Research Article
6세기 신라의 軍主와 광역 州의 관계
경희대학교
발행: 2018년 1월 · 26권 · pp. 2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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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6~7세기의 신라의 지방제도는 州-郡-城·村3단계로 구성되었으며, 군사적인 성격이 강하였던 것으로 이해되었다. 최상급단위인 州의 장관으로 파악되어 온 軍主는 군사적인 성격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관직으로 인식되었다. 본고에서는 州에 관한 기록을 검토하여 州와 軍主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三國史記』에서 州는 특정 지역명에 州가 붙는 경우와 추상적인 의 미에 州가 붙는 경우 등 두 가지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三國史記』의 기록을 바탕으로 전자에는 6停중 5개 停(=광역 州停)이 주둔하였으며, 광역단위인 후자는 광역 州停의 군사관할구역이었던 것으로 파악되어 왔다. 군주는 주의 장관으로서 특정 지명을 띤 주에 있으면서 광역 주까지를 군사적·행정적으로 관할하는 관직으로 이해되던 것이다.
하지만 「昌寧碑」(561)에는 『三國史記』의 기록과 달리 지명과 군주가 바로 결합되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군주 주둔지가 ‘州’로 불리지 않았으며, 군주가 주의 장관이 아니었음을 뒷받침해준다. 만일 「창녕비」의 ‘四方軍主’가 광역단위를 관할하였다면, 4개의 광역 주가 존재해야 하지만, 6세기 중엽 신라 영역 내에는 上州·下州·新州·于抽悉□支河西阿郡등의 광역단위만이 설정되었을 뿐, 碑利城과 대응될 광역단위는 설정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군주 주재지와 추상적인 명칭의 주는 州治와 광역 주, 군단 주둔지와 군사관할구역으로서 대응관계를 가지며 설정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군주는 군단의 사령관으로서 군주 주재지를 관할하였을 가능성이 크며, 7세기 전반~중반 사이에 광역 주와 군주제가 결합하기 전까지 군주의 역할은 큰 변화가 없었을 것이다.
『三國史記』에서 州는 특정 지역명에 州가 붙는 경우와 추상적인 의 미에 州가 붙는 경우 등 두 가지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三國史記』의 기록을 바탕으로 전자에는 6停중 5개 停(=광역 州停)이 주둔하였으며, 광역단위인 후자는 광역 州停의 군사관할구역이었던 것으로 파악되어 왔다. 군주는 주의 장관으로서 특정 지명을 띤 주에 있으면서 광역 주까지를 군사적·행정적으로 관할하는 관직으로 이해되던 것이다.
하지만 「昌寧碑」(561)에는 『三國史記』의 기록과 달리 지명과 군주가 바로 결합되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군주 주둔지가 ‘州’로 불리지 않았으며, 군주가 주의 장관이 아니었음을 뒷받침해준다. 만일 「창녕비」의 ‘四方軍主’가 광역단위를 관할하였다면, 4개의 광역 주가 존재해야 하지만, 6세기 중엽 신라 영역 내에는 上州·下州·新州·于抽悉□支河西阿郡등의 광역단위만이 설정되었을 뿐, 碑利城과 대응될 광역단위는 설정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군주 주재지와 추상적인 명칭의 주는 州治와 광역 주, 군단 주둔지와 군사관할구역으로서 대응관계를 가지며 설정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군주는 군단의 사령관으로서 군주 주재지를 관할하였을 가능성이 크며, 7세기 전반~중반 사이에 광역 주와 군주제가 결합하기 전까지 군주의 역할은 큰 변화가 없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