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築城新圖』의 반포와 조선 전기 읍성의 내벽 구조 변화
The Promulgation of 『Chukseongsindo』 and Changes in the Inner Wall Structure of Eupseong in the Early Joseon Dynasty
1 원광대학교 박물관
1 Wonkwang University Museum
DOI: https://doi.org/10.71244/jojm.2025.35.277
초록
조선 전기 읍성의 축성법의 변화 양상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특히 1438년(세종 20)에 반포된 축성신도(築成新圖) 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축성신도 는 현재 남아있지 않지만, 겸 성균주부(兼成均注簿) 이보흠의 상소문의 통해서 해당 축성법의 가장 큰 특징은 내벽을 계단식으로 조성하였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 읍성의 축성법은 현재까지의 고고학 자료와 문헌 기록을 바탕으로 종합하여 3개의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이를 구분 짓는 기준은 축성신도 이다. 현재까지 발굴조사 된 자료를 살펴보면, 계단식 내벽이 조성된 것 중 가장 이른 것은 1417년(태종 17)에 축조된 하동읍성이다. 이를 축성신도 축성법의 모본이 되는 읍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시기는 고려시대에 축성된 토성을 조선 초에 석성으로 개축한 읍성이 해당한다. 두 번째 시기는 축성신도 의 규정에 맞추어 석재로만 내벽을 계단식으로 조성한 것과 이보흠의 상소에 따라 이를 보완하여 계단식 내벽에 흙을 덮는 방식의 읍성이 해당한다. 세 번째 시기는 1451년(문종 1)에 축성된 고현읍성부터 수직 형태의 내벽이 확인되는데, 이를 기점으로 새로운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다만, 두 번째 시기에 나타나는 계단식 형태의 내벽도 여전히 존재한다. 이를 종합하면, 조선 전기의 읍성은 기본적으로 외벽은 석축으로 견고하게 쌓고 내벽부는 석축(계단식 혹은 수직 형태)으로 쌓은 후 흙으로 경사지게 덮는 등 공통적인 축성방식이 나타남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공통된 축성법이 확인되는 것은 『築城新圖』의 반포와 성곽의 축조를 병조(정부)에서 관장하였고, 이를 감독·관리하는 관청을 통해 읍성 축조를 국가적인 사업으로 진행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Abstract
In order to examine the changes in the construction methods of Eupseong (walled towns) in the early Joseon Dynasty, it is necessary to pay attention to the "Chukseongsindo" (New Map of Fortress Construction) promulgated in 1438. Although the "Chukseongsindo" no longer exists, the memorial of Lee Bo-heum reveals that the most significant feature of this method was the stepped construction of the inner walls. The construction methods of early Joseon Eupseong can be divided into three periods based on archaeological data and historical records, with the "Chukseongsindo" serving as the primary criterion. Excavations show that the earliest example of a stepped inner wall is Hadong Eupseong, built in 1417, which can be seen as a model for the "Chukseongsindo" method. The first period involves Eupseong where earthen walls from the Goryeo Dynasty were reconstructed into stone walls. The second period includes those built with stepped inner walls made entirely of stone according to the "Chukseongsindo" regulations, or those supplemented by covering the stepped walls with soil following Lee Bo-heum's suggestion. The third period begins with Gohyeon Eupseong in 1451, where vertical inner walls appeared, though stepped walls from the second period continued to exist. In conclusion, early Joseon Eupseong shared a common construction method: sturdy stone outer walls and inner walls (stepped or vertical) covered with sloped soil. This uniformity suggests that Eupseong construction was a national project managed by the Ministry of War and supervised by government offices following the promulgation of "Chukseongsindo."
Ⅰ. 머리말
한국사에서 엄밀한 의미에서의 읍성은 고려시대 후기부터 축성되었다.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략이 극심하였는데, 이러한 왜구의 피해를 막기 위해 나온 대책 중의 하나가 바로 읍성의 축성(築城)이었다.
그렇지만 조선 초 태종 연간까지만 해도 조정에서는 읍성보다는 산성 축성에 대한 주장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1429년(세종 11) 병조판서 최윤덕(崔閏德)이 각 고을의 성을 축조할 조건(各官城子造築造件)을 들어1), 연해 지역의 고을들은 산성을 없애고 읍성을 축조하되, 읍성이 소용없는 곳에만 산성을 수축하자고 청하였다. 이를 계기로 세종 연간에 읍성 축성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적대, 해자, 옹성, 등성시설의 마련 등에 대한 논의도 함께 이루어졌다. 또한 1438년(세종 20)에는 ‘축성에 대한 새로운 도본’인 『축성신도』가 반포되었다. 비록 『축성신도』는 현존하지 않지만, 1443년 겸 성균주부(兼成均注簿) 이보흠(李甫欽)의 상소문2)을 통해 ‘성 내면을 돌을 사용하여 16척(尺)으로 조성하고 그 위쪽은 계단식으로 축조’하는 방식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임진왜란을 계기로 지속적인 대규모 침입에는 읍성만으로는 대응에 한계가 있어 이후에는 읍성보다는 산성을 주로 수축하게 되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 초기부터 식민지사업의 일환인 도시계획사업으로 인하여 성곽에 대한 철거가 시작되면서 전국 읍성 대부분의 원형이 훼손되었다.
한편, 읍성에 관한 그간의 연구는 주로 조선시대 읍성을 조사한 발굴조사 자료를 중심으로 고고학 분야, 문헌 기록을 활용한 역사학 분야, 읍성의 구조 변화 등을 다룬 건축학 분야, 입지나 도시구조, 경관 등을 다룬 지리학 분야가 있다.
특히, 고고학과 역사학 분야에서는 대표적으로 충남지방의 읍성을 문헌 기록과 비교 검토하여 입지 조건, 축성 재료, 지형, 형태 등에 의해 나누어 자세히 분류한 심정보(1995)와 경남지역 연해 읍성에 대한 고고학 자료를 바탕으로 조선시대 읍성의 특징과 축성기법을 분석한 이일갑(2008)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이외에 읍성의 성벽과 객사(客舍) 축조 등의 읍성 내부 시설들을 대상으로 분석한 이수진(2019)의 연구, 최근의 발굴조사 성과를 반영하여 경상도 남해안 지역의 읍성을 내벽의 형태 변화를 중심으로 분석한 나동욱(2022)의 연구 등이 있다.
그러나 이전의 연구는 대부분 개별 읍성이나 일부 지역에 그 대상이 한정되었다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그간 고고학 조사의 성과와 축성신도 축성법을 바탕으로 문헌 기록과의 비교를 통해 조선 전기 읍성 성벽 축성법의 구체적인 변화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읍성의 현황 및 분석대상
한국고고학사전 성곽봉수편에는 ‘읍성’을 지방의 부, 군, 현 등 행정관서가 마련된 고을에 축조되어 유사시에 외적을 대비하는 한편, 행정적 편의를 제공한 성곽으로 정의하고 있다(국립문화재연구소, 2011). 사전적 정의에서 언급된 엄밀한 의미의 읍성이 축성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 말부터이다. 특히 연해 지역을 중심으로 28개소의 읍성이 축성되었는데, 28개소 중 15개소가 토축이다. 조선 전기 읍성의 현황이 기재된 문헌으로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이 대표적이다.3 세종실록지리지 에는 335개의 군현 중 110개소에 읍성이 설치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그중 충청도는 15개소, 경상도는 27개소, 전라도는 23개소4, 그리고 하삼도에 축성된 읍성 수는 65개소로 전체의 약 59%를 차지하고 있다. 이후 중종 연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에는 330개의 행정구역 중 122개소로 이전보다 읍성의 수가 늘어났으며 그중 하삼도 지역의 읍성은 77개소로 전체의 약 63%를 차지하며 여전히 높은 비중을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고에서는 축성신도 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그간 시·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읍성 중 남아 있는 유구를 통해 그 축성 방식을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읍성 13개소를 선정하여 체성부를 중심으로 축성기법의 변화 양상을 검토하고자 한다. 읍성 13개소를 선정한 기준은 체성부 중 내벽의 형태를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 여부로 정하였다. 추가적으로 체성부 이외에도 부속시설 중 옹성, 치 등을 대상으로 문헌에 나타난 축성 방식에 대한 기록과 고고학 자료에 대하여 그 양상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Ⅲ. 읍성 축성기법의 특징
읍성은 기본적으로 성벽과 성문, 그밖에 성외시설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성벽은 크게 체성(體城)과 여장(女墻)으로 구분할 수 있다. 성문의 보호시설로는 옹성, 적대, 해자 등이 있는데, 옹성은 성문 바깥쪽에 일정한 형태의 성벽을 덧대어 쌓은 시설로, 성문이 직접 노출되지 않으면서 한정된 수의 적군만이 들어올 수 있게 하여 측면과 후면에서 공격이 가능하도록 조성한 효과적인 방어시설이다(양시은, 2013, 162쪽).
1. 체성부
1) 외벽부
체성은 축조 공법과 구조적 기능에 따라 기저부·면석·뒤채움부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일반적인 읍성의 축조 순서는 기저부에 기반토를 다져 기초를 조성하는 등의 지정 작업을 한 후에 지대석을 놓고 박석을 시설하는 등의 작업을 하게 된다.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체성을 축조하게 되는데, 성돌을 외면에 맞춰 쌓아 올리되 성벽의 구조적 안정을 위해 뒤채움도 함께 이루어진다. 기저부는 외벽과 뒤채움부의 하중이 지탱하도록 기반을 조성하는 과정으로 지반을 강화하는 지정(地定), 성벽의 하중을 지지하기 위하여 설치하는 지대석(地臺石) 등으로 구성된다. 읍성 축성 시 주로 사용되는 지정 공법은 기단석 아래에 모래를 깔아 넣는 입사지정(入沙地定), 기반층에 구멍을 뚫어 말뚝을 박는 말뚝지정, 그 위에 방형(장방형)으로 다듬은 할석을 올린 잡석지정(雜石地定) 등이 있다. 그리고 성벽을 쌓는 과정에서 겉쌓기에 사용되는 성돌인 면석(面石)은 체성 내부의 뒤채움석과는 구분되며, 지대석에서 10∼30cm 정도 들여쌓는 것이 일반적이다.
『築城新圖』의 반포와 조선 전기 읍성의 내벽 구조 변화
2) 뒤채움부
뒤채움부의 축조 방식은 면석을 먼저 1~2단 쌓은 다음 뒤채움돌과 뒤채움흙을 쌓는 것이 일반적이다. 뒤채움부는 『축성신도』의 규정에 맞춰 석재만을 사용하여 내벽을 계단식으로 축조한 것과 내벽을 계단식으로 축조하되 뒤채움부의 토축 부분을 경사지게 성토한 방식 그리고 내벽을 수직 형태로 축조하고 토축 부분을 경사지게 성토한 방식 등 크게 3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유형 1은 『축성신도』의 규정에 따라 기저부를 조성한 후 그 위에 석재만을 사용한 것으로, 내벽을 계단식으로 축조한 것이다. 해당 사례는 하동읍성과 웅천읍성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동읍성에서는 북쪽 체성구간과 남문지 주변 체성, 서벽 북쪽 치성(제4 치성) 등에서 계단식으로 쌓은 내벽이 발견되었다. 사진에서는 흙이 덮인 모습이 확인되었는데, 발굴조사단은 이 흙을 후대에 자연적으로 퇴적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웅천읍성 동북쪽 내벽의 경우에는 석재만을 이용하여 계단식으로 축조하였음이 확인되었다. 특히, 시굴조사에서 계단식 구조의 내벽은 약 30cm, 60cm, 90cm 높이로 들여 쌓은 것이 드러났다. 이후 발굴조사에서도 4단의 계단식 석축이 확인되었다. 유형 2는 내벽을 계단식으로 축조한 후, 그 위에 경사지게 흙을 쌓아 마무리하는 방식으로 축성신도 의 계단식의 내벽 형태에 이보흠이 보완책으로 제시한 내벽에 흙을 덮는 방식이 추가된 것이다. 이는 계단식으로 쌓은 내벽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상부에 흙을 덧씌운 것으로, 해미읍성, 사천읍성, 태안읍성 외에도 기장읍성, 서천읍성(동남), 면천읍성, 남포읍성, 창원읍성(북동쪽), 한산읍성 등 조선 전기 읍성 다수에서 확인할 수 있다.
태안읍성에서는 동문지 남·북쪽의 석축부에서 각각 2, 3단의 계단식 내벽이 확인되었다. 내벽을 조성한 이후에는 경사진 지형에 따라 점질토와 사질토를 교대로 쌓아 올려 성토 다짐을 하였다. 사천읍성 동벽에서는 등성시설로 추정되는 계단식 구조가 발견되었다. 계단 형태의 석축 위에 점성이 강한 점토로 추정되는 흙으로 덮은 모습이 확인되었다. 해미읍성의 경우 북문지 내벽 1~1.2m 높이에서 외벽 쪽으로 1.5m 가량 안쪽으로 들여 쌓은 모습이 확인되었다. 전체적으로는 2~3단 정도의 계단상의 모습이 나타난다. 계단상의 석축 위로는 약 2m 의 두께로 흙을 덮은 모습이 발견되었다.
유형 3은 내벽을 수직 형태로 축조하고 그 위를 경사성토하여 덮은 형태로, 유형 2에서 계단식 석축이 수직 형태로 변화한 것이다. 해당 방식으로 조성된 대표적인 사례는 고현읍성, 울산읍성 등이 있다. 고현읍성 내벽은 갈색부식토층과 그 아래 생토층을 0.5m 정도 굴착한 후, 할석을 상면에 수직으로 쌓고 그 안쪽으로 흑갈색부식토와 적갈색점토를 교대로 다짐한 것이 확인되었다. 울산읍성의 내벽의 기단석은 성벽 진행 방향과 나란하게 수평으로 쌓았고, 그 위로 수평 · 수직 쌓기를 번갈아 하였다. 내벽의 전체적인 형태는 수직으로 판단되며, 위로는 경사지게 흙을 덮은 것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양상을 종합하면, 유형 3

2. 부속시설
읍성의 부속시설에는 성문, 옹성, 치, 등성시설, 여장 등이 있으나 성문과 여장은 현재 양호한 상태로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어서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옹성과 치를 중심으로 분석해 보도록 하겠다.
1) 옹성(甕城)
옹성의 평면 형태는 ‘ㄱ’자 형태도 일부 확인되나 대부분 반원형이다. 한편, 체성과의 축조 공정은 옹성을 체성에 덧대어 축조한 것과 옹성과 체성을 동시에 축조한 것이 모두 확인된다.
한편, 축성신도 반포 직후인 1440년(세종 22)의 문헌 기록6)에서는 옹성의 길이가 5, 60척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50∼60척은 현재의 단위(m)로 환산하면, 약 23.3∼28m 이다.7)
현재까지 발굴조사로 확인된 옹성 중 길이를 비교적 양호하게 파악할 수 있는 옹성은 15개소로, 그중 7개소가 위 문헌에 기록된 길이에 부합한다. 좀 더 시기를 좁혀서 1417년(태종 17)부터 세종 연간까지 축조된 옹성 12개 중 7개가 규정에 맞게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옹성의 폭은 대부분 6∼8m 대로, 개구부 폭도 3∼4m 대로 일정하게 조성된 것으로 확인된다.
2) 치(雉)
치는 성으로 접근하는 적을 양쪽 측면에서 공격하여 격퇴할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쌓은 시설을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치성, 곡성, 성두, 적대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불렀다. 또한 치 역시 옹성과 마찬가지로 축조 공정상 체성과 동시에 축조된 것과 체성에 덧대어 쌓은 것이 모두 확인되었다.
한편, 치와 관련한 문헌 기록을 보면, 세종 시기에 치 축조와 관련된 규정은 규모에 관한 것과 치 간 거리에 관한 것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치 규모의 너비와 길이는 적대를 앞면 15척, 좌우 20척으로 정하였다고 하는데8), 이는 현재의 단위(m)로 환산하면 7× 9.4m 정도 된다. 현재 발굴조사된 읍성의 치 52개소 중 너비와 길이 두 가지 모두 문헌 기록과 일치하는 경우는 10개소로 매우 적다.9)
치 간 거리와 관련한 문헌 기록은 각각 1430년(세종 12)11), 1433년(세종 15)12), 1440년(세종 22)13)에 제정 혹은 언급된 100보(步), 150보(步), 150척(尺)이다. 이와 관련하여 후대 기록이기는 하지만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에 ‘1보는 6척’이라는 언급이 있다. 이를 통해 100보와 150보는 각각 600척과 900척이 됨을 알 수 있다. 이를 세종 연간 당시에 주로 쓰이던 포백척에 대한 유재춘의 연구(1996)를 적용하여 현재의 단위(m)로 환산하면 약 280m 와 420m 가 된다. 이는 문헌 기록에 나타난 각 읍성의 치성(적대) 수를 감안할 때([표 3
표 3 치의 발굴조사 현황 (1)9
| 축조 시기 | 읍성명 | 치(성)수 | 치(성) 위치 | 평면 형태10 | 너비 (m) | 길이 (m) | 비고 |
|---|---|---|---|---|---|---|---|
| 1378년(고려 우왕 4) (조선 초 석성 개축) | 경주읍성 | 26 | 동성벽 치성 1 | 방대형 | 7.7 | 9.2 | 체성에 덧댐 |
| 동성벽 치성 2 | 방대형 | 7.5 | 9.0 | 체성에 덧댐 | |||
| 동성벽 치성 3 | 방대형 | 8.0 | 10.0 | 체성에 덧댐 | |||
| 동성벽 치성 4 | 방대형 | 8.0 | 9.5 | 체성에 덧댐 | |||
| 동성벽 치성 5 | 방대형 | 8.0 | 9.5 | 체성에 덧댐 | |||
| 북성벽 치성 1 | 방대형 | 7.5~8.0 | 9.0 | 체성에 덧댐 | |||
| 북성벽 치성 3 | 방대형 | 7.9 | |||||
| 북성벽 치성 4 | 방대형 | 7.8 | |||||
| 북성벽 치성 5 | 방대형 | 7.9 | |||||
| 고려(초축)/ 조선 초(개축) | 홍주읍성 | 7 | 북문지 동쪽 | 장방형 | (8.0) | 7.6 | |
| 동문과 남문 사이 | 정방형 | 7.9 | 7.4 | ||||
| 퇴축 성벽 구간 | 정방형 | (8.0) | 7.6 | ||||
| 1417년(태종 17) | 하동읍성 | 11 | 1 | 장방형 | 6.2 | 4.4 | 체성에 덧댐 |
| 2 | 방대형 | 7.4 | 9.8 | 체성에 덧댐 | |||
| 3 | 방대형 | 7.4 | 9.4 | 체성에 덧댐 | |||
| 4 | 장방형 | 5.8 | 5.1 | 체성에 덧댐 | |||
| 5 | 장방형 | 7.1 | 5.1 | 체성과 동시 공정 | |||
| 6 | 장방형 | 7.4 | 5.1 | 체성에 덧댐 | |||
| 7 | 정방형 | 6.1 | 6.6 | 체성에 덧댐 | |||
| 11 | 방대형 | 7 | 9.2 | 체성에 덧댐 | |||
| 1425년(세종 7) | 기장읍성 | 6 | 동문지 | 방대형 | 7.3 | 8.9 | 체성에 덧댐 |
| 동벽 남측 | 방대형 | (7.0) | (7.5) | 체성과 동시 공정 | |||
| 1434년(세종 16)/ 1451년(문종 1) | 김해읍성 | 20 | 북 | 장방형 | 7.5 | 8.8 | 체성에 덧댐 |
| 동 | 정방형 | 6.4 | 7.4 | 체성에 덧댐 |
표 4 치의 발굴조사 현황 (2)
| 축조 시기 | 읍성명 | 치(성) 수 | 치(성) 위치 | 평면 형태 | 너비 (m) | 길이 (m) | 비고 |
|---|---|---|---|---|---|---|---|
| 1435년(세종 17)/ 1453년(단종 1) | 웅천읍성 | 미상 | 서남 성우 | 장방형 | 7.6 | 10 | 체성과 동시 공정 |
| 동남 | 방대형 | 6.4 | 10.1 | 체성과 동시 공정 | |||
| 동북 | 장방형 | 5.5 | 8.4 | 체성에 덧댐 | |||
| 1438~1450년 (세종 20~32) | 서천읍성 | 미상 | 동남 | 장방형 | 9.3 | 6.6∼7.2 | 체성과 동시 공정 |
| 서남 | 장방형 | 10.5 | 5.5∼5.7 | 체성과 동시 공정 | |||
| 남서 적대 | 정방형 | 7.8 | 8.5∼8.6 | 체성과 동시 공정 | |||
| 트렌치3 | 정방형 | 7~8 | 8∼8.3 | ||||
| 동남치성 남쪽 71m | 방대형 | 9.3 | 6.6∼7.2 | 체성과 동시 공정 | |||
| 1439년(세종 21) | 면천읍성 | 7 | 서 | 방대형 | 8 | 9.3∼9.8 | |
| 북서 | 방대형 | 7.7 | 9.7∼10.5 | ||||
| 북 | 방대형 | 8 | 9.3 | ||||
| 북동 | 방대형 | 7.2 | 9.3 | ||||
| 서남 | 방대형 | 7.44 | 9.21 | 체성과 동시 공정 | |||
| 남동 | 방대형 | (6.1) | (8.3) | ||||
| 1439년(세종 21) | 장기읍성 | 12 | 2 | 방대형 | 6 | 9 | |
| 3 | 방대형 | 7.2 | 10.6 | ||||
| 4 | 방대형 | 8 | 10.3 | ||||
| 5 | 정방형 | 8.5 | 8.2 | ||||
| 12 | 방대형 | 7.5 | 10.3 | ||||
| 1440~1442년 (세종 22~24) | 당진읍성 | 8 | 북동 | 장방형 | 8.5 | 6.7 | 체성과 동시 공정 |
| 북서 | 정방형 | 7.6 | 7 | 체성과 동시 공정 | |||
| 1444~1451년 (세종 26~문종 1) | 남포읍성 | 미상 | 동남 | 장방형 | 9.5 | 6.7∼7.15 | |
| 서남 | 장방형 | 9.5 | 7.3∼7.75 | ||||
| 1479년(성종 10) | 남원읍성 | 16 | 북동 | 방대형 | 5.8 | 9.2 | 체성과 동시 공정 |
| 1493~1529년 (성종 24~중종 29) | 한산읍성 | 4 이상 | 서북 | 정방형 | 8.15 | 9.7 | 체성과 동시 공정 |
| 남문 부근 | 장방형 | 7 | 9.4 | 체성과 동시 공정 | |||
| 1390년 (고려 공양왕 2)(토축)/1500년 (조선 연산군 6)(석축) | 언양읍성 | 12 | 10 | 장방형 | 7 | 9.8 | 체성과 동시 공정 |
| 11 | 장방형 | 8 | 10.2 | 체성과 동시 공정 | |||
| 8 | 방대형 | 7.15 | 8 | ||||
| 9 | 방대형 | 7.2 | 9.44 |
또한 1440년(세종 22) 기록에 “매 3백 척마다 세 개의 적대를 설치하였다.”라는 내용을 통해 볼 때, 1433년(세종 15)에서 제정된 치 간 거리는 150 ‘보’가 아닌 150 ‘척’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확인된 고고학 자료로 볼 때 위 문헌 기록의 규정과 일치하는 비율은 평균 21%로 매우 낮다([표 5
표 5 치 설치 간격 현황
| 축조 시기 | 읍성명 | 치성 수 | 50 이하 | 51 ~ 60 | 61 ~ 69 | 70 | 71 ~ 80 | 81 ~ 90 | 91 ~ 100 | 100 이상 | 문헌 규정과 일치 비율 |
|---|---|---|---|---|---|---|---|---|---|---|---|
| 고려시대 토축→ 1378년(고려우왕4) 석축 | 경주읍성 | 26 | 9 | 13 | 4 | 1 | 1 | 1 | 3 | 19% | |
| 1417년(태종 17) | 하동읍성 | 11 | 1 | 1 | 5 | 3 | 10% | ||||
| 1434년(세종 16) | 김해읍성 | 20 | 1 | 3 | 1 | 6 | 4 | 3 | 5 | 30% | |
| 1435년(세종 17)/ 1453년(단종 1) | 웅천읍성 | 6 | 3 | 2 | 5 | 30% | |||||
| 1438~1450년(세종 20~32) | 서천읍성 | 16 | 2 | 4 | 4 | 2 | 2 | 43% | |||
| 1439년(세종 21) | 장기읍성 | 12 | 3 | 1 | 5 | 1 | 3 | 36% | |||
| 1439년(세종 21) | 남해읍성 | 12 | 2 | 3 | 1 | 3 | 2 | 4 | 40% | ||
| 1439년(세종 21) | 면천읍성 | 7 | 1 | 1 | 9 | 0 | |||||
| 1441년(세종 23) 이후 | 흥양현읍성 | 11 | 2 | 1 | 5 | 0 | |||||
| 1442년(세종 24) | 사천읍성 | 15 | 3 | 5 | 2 | 2 | 3 | 3 | 22% | ||
| 1444~1451년 (세종 26~문종 1) | 남포읍성 | 4 | 1 | 1 | 2 | 2 | 33% | ||||
| 1448년(세종 30) | 고성읍성 | 12 | 2 | 3 | 3 | 2 | 2 | 3 | 40% | ||
| 1451년(문종 1) | 고현읍성 | 7 | 1 | 1 | 1 | 7 | 10% | ||||
| 1469년(예종 1)(추정) | 해남읍성 | 4 | 7 | 0 | |||||||
| 1475년(성종 6) | 서산읍성 | 8 | 3 | 1 | 1 | 2 | 3 | 10% | |||
| 1476년(성종 7) | 창원읍성 | 13 | 4 | 2 | 2 | 2 | 5 | 13% | |||
| 1479년(성종 10)/ 정유재란 개축 | 남원읍성 | 16 | 2 | 1 | 16 | 0 | |||||
| 1390년(고려 공양왕 2)(토축)/ 1500년(연산군 6)(석축) | 언양읍성 | 12 | 1 | 1 | 1 | 5 | 5 | 1 | 2 | 44% |
* 규정과 일치하는 것은 빨간색으로 표시하였다. (치성 간 거리 단위 : m)『築城新圖』의 반포와 조선 전기 읍성의 내벽 구조 변화
다만, 이는 1451년(문종 1) 9월 정분의 계문에 “경상도·충청도 각 고을의 성자(城子)는 당초에 법식(法식)에 의하여 쌓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가 규정에 맞지 않았다”14)라는 기록으로 보아 치의 규모·간격은 규정에 맞게 축조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Ⅳ. 읍성 축성기법의 변화 양상
지금까지 조선시대 전기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읍성을 대상으로 체성과 부속시설, 그중에서도 옹성과 치를 중심으로 그 특징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 결과, 체성의 내벽부 축조 방식을 중심으로 3단계의 변화 양상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첫 번째 유형은 『축성신도』의 규정에 따라 석재만을 사용하여 내벽을 계단식 형태로 축조한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하동읍성과 웅천읍성 등이 있다.
두 번째 유형은 이보흠이 제시한 보완책인 내벽의 위에 경사지게 흙을 덮는 방식이 적용된 것으로, 해미읍성, 태안읍성, 사천읍성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세 번째 유형은 두 번째 유형에서 내벽의 형태가 계단식에서 수직으로 변화하여 조성된 것으로, 고현읍성, 울산읍성 등이 해당한다.
조선 전기의 문헌 기록에 따르면 읍성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일부 연안 지역에서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축조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1429년(세종 11) 도순무사 최윤덕의 ‘성 축조의 조건’ 등에 대한 상소는 읍성의 축조가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1438년(세종 20)에는 성곽 축성에 관한 도본인 『축성신도』가 반포되었다. 『축성신도』 반포와 관련하여서는 1438년(세종 20) 1월의 의정부에서 병조의 정문(呈文)을 참고하여 변방 방어책의 구체적 사안을 세종에게 올리는 내용에 “수성전선색(修城典船色)에게 도본(圖本)을 만들게 한 다음 읍성 축조를 도절제사에게 감독하게 하라”라는 내용의 기사15)를 통해 병조에서 『축성신도』 작성 및 읍성 축조를 관장하였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즉, 읍성 축조가 국가의 정책으로 추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1443년(세종 25)에 겸 성균 주부(兼成均注簿) 이보흠이 남긴 상소문을 통하여 『축성신도』의 내용은 대략 파악해 볼 수 있다. 상소문에는 체성벽의 축조를 “내면에 돌 16척을 메우고 그 위에 계단을 만들며, 박석을 깔도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성벽의 기단부는 16척으로 조성하고, 석재만을 이용하여 그 상면을 계단식으로 축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리하면, 외면의 2.8∼3.3m 는 큰 돌로 쌓고, 내면의 3.3∼3.7m 는 잡석과 흙을 섞어 사용하여 다지고, 그 위로 0.9∼1.4m 의 두께로 흙을 잘 다듬어 덮어 성안 쪽으로 경사지게 마감하는 내용이다. 이는 1434년(세종 16)에 우의정 최윤덕이 ‘고려 때 흙으로 성을 쌓았는데 그 효과가 없었음을 지적하며 석성을 쌓을 것’16)을 건의한 것이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체성벽 외에도 적대, 치성, 해자 등 성벽의 부속시설의 축조 또한 『축성신도』 반포 이전부터 논의되고 있었다.
이들 내용을 종합하면, 『축성신도』 반포를 기점으로 조선시대 전기 읍성의 기본 형태가 갖춰졌고, 이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일부 폐해가 있어 축조 방식에 일부 수정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 전기에 축조된 읍성의 경우 지금까지 살펴본 고고학적 양상에 따라서 ① 고려 토성을 고려 말 혹은 조선 초에 석성으로 개축한 경우, ② 『축성신도』의 축성기법에 맞추어 축조된 경우 ③ 이보흠의 상소에 따라 신축 혹은 개축한 경우 ④ 내벽을 수직 형태로 축조한 사례 등 4가지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위의 사례들을 현재까지 조사된 고고학 자료와 문헌 기록을 종합하여 조선 전기 읍성 축성법의 시기에 따른 변화를 파악해 보면 크게 3개의 분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시기 구분에 대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조선 전기 읍성은 우선 『축성신도』의 반포를 기준으로 전과 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축성신도』 축성법의 가장 큰 특징은 체성 내벽이 계단식으로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발굴조사된 읍성 중 석재만을 사용하여 축조된 계단식 내벽 형태가 확인되는 가장 이른 시기에 축성된 읍성은 1417년(태종 17)에 축조된 하동읍성이다. 다만, 『축성신도』 반포와 이보흠이 보완책을 제시한 시기 차는 불과 5년이다. 따라서 그 기간에 읍성의 축성기법 기준에 큰 변화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보흠이 보완책 제시 이후에 읍성 축성, 나아가 조선 전기 축성의 기준이 명확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축성신도』 반포와 이보흠이 보완책을 기준으로 하여 고고학 자료상 그와 유사한 축성법을 보이는 읍성을 하나의 시기로 설정하였다.
또한 1451년(문종 1)에 축조된 고현읍성에서는 내벽의 형태가 기존의 계단식이 아닌 수직 형태가 확인되는데, 이를 기점으로 새로운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다만, 이 시기에는 계단식의 내벽이 확인되는 읍성도 여전히 존재하는데 앞 시기와 다른 것은 뒤채움부 석축 구간의 너비가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설정한 분기는 다음과 같다.
이렇게 설정한 분기를 토대로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난 축성기법의 변화와 해당 시기의 문헌 기록에서 그 배경을 검토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설정한 분별 특징과 그 의미를 도면 등을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1. Ⅰ기
Ⅰ기는 읍성이 축조되는 고려 말부터 1416년(태종 16)까지이다18). 이 시기에는 고려 말에 토성으로 쌓은 것이 석성으로 개축되는 시기이다. 경주읍성, 나주읍성, 홍주읍성 등이 이 시기에 해당한다.
경주읍성은 발굴조사 결과, 동·북성벽 조사에서는 석성 개축부와 2차에 걸친 수축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1차 수축부에서는 특히 북성벽에서 고려시대 기와편이 다수 발견되어 문헌 기록의 1378년(고려 우왕 4)의 석성 개축 기사를 뒷받침해 준다. 또한 2차에 걸쳐 수축된 흔적이 확인되었다. 2차 수축부의 뒤채움부에 『축성신도』의 축성법인 2열로 된 계단식에 가까운 석축의 흔적이 확인되고 있어 『축성신도』 반포를 전후한 시점에 수축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경주읍성 북성벽 뒤채움부 기와 노출 상태(한국문화재재단, 2023, 411쪽)
경주읍성 북성벽 뒤채움부 석축(한국문화재재단, 2023, 411쪽)
나주읍성은 발굴조사 결과, 고려시대 토성 부분이 석성 체성 내부에서 확인되었다. 조선시대 석성의 뒤채움부는 토성 상부 일부를 깎아 기반층을 조성한 후, 뒤채움부와 석성 내벽 사이를 흙과 잡석으로 채운 모습으로 추정된다. 한편, 나주읍성 축조와 관련하여서는 1404년(태종 4)의 보성, 나주에 성을 쌓았다는 기사19)와 목사 김계희(金係熙)가 세조 연간에 축조하였다는 기록20)이 있다. 개축 시기에 대하여 연구자들 간에 견해가 다르다. 다만, 세종실록지리지 에서 나주읍성을 ‘석성’으로 기록하고 있고,21) 현재까지의 고고학 자료를 종합하여 볼 때 1404년(태종 4)의 태종실록 의 기사를 개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홍주읍성은 발굴조사 결과, 북문지에서 조선시대 석성부 체성 쪽에 토축석렬이 확인되었다. 또한 체성부 안쪽에서 너비 약 3.9m 의 체성과 나란한 2∼3열의 석렬이 확인되었고, 내부 토층이 기저부 석렬에 맞추어 분기되는 모습이 확인되었다.
홍주읍성 고려시대 체성부 기저부 석렬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19, 275쪽) 홍주읍성 북문지 체성 내부 토층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19, 74쪽) 홍주읍성 북문지 토층 양상(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19, 275쪽)
한편, 홍주읍성의 개축 시기에 대해서는 『세종실록지리지』에 홍주읍성이 ‘석성’으로 기록되어 있어 세종 시기 이전에 이미 석성으로 개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상의 발굴조사 결과를 종합하면, 경주읍성은 일부 구간에서 통일신라시대 도로유구를 굴착하여 개축한 흔적이 발견되었으나, 경주읍성을 포함하여 나주읍성, 홍주읍성 등은 고려시대의 토성의 외벽 면을 굴광하여 석축하고, 기존의 토축부를 내탁부로 이용하여 석성으로 개축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주읍성, 홍주읍성 등의 내벽의 형태는 유실이 심해 정확한 파악이 어렵지만, 잔존 상태를 볼 때 경주읍성 북성벽의 계단식 내벽을 제외하면 정형성 있는 구조는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시기의 특징은 고려시대에 비해 다소 줄었지만, 여전히 40여 건이 넘는 왜구 침입 기사가 실록에서 확인되는 등 위협이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 축성이 이루어진 곳은 고려 치소성이었던 성을 활용하여 축조하는 특징을 보인다(최종석, 2007). 또한 이러한 이유에서 일부 연해 지역에서 석성으로의 개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 Ⅱ기
Ⅱ기는 1417년(태종 17)부터 1450년(세종 32)까지이다. 이 시기에는 기본적으로 석성으로 축조되며, 계단식 내벽의 형태가 확인된다. 해당 읍성은 [표 8]
[표 8] Ⅱ기 읍성(1417년(태종 17)∼1450년(세종 32)) 사례

또한 옹성의 경우 길이 50∼60척 사이, 폭 6∼8m 로 일정하게 축조되는 경향이 나타나며, 치성 간 거리도 다른 시기에 비하여 비교적 규정에 맞게 조성된 비율이 높게 확인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좀 더 조사 결과가 늘어나야 의미 있는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
한편, 이 시기 문헌 기록을 보면, 세종 초기에는 1421년(세종 3) 9월에 경상도 관찰사가 기장현의 성내에 물이 부족하여 성의 이전을 요청하였고 이를 받아들였다.23) 이를 통해, 세종 초기까지는 지방관의 의견을 수용하여 읍성을 축조하는 사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에 “공조에서 계하여, 전라도 관찰사가 장흥성을 수령현(遂令縣)으로 옮기기를 청하니, 조관(朝官)을 파견하여 다시 살펴보겠다.”24)라고 한 기록을 통해 이때부터 조정관리를 파견하여 읍성의 축조를 결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434년(세종 16)에는 우의정 최윤덕이 파저강의 야인에 대한 방어 대책을 말하며 ‘고려 때 흙으로 성을 쌓았으나 효과가 없었으니 돌로 쌓을 것’을 건의25)하였다. 이를 계기로 축조 재료를 돌로 사용하는 것이 낫다는 인식이 우세해진 것으로 보인다.
1438년(세종 20)에는 조선 성곽 축성법의 기준이 되는 축성신도 가 반포되는데, 이를 병조에서 주관하여 읍성의 축조가 국가적인 정책으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1443년(세종 25)에는 축성신도 의 폐단으로 인하여 이보흠이 내벽 상부에 흙을 덮는 등의 보완책을 제시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조선 전기 읍성의 축조 방식의 규범화가 정부의 국가정책으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성 밖의 해자(외황)의 흙을 파서 성을 쌓으면 참호를 파지 않아도 될 것’이라 한 기록을 통해 축성의 공력도 줄어들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1419년(세종 1)의 대마도 정별로 이후 왜구의 침략이 감소하면서 대외적인 상황이 안정되었던 것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3. Ⅲ기
Ⅲ기는 1451년(문종 1)부터 1592년(임진왜란 발발) 이전까지이다. 이 시기 읍성의 특징은 내벽의 형태가 계단식에서 수직 형태로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Ⅱ기에서 확인되었던 계단식 내벽을 위에 흙을 경사지게 덮은 형태도 여전히 확인된다. 다만, 앞 시기와 달리 뒤채움부 석축 구간의 길이가 줄어드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 시기에 해당하는 읍성은 표 9
[표 9] Ⅲ분기 읍성(1451년(문종 1)∼1592년(임진왜란 발발))

내벽이 계단식에서 수직으로 변화하는 것은 상부를 흙으로 덮기 때문에 보이지 않으므로 계단상의 석축을 굳이 쌓을 필요가 없고, 빗물이 유입될 경우 단의 모서리를 타고 물이 스며들어 석축이 쉽게 붕괴되는 현상을 막기 위해서라는 견해가 있다(나동욱, 2022, 69쪽). 한편, 창원읍성에서는 형태가 다소 조잡하나 북동쪽에서 계단식의 형태, 북성벽에서는 정형성 없이 쌓인 내벽이 확인되었다. 이는 내벽의 형태가 계단식에서 수직 형태로 변화하는 과도기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언양읍성의 경우에는 남문지에서는 수직 형태의 내벽이 확인되지만, 북문지 주변에서는 비스듬한 형태의 내벽이 확인되었다. 이는 구조적 안정성 확보, 빗물 유입 방지, 등성을 편하게 한 것 등의 축조 목적을 가진 것으로 판단한 견해(나동욱, 2022, 69쪽)가 있다. 결국, 이는 이보흠의 축성신도 에 대한 보완책과 큰 틀에서 동일한 축조 목적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452년(단종 즉위년)에는 경상·전라도의 성 가운데 세종 연간에 축조되지 못하였던 해자, 적대, 옹성을 설치하도록 하였고, 1453년(단종 1)에는 웅천읍성을 증축하도록 하고 해자를 파도록 하였다. 현재까지 발굴조사된 자료를 통해 뒤채움부의 석축과 토축 구간의 너비를 살펴보면, 세종 연간 후반부터 석축 구간의 너비가 줄어드는 경향이 보인다. 결국, 이는 축성에 들이는 공력을 줄여가는 과정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배경으로는 왜구 침입의 감소로 대외적인 안정과 성종 연간에 조선시대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 이 완성되는 등 중앙집권적 관료 체제가 정비되는 시기였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조선 후기의 안흥진성, 후기 동래읍성, 영산읍성 등 지대석을 설치하지 않은 성벽이 확인되는데(남재우·안성현, 2016, 234쪽), 이는 임진왜란 이후 읍성의 효용성이 떨어져 다시 산성 축성을 중시하다 보니, 읍성 축조에 전과 비교하여 신경을 덜 쓰게 된 요인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성종 시기에는 연해 지역뿐만 아니라 내지 읍성의 축조에도 관심을 가졌다. 또한 1489년(성종 20)에는 “축성 도체찰사가 하삼도의 축성 기준을 포백척 15척으로 일정하게 할 것을 건의하여 그대로 따랐다”라고 하여, 여전히 읍성 등 성곽의 축성을 국가에서 철저하게 관리하며 관련 규정 등이 더욱 강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Ⅴ. 맺음말
이상과 같이 조선 전기 읍성의 축조기법을 시기적인 변화 양상을 중심으로 검토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엄밀한 의미의 읍성은 고려시대 후기에 도입되었는데, 그 배경은 전적으로 왜구의 침입이었다. 고려 말~조선 태종까지만 해도 산성 축조론이 우세하였고, 연해 지역을 중심으로 축조된 읍성 역시 석축보다는 토축이 좀 더 많이 축조되었다. 그러나 세종 시기에 접어들면서 대외적인 상황이 안정되며 성곽 축조에 관한 여러 논의가 진행되었고, 세종 20년(1438)에는 조선 전기 성곽 축성의 기준이 되는 『축성신도』가 반포되었다.
앞에서 발굴조사 자료와 문헌 기록을 통해 살펴본 조선 전기 축조기법의 변화 양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 초기에 대·내외적 상황으로 인하여 성을 새로 축성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기존의 토성이나 산성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일부 기존의 고려시대 토성을 내탁부로 이용하여 석성으로 개축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 세종 연간 중반이 되면, 왜구의 침략이 감소하고 국가가 안정되면서 석축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성곽 축조에 관련한 여러 논의들을 거쳐 새로운 축성법을 제정하였는데 그것이 『축성신도』였다. 이에 『축성신도』의 축성법에 따라 석재로만 내벽을 조성하게 되는데, 이러한 방식으로 축조된 읍성 중 시기가 가장 이른 것은 1417년(태종 17)에 축조된 하동읍성이었다. 이는 『축성신도』 반포 이전부터 그 규정에 따라 축조된 읍성이 존재했고, 그 모본이 되는 읍성이 하동읍성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축성신도』 축성법은 등성이 어렵고, 빗물에 성벽이 쉽게 무너지는 등의 폐단이 발생하여 이보흠의 상소에 따라 석축을 줄이고 흙으로 경사지게 덮는 형식으로 변화한다.
위와 같은 축조 방식이 반영되어 이어지다가 문종 대 초반부터는 점차 계단식 형태의 내벽보다는 수직 형태의 내벽이 등장한다.
정리하면 조선시대 읍성은 문헌 기록과 현재까지 조사된 고고학 자료를 통해 살펴보았을 때, 세부적으로는 시기·지역 차가 일부 존재하지만, 기본적으로 외벽은 석축으로 견고하게 하고, 내벽부는 석축으로 계단식 혹은 수직 형태로 쌓은 후 흙으로 경사지게 덮는 방식, 성벽이 상부로 올라갈수록 돌의 크기가 작아지는 등의 공통적인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앞서 머리말에서 언급한 1436년(세종 18)에 각 고을의 축성을 감독하게 한 ‘수성전선색’이라는 기관을 설치한 기사를 통해 지방의 읍성 축조를 포함한 성성곽 축성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진행된 사업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렇게 성곽 축조가 정형화될 수 있었던 것은 세종 시기에 중앙집권체제 확립을 위한 정책 추진 과정이 그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표 1 분석대상 현황
| 읍성명 | 축조 시기 | 축조 유형 | 입지 | 평면 형태 | 체성 폭(m) | 신증동국여지승람 둘레(尺) | 신증동국여지승람 높이(尺) | 잔존둘레 (km) |
|---|---|---|---|---|---|---|---|---|
| 홍주읍성 | 고려 토축/ 조선 초 석축 | 토성→석성 | 평산성 | 타원형 | 7.5 | 4,915 | 15 | 1.77 |
| 나주읍성 | 고려(토축)→ 1404년(태종 4)→ 1459년(세조 5) | 토성→석성 | 평산성 | 타원형 | 5.5∼6.3 | 3,126 | 9 | - |
| 경주읍성 | 고려시대 토축→ 1378년(고려 우왕 4) 석축 | 토성→석성 | 평산성 | 방형 | 7.0 | 4,075 | 12 | - |
| 하동읍성 | 1417년(태종 17) | 석성 | 평산성 | 제형(마름모) | 3.5→6 | 1,019 | 13 | 1.3 |
| 태안읍성 | 1417년(태종 17) | 석성 | 평산성 | 방형 | 6.5 | 1,561 | 12 | 0.114 |
| 해미읍성 | 1417~1418년(태종 17~18) | 석성 | 평산성 | 타원형 | 7.4 | 3,172 | 15 | - |
| 기장읍성 | 1425년(세종 7) | 석성 | 평산성 | 부정형 | 6.2∼8.5 | 3,197 | 15 | 1.0 |
| 웅천읍성 | 1435년(세종 17)/ 1453년(단종 1) | 석성 | 평지성 | 정방형→장방형 | 8.1 | 3,514 | 15 | 0.77/ 1.095 |
| 면천읍성 | 1439년(세종 21) | 석성 | 평지성 | 말각방형 | 5.9 | 3,225 | 11 | 1.56 |
| 사천읍성 | 1442년(세종 24) | 석성 | 평산성 | 반원형 | 7.5 | 5,015 | 15 | - |
| 남포읍성 | 1444~1451년(세종 26~문종 1) | 석성 | 평지성 | 방형 | 7.8 | 2,476 | 15 | 0.825 |
| 고현읍성 | 1451년(문종 1) | 석성 | 평지성 | 장방형 | 7.0 | 3,038 | 13 | 0.818 |
| 울산읍성 | 1476년(성종 7) | 석성 | 평지성 | 부정형 | 7.01 | 3,635 | 10 | - |
| 창원읍성 | 1476년(성종 7) | 석성 | 평산성 | 5각형 | 6~8 | 4,410 | 13 | - |
| 한산읍성 | 1493~1529년(성종 24~중종 29) | 석성 | 평산성 | 사다리꼴 | 7.3 | 4,070 | 11 | 1.245 |
| 언양읍성 | 1390년(고려 공양왕 2) 토축→ 1500년(연산군 6) 석축 | 토성→석성 | 평산성 | 정방형 | 7~8.5 | 3,064 | 8/13 | 1.7 |
표 2 옹성 발굴조사 현황
| 읍성명 | 옹성 수 | 성문 위치 | 평면 형태 | 옹성5) 길이(m) | 개구부 폭(m) | 옹성 폭(m) | 축조 시기 | 비고 |
|---|---|---|---|---|---|---|---|---|
| 나주읍성 | 4 | 서 | ‘ㄱ’자형 | 5.5 | 7.2 | 고려(토성)→ 1404년(태종 4)→ 1459년(세조 5) | 체성에 덧댐 | |
| 무장읍성 | 미상 | 동 | 반원형 | 8.0 | 1417년(태종 17) | |||
| 남 | 반원형 | 3.1 | 6.8 | |||||
| 하동읍성 | 4 | 서 | 반원형 | 3~4.1 | 7.5 | 1417년(태종 17) | 체성에 덧댐 | |
| 동 | ‘ㄱ’자형 | 3.0 | 6.4 | |||||
| 남 | 반원형 | 6.1~7.3 | ||||||
| 태안읍성 | 2 | 동 | 반원형 | 26.3 | 3.9 | 7.1 | 1417년(태종 17) | 체성에 덧댐 |
| 기장읍성 | 미상 | 남 | 반원형 | 30.6 | 3~3.5 | 7.0 | 1425년(세종 7) | 체성과 동시공정 |
| 동 | 반원형 | 30.0 | 2.7 | 6.5~7 | 체성에 덧댐 | |||
| 웅천읍성 | 미상 | 동 | 반원형 | 28.3 | 4.0 | 6.8 | 1435년(세종 17)/ 1453년(단종 1) | 체성에 덧댐 |
| 서 | 반원형 | |||||||
| 면천읍성 | 1 | 남 | ㄱ자형 | 31.8 | 1439년(세종 21) | |||
| 장기읍성 | 미상 | 북 | 반원형 | 25.0 | 3.5 | 7.1 | 1439년(세종 21) | 체성과 동시공정 |
| 동 | 반원형 | 28.4 | 6.7 | 6.0 | 체성과 동시공정 | |||
| 서 | 반원형 | 3.7 | 7.1 | 체성에 덧댐 | ||||
| 김해읍성 | 4 | 북 | 반원형 | 28.4 | 2.4~2.5 | 7.1~7.5 | 1439년(세종 21) | |
| 당진읍성 | 3 | 북 | 반원형 | 20.0 | 3.5 | 6.1 | 1440~1442년 (세종 22~24) | |
| 남포읍성 | 3 | 남 | 반원형 | 25.4 | 5.1~5.3 | 5.3~9.27 | 1444~1451년 (세종 26~문종 1) | 체성과 동시공정 |
| 동 | 반원형 | 23.1 | 3.85~6.3 | 7.1~8.4 | ||||
| 서 | 반원형 | 26.1 | 3.8~4.6 | 7.8~9.1 | ||||
| 결성읍성 | 2 | 동 | 반원형 | 22.0 | 3.7 | 5.4~7.0 | 1451년(문종 1) | 체성과 동시공정 |
| 서 | 반원형 | 23.0 | 5.1~6.4 | |||||
| 고현읍성 | 3 | 동 | 반원형 | 3.6 | 7.0 | 1451년(문종 1) | 체성과 동시공정 | |
| 북 | 반원형 | 29.6 | 3.6 | 6~7 | ||||
| 강진읍성 | 미상 | 북 | 반원형 | 4.7 | 5.3 | 1475년(성종 6) | 체성에 덧댐 | |
| 언양읍성 | 4 | 북 | 반원형 | 3.0 | 7.0 | 1390년(고려 공양왕 2)→ 1500년(조선 연산군 6) | 체성에 덧댐 | |
| 남 | 반원형 | 29.9 | 8.2 | 6.0 |
[표 6] 분기 설정 구분
| 분기 | 시기 | 축조 방식 | 유적 사례 |
|---|---|---|---|
| Ⅰ기 | 고려 말~ 1416년(태종 16) | 고려시대 토성 및 통일신라시대 도로유구를 내탁부로 이용하여 석성으로 개축 | 경주읍성, 나주읍성, 홍주읍성 등 |
| Ⅱ기 | 1417년(태종 17)~ 1450년(세종 32) | 계단식 내벽 축조(『축성신도』 축조법) / 이보흠의 보완책(계단식 내벽+경사성토) | 하동읍성, 웅천읍성, 태안읍성, 해미읍성, 기장읍성, 면천읍성, 사천읍성, 남포읍성 등 |
| Ⅲ기 | 1451년(문종 1)~ 1592년(임진왜란 발발) | 수직 형태의 내벽 등장17 / 기존 계단식 내벽도 공존 | 고현읍성, 울산읍성, 창원읍성, 한산읍성, 언양읍성 등 |
[표 7] Ⅰ기 읍성(고려 말 ~ 1416년(태종 16))
| 읍성명 | 축조 시기 | 내벽 형태 | 비고 |
|---|---|---|---|
| 경주읍성 | 고려(토축)→1378년(고려 우왕 4)(석축) | 부정형/계단식 | 통일신라 도로 유구/고려 토성을 내탁부로 이용 |
| 나주읍성 | 고려(토축)→1404년(태종 4)(석축) | 계단식 | 고려 토성 내탁부로 이용 |
| 홍주읍성 | 고려 토축/조선 초 석축 | 계단식 | 고려 토성 내탁부로 이용 |
표 10 뒤채움부 석축/토축 구간의 너비
| 연번 | 읍성 | 분기 | 축조 시기 | 내벽 형태 | 석축 너비(m) | 토축 너비(m) |
|---|---|---|---|---|---|---|
| 1 | 태안읍성 | Ⅱ기 | 1417년(태종 17) | 계단식 | 5.5~7.2 | 2 |
| 2 | 해미읍성 | Ⅱ기 | 1417년(태종 17) | 계단식 | 7.2 | 2 |
| 3 | 기장읍성 | Ⅱ기 | 1425년(세종 7) | 계단식 | 6 | 2.5 |
| 4 | 면천읍성 | Ⅱ기 | 1439년(세종 21) | 계단식 | 5.66~6.18 | 6 |
| 5 | 사천읍성 | Ⅱ기 | 1442년(세종 24) | 계단식 | 3.6~4.1 | 4.4 |
| 6 | 남포읍성 | Ⅱ기 | 1444~1451년 (세종 26~문종 1) | 계단식 | 2.9~3.2 | 5.3~6.4 |
| 7 | 고현읍성 | Ⅲ기 | 1451년(문종 1) | 수직형 | 5.2 | 3.9 |
| 8 | 울산읍성 | Ⅲ기 | 1476년(성종 7) | 수직형 | 3.4 | 3.3~ |
| 9 | 창원읍성 | Ⅲ기 | 1476년(성종 7) | 계단식/부정형 | 3.8~4.2 | 3.4~ |
| 10 | 언양읍성 | Ⅲ기 | 1500년(연산군 6) | 수직형/사선형 | 4.8~6 | 2.2~2.5 |
| 11 | 한산읍성 | Ⅲ기 | 1493~1529년 (성종 24~중종 29) | 계단식 | 3.4~3.9 | 5.5~6.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