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초록
Research Article

670년대 이후 고구려 유민과 신라·당 관계

김강훈

사동중학교 교사

발행: 2024년 1월 · 33권 · pp. 149-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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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서북한 일대에서 활동한 고구려 부흥군은 673년 윤5월 호로하 서쪽에서 당군에게 크게 패하였다. 황해도 일대에서 부흥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고구려 유민들은 근거지를 상실하고 육로와 해로를 통해 신라 영역인 영서 지역 및 경기 서부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신라는 이들을 대양성, 동자성 등에 배치하여 군사적으로 활용하였다. 673년 후반 신라와 당의 전투는 신라로 이주한 고구려 유민을 둘러싼 양국의 갈등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이후 신라는 고구려 유민을 지금의 익산 지역인 금마저 일대로 집단 안치하였다.
674년은 나당전쟁의 소강기였다. 당시 안동도호부는 요동성에서 평양성으로 다시 옮겨져 있었다. 674년 2월 안동도호는 고간에서 굴돌전으로 교체되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안동부도호가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670~673년 서북한 일대에서 전염병이 창궐하여 당군이 피해를 입은 사실이 「육효빈신도비」를 통하여 확인된다. 고구려 유민도 전염병을 비켜 갈 수 없었다. 안동도호부 수뇌부의 일시적 부재와 전염병의 유행은 674년에 나당전쟁이 소강기를 맞는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
신라가 고구려 유민 집단을 받아들이고 금마저에 집단 안치한 것은 당이 원정군을 신라에 파견하는 이유가 되었다. 이에 신라는 674년 9월 안승을 보덕왕으로 책봉하여 고구려 유민을 수용하였다는 사실을 희석시켜 당과의 충돌을 피하고자 하였다. 한편 670년대 후반 요동 지역의 정세는 여전히 불안정하였다. 신라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안승과 신라 왕실 여성의 혼인을 추진하여, 고구려 유민을 회유하는 동시에 신라 체제 내로 흡수하고자 하였다.
결국 신라는 집권 체제 구축을 위해 보덕국을 해체하였다. 이때 내부한 지 10년이 된 고구려 유민은 완전한 신라민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작동하였다. 이에 683년 안승은 신라 관등과 김씨 성을 사여 받고 경주로 이거하게 되었다. 금마저의 고구려 유민은 보덕국 해체에 따른 심리적 상실감과 부세 면제 혜택 종료에 따른 경제적 여건의 악화로 684년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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