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지역 고려시대 명문기와의 현황과 활용
Current Status and Utilization of Inscribed Roof Tiles from the Goryeo Dynasty in the Chungbuk Region
1 충북대학교
1 Chungbuk National University
DOI: https://doi.org/10.71244/jojm.2025.35.183
초록
명문기와는 표면에 글자나 기호가 있는 기와를 말한다. 이는 유적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할 뿐 아니라 때때로 문헌 기록에 실려 있지 않은 정보를 담고 있으므로 고고학은 물론이고 역사학에서도 중요하게 취급된다. 본고는 충북지역에서 보고된 고려시대 명문기와를 연구자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유적별로 현황을 정리하고 연호와 유적 성격에 따라 주요 명문 내용을 검토하였다. 2025년 11월까지 발간된 충북지역의 고려시대 유적 관련 자료 중에서 명문기와가 수습된 유적으로 총 94건을 추출하였다. 지역별 분포는 청주 28, 충주 15, 제천 8, 영동 8, 옥천 7, 음성 7, 보은 6, 진천 5, 괴산 4, 단양 3, 증평 3건인데 고려시대 계수관이었던 청주가 30%, 충주가 16%를 각각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유적의 성격별 분포는 사원 50, 관방 19, 관아 11, 건물지 10, 미상 4건이며 사원 유적이 절반을 넘는 53%에 해당한다. 명문 내용으로는 연호가 총 8건이 확인되었다. 국가별 분포는 고려 1건, 송 2건, 금 2건, 원 3건이며 다른 지역과 달리 요와 명의 연호는 아직 보고된 바가 없었다. 또한 고려시대 치소가 어떠한 곳에 있었는지를 규명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官’과 ‘城’ 등의 명문을 주목하였다. 아울러 폐사지의 본명을 추정할 수 있는 사원명 기와, 그리고 원관 사찰과 중소 규모의 역원 시설로 추정되는 유적에서 출토된 명문기와 등을 분석하였다.
Abstract
Inscribed roof tiles refer to tiles with letters or symbols on their surfaces. These are treated as important not only in archaeology but also in history because they provide clues to identifying the nature of remains and sometimes contain information not found in literature records. This study summarized the current status of inscribed roof tiles from the Goryeo Dynasty reported in the Chungbuk region by site so that researchers could utilize them, and reviewed the main contents of the inscriptions according to the era name and the nature of the site. A total of 94 sites where inscribed roof tiles were collected were extracted from data related to Goryeo Dynasty sites in the Chungbuk region published until November 2025. By region, Cheongju accounted for 30% and Chungju for 16%, which were administrative centers during the Goryeo Dynasty. By the nature of the sites, temples accounted for 53%. Regarding the contents of the inscriptions, a total of 8 era names were identified. In addition, inscriptions such as 'Gwan(官)' and 'Seong(城)' were noted in relation to the location of administrative offices. Furthermore, roof tiles with temple names that can estimate the original names of abandoned temple sites, and inscribed roof tiles excavated from sites presumed to be state-managed temples or station facilities were analyzed.
Ⅰ. 머리말
기와는 양질의 점토를 틀에 넣어 일정한 모양을 만들고 가마에 구워서 제작한 건축 부재를 말하며, 건물의 지붕을 덮어 눈과 비에 의한 침수를 막고 외관을 꾸미는 기능과 함께 권위를 드러내는 상징적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쓰이기 시작해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로 내려오면서 생산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사용이 점차 확대되었고 주로 궁궐, 관아, 사원 등 지배층 건물을 중심으로 활용되었다. 아울러 기와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기와 사용처, 기와 제작자, 조성 시기, 건축 주체, 길상 문구 등을 문자 혹은 기호로써 표면에 새기거나 찍어 넣은 명문기와가 등장하였다. 명문기와는 지금까지 전국 각지의 유적에서 상당수 출토되었는데 직접적으로 유적의 명칭을, 간접적으로 유적의 성격을 가늠하게 하는 단서를 제공할 뿐 아니라 때때로 문헌자료에 실려 있지 않은 정보를 담고 있는 사례도 있다.
이러한 가치로 인해 고고학 분야는 일찍이 명문기와에 주목하여 관련 연구 성과를 다수 축적하였다. 반면에 역사학 분야는 한동안 문헌자료를 보조하는 차원에서 부수적으로 언급하는 정도에 머물렀다가 근래 들어 명문기와를 주제로 하는 전문 연구가 속속 발표되었다1). 고려시대사 경우는 유적 발굴에 따른 개별적 논저를 제외하면 김해와 부산 등지에서 출토된 명문기와를 토대로 면리제(面里制)의 시행 가능성을 타진하고 동시에 치소성(治所城) 건설의 인력 수급과 기와 조달 체계를 검토한 일련의 연구2), 그리고 전체 지역 및 경기, 부산, 제주 등 일부 지역을 대상으로 명문기와 현황을 정리한 연구3)가 대표적이다. 전자는 기와에 적힌 명문 내용을 근거로 들어 기존 사료에 드러나 있지 않은 부분을 조명하였고, 후자는 고려시대사 연구에 명문기와를 활용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3).
최근 역사학 연구는 사료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연구 방법을 도입하거나 다양한 자료를 모색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 명문기와의 내용 역시 하나의 사료로 각광을 받고 있다. 향후 명문기와의 연구 활용도를 한층 제고하기 위해서는 전국의 모든 사례를 망라해 일괄 관리하는 방법이 가장 좋지만, 점점 증가하는 명문기와 사례를 한데 모아 다루기는 여건상 지난하므로 권역별, 시대별, 유적별 등으로 나누어 체계화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충북이라는 지역과 고려라는 시대로 범위를 한정해서 명문기와를 조사하고 내용상 어떠한 특징이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충북지역의 고려시대 명문기와는 2015년에 전국의 사례를 종합 검토한 논문 속에서 한 차례 정리된 바 있다4). 그로부터 10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여러 개발 사업이 추진되어 각처에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고 적지 않은 수량의 명문기와가 보고되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현황 점검이 재차 요구되는 상태이다.
또한 충북은 고려시대 지방 행정의 중심지였던 충주목과 청주목, 두 곳의 계수관(界首官)을 품고 있어서 해당 지역의 명문기와 검토는 지방제도 내지는 지역사 연구와도 관계가 있고 일정 부분 도움을 줄 수 있다. 고려시대 연구자들은 예전부터 개경, 서경, 동경, 남경, 강도 등 대읍을 위주로 통치 시설과 공간 구조를 복원하는 경관(景觀) 연구를 진행해 왔다5). 중앙에 비해 지방은 문헌 기록이 부족해서 발굴 자료를 활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명문기와는 유적의 정체를 파악하는 일종의 명함 같은 자료로써 각종 시설의 존재와 위치 등을 규명하는 작업에 효용성이 있다. 일례로 이처럼 명문기와를 통해 고려시대 용구현(龍駒縣)[경기 용인시]의 경관을 분석한 연구6)가 이미 발표된 적이 있다. 그러므로 충주목과 청주목의 명문기와 사례는 고려시대 지방 사회의 경관을 재구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Ⅱ. 명문기와의 유적별 출토 현황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충북지역은 고려시대에 모두 24개의 군현이 설치되어 있었다7). 이중 중앙 정부에서 지방관이 파견된 주현은 충주목과 청주목이며 나머지는 모두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던 속현이었다. 지금의 제천과 단양은 원주[강원 원주시]의 속현이었고 보은, 옥천, 영동은 경산부[경북 성주군]의 속현이었다. 반대로 충주목의 속현이었던 음죽[경기 이천시 장호원읍]과 청주목의 속현이었던 목주[충남 천안시 목천읍], 연기현[세종시], 전의현[세종시]은 충북에 속해 있지 않다. 고려시대 행정 단위를 기준으로 명문기와를 살펴보는 방법이 당시를 이해하는 데에 편리해서 일견 타당할 수 있으나 지역 간의 경계를 명확히 알 수 없고 월경지 등과 같이 복잡한 문제가 남아 있어서 실제 구현하기는 어렵다. 기존 연구도 오늘날의 행정 단위로 범위를 설정하였기 때문에 그대로 따라 편의상 현재 충북을 대상으로 명문기와를 조사하였다.
2023년 11월까지 발간된 고려시대 유적의 지표·시굴·발굴 조사보고서, 문화유산 조사보고서, 문화유적 분포지도, 기타 관련 논저와 도록 등 약 400건의 자료를 검토하였으며 여기에서 명문기와가 수습된 사례만을 추출해 유적별로 정리하였다. 방대한 양의 자료를 취급하는 작업이므로 아래와 같이 몇 가지 기준을 선정해서 처리하였다.
① 유적의 사용 시기가 삼국시대 및 조선시대에만 해당하고 고려시대와 무관하다면 제외하였으며, 통일신라 말기에 있던 시설이 고려 전기에 존속했거나 고려 말기에 있던 시설이 조선 전기에 존속했다면 수록하였다.
② 다양한 사유로 인해 연대를 추정하기 어려운 유적은 보고서 내용을 토대로 고려시대와 관계된 유구 및 유물이 발견되었다면 포함하였다. 그리고 고려시대 제작으로 추정되는 명문기와가 수습되었다면 유적이 주로 사용된 시기와 상관없이 수록하였다.
③ 범자명(梵字銘) 기와는 유적이 불교 사원, 혹은 그와 연관이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나 문헌사 연구자에게는 효용성이 낮다고 판단되어 제외하였다. 대개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
④ 유적은 명칭이 일정하지 않은 경우가 있어서 주소의 가나다순으로 정렬하였다. 주소는 지면상 동(洞)·리(里)까지 기재하였고 충주댐과 대청댐 건설로 인해 수몰된 지역은 ‘(수몰)’이라고 표기하였다.
⑤ 유적명은 대부분 보고서에 쓴 것을 그대로 따랐다. 매우 드문 편이지만 명칭이 없는 유적은 보고서 내용 중 적당한 부분을 가져와 임의로 명명하였다. 아직 조사가 실시되지 않은 사지(寺址)는 문화재청과 불교문화재연구소에서 발간한 『韓國의 寺址』를 참고하였다.
⑥ 명문은 원칙적으로 보고서의 판독문을 그대로 옮겼다. 다만 보고서 내용에 따라 판독이 확실치 않으면 ‘林(?)’과 같이 글자를 적고 소괄호 안에 물음표를 달았으며, 결실과 마모에 의해 거의 알 수 없으면 ‘○[林(?)]’처럼 결락 처리한 뒤 대괄호 안에 추정되는 글자를 쓰고 다시 소괄호 안에 물음표를 달았다. 판독 불가한 사례도 배제하지 않고 ‘판독불가○점’으로 표기하고 수량을 기재하였다. 그밖에 판독 오류가 확실하거나 추가 설명이 필요하면 각주로 부기하였다.
⑦ 전거는 지면의 제약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으나 자료 신뢰도를 높이는 한편, 후속 연구와 참고의 편의성을 위해 기재하였다. 중복 사례는 저자 및 연도와 함께 ‘앞의 책’이라고 표기하였다.
이상의 기준을 바탕으로 충북지역의 고려시대 명문기와를 유적별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표 1]
표 1
| 시군 | 구읍면리동 / 위치 | 유적명 | 명문 / 명문내용 | 전거 / 보고서 |
|---|---|---|---|---|
| 괴산군 (4) | 괴산읍 제월리 | 제월리유적 | ‘客舍草’ | 中原文化財硏究院, 2016, 『槐山 大霽産業團地 造成工事敷地 內 槐山 霽月里·大德里 遺蹟』 |
| 사리면 사담리 | 봉학사지 | ‘至元庚辰’ | 忠淸北道, 1982, 『寺誌』 문화재청·불교문화재연구소, 2014, 『韓國의 寺址―현황조사 보고서 下』 | |
| 청천면 도원리 | 도원리사지 | ‘大工山平(?)’ ‘平(?)’ ‘師’ ‘○匠○’ | 李在俊, 1995, 『한국의 폐사―百濟故土의 寺址를 찾아』, 한국문화사 문화재청·불교문화재연구소, 2014, 앞의 책 | |
| 칠성면 외사리 | 외사리사지 | ‘大’ ‘丁頁’ ‘大匠/丁頁’ | 金豊植·李在俊, 1979, 『忠北의 기와』, 유림사 李在俊, 1995, 앞의 책 | |
| 단양군 (3) | 가곡면 덕천리 | 덕천사지 | ‘關(?)’ | 金豊植·李在大, 1979, 앞의 책 |
| 가곡면 중방리 (수몰) | 중방리사지 | ‘大德精[靑(?)]’ | 忠北大學校 博物館, 1984, 「丹양 逸名寺址 發굴조사 보고―1983·84年度」, 『忠州댐 水沒地區 文化遺蹟發掘調査綜合報告書―佛蹟分野』 | |
| 대강면 용부원리 | 용부원리사지 | ‘米’ ‘瓦’ ‘草’ ‘自’ ‘工’ ‘官’ | 丹陽郡, 1984, 『竹嶺 輔國寺址 地表調査報告書』 불교문화재연구소, 2021, 『韓國의 寺址 시·발굴조사 보고서―단양 용부원리사지』 | |
| 보은군 (6) | 보은읍 어암리 | 삼년산성 | ‘全’ ‘田人’ ‘日’ ‘三’ ‘官’ 판독불가 2점 | 忠北大學校 中原文化硏究所, 2001, 『三年山城―기본 자료 및 종합 보존·정비계획안』 忠北大學校 中原文化硏究所, 2005, 『報恩 三年山城 2003年度 發掘調査 報告書』 |
| 속리산면 사내리 | 법주사 세존사리각지 | ‘卍’ ‘和向向訓/○○善○/○○’ ‘○/○○/○○浻俊’ ‘○○/全訓/李一卜’9) |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2020, 『報恩 法住寺 世尊舍利閣址』 | |
| 속리산면 사내리 | 사내리사지8 | ‘大’ | 문화재청·불교문화재연구소, 2018, 『韓國의 寺址―현황조사 보고서 上』 | |
| 속리산면 사내리 | 중관음암지 | ‘寺’ | 문화재청·불교문화재연구소, 2014, 앞의 책 | |
| 회북면 부수리 | 매곡산성 | ‘未’ ‘喆’ ‘下一’ ‘日(?)’ ‘田(?)’ ‘長(?)○’ | 忠北大學校 中原文化硏究所, 1998, 『報恩 昧谷山城 地表調査 報告書』 | |
| 회인면 쌍암리 | 웅암사지 | 판독불가 1점 | 문화재청·불교문화재연구소, 2020, 『韓國의 寺址―현황조사 보고서 上』 | |
| 영동군 (8) | 심천면 고당리 | 대동콘크리트(604번지) 옆 밭 | ‘太平興國七年壬午三月日/竹州九草近水虎水點矣作’ | 忠淸大學 博物館, 1992, 『永同郡 文化遺蹟』 |
| 양산면 누교리 | 영국사 | ‘草’ | 忠淸大學 博物館, 2008, 『永同 寧國寺』 | |
| 양산면 죽산리 | 죽산리사지2 | ‘伸[偉(?)]’ | 문화재청·불교문화재연구소, 2020, 앞의 책 | |
| 영동읍 계산리 | 계산리유적 | ‘太平興國七年壬午三月日/竹州瓦草匠水烏水院矣’ ‘在瓦’ | 忠南大學校 百濟硏究所, 2002, 『永同 稽山里遺蹟』 | |
| 영동읍 부용리 | 부용리사지 | ‘竹州凡草近水與(?)水/興國七年壬○/○○草近水與○’ ‘…寺’ | 李在俊, 1995, 앞의 책 문화재청·불교문화재연구소, 2014, 앞의 책 | |
| 영동읍 부용리 | 영동읍성 | ‘…年壬午三月日’ ‘同 郡官’ ‘…阝’ | 忠北大學校 中原文化硏究所, 1997, 『永同邑城 地表調査 報告書』 | |
| 추풍령면 사부리 | 사부리사지 | ‘太平’ | 문화재청·불교문화재연구소, 2018, 앞의 책 | |
| 황간면 신흥리 | 신흥리유적 | ‘大’ ‘天’ | 한국선사문화연구원, 2018, 『永同寄숙형중학교 교사 신축공사부지 내 영동 신흥리 유적』 | |
| 옥천군 (7) | 안내면 현리 | 현리사지 | ‘○禾寺’ ‘觀(‘禾’자 반파)’ ‘◯大◯’ ‘明(?)堂’ ‘王天’ | 淸州大學校 博物館, 1984, 『中原文化圈遺蹟精密調査報告書―沃川郡』 문화재청·불교문화재연구소, 2014, 앞의 책 |
| 옥천읍 삼양리, 문정리, 옥각리 | 서산성 | ‘午’ ‘三月/四月(?)’ ‘年’ | 충청전문대학 박물관, 1998, 『경부고속도로 옥천 증약리-문정리 구간 문화유적 지표조사 보고서』 | |
| 옥천읍 삼양리 | 삼양리유적 | ‘◯舍’ ‘◯沃◯舍’ ‘官左’ ‘左所’ ‘官右’ ‘官右/所麻田’ ‘*卍善◯’ ‘◯香徒笚’ ‘◯眞(?)’ ‘◯草◯’ ‘◯里’ ‘必◯’ ‘◯◯◯◯[元王元示(?)]’ | 中央文化財硏究院, 2003, 『京釜線 大田-沃川間 線로개량공사구간내 옥천 삼양리유적』 | |
| 옥천읍 삼청리 | 삼청리유적 | ‘房住’ ‘使…’ ‘二十○’ |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2001, 『옥천 삼청리·가풍리유적』, 『경부고속철도 대전·충청권 문화유적 발굴조사 보고서(Ⅱ)』 | |
| 이원면 백지리 | 백지리유적 | ‘赤谷…’ ‘…寺造…’ ‘赤谷寺…’ ‘…赤谷寺…’ ‘…谷寺造…’ ‘…造成…’ ‘…寺造成…’ ‘…寺造成香…’ ‘…香草…’ ‘大…’ 판독불가 1점 |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2001, 『옥천 백지리유적』, 『경부고속철도 대전·충청권 문화유적 발굴조사 보고서(Ⅱ)』 | |
| 청성면 산계리 | 수미사지 | ‘端洪’ ‘三’ ‘年’ ‘三年’ | 淸州大學校 博物館, 1984, 앞의 책 문화재청·불교문화재연구소, 2018, 앞의 책 | |
| 청성면 산계리 | 이성산성 | ‘延祐元年甲寅○[三(?)]/站主朴守于○[亇(?)] 三/ 甘勺三棟○[梁(?)]○○’ | 국원문화유산연구원, 2025, 『옥천 이성산성(4차) 매장유산 발굴조사 약식보고서』10) | |
| 음성군(7) | 감곡면 오향리 | 오향리유적 | ‘住戻干涬’ | 호서문화유산연구원, 2016, 『음성 감곡 오향리 생활체육공원 부지 내 유적』 |
| 맹동면 쌍정리 | 쌍정리사지 | ‘○[王(?)]’ | 문화재청·불교문화재연구소, 2020, 앞의 책 | |
| 삼성면 양덕리 등 | 망이산성 | ‘亰’ ‘國’ ‘大’ ‘官’ ‘大官’ ‘大/官’ ‘官/大/官’ ‘官/大官’ ‘天’ ‘大大’ ‘大華’ ‘障’ ‘…萬八(?)’ ‘興國’ ‘…國七年…’ ‘○平○國七年…/竹州凡草近(?)…’ ‘峻豐’ ‘(峻)豐四年壬戌’ ‘峻豐四年壬戌大介(?)山’ ‘○○/峻豐四年壬戌大介(?)山/竹州’ ‘丁丑七月七日作○’ ‘己巳年千年主(?)人(?)○大(?)’ ‘己巳八月…’ ‘壬□月日’ ‘日月’ ‘○○十(?)氏(?)工(?)’ ‘草(?)’ ‘草’ ‘…作’ ‘○○德九蒲凡草○○’ ‘…德宮宅障…’ ‘○○德進榲宮’ 판독불가 5점 | 단국대학교 중앙박물관, 1992, 『망이산성 학술조사보고서』 단국대학교 중앙박물관, 1996, 『망이산성 발굴 보고서(1)』 단국대학교 중앙박물관, 1999, 『안성 망이산성 2차 발굴조사 보고서』 中原文化財硏究院, 2013, 『陰城 望夷山城 Ⅱ 忠北區間 發掘調査 報告書』 | |
| 소이면 비산리 | 비산리사지 | ‘天騏’ ‘石’ ‘石駁’ | 蘂城同호會, 1991, (蘂城文化 12號 別冊) 『忠州·中原地域出土 瓦當圖錄』 문화재청·불교문화재연구소, 2014, 앞의 책 | |
| 소이면 중동리 | 중동리사지 | ‘公’ ‘相在用’ ‘在用◯’ ‘壬子四月日◯’ ‘…四月日 間垻寺 大德…’ 판독불가 1점 | 李在俊, 1995, 앞의 책 淸州大學校 博物館, 1997, 『陰城 中洞里寺址 精密地表調査 報告書』 문화재청·불교문화재연구소, 2014, 앞의 책 | |
| 음성읍 읍내리 | 읍내리사지 | ‘◯[興(?)]天寺’, ‘夫’, ‘◯白(?)’ | 忠淸北道, 1982, 앞의 책 金豊植·李전준, 1979, 앞의 책 문화재청·불교문화재연구소, 2014, 앞의 책 | |
| 음성읍 읍내리, 평곡리 | 수정산성 | ‘天’ ‘○水○’ ‘金○’ ‘金方(?)’ | 忠州産業大學校 博物館, 1998, 『陰城 水精山城―精密地表調査 報告書』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2016, 『음성 수정산성―2013년 발굴조사 보고서』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2018, 『음성 수정산성―2016년 발굴조사 보고서』 | |
| 제천시 (8) | 덕산면 신현리 | 와룡산성 | ‘○草’ | 忠北大學校 中原文化硏究所, 2000, 『堤川 城山城·臥龍山城·吾峙烽燧 地表調査 報告書』 |
| 봉양읍 명암리 | 백련사 | ‘韓’ | 忠淸專門大學 博物館, 1998, 「附: 堤川의 佛敎遺蹟」, 『堤川 月光寺址』 | |
| 봉양읍 옥전리 | 옥전리사지 | ‘酉年/○捧(?)/○’ | 문화재청·불교문화재연구소, 2014, 앞의 책 | |
| 수산면 원대리 (수몰) | 권일원지 | ‘○○[良巳(?)]’ ‘○[守(?)]’ | 忠北大學校 博物館, 1984, 「堤原 權一院址 發掘調査 報告」, 『忠州댐 水沒地區 文化遺蹟發掘調査 綜合報告書―歷史分野』 | |
| 장락동 | 장락사지 | ‘長’ ‘長○’ ‘戊寅六月大吉’ ‘大吉○○○○’ ‘卄十’ ‘吉三’ ‘天○’ ‘禾/三’ ‘大/因’ 판독불가2점 | 충청대학 박물관, 2004, 『堤川 長樂寺址 試掘調査 報告書』 충청대학 박물관, 2008, 『堤川 長樂寺址 1~3차 발굴조사 보고서』 | |
| 청풍면 읍리 (수몰) | 평등원지 | ‘○[淸(?)]風’ ‘月 日’ | 忠北大學校 博物館, 1984, 「淸風 邑里 逸名寺址 發掘調査 報告」, 앞의 책(佛蹟分野) | |
| 청풍면 읍리 (수몰) | 청풍부관아건물지 | ‘凡’ ‘氶’ ‘昌’ ‘就’ ‘靑風’ ‘靑風○○’ | 忠北大學校 博物館, 1982, 「淸風府官衙建物址 發掘調査 報告書」, 『’82忠州댐收沒地區 文化遺蹟發掘調査略報告書』 忠北大學校 博物館, 1984, 「淸風府 官衙建物址 發掘調査 報告」, 앞의 책(歷史分野) | |
| 하소동 | 하소동안담유적 | ‘造’ | 中原文化財硏究院, 2011, 『제천 하소(안담)지구 주거환경 개선사업부지내 堤川 下所洞 안담 遺蹟』 | |
| 증평군 (3) | 남하리 | 남하리사지 | ‘○[大(?)·天(?)]’ ‘○○’ | 미래문화재연구원, 2023, 『증평 남하리사지』 |
| 도안면 노암리 | 추성산성 | ‘○田’ | 中原文化財硏究院, 2014, 『曾坪 杻城山城―4次(北城 1次) 發掘調査 報告書』 | |
| 증평읍 미암리 | 미암리유적 | ‘仍二□’ ‘大□’ ‘大’ ‘□大’ ‘官’ ‘目’ 판독불가3점 | 서경문화재연구원, 2024, 『증평 미암리 온세온천 개발사업부지 내 증평 미암리 고려시대 건물지 유적』 | |
| 진천군 (5) | 문백면 옥성리 | 옥성리유적 | ‘韓’ | 忠北大學校 中原文化硏究所, 2002, 『오창~진천간 도로 확·포장공사구간내 文化遺蹟 試掘·發掘調査 報告書』 |
| 진천읍 교성리 | 청걸이골사지11) | ‘…○神光○○…’ ‘神光’ | 國立淸州博物館, 1992, 「校成里 推定寺址」, 『鎭川郡 文化遺蹟 地表調査 報告書』 | |
| 진천읍 교성리 | 행저골사지 | ‘甲’ ‘甲辰’ ‘甲辰年’ ‘年作’ | 錦江文化遺産硏究所, 2018, 『鎭川 校成地區 都市開發事業地區內 文化財 發掘調査 鎭川 校成里 행저골 寺址』 | |
| 진천읍 연곡리 | 보탑사 | ‘回太’ ‘王/天’ ‘入香’ | 忠淸專門大學 博物館, 1997, 『鎭川 寶塔寺』 | |
| 초평면 은암리 | 은암리유적 | ‘素垷○’ ‘素垷官’ | 중앙문화재연구원, 2018, 『진천 초평 은암산업단지 조성부지 내 진천 은암리유적』 | |
| 청주시 (28) | 상당구 남문로2가 | 남궁타워부지유적 | ‘官’ ‘城’ ‘大中’ ‘大中三’ ‘大中三/年○’ |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2013, 『청주읍성 내 남궁타워부지 유적』 |
| 상당구 남문로2가 | 우리은행부지유적 | ‘苐’ ‘王’ ‘西’ ‘草’ 판독불가1점 |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2013, 『청주읍성 내 우리은행부지 유적』 | |
| 상당구 문의면 덕유리(수몰) | 김생사지 | ‘金生寺’ ‘大平興國’ ‘金生寺/大平興國’ ‘金生寺/講堂草’ | 文化財管理局 文化財硏究所, 1979, 『大淸댐水沒地區遺蹟發掘報告書(忠淸北道篇)』 | |
| 상당구 문의면 미천리 | 양성산성 | ‘官’ ‘堅’ ‘相’ ‘堅相’ ‘○相’ ‘天下大一’ ‘金鼓/○寺(?)’ ‘善’ ‘善○’ ‘木’ ‘卍’ | 忠北大學校 中原文化硏究所, 2005, 『淸原 壤城山城 圓池 發掘調査 報告書』 | |
| 상당구 문화동 | 문화동 50-2번지 유적 | ‘城’ ‘城草’ ‘印(?)’ ‘三(?)’ ‘○三○’ ‘○玉○’ ‘木(?)土(?)’ ‘木(?)○’ ‘○丁(?)○○’ ‘卍’ 판독불가 4점 |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2017, 『청주 문화동 50-2번지 유적』 | |
| 상당구 북문로3가 | 북문로 Hutis 아파트 조성부지 내 유적 | ‘大○’ ‘大○○’ ‘○○木’ ‘大王木’ |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2019, 『청주 북문로 Hutis 아파트 조성부지 내 유적』 | |
| 상당구 산성동 | 상당산성 | ‘城’ ‘城草’ 판독불가 11점 | 中原文化財硏究院, 2013, 『淸州 上黨山城―運籌軒址 發掘調査 報告書』 | |
| 상당구 서문동 | 서문동성안유적 | ‘城’ ‘大’ ‘大平’ ‘三十五年 七月 日’ | 中原文化財硏究院, 2008, 『청주 서문동 마야복합상영관 부지내 淸州 西門洞 성안遺蹟』 | |
| 상당구 서문동 | 청주읍성 | ‘城’ |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2014, 『청주읍성 성벽구간 발굴조사 Ⅱ』 | |
| 상당구 수동 | 목우암지 | ‘天曆二年’ | 忠北大學校 博物館, 1980, 『牛岩山地域文化遺蹟 地表調査報告書』 | |
| 상당구 수동 | 천흥사지 | ‘天興寺’ ‘興泉’ | 忠北大學校 博物館, 1980, 앞의 책 | |
| 상당구 수동, 대성동 | 우암산성 | ‘易’ ‘城’ ‘乃三’ | 忠北大學校 博物館, 1980, 앞의 책 | |
| 상당구 영동 | 영동유적 | ‘城’ ‘十+圭’ ‘文住’ | 中原文化財硏究院, 2016, 『淸州中學校 多目的敎室 및 跆拳道訓鍊場敷地內 淸州 榮洞 遺蹟』 | |
| 상당구 용정동 | 것대산봉수 | ‘金’ | 中原文化財硏究院, 2010, 『淸州 巨叱大山烽燧』 | |
| 상당구 우암동 | 관음사 | ‘桂香之寺’ ‘月岵寺’ | 忠北大學校 博物館, 1980, 앞의 책 | |
| 상당구 탑동 | 탑동사지 | ‘山’ ‘丈’ ‘福寺’ | 중앙문화재연구원, 2022, 『청주 탑동2구역 주택개발사업부지 내 청주 탑동사지』 | |
| 서원구 남이면 문동리 | 문동리사지 | ‘○○○○[中月寺康(?)]…’ | 李在俊, 1995, 앞의 책 | |
| 서원구 사직동 | 사직동 6-169번지 유적 | ‘城’ ‘草’ ‘田’ ‘香’ ‘桂之’ ‘木’, ‘木○’ ‘木[大(?)]○’ ‘北(?)’ ‘喆(?)’ ‘出(?)’ 판독불가 4점 |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2018, 『청주 사직동 6-169번지 유적』 | |
| 서원구 성화동 | 성화2지구유적 | ‘城’ | 中原文化財硏究院, 2011, 『淸州 聖化2地區 宅地開發事業敷地內 文化遺蹟 發掘調査 淸州 聖化2地區 遺蹟』 | |
| 서원구 모충동 | 모충동 481번지 유적 | ‘靈’ ‘岩’ ‘禾’ |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2016, 『청주 모충동 481번지 유적』 | |
| 청원구 강내면 학천리 | 학천리유적 | ‘城’ | 中原文化財硏究院, 2013, 『淸州 國道代替迂廻道路(休岩-梧洞 2次區間) 建設工事 事業敷地內 淸原 鶴天里 遺蹟』 | |
| 청원구 오창면 백현리 | 백현리건물지 | ‘主…’ ‘頓…’ ‘主頓’ ‘田(?)’ ‘贊(?)’ ‘…喆’ ‘…也’ ‘天蓋’ | 忠北大學校 湖西文化硏究所, 1997, 『淸原 栢峴里 建物址 發掘調査 報告書―청주골프장 확장부지내 유적 긴급조사 보고』 | |
| 청원구 오창읍 괴정리 | 괴정리사지 | 판독불가1점 | 문화재청·불교문화재연구소, 2014, 앞의 책 | |
| 청원구 오창읍 창리 | 창리사지 | ‘棟兩公孟’ ‘棟兩公孟長’ ‘天申’ ‘…五月九草’ ‘…地草’ | 中原文化財硏究院, 2013, 『梧倉 第2産業團地 造成事業敷地 內 淸原 主城里·倉里 遺蹟』 | |
| 흥덕구 강내면 태성리 | 미상 | ‘城’ | 金豊植·李在俊, 1979, 앞의 책 | |
| 흥덕구 내곡동 | 내곡동유적 | ‘城’ | 忠北大學校 博物館, 1986, 「淸州 內谷洞遺蹟 發掘調査 報告」, 『中部高速道路 文化遺蹟發掘調査 報告書』 | |
| 흥덕구 운천동 | 운천동사지 | ‘城’ ‘大觀(?)’ ‘草上’ ‘佛’ ‘佛法○世’ | 忠淸北道, 1985, 『淸州雲泉洞寺址發掘調査報告書』 | |
| 흥덕구 운천동 | 흥덕사지 | ‘桂香之寺’ ‘大中三年’ | 淸州大學校 博物館, 1986, 『淸州興德寺址 發掘調査報告書』 | |
| 충주시 (15) | 금가면 유송리 | 김생사지 | ‘金生寺’ ‘金’ ‘王’ ‘龍頭’ ‘大平’ ‘○方’ 판독불가2점 | 忠淸大學 博物館, 1999, 『忠州 金生寺址』 忠淸大學 博物館, 2006, 『忠州 金生寺址 發掘調査 報告書』 中央文化財硏究院, 2006, 『忠州 龍頭-金加間 迂回道路建設區間 內 忠州 金生寺址』 |
| 노은면 수룡리 | 천룡사지 | ‘大’ ‘大天…’ ‘大天龍寺’ ‘天用’ | 忠州博物館, 2000, 『忠州 老隱面의 文化遺蹟―地表調査 報告書』 | |
| 단월동 | 단월 서부우회도로부지 내 유적 | ‘○○’ |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2016, 『충주 단월 서부우회도로부지 내 유적』 | |
| 동량면 하천리 (수몰) | 정토사지 | ‘淨土寺’ ‘開’ ‘開天’ ‘開天寺’ ‘代內/燔造’ ‘禪師/惟素’ ‘大’ ‘卍’ 판독불가1점 | 忠北大學校 博物館, 1984, 「中原 淨土寺址 A·B地區 發掘調査 報告―1983年度」·「中原 淨土寺址 發掘調査 報告―1984年度」, 앞의 책(佛蹟分野) | |
| 성내동 | 충주사고지 | ‘官’ ‘舍’ ‘仐’ ‘弓+京’ ‘上日’ ‘兀天’ ‘寺’ ‘○[義(?)]林寺’ | 국원문화유산연구원, 2024, 『충주읍성사고복원사업 부지내 유적 발굴조사(1~3차) 약보고서』 백종오·강진주, 2025, 「忠州邑城 內 考古資料를 통해 본 統一新羅~朝鮮時代 變化過程 豫察」, 『東洋學』 98 | |
| 소태면 오량리 | 청룡사지 | ‘頓’ ‘生’ ‘靑(?)’ ‘日成’ ‘王眞’ ‘卍’ 판독불가1점 | 忠州産業大學校 博物館, 1996, 『忠州 靑龍寺址 ―發掘調査 報告書』 | |
| 수안보면 미륵리 | 미륵대원지 | ‘明昌○三年 大院寺住持 僧元明’ ‘明昌三年……四月現造’ ‘甲午年○’ ‘瓦立僧元明里儒造’ ‘德山公草’ ‘德山公’ ‘山公草’ ‘公草’ ‘草’ ‘彌勒堂草’ ‘彌勒堂’ ‘弥/堂’ ‘大管’ ‘金堂’ ‘院主’ ‘文柱’ ‘柱’ ‘吾尙’ ‘坩今’ ‘卍’ | 淸州大學 博物館, 1978, 『彌勒里寺址發掘調査報告書』 淸州大學 博物館, 1979, 『彌勒里寺址 2次發掘調査報告書』 梨화여자대학교 박물관, 1983, 『彌勒里寺址 3차발굴조사보고서』 淸州大學校 博物館, 1992, 『中原彌勒里寺址―4次發掘調査報告書』 淸州大學校 博物館, 1993, 『中原彌勒里寺址 5次發掘調査報告書―大院寺址·彌勒大院址』 | |
| 신니면 문숭리 | 숭선사지 | ‘善’ ‘崇善’ ‘善寺’ ‘善寺三’ ‘三寶’ ‘崇善寺三○’ ‘○[寺(?)]上○[院(?)]○監役副都監大師性林大匠輰交/ 大定二十二年壬寅四月日’ ‘監役副’ | 蘂城同好會, 1995, 『崇선사지 지표조사 보고서』 충청대학 박물관, 2006, 『충주 숭선사지(시굴 및 1차~4차 발굴조사 보고서)』 忠淸大學 博物館, 2011, 『충주 숭선사지―5차 발굴조사 보고서』 | |
| 중앙탑면 루암리 | (숭선사지)9) | ‘都監大師性林/ □年壬寅四月日’ ‘院府監役/大定二十二年’ ‘監役/○年’ ‘監役/二年’ ‘…田(?)者(?)/監大’ ‘大師性林大匠…日’ ‘性林大匠’ ‘大匠輰交’ ‘□寅五月日造副都□’ ‘五月’ ‘卍’ 판독불가 6점 | 충청대학교 박물관, 2016, 『忠州 崇善寺址―6차 발굴조사 보고서』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2020, 『忠州 崇善寺址―7次發掘調査 報告書』 | |
| 앙성면 모점리 | 오갑사지 | ‘明昌三年 壬子 七月 ○○/ 烏岬寺 知事大○○○○○○’ | 金禮植, 1979, 「『明昌三年』 銘瓦를 통한 中原地方의 佛事」, 『蘂城文化』 1 | |
| 중앙탑면 가흥리 | 원동사지 | ‘鳳凰’ | 蘂城同好會, 1991, 앞의 책 | |
| 중앙탑면 창동리 | 창동리 쇠꼬지 유적 | ‘官’ | 中央文化財硏究院, 2007, 『忠州 龍頭-金加間 迂廻道路建設區間 內 忠州 倉洞里遺蹟』 | |
| 중앙탑면 창동리 | 창동리 263번지 유적 | ‘…○○/ 元○…○尙/ 道○…’ | 中原文化財硏究院, 2009, 『충주 가금~칠금간 도로 확·포장공사 구간내 충주 창동리·루암리 유적』 | |
| 중앙탑면 탑평리 | 칠층석탑 주변부지 내 유적 | 판독불가 1점 |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2019,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주변부지 내 유적(17번지 일원) 발굴조사 보고서』 | |
| 중앙탑면 탑평리 | 탑평리사지 | ‘寺’ ‘舍’ ‘天指(?)’ ‘天○’ ‘天’ ‘今達○金’ | 韓國敎員大學校 博物館, 1993, 『中原 塔坪里寺址 發굴조사보고서』 | |
| 호암동 | 호암동토성12) | ‘官’ ‘龍山寺’ |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2011, 『충주 호암동유적―2009년 발굴조사 보고』 東亞細亞文化財硏究院, 2018, 『忠州 虎岩洞 複合遺蹟 Ⅴ―Ⅶ·Ⅷ區域』 |
충북 내의 지역별 분포는 괴산 4, 단양 3, 보은 6, 영동 8, 옥천 7, 음성 7, 제천 8, 증평 3, 진천 5, 청주 28, 충주 15건으로 전체 대비 청주가 30%로 가장 많고 뒤를 이어 충주가 16%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청주와 충주가 고려시대에 계수관이었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계수관은 대체로 넓은 영역과 많은 인구를 가졌고 교통의 중심지이며 관청, 객사, 학교, 사원, 감옥, 시장, 창고 등 여러 시설을 갖춘 데다가 시가도 번화하였다15). 따라서 고려시대 일반 군현이었던 지역에 비해 유적과 유물이 잠재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원도심 재개발, 부도심 신개발, 고속화도로 건설, 산업단지와 주택 부지 조성, 유적에 대한 추가 발굴 조사 등 다양한 요인이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특히 청주 원도심 곳곳에서 추진되었던 재개발 공사는 위와 같은 결과를 가져오는 견인차 구실을 하였다.
다음으로 보고서 내용을 토대로 유적의 성격을 추려 보면 사원 50, 관방 19, 관아 11, 건물지 10, 미상 4건이며16) 사원이 전체의 53%를 차지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선행 연구를 보면 사원 30, 관방 12, 건물지 7, 분묘 1, 미상 1건17)으로 역시 사원이 전체의 59%를 차지하였다. 사원 다음으로 높은 비율을 점유하는 관방 시설도 양자를 비교해 보면 20:24(%)로 큰 차이가 나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해 2013년부터 2025년까지 유적의 수량은 약 2배 증가했어도 유적의 성격은 대체로 기존 경향이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충북 내 여러 지역 가운데 청주는 사원의 비율이 42%로 낮은 편인데 충주는 67%로 오히려 평균보다 높은 수치를 보인다. 청주는 도심지에서 주거지, 우물, 담장, 도로, 가마 등 다양한 유구가 조사되면서 사원의 비중이 낮아졌으나 충주는 숭선사지, 정토사지, 미륵대원지처럼 유명한 사원이 많고 관아가 있었던 원도심 발굴 조사가 비교적 늦게 이루어졌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소결
이처럼 충북은 고려시대 명문기와 출토 유적이 전국에서 많은 축에 속하며, 지역별로는 청주와 충주에서 절반가량이 나왔고 성격별로는 사원과 관방 유적의 비율이 높음을 확인하였다. 물론 유적의 수가 많다고 해서 명문기와의 사료적 가치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와 관련해 명문기와의 내용은 다음 장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Ⅲ. 명문기와의 내용과 활용 전망
명문기와는 온전한 상태가 드물고 대부분 파손된 채로 수습되어 판독이 까다롭다. 아예 한두 글자만 남아 있기 일쑤이고 서너 글자가 넘더라도 중간에 결락이 있어서 담겨 있는 내용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내용상 부족한 부분은 명문기와가 출토된 유적의 조사 결과를 참고하거나 유사한 성격을 가진 동시기 유적의 명문기와를 비교 검토하는 등 여러 가지 작업을 통해서 추정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는 충북지역의 명문기와 중에 고려시대사 또는 지역사 연구에 활용될 만한 사례를 연호, 관아, 성곽, 사원, 역원으로 나누어 검토하고자 한다.
1. 연호명 기와
연호명 기와는 연도가 적혀 있어서 유적의 편년을 결정하는 단서이자 다른 기와의 편년 설정에 하나의 기준이 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고고학 분야는 연호명 기와를 중요한 연구 소재로 취급한다.18) 고려시대사 연구에서는 대외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 이용되었다.19) 고려는 준풍(峻豊)과 같은 독자적 연호를 반포한 적이 있지만, 대개는 중국의 오대 이래로 역대 왕조와 조공-책봉 관계를 맺고 그들의 연호를 사용했으며 국제 정세에 따라서 연호를 취사하거나 간지를 쓰기도 하였다.20) 예를 들어 현종은 거란과 관계가 좋지 않아 1016년에 송의 연호인 대중상부(大中祥符)를 썼다가 1022년에 거란의 책봉을 받자 다시 거란의 연호인 태평(太平)을 사용했는데, 천안 봉선홍경사지의 ‘大中祥符十年丁巳’(1017)21) 기와와 고창 용계리 청자요지의 ‘大平壬戌’(1022)22) 기와를 보면 그러한 사실이 곧바로 반영되어 있다. 이처럼 연호명 기와는 대외관계와 연동되는 증거 자료로 참고할 수 있다. 또한 유적의 사용 시기를 명확히 밝혀줌으로써 당시의 지역 사정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지역사 측면에서도 가치가 크다. 지금까지 충북지역에서 출토된 연호명 기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 2 충북지역의 고려시대 연호명 기와
| 연번 | 서기 | 왕력 | 국명(황제) | 연호명 | 유적 | 소재지 |
|---|---|---|---|---|---|---|
| ① | 849 | 문성왕 11 | 당(선종) | 大中三年 | 남궁타워부지 유적, 흥덕사지 | 청주시 |
| ② | 963 | 광종 4 | 고려 | 峻豐四年 | 망이산성 | 음성군 |
| ③ | 982 | 성종 1 | 송(태종) | 太平興國七年 | 계산리유적, 대동콘크리트 옆 밭, 부용리사지 | 영동군 |
| 망이산성 | 음성군 | |||||
| ④ | 990 | 성종 9 | 송(태종) | 端拱三年 | 수미사지 | 옥천군 |
| ⑤ | 1182 | 명종 12 | 금(세종) | 大定二十二年 | 숭선사지 | 충주시 |
| ⑥ | 1192 | 명종 22 | 금(장종) | 明昌三年 | 미륵대원지, 오갑사지 | 충주시 |
| ⑦ | 1280 | 충렬왕 6 | 원(세조) | 至元庚辰 | 봉학사지 | 괴산군 |
| 1340 | 충혜왕 1 | 원(순제) | ||||
| ⑧ | 1314 | 충숙왕 1 | 원(인종) | 延祐元年 | 이성산성 | 옥천군 |
| ⑨ | 1329 | 충숙왕 16 | 원(문종) | 天曆二年 | 목우암지 | 청주시 |
① 大中三年: 849년으로 고려시대에 해당하지 않으나 고려 건국과 시기적으로 멀지 않고, 기와가 출토된 유적이 고려시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기능했으므로 목록 안에 포함하였다. 청주 흥덕사지와 남궁타워부지 유적의 명문기와는 모두 배면에 어골문을 기본 문양으로 하였으며 명문 서체, 방곽 형태, 어골 문양 등이 거의 같아서 동일 가마에서 생산된 것으로 보고 있다.23)
② 峻豐四年: 주지하듯이 준풍은 광종의 연호로 이해되고 있다. 처음에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송 태조의 연호인 건륭(建隆)에서 건은 태조 왕건(王建)을, 융은 세조 왕륭(王隆)의 이름에 해당하므로 피휘하여 준풍을 썼다고 보았다.24) 반면 아키우라 히데오(秋浦秀雄)는 963년(광종 14)에 광종을 ‘昭大王’(「古弥縣西院鐘」)으로 지칭한 기록 등을 근거로 들어 당대에 피휘하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이마니시의 견해를 부정하였다.25) 이후 준풍이 독자적 연호인가26) 아니면 건륭의 피휘인가27)를 두고 논자마다 입장이 갈리고 있다.
③ 太平興國七年: 영동의 여러 유적에서 보고된 것과 동일한 명문을 담고 있는 사례가 음성과 안성의 경계에 있는 망이산성, 인근의 안성 봉업사지에서도 출토되어 눈길을 끈다. 일단 여기서는 연호만 간략히 소개하고 구체적인 분석은 후술하겠다. 한편 청주 김생사지28)에서도 ‘大平興國’이 새겨진 명문기와가 발견되었는데 보고서에는 별다른 의심 없이 송 태종의 연호라고 설명하였다.29) 그러나 위아래 어골문이 배치된 방곽 안에 ‘金生寺’와 ‘大平興國’을 세로로 나란히 배치하고는30) 연도가 들어갈 만한 자리를 두지 않았으므로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길상 문구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④ 端拱三年: 연호와 연도의 부분이 온전한 여타 기와와 달리 ‘端洪’, ‘三’, ‘年’, ‘三年’이 각각 남아 있는 기와 6점이 수습되었다. 옥천 수미사지를 지표 조사한 보고서에는 사진 없이 설명만 있어서 과연 ‘端洪三年’으로 조합이 가능한 것인지 확인할 수 없다. 또한 보고서는 연호 가운데 단홍(端洪)이 실재하지 않아서 단공(端拱)의 오기라고 파악하였다.31) 단공은 2년 만에 순화(淳化)로 바뀌어 비교적 단기간 사용한 연호인데, 만약 보고서의 해석이 맞는다면 각종 금석문을 통틀어 단공이 새겨진 사례는 수미사지의 기와가 유일하다.
⑦ 至元庚辰: 연도 없이 연호와 간지로만 구성되어 있다. 지원은 두 번 사용된 특이한 연호라서 지원 경진은 1280년과 1340년에 해당한다. 최해(崔瀣, 1287~1340), 이제현(李齊賢, 1287~1367), 이색(李穡, 1328~1396) 등은 전대의 지원 연호와 구분하려고 당대의 지원 연호를 ‘後至元’32)으로 썼는데 이곡(李穀, 1298~1351)은 그대로 ‘至元’33)이라고 기록하였다. 당시에 지원과 후지원을 엄밀히 구분해 사용하지 않아서 현재로서는 어느 쪽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기 어렵다.
이밖에 연호로 의심되는 사례 가운데 대관(大觀)이 있다. 청주 운천동사지의 ‘大觀’은 명문의 두 번째 글자에서 좌상의 ‘艹’ 변이 일부 남아 있고 좌하의 ‘佳’ 자가 뚜렷하며 나머지는 마멸된 상태이다. 보고서는 자형뿐만 아니라 유적에서 출토된 원풍통보(元豐通寶)[1078~1085] 등을 함께 고려하여 두 번째 글자를 ‘觀’으로 판독하고 송 휘종의 연호인 대관(大觀)[1107~1110]으로 파악하였다.34) 아울러 거란 성종의 연호인 태평(太平)[1021~1031]과 관련하여 영동 사부리사지의 ‘太平’, 청주 서문동성안유적과 충주 김생사지의 ‘大平’ 사례가 눈에 띈다. 전자는 사진이 첨부되지 않아 모양을 확인할 수 없고 후자는 둘 다 하단부가 파손되어 연도의 존재 여부를 가리기 어렵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대평 또는 태평이 연호가 아니라 천하대평(天下大平)과 같은 길상 문구의 축약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대표적 사례로 부산 당감동성지에서 출토된 ‘大平’ 명 기와를 들 수 있다. 이에 대해 발굴보고서는 연호로 보고 성곽의 수축 연대를 추정하는 근거 자료로 삼았지만,35) 관련 연구는 두 글자만 있고 뒤에 다른 글자가 없음이 확실하므로 연호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36)
위와 같이 충북지역의 고려시대 명문기와 중에서 몇몇 의심되는 사례를 제외하면 준풍, 태평흥국, 단공, 대정, 명창, 지원, 연우, 천력의 총 8개 연호가 확인된다. 선행 연구37)와 비교하면 약 10년 사이에 지원과 연우의 2개 연호가 추가 보고되었으며 전국적으로 보아도 사례가 적은 편에 속하지는 않는다. 덧붙여 국가별로는 요와 명의 연호가 새겨진 명문기와가 아직 없다. 물론 요의 경우 태평으로 의심되는 사례가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충남에서는 11세기의 거란 연호가 담긴 명문기와 여러 편이 수습되었는데 충북의 경우는 아직 사뇌사(思惱寺) 금속 기물에만 나타나고 있다.38)
2. 관아와 성곽 유적의 명문기와
고려시대 지방에서 군현마다 통치 시설이 있는 공간을 읍치나 치소라고 하며, 여기에 외부 침입을 막기 위해 성벽을 쌓은 경우 성벽 내지는 안쪽 영역까지를 포함해 흔히 읍성 또는 치소성이라고 부른다.39) 그 존재 양태에 대해서는 고려 초기부터 평지 읍성에 치소가 있었다는 평지읍치설40)과 산성을 중심으로 치소가 있었다는 산성읍치설41)의 두 가지로 나뉜다.
이러한 치소 및 치소성과 관련하여 주목을 받는 명문기와 사례가 바로 ‘官’과 ‘城’이다. 기존 연구에 의하면 통일신라 시기부터 고려 초기에 해당하는 산성, 사원, 건물지 등 총 28개 유적의 사례를 검토한 결과, ‘官’은 관아 건물과 관영 창고에 사용될 기와임을 나타내기 위해 표시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지명 뒤에 결합한 경우는 ‘官’, ‘城’, ‘郡’이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官’, ‘官草’, ‘宦’ 등과 같은 명문기와가 출토되는 대형 건물지를 호족의 거관(居館)이라고 추정하였다. 그리고 ‘城’은 보통 기와의 사용처를 나타낸 것으로 설명되고 있으며 실제로 성곽에서 자주 출토된다. 지금까지 충북지역에서 보고된 명문기와 중 ‘官’과 ‘城’의 사례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먼저 ‘官’은 자형의 유사성으로 인해 ‘瓦’나 ‘宮’ 등으로 잘못 판독될 만한 여지가 있다. [표 3]
표 3 충북지역의 ‘官’ 및 ‘城’ 기와 출토 사례
| ‘官’자명 기와 출토 유적 | ||
|---|---|---|
| 지역 | 유적명 | 성격 |
| 단양군 | 용부원리사지 | 역원 기능이 있는 사원 |
| 보은군 | 삼년산성 | 산성 |
| 음성군 | 망이산성 | 산성 |
| 증평군 | 미암리유적 | 역원 기능이 있는 사원 |
| 진천군 | 은암리유적 | 호족 제택(第宅) 또는 교통 시설 |
| 청주시 | 남궁타워부지유적 | 읍성 |
| 양성산성 | 산성 | |
| 충주시 | 충주사고지 | 건물지(관아) |
| 호암동토성 | 토성 | |
| 창동리 쇠꼬지 유적 | 조운 관련 시설 | |
[표 3]에서 가장 많은 ‘官’자명 기와 사례가 보고된 충주는 최근 들어 고려시대 치소를 규명하는 데 한 걸음 다가서고 있다. 충주에서는 2012~2016년 동안 호암지구 택지개발 부지를 발굴 조사해 고려시대 성곽인 호암동토성이 모습을 드러냈고, 2022년부터 조선시대 읍성 구역에서 충주사고를 찾기 위한 발굴 조사를 통해 통일신라 시기의 건물지 적심과 고려 시기부터 조선 전기까지 사용된 대형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두 군데 모두 ‘官’이 새겨진 와편이 수습되었다. 이상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충주 읍성과 인접 지역이 통일신라 시기부터 조선시대까지 지방의 행정 및 군사 시설들이 들어선 중요 공간으로써 활용되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고 보는 견해, 호암동토성이 고려시대 충주의 치소성이며 관청은 현재의 관아공원 일대에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앞으로 충주 원도심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요구되며 신라 중원경과 고려 충주목의 치소와 관련하여 어떠한 성과가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다음으로 [표 3]에서 ‘城’ 사례는 총 13건이며 공교롭게도 모두 청주 일대에 해당한다. 청주는 한동안 서원경 단계에서 상당산성과 우암산성 등이 치소 후보지로 거론되었다. 하지만 [표 3]에 수록된 것처럼 남궁타워부지에서 ‘官’과 ‘城’이 함께 출토되고, 마찬가지로 서문동성안유적과 청주읍성 성벽구간 등에서 ‘城’을 비롯해 여러 명문기와가 보고된 뒤부터는 관아 시설이 평지에 있었다고 보는 방향으로 힘이 실리고 있다. ‘城’자명 기와는 조선시대 읍성 자리 안팎은 물론이고 산성과 환호 같은 방어 시설에서 주로 수습되었는데 특이하게도 주변에 이렇다 할 만한 성곽이 없는 내곡동, 사직동 6-169번지, 성화2지구 등의 유적과 운천동사지에서도 출토되었다. 그리고 기와의 외면 문양이 어골문이고 약 4~4.5cm 의 방곽(方郭)에 우서(右書)된 ‘城’자를 인장하는 수법이 동일한 특징을 보인다. 이처럼 청주는 치소성으로 추정되는 지역 바깥에서 제작 수법까지 동일한 ‘城’ 사례가 나타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가 과제로 남는다.
한편 ‘官’ 및 ‘城’의 명문기와 사례는 없지만 고려시대 치소로 의심되는 유적이 있다. 옥천 삼양리 유적은 발굴 조사 결과 1·2·5·7호 건물지가 고려시대 관청 혹은 그와 관련된 유구로 추정되며 이들 건물지와 대체로 중복 관계에 있는 1-2호와 3·4·6호 건물지는 조선시대 역과 관련된 건물, 즉 가화역(嘉化驛)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한다. 여기서 출토된 명문기와를 보면 ‘◯沃◯舍’는 옥천의 고려시대 지명인 옥주(沃州)를 가리키는 ‘沃’이 들어간 것으로 생각되며, ‘官…’으로 시작하는 여러 사례는 의미를 알 수 없으나 대략 관아와 연관이 있다고 추정된다.
또한 영동 계산리 유적은 발굴 조사를 통해 나말여초 건물지군이 확인되고 태평흥국 7년명 기와가 출토되었다. 이는 보고서에서 해당 유적을 고려 초기 호족의 거관이라고 추정하는 주요 근거 자료로 활용되었다. 그런데 태평흥국 7년명 기와는 인근의 영동읍성, 부용리사지, 심천면 고당리 604번지 옆 밭을 비롯해 멀리 떨어진 음성 망이산성과 안성 봉업사지에서도 거의 동일한 형태의 기와가 수습되었다. 명문은 이중 방곽 안에 2열 우종서(右縱書)로 글자를 새겼고 왼쪽이 ‘竹州…’, 오른쪽이 ‘太平興國…’으로 각각 시작한다. 이러한 명문 내용을 유적별로 나열하면 아래와 같다.
여기에서 ①과 ②의 사례는 사진 없이 설명만 있고 특히 ②는 구전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④의 사례는 ‘太平興國七’의 뒷부분으로 보이며 여타 명문과 같은 내용이었다고 추정된다. 판독상 쟁점은 2행에 있으며 [표 4]
표 4 ‘太平興國七年壬午三月日’ 기와 사례
| 연번 | 보고서 연도 | 유적명 | 명문 |
|---|---|---|---|
| ① | 1992 | 영동 부용리사지 | 竹州凡草近수與(?)水/興國七年壬○/○○草近水與○ |
| ② | 1992 | 영동 고당리 밭 | 太平興國七年壬午三月日/竹州九草近水虎水點矣作 |
| ③ | 1996 | 음성 망이산성 | ○平○國七年…/竹州凡草近(?)… |
| ④ | 1997 | 영동 읍성 | …年壬午三月日 |
| ⑤ | 2002 | 안성 봉업사 | 太平興國七年壬午三月日/竹州凡草近水(仁)水(吳)(矣) |
| ⑥ | 2002 | 영동 계산리유적 | 太平興國七年壬午三月日/竹州瓦草匠水烏水院矣 |
『여지도서』를 보면 영동의 고을 명칭에 대해서 새로 추가된 사항[신증(新增)]으로 “죽주는 지금의 영동이다. 태평흥국 연간에 이러한 호칭이 있었다.”라는 기사가 있다. 일각에서는 계산리 유적의 명문기와를 근거로 들어 태평흥국(976~984) 연간에 영동이 죽주였다는 기록을 사실로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신라의 개산군(介山郡)을 고려 초기에 죽주로 고쳤다고 전하는데 지금의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죽산면, 삼죽면 일대에 해당한다. 그리고 영동에 대해서는 신라의 길동군(吉同郡)을 경덕왕 때 영동군으로 고쳤다가 995년(성종 14)에 계주자사(稽州刺史)로 승격시켰으며 1005년(목종 8)에 자사를 없애고 1018년(현종 9)에 상주목의 속현이 되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태평흥국 연간에 영동이 죽주였다는 기록은 없다. 만약 『여지도서』 기사를 그대로 신뢰한다면 당시에는 죽주가 2곳[안성 죽산 일대와 영동]이 존재하는 셈이다.
이와 관련하여 음성과 안성의 경계에 있는 망이산성에서 출토된 기와 가운데 ‘○○/峻豐四年壬戌大介(?)山/竹州’라는 명문이 주목된다. 고려 초기에 개칭된 현행 지명인 죽주와 예전 지명인 개산이 함께 적혀 있어서 『고려사』 지리지의 기록대로 죽주는 영동이 아닌 안성 죽산 일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므로 영동 일대에서 수습된 태평흥국 7년명 기와는 현재 안성 지역인 죽주로부터 가져왔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직선거리로 무려 100km 밖에 있는 죽주의 기와를 영동까지 운반한 이유나 방법 등 구체적 부분은 쉽게 짐작되지 않는다. 기존 연구에 의하면 거리가 멀어 운반이 어렵거나 생산분으로는 수요를 충당할 수 없으면 와장으로 하여금 일정 기간을 거주케 하며 필요한 기와를 생산하게 하였다고 한다. 혹은 영동의 여러 유적에서 출토될 정도로 기와를 다량 운반했다면 일개 지방 호족의 권위로는 불가능하고 중간에 개재한 여러 군현을 동원할 정도의 국가 단위 공역이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에, 호족의 거관이 아닌 계주자사 같은 외관 파견에 부합하는 치소를 조성하기 위한 목적일 가능성도 있다.
종합하자면 고려시대 치소의 입지 조건을 논하는 평지읍치설과 산성읍치설에 대해서 충주와 청주의 경우는 ‘官’과 ‘城’ 같은 명문기와를 활용해 전자로 기울고 있음을 설명하였다. 또한 이러한 사례가 보고되지 않은 옥천 삼양리 유적과 영동 계산리 유적의 명문기와를 살펴보고 뚜렷하지는 않으나 해당 유적이 관아로 존재했을 가능성을 상정해 보았다.
3. 사원과 역원 유적의 명문기와
충북지역에서 명문기와가 보고된 유적 가운데 사원은 절반 이상의 비중을 차지한다. 여기에서 수습된 사원명 기와는 문헌자료에 나타나 있지 않은 사원의 존재를 알려주는 경우가 많아 지역사 측면에서 가치가 높다. 충북 각지에는 이름을 모르는 폐사지가 산재해 있다. 예를 들어 옥천군에는 폐사지가 26개나 집계되는데옥천군지편찬위원회(2015) 충북 전체를 합한다면 상당한 숫자에 이를 것이다. 전장의 [표 1]에서 정리한 바와 같이 명문기와를 통해 사원명이 분명히 드러난 사례로는 옥천 현리사지의 ‘觀禾寺’, 백지리유적의 ‘赤谷寺’, 음성 중동리사지의 ‘間垻寺’, 청주 김생사지의 ‘金生寺’, 천흥사지의 ‘天興寺’, 관음사의 ‘月岵寺’, 충주 김생사지의 ‘金生寺’, 천룡사지의 ‘大天龍寺’, 정토사지의 ‘淨土寺’와 ‘開天寺’, 미륵대원지의 ‘大院寺’, 숭선사지의 ‘崇善寺…’, 오갑사지의 ‘烏岬寺…’ 호암동토성의 ‘龍山寺’가 있다. 그밖에 사원명으로 의심되는 경우를 더한다면 전체 사례는 더욱 불어난다.
지역별로 청주는 ‘桂香之寺’가 눈에 띈다. 일찍이 청주 관음사와 흥덕사지에서 ‘桂香之寺’가 새겨진 명문기와가 수습되었고, 근래 사직동 6-169번지 유적에서 고려시대 건물지가 사원인지 확실치 않으나 ‘香’, ‘桂之’ 명문이 있는 와편이 출토되었다.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2018) 지금으로서는 관련 자료가 부족하여 그 의미를 추적할 수 없지만 고려시대 청주의 사원 세력이나 지역 사회의 동향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충주는 호암동토성 발굴 조사를 통해 ‘龍山寺’ 명문기와가 출토되면서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었다. 용산사는 성석린(成石璘, 1338~1423)의 문집인 독곡집(獨谷集)에서 확인되는 사찰인데 지금의 충주공업고등학교 뒤편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대원사에 있는 철불좌상이 본래 의림사가 아닌 용산사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김희찬(2021) 또한 1989년에 대원고등학교 운동장에서 발견된 청동반자[大定三十年銘義林寺般子]의 명문을 통해 안림동 절터가 의림사였음이 밝혀진 적이 있었는데, 최근 충주사고지 발굴 조사 현장에서 ‘義林寺’ 명문기와가 출토되었다. 두 곳이 직선거리로 1.5km 이내에 있어서 의림사의 기와가 충주읍성 내로 옮겨져 재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백종오·강진주(2025)
다음으로 충북은 백두대간을 옆에 끼고 있어서 이른 시기부터 죽령과 계립령 등 고갯길이 개통되었으며, 이에 따라 역로망이 정비되고 역원과 여기에 불교 사원 기능을 겸한 소위 원관 사찰최연식(2016)이 발달하였다. 원관 사찰은 현종대에 처음 출현해서 활발히 운영되다가 몽골의 침입으로 육상 교통이 쇠퇴하는 1230년대 이후 크게 축소되었고, 원 간섭기에 육상 교통이 다시 정비되었으나 역로망 운영자들에 대한 과도한 부담과 권세가들의 사적 침탈 속에서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였으며, 공민왕이 육상 교통의 발전을 도모하면서 국가의 관리 아래 불사 기능이 없는 순수한 객관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고 한다.최연식(2016)
충북의 대표적인 원관 사찰은 계립령의 충주 미륵대원지와 죽령의 단양 용부원리사지이다. 전자는 1977년부터 5차에 걸쳐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 사찰과 역원의 건물터가 함께 발굴되었고 명창 3년명 기와를 비롯해 수많은 명문기와가 출토되었다. 후자는 죽령대원(竹嶺大院)으로 비정되는 장소 중에 가장 유력하며 보국사지(輔國寺址)로도 알려져 있으나 사원명에 대한 정확한 문헌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1984~1985년과 2018~2019년에 발굴을 통해 건물지 7동, 담장지, 배수로 등을 조사하고 ‘官’을 포함한 여러 편의 명문기와를 수습하였으며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죽령대원이었음을 재차 확인하였다.김선·장기동(2021)
이외 충북에서 원관 사찰로 추정되는 것으로 증평 미암리 유적이 있다. 여기서는 고려시대 건물지가 확인되고 ‘大’, ‘官’, ‘目’ 등의 명문기와가 출토되었다. 고려시대 건물지는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건물 사이 공간에 마당 또는 정원을 두고 중정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다. 고려시대에 중정식 건물지는 사찰 및 역원에서 보이는 배치 형태이며 원관 건축의 중요 요소로 알려져 있다.박만홍(2023) 그러한 사례로는 충주 미륵대원지, 파주 혜음원지, 양주 회암사, 가평 감천역원지, 화성 오산 미륵동 유적 등이 있다. 그런데 이른바 □자형 건물 배치는 사찰 건물지에서도 나타나는 형태이므로 이것만 가지고 역원 시설을 주장하기 어렵다는 반론이 있다.정요근(2020) 증평 미암리 유적은 발굴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건물지의 성격이 명확히 규명되지 않으나 청주, 음성, 괴산을 연결하는 주요 도로에 위치하였으며, 고려 중기 이후 사원 유적으로 건립되었다가 고려 후기에 왜구 침입으로 인해 육로 활용도가 증가하자 조선 전기까지 역원으로서 크게 번성했다고 보았다.서경문화재연구원(2024)
진천 은암리 유적은 발굴 조사를 통해 고려시대 건물지 10동이 확인되었고 ‘素垷官’이라는 명문기와가 출토되었다. 발굴조사 보고서에는 불교 관련 유물이 없으므로 원관 사찰로 보기 어렵고 건물지 성격도 분명히 드러나지 않지만, 입지 조건과 출토 유물로 보아 호족의 제택(第宅)이거나 교통 관련 시설이었을 것으로 설명하였다.중앙문화재연구원(2018) 마찬가지로 은암리 유적이 청주 읍치의 북쪽 40리에 있었다는 조선시대 조풍원(調豐院)의 위치와 부합되고 있어서 고려시대에 중소 규모의 역원 시설이었다는 견해가 제출되었다.정요근(2020) 이상의 용부원리사지, 미암리 유적, 은암리 유적과 같이 원관 사찰이나 역원으로 추정되는 유적에서 ‘官’자가 들어간 명문기와가 출토되었는데 충주미륵대원지, 천안 봉선홍경사지, 파주 혜음원지 등 대형 역원은 오히려 그렇지 않아서 의문이 남는다.
한편 역원과 관련하여 금년 옥천 이성산성의 4차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연우 원년명 기와가 주목된다. 이를 검토해 보면 1열의 ‘延祐元年甲寅’은 1314년으로 충숙왕 원년에 해당한다. 2열의 ‘站主朴守于○…’에는 그간 문헌자료에서 볼 수 없었던 참주(站主)라는 호칭이 있고 뒤이어 박씨 성을 가진 인물(이하 박모)이 기록되었다. 뒤에 결락이 있어서 1명이 맞는지, 이름이 1자 혹은 2자인지 단정하기 어렵다. 이성산성이 위치한 청성면은 이웃한 청산면과 함께 고려시대에는 청산현이었다. 이는 고려시대 동안 상주목의 속현이었고 1390년(공양왕 2)에 가서야 감무가 파견되었다.
우선 참주는 역참의 관리 혹은 수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에 빈번히 등장하는 역리(驛吏)나 고려 말기에 잠깐 등장하는 참리(站吏)와 유사한 용례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세종실록 지리지를 보면 청산현의 토성 중에 박씨가 있어서 박모라는 인물은 재지 세력으로 추정된다. 박모는 청산현에 있는 역참의 관리라고 보는 쪽이 자연스러운데, 고려시대 옥천 지역에는 토현역(土峴驛)[이원면], 이인역(利仁驛)[안내면], 증약역(增若驛)[군북면]이 있었고 고려사 청산현에서 역참과 관련된 시설은 딱히 확인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시대 역원인 오곤원(吾昆院)이 주목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오곤원은 청산현 읍치 기준으로 서쪽 8리에 있었으며 명문기와가 출토된 이성산성도 서쪽 8리에 있었다고 한다.정요근(2020) 즉 이성산성과 함께 오곤원은 지금의 청성면 산계리에 있었다.정요근(2020)
조선 전기에 청산현은 오곤원 외의 역원으로 서쪽 19리에 은천원(銀川院), 북쪽 72리에 주성원(酒城院)이 있었다. 하지만 은천과 주성의 토성에 박씨는 찾을 수 없다. 따라서 박모는 청산현의 재지 세력으로서 오곤원 자리에 있었던 역참을 관장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앞서 진천 은암리 유적은 문헌 기록에 나오지 않으나 조선시대 역원의 위치에 부합하는 중소 규모의 역원 시설로 이해되고 있다. 고려 후기에 참주 박모가 관리한 역참 역시 유사한 성격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역은 외곽 지역에 위치하여 연료 확보가 수월하고 완제품을 소비지로 운반하는 데 편리한 조건을 갖추었으므로 일부는 기와의 제작과 유통을 담당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성산성에서 참주 관련 명문 기와가 출토된 배경으로는 역의 기와 생산이 먼저 생각되는데, 이외에도 이성산성이 역참으로 기능했거나 참주가 이성산성을 관장했다는 등 다양한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먼저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사원 유적의 경우 사원명 기와를 통해 폐사지의 본명으로 추정되는 사례, 청주와 충주의 최근 출토 사례 등을 살펴보았다. 다음은 원관 사찰의 사례로 단양 용부원리사지와 증평 미암리 유적, 그리고 중소 규모의 역원 시설로 추정되는 진천 은암리 유적을 다루었다. 또한 역원과 관련하여 올해 출토된 연우 원년명 기와의 명문 내용을 검토하였다.
Ⅳ. 맺음말
이상과 같이 지금까지 발간된 유적 및 유물 관련 자료를 바탕으로 충북지역에서 보고된 고려시대 명문기와의 현황을 정리하고 연호와 유적 성격에 따라 주요 내용을 검토하였다. 이는 시대사와 지역사 연구 등에 명문기와가 활용될 수 있도록 기반을 제공하기 위한 목적을 지닌다. 다만 필자가 논문을 집필하면서 혹여 아래와 같은 사항을 부득이 빠뜨렸을 수 있으므로 유의할 필요가 있다.
기와의 명문을 사료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실물 판독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그러나 방대한 자료를 정리하면서 유물이 있는 곳을 일일이 찾아가 확인할 수 없다 보니 사진으로 대신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일부는 판독이 제대로 되지 않았거나 오독을 그대로 가져온 경우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도표에 고려가 아닌 다른 시기의 것이 수록되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다. 명문기와는 온전한 형태보다 문양이나 양식을 감별하기 어려운 파편 상태로 출토되는 것이 많으며, 도심지는 오래전부터 건축이 반복되어 유구와 유물의 교란이 일어나 다양한 시기의 명문기와가 뒤섞이기도 한다. 특히 기와는 소재 특성상 사용 기간이 길어서 재사용을 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역사학이 절감하고 있는 문헌자료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자료의 활용이 요구되며, 인접 학문인 고고학 자료는 유용한 연구 수단이 되기에 충분하다. 고대사만큼은 아니지만 중세사 연구에 발굴 성과가 이용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간 명문기와는 전국적으로 상당한 수량이 축적되었을 뿐 아니라 앞으로 발굴 조사를 통해 계속 추가되고 연구될 것이다. 이에 비해 문헌사 연구에서 명문기와는 단편적으로 이용되거나 보조적 수단에 머물러 있다. 충북만 놓고 보아도 유적을 설명하기 위한 용도를 제외하면 지역사 연구에서 명문기와의 활용도는 결코 높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향후 명문기와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나가는 한편, 다양한 접근 방식을 통해 각종 연구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