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등교과 동국사략』의 동학농민전쟁 이후 서술과 의병인식
Narrative and Perception of Righteous Army after the Donghak Peasant War in Jungdeung-gyogwa Dongguk-saryak
1 한남대학교
1 Hannam University
DOI: https://doi.org/10.71244/jojm.2025.35.367
초록
본고는 대한제국기 중등 역사교과서인 『중등교과 동국사략(中等敎科 東國史略)』을 대상으로, 동학농민전쟁 이후 당대사 서술의 전개 양상과 그 속에 투영된 의병 인식을 분석하였다. 현채(玄采)가 저술한 본서는 통감부 시기에 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적 역사 개설서로서 당대의 역사 인식과 교육적 지향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핵심 자료이다. 본고는 특히 1908년 7월에 발행된 제3판을 중심으로, 동학농민전쟁부터 청일전쟁, 을미사변, 을사늑약, 헤이그 특사 사건, 그리고 1907년의 정미의병에 이르는 시기별 서술을 검토하였다. 『중등교과 동국사략』 초기에는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의 원인을 조선 정부의 부패와 무능으로 규정하였으며, 일본의 개입을 조선의 개혁과 독립을 지원하는 문명개화적·자강론적 관점에서 기술하였다. 이는 박은식을 비롯한 자강운동 계열의 초기 인식과 맥락을 같이한다. 그러나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국권 침탈이 노골화됨에 따라 서술 기조는 비판적으로 선회하였으며, 일제의 강압적인 정책 수행과 주권 침탈 과정이 보다 상세하고 비판적으로 서술되었다. 의병에 대한 인식 또한 시기에 따라 분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을미의병에 대한 서술은 거의 없는 반면, 을사늑약 이후 전직 관료와 해산 군인이 주도한 의병 운동에 대해서는 국권 회복을 위한 저항으로서 일정 부분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다만, 1907년 의병전쟁 서술에서는 ‘의병’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회피하고 ‘병민(兵民)’, ‘해도(海徒)’, ‘폭도(暴도)’ 등의 용어를 혼용하였다. 이는 무장투쟁에 대한 일정한 거리두기와 함께, 실력양성을 강조하는 자강론적 인식이 여전히 기저에 작용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결론적으로 『중등교과 동국사략』의 동학농민전쟁 이후 서술은 일본의 침략이 심화됨에 따라 비판적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주며, 의병운동 역시 단순한 무장봉기보다는 국권회복을 위한 조직적 저항이라는 관점에서 제한적으로 재구성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Abstract
This study analyzes the development of the narrative of contemporary history after the Donghak Peasant War and the perception of the Righteous Army reflected in it, focusing on "Jungdeung-gyogwa Dongguk-saryak," a secondary school history textbook during the Korean Empire. Although this book, written by Hyeon Chae, was published during the Residency-General period, it is a key resource that intensively shows the historical perception and educational orientation of the time as a modern historical introductory book. This paper examines the chronological descriptions from the Donghak Peasant War to the Sino-Japanese War, the Eulmi Incident, the Eulsa Treaty, the Hague Secret Envoy Incident, and the Jeongmi Righteous Army in 1907, focusing on the third edition published in July 1908. In the early stages of the textbook, the causes of the Donghak Peasant War and the Sino-Japanese War were defined as the corruption and incompetence of the Joseon government, and Japan's intervention was described from a civilization-enlightenment and self-strengthening perspective. However, as Japan's deprivation of national sovereignty became overt after the Eulsa Treaty, the narrative tone shifted critically. The perception of the Righteous Army also showed a pattern of differentiation over time. While there is almost no description of the Eulmi Righteous Army, historical significance was given to the Righteous Army movement led by former officials and disbanded soldiers after the Eulsa Treaty. However, in the description of the 1907 Righteous Army War, direct expressions such as 'Righteous Army' were avoided, and terms like 'soldier-civilians', 'island bandits', and 'rioters' were used interchangeably. In conclusion, the narrative after the Donghak Peasant War in "Jungdeung-gyogwa Dongguk-saryak" shows a process of critical transition as Japanese aggression intensified.
Ⅰ. 머리말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사회는 근대 개혁을 추진하는 동시에 열강의 침략에서 자주권을 유지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에 당대 상황을 인식하고 개혁을 추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이들을 중심으로 개혁운동이 진행되었다. 갑신정변, 갑오개혁, 동학농민전쟁 등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개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들 외에도 당대를 기록하여 후대에 남기고자 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남긴 기록으로 우리는 그 시대를 이해하고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기록들은 기록을 남긴 사람의 현실 인식, 관점 등에 따라 동일한 사건이라도 다르게 서술될 수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역사교과서는 역사 연구 등을 통해 규명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사전에 설정된 교육 목적에 부합하도록 내용을 선택 정리하여 제작된 교육용이라는 점에서 당시 보편적인 역사인식과 함께 교육정책의 일단을 볼 수 있다1). 그런 측면에서 대한제국기 역사교과서에 서술된 대한제국기 의병에 대한 서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의병은 일제의 침략에 맞선 직접적인 무력 항쟁이고, 통감부의 검열과 지식인의 자강론적 시각과 부딪히고 있기 때문이다. 즉, 통감부의 검열과 지식인의 부정적 인식 속에서 무장독립운동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의병에 대한 서술을 통해 무장투쟁에 대한 인식과 역사교과서 서술의 방향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발간 역사교과서, 독립운동 세력 발간 역사교과서 등에서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서술의 흐름과 계통을 이해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대한제국기 역사교과서에 수록된 의병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은 없었다2).
따라서 최초의 근대적인 역사 개설서라고 평가받는 『중등교과 동국사략(中等敎科 東國史略)』을 그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중등교과 동국사략』은 학부 주사 등을 역임한 현채(玄采)가 저술하였다. 현채는 대표적인 역관(譯官) 가문인 천녕현씨(川寧玄氏) 가문에서 1856년에 태어났다. 1873년 식년시 역과(譯科)의 한학(漢學)에 3위로 급제한 이후 1892년 부산항감리서 역학, 번역관, 1894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 1895년 관립외국어학교 부교관, 한성사범학교 부교관, 1899년 학부 편집국 위원, 1907년 학부 주사 및 보좌원 등으로 근무하였다. 그 과정에서 1899년에는 학교용 국사교과서인 동국역사(東國歷史) 를 편찬하였다3). 또한 1900년 장지연과 함께 시사총보사를 광문사로 개칭한 후 목민심서(牧民心書) (1901년 간행), 흠흠신서(欽欽新書) (1901년 간행) 등 정약용의 저서를 간행하였으며, 1906년에는 동국사략(東國史略) 을 발간하였다. 1907년 학부에서 해임된 후에도 유년필독(幼年必讀) (1907년 간행), 동서양역사(東西洋歷史) (1907년 간행), 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 (1906년 간행) 등 수많은 역사·지리서를 간행하였다. 즉, 현채는 관료이면서 번역가, 교과서 집필자, 역사가로 폭넓게 활동한 인물이었다. 특히, 학부 관료로 있으면서 다수의 역사교과서 집필에 관여하였기에 당시 역사교과서 서술 및 제작에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중등교과 동국사략 은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의 조선사(朝鮮史) (1892년), 조선근세사(朝鮮近세史) (1901년)를 번역한 것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지만4) 한국인이 신사체로 저술한 최초의 한국사 통사이자 교과서로 한국사 서술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한 저술로 평가되고 있다5). 즉, 근대적 역사서술로 근대민족국가 수립과정에서 국민을 양성하기 위한 도구로 제작된 근대적 역사서술의 선구로 인식되고 있다6). 그런 측면에서 중등교과 동국사략 은 당대 역사교과서 서술 및 제작의 전문가인 현채가 서술한 근대적 역사서술의 선구적인 교과서로 볼 수 있다.
한편, 중등교과 동국사략 의 판권을 보면 1906년 6월 10일 초판이 제작된 것으로 되었고, 현채가 학부에서 해직된 다음인 1907년 11월 20일에 재판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로 볼 때 초판은 학부에서 제작 간행한 동국사략 이고, 중등교과 동국사략 은 초판본에 ‘을사신조약(乙巳新條約)’, ‘해아사건 및 선양(海牙事件及禪讓)’, ‘결론’을 추가하여 발행한 2판본에 해당하는 것이다. 중등교과 동국사략 이라고 한 것은 현채가 1907년 1월 학부에서 해직된 후 발행된 것이기에 동국사략 과 구분한 것으로 보여진다7). 이후 1908년 7월에 3판본이 출판되었다. 따라서 중등교과 동국사략 이 조선사 , 조선근세사 를 편역하였다고 하더라도 초판에 없던 ‘을사신조약’, ‘해아사건 및 선양’, ‘결론’의 서술은 현채의 인식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그가 저술한 역사저술 중 월남망국사 , 동국사략 , 유년필독 , 유년필독석의(幼年必讀釋義) 등은 1909년 5월 5일 관보 「內部告示27호」8) 통감부의 「출판법」에 의해 압수된 7종에 들어가 있으며, 당시 대성학교 등 여러 학교에서 교과서로 사용되고 있었다.9) 그렇게 본다면 『중등교과 동국사략』의 의병에 대한 서술은 현채의 인식도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본고는 1907년 8월 1일 군대해산을 계기로 의병전쟁이 전국적으로 확대된 후인 1908년 7월에 제작된 『중등교과 동국사략』 3판본을 중심으로 의병서술의 변화를 파악하고자 한다. 특히,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 이후 서술부터 분석하고자 한다. 이는 하야시의 『조선사』, 『조선근세사』를 편역했다는 초판본에서 일본의 본격적인 침략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동학농민전쟁, 청일전쟁 등에 대한 서술의 경향성을 파악하고 이후 현채가 추가한 ‘을사신조약’, ‘해아사건 및 선양’, ‘결론’ 등에서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추적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변화 속에서 서술된 의병운동에 대한 내용을 분석하여 『중등교과 동국사략』의 의병운동에 대한 서술 방향과 교과서에 담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해 보도록 하겠다. 이와 함께 통감부 시기라는 시대적 한계 속에서 당시 교과서에서 의병을 어떻게 표현했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Ⅱ. 동학농민전쟁 이후 당대사 서술과 인식
1.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에 대한 서술과 인식
일본의 조선침략이 본격화되는 시점은 동학농민전쟁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동아시아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동학농민전쟁을 계기로 청일전쟁을 일으켰지만, 대외적으로는 청으로부터 조선의 자주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서라고 선전하였으며, 조선의 관료나 개화파 일부에서도 이러한 일본의 선전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후 계몽운동 세력은 일본이 청일전쟁을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는 전쟁이었다고 선전하고 있던 점을 들어 일본이 ‘한국의 독립 보장’ 약속을 어기고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하고 있다고 문제 삼기도 하였다. 그런 측면에서 『중등교과 동국사략』에서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을 어떻게 서술하는지 살펴보는 것은, 『중등교과 동국사략』 2판본에 추가된 ‘을사신조약’, ‘해아사건 및 선양’, ‘결론’의 서술과 비교하여 서술 방향의 추이를 이해할 수 있다. 또한 하야시의 『조선사』, 『조선근세사』를 번역했다는 한계를 넘어서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파악할 수 있다. 『중등교과 동국사략』은 동학농민전쟁에 대해 에 따라 발매와 반포를 금지하였다(『관보』 제4310호, 융희3년(1909년) 2월 26일).
9) 조동걸 外, 1994, 40~41쪽.
此時를 當하야 전라도에 東學黨의 亂이 起하니 東學黨은 四十年前부터 一派가 團結하더니 今에 至하야는 國政이 日非하고 貪官汚吏가 專橫하며 外勢가 또 侵入하는지라 이에 크게 擧事코자 하니 亂民이 附和하여 形勢가 더욱 盛하거늘 洪啟薰으로 하여금 兩湖招討使를 拜하여 討伐하다가 不克하고 全州가 陷沒하는지라10
라고 서술하고 있다. 즉, 동학농민전쟁은 조선정부의 부정부패와 외세의 침략에 의해 일어났으며, 홍계훈이 양호초토사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고자 하였으나 토벌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학농민군이 전주까지 함락하였다고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은 동학농민군의 봉기원인을 조선 정부의 부패에 두고 서울에서 파견한 중앙군이 동학농민군에게 패하여 전주성까지 함락되는 무능을 서술함으로써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의 『조선사』를 번역했다는 한계에서 보이는 것일 수 있지만, 현채가 가지고 있는 역사 인식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중등교과 동국사략』 결론에서도 서술하였듯이 ‘관리의 탐학과 폭정’11을 바로 잡아야 할 구습으로 보고 있었다. 현채는 문명개화, 국권회복을 하기 위해서는 구습을 바로잡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인식하고 있었고, 인민을 개명(開明)한 사람이 되도록 교육하는 것이 실력양성과 자강의 시작이라고 믿고 있었다.12 그러한 인식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동학농민전쟁의 전개과정, 농민군들의 요구사항, 조선 정부의 대책 등에 대해서는 서술되어 있지 않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하지 못한 조선 정부가 청국에 원병을 청하고 청국군이 조선의 아산만으로 출병하면서 출병 사실을 일본에 ‘속국조선(屬國朝鮮)에 내란이 있어 그 청에 따라 군대를 동원한다’고 통지하였고 이에 일본은 ‘조선은 청(淸)의 속국(屬國)이 아니라 하고 일본(日本)이 또한 조선(朝鮮)에 출병(出兵)’하였다는 내용으로 이어져 있다.13 이러한 서술은 일본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는 것으로 동학농민군의 활동보다는 청국군의 출병과 그들이 조선에 취하고 있던 전근대적 인식 속에서 조선의 독립을 부정하는 속국을 강조하고 있었다. 이에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고 있으며, 조선 정부의 개혁과 조선의 독립을 지원하기 위해 출병하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는 다음의 서술에서도 확인된다.
大抵 東學黨이 起함은 弊政의 緣故라 萬一 其弊政을 革新치 아니하면 禍亂이 不絶할지라 이에 日本이 淸國을 勸하여 朝鮮의 內政을 改革코자 하니 淸國이 不聽하거늘 日本公使 大鳥圭介가 改革案五條를 朝鮮에 勸告하니 朝廷의 議論이 紛紜하더니 旣而오 陛下께서 校正廳을 宮中에 設하시고 領議政 沈舜澤과 左議政 趙秉世 等으로써 總裁를 拜하고 堂上十數人을 置하고 外戚諸臣을 罷職하여 改革의 端緖가 始開하더니 然이나 李鴻章, 袁世凱가 從中指示함을 因하여 局面이 猝變하고 日兵이 撤回키를 求하니 이에 日本이 獨力으로 不持할 策을 決하고 直히 兵力으로 宮內에 闌入하고 大鳥圭介가 日本의 本意를 奏達하니 袁世凱가 形勢의 漸非함을 알고 本國으로 逃回하고 外戚도 다 逃亡하거늘 이에 大院君이 內外政務를 專管할 때 軍國機務所를 設하고 右議政 金弘集은 總裁가 되어 弊政改革에 從事하고14
일본은 조선 정부의 폐정개혁을 위해 청국에 함께 내정을 개혁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청국은 듣지 않았고, 일본공사가 단독으로 개혁안 5개 조항을 조선 정부에 권고하니 조선 조정의 논의가 혼란스럽더니 얼마 지나 교정청을 궁중에 설치하고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청국의 이홍장(李鴻章),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지휘하여 국면이 바뀌고 일본군의 철군까지 요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은 조선 정부의 폐정개혁을 위한 일본의 권고가 있은 후 교정청이 설치되어 개혁이 실시되었지만 청국이 조선에서 개혁을 반대하고 오히려 일본군의 철수까지 요구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서술은 일본은 조선 정부의 폐정개혁을 권고하고 지지하는 세력이고 청국은 구습을 유지하는 세력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서술은 일본의 경복궁 점령도 일본이 청국의 내정간섭과 외척의 횡포를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진행된 것이라고까지 하고 있다. 그 결과 위안스카이와 외척을 내쫓고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폐정개혁을 진행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서술은 청일전쟁에서 청국군은 침략군, 일본군은 응원군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하는 것이었다. 청일전쟁의 과정도 일본군의 승전 위주로 서술하고 있으며,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가고 있지만 조선 정부는 여전히 붕당의 알력과 폐정으로 개혁하지 못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는 이어 서술하고 있는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으로써 전권공사로 임명되어 내무대신 박영효(朴泳孝)를 통해 개혁을 추진하였음을 강조하기 위한 서술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청전쟁은 전(全)혀 한국독립을 부식(扶植)고자 함이라 고로 한국도 일본의 의(義)를 감동하더니’15 라고 하여 청일전쟁이 한국의 독립을 위한 전쟁이었다는 평가가 내려지도록 서술되었다. 즉, 청일전쟁의 강화로 조선의 독립국이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일련의 서술이 조선의 독립과 개혁을 위해 싸운 일본으로 이뤄져 있다.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서술은 그 원인을 조선 정부의 부정부패로 보고 이를 개혁하는 것인 근본적으로 필요하였으나 청국은 개혁에 반대하고 일본은 개혁을 권고하여 궁극적으로 조선이 독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는 것이다. 청일전쟁도 그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고 이를 통해 조선의 독립을 가져왔다는 서술로 일본의 입장이 반영된 서술인 동시에 당시 현채가 가지고 있던 청국의 간섭에서 벗어나 문명개화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인식이 함께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명성황후시해사건과 을미의병에 대한 서술과 인식
을미의병의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였던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해 『중등교과 동국사략』에는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지 않다. 그렇기에 을미의병에 대한 서술도 거의 없다. 다만 부록인 ‘부(附) 갑오(甲午) 후 10년 기사’에서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 ‘부(附) 갑오(甲午) 후 10년 기사’는 하야시의 『조선사』·『조선근세사』에 없는 내용으로 현채가 서술한 것이다. 따라서 당시 현채의 인식을 파악할 수 있다.
명성황후시해사건에 대한 서술은 청일전쟁에 대한 감사함에서 시작한다. 즉, 청일전쟁16은 한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이 싸운 것이고 그 의(義)에 대해 한국이 감동하였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이 의외로 간섭이 과도하고 권고가 각려(刻勵)해서 정무에 대한 간섭, 제도·법률 등에 대한 개혁을 한 번에 일시에 행함으로써 한국의 감정을 속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결국 배일당(排日黨)을 형성하게 만들었고, 이 배일당은 당시 한반도로 세력을 확장하고자 하고 있던 러시아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러시아 공사 베베르(Karl Ivanovich Weber)와 상통(相通)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일본이 미우라 고로(三浦梧楼)를 한국으로 보내 명성황후시해사건을 일으키고 이것으로 인해 한국 정부의 원한이 깊어지고 일본이 일대오욕(一大汚辱)을 스스로 취한 것이라고 하였다.17
이는 동학농민전쟁, 청일전쟁의 서술과 비교할 때 서술에 변화가 나타난 것이다. 즉, 청일전쟁을 한국의 독립전쟁으로 인식하여 감사한 마음도 있지만 일본이 한국의 문명개화를 지원하는 것을 넘어 과도한 간섭을 하더니 급기야 명성황후시해사건을 일으켜 일본 스스로가 배일당을 만들게 했다는 비판적 서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1906년 『중등교과 동국사략』의 초판이 간행된 것을 생각하면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 불편한 감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통감부시기 간행된 교과서라는 한계로 명성황후시해사건에서 나타난 일본의 침략성은 서술하지 못하지만 일본의 침략성을 배일당의 형성이라는 것으로 최소한 서술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와 단발령 반대를 기치로 내세웠던 의병운동에 대해서 서술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유학적 전통을 계승하고 신학을 수용하며, 의뢰(依賴)를 경계하여 자강을 통해 국권을 회복할 수 있다는 현채의 인식이 반영된 것이다.18 즉, 위정척사사상을 바탕으로 신학의 수용을 거부하고 의병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전통유학자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3. 아관파천에서 을사의병까지에 대한 서술과 인식
『중등교과 동국사략』의 ‘부(附) 갑오(甲午) 후 10년 기사’는 아관파천 이후 한국에서 벌어진 일본과 러시아의 각축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아관파천 이후 모든 권력이 러시아 공사 베베르에게 귀속되었고, 일본은 러시아의 압박을 받게 되었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일본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Nikolay) 2세의 대관식을 계기로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 러시아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에서 러일협상(日露協商)을 진행하여 전쟁을 피하고 외교적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한국에서 일본 군제를 폐지하고 영국인 재정고문 브라운(柏卓安)을 해고시켰으며, 재정경제기관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이에 러시아를 반대하는 미국파가 나타나고 독립협회가 결성되어 법령, 군대, 재정을 한국이 자주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국내외 큰 동정과 관심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에 러시아는 더 이상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19 특징적인 것은 아관파천 이후 국내의 상황을 서술하기 보다는 일본과 러시아의 협상을 중심으로 당시 국제 관계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문명개화, 자강의 측면에서 국제사회의 변동에 대해 이해하고 있어야 하고 이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정척사사상을 바탕으로 의병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보수유학자들의 활동은 그다지 관심거리가 되지 못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국제사회의 변동에 대응하여 독립협회의 활동이 자강의 측면에서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물리쳤다는 것에서 성공적이었음을 부각하고 있다. 독립협회의 활동을 대표적인 자강 활동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중등교과 동국사략』이 서술되고 있었기에 이후 만주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던 국제사회의 각축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러시아가 요동반도를 차지하여 여순(旅順), 대련만(大連灣)을 조차하고 동청철도(東淸鐵道)를 부설하고 만주에 출병하여 점거하는 등 만주의 이권을 독점하려고 하다가 일본, 영국, 미국,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독일이 다 청국을 압박하여 러시아와의 약속을 파괴하도록 하고, 일본이 전쟁 준비를 하니 러시아가 청국과의 조약을 철회하였다고 서술하였다. 또한 영일동맹에 대해서도 ‘그후 임인(壬寅)에 일본, 영국 양국이 동맹을 맺고 시국이 일변하니 그 조약은 곧 청한(淸韓) 양국의 독립을 인(認)하여 전연(全然)히 침략지 아니한다 함이오 이는 러시아가 만주서 자유망동치 못하게 함이라’20 라고 하여 한국과 청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만주에 대한 러시아의 침략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일본의 동아시아 정책이 한국의 독립을 보존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평가를 내리도록 서술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서술 방향은 러시아·프랑스 동맹, 만주에서의 군비증강, 용암포사건 등 일련의 사건들을 서술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21 이는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을 통해 러시아의 침략성을 강조하고 일본이 한국과 청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할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침략을 막아 동아시아의 안정을 추구하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영일동맹도 그런 차원에 진행된 것이라고 서술한다. 당시 러시아의 남하에서 비롯된 국제사회의 긴박함을 일본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서술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일본의 입장에서 서술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동아시아 최대의 위협이라고 할 수 있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독립협회의 활동이 유효했다는 인식 속에서 서술된 측면도 있다고 하겠다.
한편, 을사조약 이후 본격화되는 일본의 침략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다. 특히, 을사조약이 체결되는 과정에서 일본군의 무력시위가 있었던 것, 고종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대화, 내각회의에서 을사조약에 대한 찬반, 조약의 내용 등 그 과정을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에 전국적으로 분노하고 통곡하였다고, 민영환(閔泳煥)의 자결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또한 통감부의 설치과정, 일본에 의해 어업권, 철도 및 통신기관 장악, 하천 운행 등 한국을 점령해 가는 과정도 서술하였다.22 이는 현채가 1907년 1월 학부에서 나온 이후 비교적 집필의 자율성을 확보한 상황에서 을사조약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침략성을 확인한 이후 작성한 것이다. 러일전쟁으로 러시아가 한국에서 정치적으로 멀어지게 되고 일본이 식민지화 정책을 추진하는 상황에서 자강으로 극복해야 할 대상은 일본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침략과정을 비교적 상세히 서술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두어 내정을 장악해가는 과정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지만 결국 그것은 한국 정부가 개혁하지 못해 일어난 것이라고 하는 사회진화론적 인식 속에서 서술하고 있었다. 이러한 서술은 다른 한편으로는 자강의 필요성을 강조한 서술이라고도 할 수 있다. 대구의 국채보상운동을 소개하고 그 의의를 높이 평가하면서 차관을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23 타국에 의뢰하지 않고 실력을 양성하여 자강하는 것을 강조하는 서술이었다. 의병운동에 대한 인식도 이러한 시각에서 나오고 있었다. 즉, 실력도 쌓이지 않은 상태에서 의병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무모한 것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을사조약 이후 서술에서 홍주의병, 최익현 의병장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는 중등교과 동국사략 에서 의병운동에 대한 첫 서술이었다. 더욱이 전참판(前參判) 민종식(閔宗植)이 의병장이 되어 홍주성을 점령하고 일본군과 교전한 사실을 그대로 서술하고 있었다. 또한 전참정(前贊政) 최익현(崔益鉉)이 의병을 일으키려다 체포되어 일본 대마도(對馬島)에서 단식하며 저항하다 아사(餓死)한 사실도 서술하고 있다.24 이를 통해 의병운동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전까지 위정척사사상을 바탕으로 보수유생들의 의병운동에 대해서는 자강에 비춰 불필요한 것으로 보고 있었다면, 을사조약 이후 전직 관료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홍주의병, 최익현 의병장의 활동은 일본의 국권침탈에 대항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활동으로 인식한 것이다. 을미의병과 을사의병에 대한 인식이 다른 것이었고, 을사조약 이후 자강으로 극복해야 할 대상이 일본이 된 시점에서 의병운동의 서술은 전직 관료 중심의 국권회복운동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던 것이다.
4. 헤이그특사사건에 대한 서술과 인식
중등교과 동국사략 의 특징 중 하나는 헤이그특사사건을 시작으로 고종의 강제퇴위까지 전 과정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술 방식도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대한제국 입장에서 서술되어 있다. 서술 내용상 특히 주목되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첫째는 헤이그에서 한국파견위원들의 독립청원에 대한 내용을 상세히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의 자주함은 1884년 각국이 공인하였는데, 1905년 11월 17일 이후 일본인이 무력으로 한국을 압박하여 그 고유한 각국 교섭 권리를 찬탈한지라 고로 지금에 특히 일본의 술책과 한국의 일절 법률 정권을 파괴한 일을 3개조로 작성하여 근정한다. 하나는 일절 정사를 일본이 한국 조정의 승낙을 기다리지 않고 마음대로 시행하였으며, 둘은 일본이 해군 세력을 의지하여 한국을 반대하며, 셋은 일본이 한국의 일절 법률풍습을 파괴하였으니, 일본이 공법 위배함을 알지라 한국이 이미 자주한 땅에 어찌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의 국제교섭을 간여하여 원동평화국면을 진탕하리오, 오직 일본이 한국의 국제교섭권을 무너뜨림으로써 황제의 전권사명이 있어도 그 회에 참여치 못하니 이는 우리 사신들의 깊은 탄식이로다. 귀 총통은 이 일에 특별히 마음을 두어 한국이 국제교섭의 권리를 방기함이 한국의 본의가 아니고 일본이 압제한 고로 사신들이 귀 총통 앞에 하소연 하오니 약한자를 도와주어 사신들로 하여금 만국평화공회에 참여하여 일본의 한국에서 일절 행하고 있는 것을 알리면 깊이 행복하리오다.25
대한제국이 자주국가라는 것은 이미 1884년에 각국이 공인한 사항인데, 일본이 무력을 통해 한국 고유의 교섭 권리를 찬탈하는 을사조약을 체결했다고 하여 을사조약의 강제성과 불법성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통감부의 통제 속에서 수록되기 힘든 일본의 불법성을 고발하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는 것은 당시 현채가 국권회복운동으로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고자 했던 헤이그특사사건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꼭 기록하여 알려야 할 것으로 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25 두 번째로 주목되는 것은 헤이그특사사건에 대한 일본의 처리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것이다. 먼저, 한국의 특사인 이위종이 국제협회에서 공개연설하여 을사조약은 황제가 조인하지 않은 것임을 지적하면서 한국은 일본에 외교권을 위임한 사실이 없고 일본이 보호정책을 행한다는 것은 불가하다고 한 것을 서술하여 일본의 불법성과 한국의 독립성을 강조한 서술을 하고 있다. 이어 일본정우회(日本政友會)에서 헤이그특사사건으로 처리할 일을 심의하고, 유흥회(猶興會)에서 헤이그특사사건의 근본을 일소할 일로 이토 히로부미에 전보하고 위원 3명이 한국으로 파견되고, 일본외무대신 하야시 다다스(林董)이 파견되는 과정을 서술하였다.26 일본이 전방위적으로 한국을 압박하고 있으며 향후 한국의 국권침탈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 서술이었다. 바로 이어진 다음의 서술을 통해 일본의 대한방침과 이를 통한 국권침탈을 명확히 서술하였다.
(7월)15일에는 일본 외부대신 하야시 다다스(林董)가 한국으로 넘어간다 하는데 일본 각 당국자의 말에 의하면, 이 일이 한국이 열강 앞에서 일본을 능욕하였다 하고, 또 말하길 이 일은 선양(禪讓)하는 것이 가(可)하다 하고, 또 말하길 한국 황제가 일본으로 넘어와 사과하는 것이 가(可)하며, 이상 책임은 한국 내각을 총사직케하고 이후 내각은 일본인으로 조직하여 모든 정무를 일본인 수중에 넣는 것이 마땅하며, 또 군부와 징병령을 폐지하여 외교사무와 같이 일본 육군성에서 관장하고 궁내(宮內), 탁지(度支) 양 대신을 택하여 궁중을 감독할지라 이는 일본의 대한정책의 제일의 호기회니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한국은 일본의 골칫거리가 되어 사단이 속출하리라 하더니27
(7월)18일에는 내각대신 8명이 헤이그특사사건(海牙事件)으로 곤란을 면할 방책으로 一은 광무 9년 11월 17일 신약(新約, 을사조약)에 어새(御璽)를 찍을 일, 二는 황제의 섭정을 추천할 일, 三은 황제께서 도쿄(東京)에 친행(親幸)하사 일황(日皇)께 사과할 일28
『중등교과 동국사략』에 서술된 위 두 내용은 일본의 대한방침이면서 일본이 이완용, 송병준 등을 통해 고종을 협박했던 내용이었다. 헤이그특사사건 처리과정에서 고종의 강제퇴위와 일본의 대한제국 내각을 장악하는 과정을 그대로 서술한 것이다. 이러한 서술은 일본의 침략으로 국권침탈이 심각해지는 상황에 대한 위기의식이 반영된 것으로 자강과 국권회복을 강조한 현채의 인식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였다.29 일본의 과도한 침략에 대한 저항을 담고 있는 것으로 역사교과서를 통해 저항 의식을 높이고자 한 의도도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이준(李儁) 열사의 죽음에 대한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중등교과 동국사략』에 서술된 이준 열사의 죽음은 다음과 같다.
도쿄(東京) 전보에 의하면 해아부(海牙府)에서 한원(韓員) 이준(李儁)이 충분(忠憤)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하고 만국(萬國) 사신전(使臣前) 열혈(熱血)을 일쇄(一灑)하야 만국(萬國)이 경동(驚動)케 하였다고 한다.30
이러한 서술 내용은 실제 이준의 죽음과는 맞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준의 죽음에 대해 『중등교과 동국사략』의 서술과 같이 이해하고 있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서도 ‘이준은 분통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할복(割腹)한 후 그 피를 한 줌 쥐어 그들이 앉은 자리에 뿌리며 “이렇게 해도 믿지 못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 피는 뚝뚝 떨어지고 그는 이미 땅으로 쓰러졌다.’31라고 서술하고 있다. 『대한매일신보』에서는 ‘吾가 血氣男兒로 韓國에 復生야 與我靑年同胞로 韓國獨立挽回기 上天에 控訴리로다 고 言畢에 別世지라 當時 目擊 列國紳士와 各國報舘과 新聞記者와 其他聞者가 含淚嗟嘆치 아니 者가 無얏도다’32라고 하여 이준의 죽음을 두루뭉술하게 서술하고 있다. 한편, 일본은 이준의 죽음에 대해 ‘한국인 이준의 얼굴에 있는 종양을 수술한 결과 독이 퍼져 이들 전에 사망하였다(韓人 李儁顔ノ腫物ヲ切リタル結果円독ニ罹リ一昨日死亡)’33 라고 하여 병사로 보고 있었으며, ‘자살이라는 소문을 내는 사람이 있지만, 앞서 언급한 사실은 점차 세상에 알려질 것이라고 믿는다(自殺トノ風說ヲナスモノアレト前記ノ事實ハ漸次世上ニ判明スヘシト信ス)’34 라고 하여 자살로 소문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실이 점차 판명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서 보면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준의 죽음을 자결로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1920년대 『독립신문』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1920년 5월 8일 『독립신문』, 「의병전」(5)에 이준의 죽음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그 내용은 ‘紀元四二四〇年에 密使 李相卨, 李儁, 李瑋鍾 三人이 海牙平和會에 派往되야섯는데 畢竟李儁은 忠憤을 不勝하야 割腹自裁하다 그 결과, 倭統監伊藤輩는 此機를 不可失이라 하야’35이다. 『중등교과 동국사략』에 서술된 이준의 죽음은 자강의 측면에서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고자 한 활동에 대한 평가이면서 의로움으로 연결된 것이었다. 당시 현채를 비롯한 애국계몽운동 계열의 인식을 반영한 것일 뿐만 아니라 당대 사람들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등교과 동국사략』의 서술방향과 현채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시기 서술에 주목해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증등교과 동국사략 에서는 이준의 죽음을 통해 다시금 독립 의지를 다지고 확산하고자 하는 의도가 들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Ⅲ. 1907년 의병전쟁에 대한 서술과 인식
1907년 의병전쟁은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군 해산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군대가 해산을 거부하고 일본군과 전투를 시작한 것을 의병전쟁의 출발로 보는 것이다. 군인이 의병에 참여함으로써 의병운동의 성격을 전쟁으로 확대시켰다는 것이다. 그만큼 군대해산은 의병전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사건인데, 『중등교과 동국사략』은 군대해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7월)30일 各大臣이 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 等과 會議하고 韓國軍隊를 解散할새 其中一隊만 存置하고 各隊를 解散하니 第一大隊長 朴星煥(朴昇煥)이 一塲痛哭한 後 自刎하야 死하니 其部下 兵士가 大驚하야 日兵과 開戰하고 其他兵士도 營門을 閉하고 日兵을 防禦하더라 先是에 日人이 韓兵을 解散코자 할새 各將官을 招致하야 其部兵을 訓鍊院에 率集하라하고 軍械를 奪하고 其空營한 時를 乘하야 其營을 奪하더니 朴星煥의 死함을 聞하고 兵卒이 비로소 解隊함을 知하고 擧皆奮激하야 爭鬪에 至하는지라36)
군대해산에 저항하여 시위대 제1대대장 박성환(朴星煥, 본명 朴昇煥) 참령이 자결하고, 그 부대원이 일본군과 전투를 개시하고 다른 병영의 군사들도 일본군을 방어하였다는 것을 서술하고 있다. 즉, 군대해산이 원인이 되어 박승환 참령이 자결하고 이후 서울 주둔 시위대가 봉기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하고 있었던 상황에 대해 비교적 정확하게 서술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박승환 참령으로 알려져 있는 시위 제1대대장 이름이 ‘박성환’으로 기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교지(敎旨)』 등 국가에서 제작한 문서에는 ‘박승환’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37) 박성환이라고 기재한 것은 정부의 공식문서를 통해 작성한 것은 아니라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박성환’이라는 이름은 무엇을 참고해서 작성한 것인가를 생각하면 우선적으로 당시 신문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당시 『대한매일신(大韓每日申報)』, 미주에서 발행된 『공립신보』 등에서 ‘박성환’으로 작성한 것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38)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등을 참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현채가 『중등교과 동국사략』을 저술하면서 신문 등 일반적으로 수집 가능한 자료를 참고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도 ‘朴星煥 死’39)이라고 하여 서술하고 있고, 김윤식의 『속음청사(續陰晴史)』에서도 ‘八月一日二十三日壬午軍隊解散西小門의韓일兩兵衝突朴星煥自裁陰’40)라고 서술하고 있으며, 정교의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에서는 ‘侍衛第一聯隊第一大隊大隊長朴星煥, 自殺’41)라고 서술하고 있어 당시 당대사 저술의 방식이 신문 등의 기록을 주요 자료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렇게 서술된 내용은 이후 기록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었다. 1926년 6월 1일 발간된 『개벽』 제70호의 「경성잡화(京城雜話)」42), 송상도(宋相燾)의 『기려수필(騎驢隨筆)』43) 등에서 박승환을 여전히 ‘박성환’으로 기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의병 서술에도 반영되어 의병 관련 내용의 상당수를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등을 참고하여 작성하고 있다. 『중등교과 동국사락』에서 한말 의병전쟁과 관련된 서술은 군대해산 이후 지방 주둔 진위대의 봉기를 서술하는 것에서 시작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京城에서 解隊하든 當日에 各地方鎭衛隊도 또한 一時解散하라하니 此令이 下하매 江華에서는 留在兵이 日兵을 射擊하야 數三名을 殺하고 其他原州는 兵民이 合하야 日人의 郵便取扱所를 打破하고 幷히 日人을 殺하니 此는 人民이 國權의 喪失됨을 忿恨하다가 今에 此機를 乘하야 處處蜂起하니 即關東一省에 安隱한 地方이 無하고 또 其他京畿, 忠淸, 慶尙, 全羅 各道에 及하니 該徒等이 洋銃獵銃等을 携帶하고 斷髮人을 遇하면 曰 此는 一進會라하야 殺戮하니 此는 乙巳新條約 時에 一進會에서 國內에 宣言하야 日本保護를 受함이 可라한 故오, 또 其中에 會를 藉勢하고 鄕民을 凌壓한 故러라, 이에 該徒等이 邑村間에 入하야 衣糧을 討索하며 銃械를 收集하며 長吏를 殺하고 檄文을 馳傳하니 民心이 더욱 紛擾하다가 及其該徒가 回한 後에는 日兵이 謂하되 此地人民이 義兵을 容留하얏스니, 곳 義兵이라하고 家屋을 燒하고 人民을 殺하니 數月間에 民戶數萬이 燒燼이되고 人民死者가 無數하더라, 이에 人民이 捿止가 無하야 더욱 義兵에 投入하고 其外溝壑에 塡하는 者와 男女老幼가 無罪被殺하는 者가 處處皆然하며, 또 各處의 盜賊과 亂類가 義兵이라 稱하고 人民을 迫脅하고 財物을 勒取하니 故로 人民이 義兵及日兵의게 困逼하야 一時를 安過치 못하고 流離飄泊하더라44)
서울에서 시위대가 군대해산에 반발하여 봉기한 이후 지방 주둔 원주진위대, 강화분견대의 봉기와 이후 의병전쟁의 전개과정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서술 내용으로 보면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등 당시 신문의 의병기사를 중심 자료로 하여 서술하고 있는데, 이러한 서술에서 몇 가지 특징이 나타나고 있다. 첫째, 의병전쟁의 시작을 일본군에 의한 군대해산, 의병탄압으로 서술하지 않고 대한제국군의 일본군 공격으로 서술하고 있다. 즉, 강화분견대의 경우 해산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여 3명의 일본군인을 사살하고, 원주진위대의 경우 인민(人民)과 연합하여 우편취급소의 일본인을 공격하고 아울러 일본인을 살해하고 있음을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은 당시 상황상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일본군의 불법성과 잔인성에 대한 서술 없이 해산군인과 인민들이 일본인을 공격한다는 것만 강조될 수 있는 서술이었다. 둘째, 일본군, 일본인, 일진회에 대한 공격의 원인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즉, 일본군, 일본인에 대한 공격은 인민이 국권의 상실됨을 분한(忿恨)하여 일어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당시 고종황제의 강제퇴위, 차관정치, 군대해산 등 일본의 침략정책에 대한 분노·불만이 일반 인민들에게 널리 퍼져 있었고 이러한 분노가 저항으로 표출된 것이라는 인식에서 서술된 것이다. 그런데 그 안에는 제국신문 에서 ‘금번 한일신협약 이후로 일반 인민이 시의는 모르고 단지 울분한 마음만 있어서 각 지방에서 종종 소요하여 대단 소요한 일’45)이라고 보도한 것과 같이 시의를 모르는 단지 울분에만 찬 인민들이 소요를 일으키고 있다는 애국계몽운동계열의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일진회에 대한 공격을 서술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일진회에 대한 공격은 을사늑약에 대한 찬성과 일진회원들 향민(鄕民)에 대한 능압(凌壓)이 원인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국권을 상실해 가는 상황에서 일본에 편승하여 횡포를 부리는 일진회에 대한 분노와 불만으로 볼 수 있지만 그 내면에는 현채를 비롯한 애국계몽운동계열이 가지고 있던 일진회에 대한 인식이 반영된 것이었다. 군대해산 직후 나온 제국신문 의 논설에서도 ‘무릇 타국의 일에 간섭하는자는 자기 나라의 이로움을 위하여 함이니 만일 이로움이 없으면 간섭하여 달라고 청하여도 행하지 아니할지라 그런고로 독립국이 되어 타국의 의뢰코져 하는자는 그 자주 권리를 버리고 부용지국 되기를 스스로 구함과 같으니……’46)라고 하여 일본의 침략의도와 이에 동조하고 있던 세력을 비판하고 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셋째, 해산군인과 연합하고 있던 세력,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던 봉기 등에 대해 서술하면서 의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원주진위대 봉기 당시 ‘병민(兵民)’이라고 하여 원주진위대 해산군인과 의병세력의 연합을 해산군인과 인민들의 연합으로 서술하고 있다. 또한 ‘해도등(該徒等)’이라고 하여 원주진위대 봉기 이후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던 의병봉기에 대해서 의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政府에서 地方暴動을 鎭壓코자하야 日本에 請兵한다는 說’47)이라고 하여 지방에 전개되고 있던 의병전쟁에 대해 지방폭동이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신문기사 등에서 비도, 폭도, 의병 등등 다양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어 그렇게 서술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현채가 가지고 있던 의병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였다. 『제국신문』의 경우 ‘원주진위대가 비도 등과 합심’48)하고 있다고 하는 등 의병봉기를 부정적으로 보도하고 있었으며,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등도 1908년 상반기 이후 의병을 비도(匪徒), 폭도(暴徒) 등으로 부정적으로 지칭하는 빈도가 높아지고 있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49).
넷째, 인민(人民)의 피해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일본군이 무고한 양민들을 의병으로 몰아서 수개월 동안 민호(民戶) 수만호를 불태우고 수많은 사람들을 살해하고 있는 잔혹성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군이 그렇게 한 것은 양민이 의병의 주둔을 용인하였기 때문이고 일본군의 무자비한 탄압 때문에 다시 의병에 가담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또한 도적(盜賊)과 난류(亂類)가 의병이라고 칭하면서 인민을 박협(迫脅)하고 재물을 늑취(勒取)하고 있어서 인민들은 의병과 일본군에게 이중의 곤핍(困逼)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서술은 당시 일반민들이 받고 있던 어려움을 잘 서술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된 원인에는 일본군의 잔혹성도 있지만 상당 부분은 의병활동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는 서술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의병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면서 의병이 주둔했었다는 이유로 일본군의 탄압을 받고, 도적들이 의병이라고 칭하면서 재물을 빼앗고 있다고 하여 의병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줄 수 있었다. 이는 애국계몽운동계열이 가지고 있던 의병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내포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는 당시 『제국신문』의 의병관련 논설을 통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제국신문』 1907년 8월 29일자 논설을 보면 ‘(전략) 지금 한국은 군대를 해산한 후로부터 각 지방에 폭도가 일어나는데 경기, 충청, 전라, 강원 제도가 우심하고 그 폭도의 성질은 대만의 土匪와 흡사하여 (중략) 본래 이번의 폭도는 해산한 군대에서 나아간 불평한 무리와 무뢰배에 지나지 않은 즉 그 활동하는 힘의 많고 적음은 가히 알지나 그러나 불행히 한국 인민 가운데 우리 일본 사람을 대하여 불쾌한 생각을 품은 자가 많은 고로 불평당의 선동함과 협박함을 성공하기 용이하여 양민이 변하여 비도가 되고 (후략)’50)라고 보도하고 있다. 즉, 의병을 대만의 토비(土匪)와 유사하다고 하여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군대해산으로 나간 불평한 무리와 무뢰배들이 일으킨 것이고, 일본을 싫어하는 불평당의 선동과 협박으로 인해 양민이 비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설은 『중등교과 동국사략』에서 의병전쟁이 전개되는 과정을 서술한 내용과 유사하였다.
한편, 강원관찰사 황철(黃鐵)이 민긍호(閔肯鎬) 의병장에게 귀순을 요구한 것에 대한 답서(答書) 내용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江原道 原州鎭衛隊 正校 閔肯鎬가 擧兵하야 其勢가 漸大하는지라 觀察使 黃鐵이 禍福으로써 其歸順을 權喩하고 且曰 君等이 白旗를 懸하야 歸順을 表하고 軍物彈藥을 本道에 輸送하라하니 肯鎬가 答書曰, 今에 皇帝傳位가 陛下本意乎아 君父가 被脅하고 人民이 魚肉이오 疆土가 他國에 入한지라 故로 愚等이 義旅를 起하얏스니 兵出無名이 아니오 또 村落의 燒燼과 人民의 離散으로 義兵이게 歸咎하니 大抵義兵의 起함은 日人의 無道한 故라 然則其咎가 安在오 또 義兵이 解散하면 我民이 日人의게 受困치 아니하고 太平을 可享乎아 且宣諭使로 言하야도 單騎로 喩飭함이 可하거날 此를 不爲하고 外兵이 隨來하니 此는 我等을 誘殺코자 함이라 하얏더라
민긍호는 의병을 일으킨 이유를 황제의 양위가 본뜻이 아니고 핍박을 받고 있고, 인민은 착취당하고 있으며, 강토를 빼앗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한 촌락이 불타고 인민이 이산(離散)하여 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는 일본의 무도함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선유사가 의병이 해산하면 우리 인민은 일본인에게 어려움을 겪지 않고 태평하다고 하고서는 일본군을 이끌고 온 것은 나(민긍호)를 죽이고자 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의병관련 서술 중 민긍호 관련 내용을 비중 있게 서술한 것은 민긍호로 대표되는 의병세력의 봉기 명분을 확인하고 이 명분이 충족되면 의병들은 해산할 수 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해산군인 출신의 의병들과 폭도, 비도로 표현한 의병들과 구분하는 동시에 군인으로써 일본의 침략에 저항해 일어난 봉기에 대해 어느 정도 인정해 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앞서 홍주의병, 최익현 의병장의 활동에 대한 서술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전직 관료, 군인 등의 활동을 의병운동의 일환으로 바라보고 있던 것이다. 한편, 『중등교과 동국사략』은 의병 이외에도 스티븐스 저격사건 등 독립운동 관련 사건들을 서술하고 있다. 독립운동 관련 사건에 대해 사건의 전개과정을 서술하는 정도이지만 일본의 침략하고 있다는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다. 그러한 서술 중 주목되는 것은
明雲曰, 日本이 宣戰時에 言하되 韓國獨立을 爲하야 俄國과 開戰한다하더니 今에 我韓의 國權을 奪하고 財政을 枯渴하고 官職을 占取하고 憲兵, 巡査가 全國에 遍滿하는 故로 我가 美國에 來하야 學業을 修한 後에 國家에 獻身코자 하얏더니 今에 須知分(스티븐스)이 各處에 通信하되 韓人이 歡迎한다 感服한다하는지라 故로 我가 此賊을 殺코자하얏노라하고51)
이다. 애국계몽운동계열 뿐만 아니라 개화관료들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다고 하지만 결국에 대한제국을 침략하고 독립을 훼손하고 있다는 인식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고 그것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중등교과 동국사략』 결론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이 한국을 간섭한 이래로 소요가 많아 백성이 존안(存安)치 못하나 일본에 의해 궁내의 폐단이 일소되고 관리의 탐학이 그치는 등 일본의 공이 많았지만 러일전쟁의 승리 이후 침략을 강화하는 실책(失策)을 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국인이 ‘依賴思想이 尙存하야 但히 日本의 始終이 無함만 怨尤하고 自修自立지 아니하니 엇지 慨然치 아니리오’52)라고 하면 자강하지 못하는 한국 스스로에 문제가 있다고 끝내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제국신문』에서도 그대로 나타난 것으로 당시 자강론자들의 인식이 『중등교과 동국사략』에도 반영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병에 대해 우호적으로 서술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해산군인들의 활동은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실책에 대한 저항으로 인식하면서 해산군인들의 저항은 문제가 있지만 일본의 침략에 군인으로써 저항한 것으로 기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Ⅳ. 맺음말
현채의 『중등교과 동국사략』의 동학농민전쟁 이후 당대사 서술과 의병 인식에 대해 살펴보았다. 동학농민전쟁에 대해 그 주요 원인을 조선 정부의 부패와 무능으로 보고, 일본군의 출병과 청일전쟁을 조선의 독립을 위한 ‘의로운 전쟁’으로 서술하였다. 이는 초기에는 일본을 조선의 개혁과 독립을 도운 세력으로 인식한 문명개화론적 시각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박은식을 중심으로 한 ‘황성신문계열’의 자강론이 그 중심에 있었다. 자강, 실력양성, 문명개화의 사상이 반영되고 있었다.
또한 국내 상황의 전개보다는 국제관계 속에서 청일전쟁, 영일동맹 등 주요 사건을 서술하고 있고, 그것이 일본의 조선정책과 맞물려 긍정적인 평가를 내도록 서술되었다. 즉, 일본의 동아시아정책이 한국의 독립을 보존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평가를 내리도록 서술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국권침탈이 노골화되자 현채는 『중등교과 동국사략』을 통해 비판적 시각을 강화해 나갔다. 특히, 을사조약 이후 일본의 국권 침탈과정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홍주의병, 최익현 의병장 등 전직 관료 중심의 의병운동을 국권회복운동 차원에서 서술하였다. 이는 보수유생 중심의 을미의병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았던 기존 태도에서 의병운동을 재조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1907년 의병전쟁에 대해 서울 주둔 시위대의 봉기와 시위대, 진위대 해산 군인들이 주축이 된 의병전쟁에 대해서는 일본의 침략에 분노해 일어난 것으로 일정 부분 인정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의병이라는 표현 대신 ‘해도등’, ‘폭도’, ‘병민’ 등의 용어를 사용하여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의병활동이 오히려 문제를 일으키고 있으며, 그 문제는 인민들에게 미치고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은 『제국신문』 논설53)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지금 일어난 의병이 나라가 망함을 한탄하여 일어난 자들도 있지만 화적의 무리가 의병을 사칭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양민을 노략질함으로써 사회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고 보았다. 또 군사를 일으켜 싸울려면 나를 알고 적을 알아서 강약과 허실을 논해야 하는데 의병과 일본군의 전력차가 너무 커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즉, 자강을 바탕으로 실력양성을 추진해야 한다는 애국계몽운동계열의 인식이 『중등교과 동국사략』에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중등교과 동국사략』의 동학농민전쟁 이후 당대사 서술은 초기에는 일본 중심의 개화론적 시각을 유지하다가 일본의 식민 침탈이 강화되면서 비판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으며, 의병운동에 대한 서술도 단순한 무장봉기보다는 국권회복을 위한 조직적 저항에 무게를 두고 서술하고 있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