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경(中原京)의 치소(治所) 범위와 구조
The Administrative center and Spatial Structure of Jungwongyeong
1 국립나주문화유산연구소
1 Naju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DOI: https://doi.org/10.71244/jojm.2025.35.37
초록
오늘날 중원역사문화권의 용어는 신라시대 ‘中原京’에서 시작되었다. 충주를 중심으로 그 일대를 아우르는 중원경은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을 위한 전략적 요충지이자 제2의 행정수도로 역할을 하였다. 조사자료가 축적되면서 중원경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게 된 점은 다행이다. 그러나 아직 중원경의 행정 치소가 정확히 어디에 있었으며, 도시의 구조는 어떠했는지에 대한 연구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고고학적 접근으로 중원경의 치소를 규명하기 위한 연구가 중심이었다. 최근 문헌으로 중원경의 범위를 설정한 연구는 상당히 의미 있다. 문헌으로 접근한 중원경의 범위와 그동안 고고학적인 연구성과를 종합했을 때 중원경의 범위는 오늘날 충주시와 경계를 거의 같게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중원경의 행정치소는 중앙탑면 탑평리 일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가 나당전쟁을 계기로 행정치소의 중심지가 오늘날 충주시내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최근 충주사고지나 안림 택지개발지구 등의 새로운 고고학적 조사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충주 루암리·하구암리고분군과 탑평리 유적 그리고 최근 충주시내에서 확인되는 유적을 참고하면 신라의 중원지역 진출은 6세기 중반에는 확실하게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7세기 후반에는 중원경의 행정치소가 탑평리 일원에서 충주시내인 현재 충주읍성을 중심으로 구획된 도시구조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673년 문무왕대 쌓은 국원성은 현재의 대림산성으로 당시의 국제정세와 신라의 수성적인 의지와 대림산성에서 출토되는 통일신라시대 유물 양상 등을 종합했을 때 가장 설득력 있다고 생각된다.
Abstract
The contemporary concept of the Jungwon Historical and Cultural Area derives from Jungwongyeong, a major regional center established during the Silla Dynasty. Centered on present-day Chungju, Jungwongyeong functioned as a strategic base for Silla's expansion into the Han River basin and served as the kingdom's secondary administrative center.
As archaeological and historical evidence continues to accumulate, the historical reality of Jungwongyeong has become increasingly well defined. Nevertheless, further research is required to accurately identify the location of its administrative center and to reconstruct the city's overall spatial structure.
Until recently, attempts to identify the administrative center relied primarily on archaeological evidence. In this context, recent studies employing textual sources to delineate the territorial boundaries of Jungwongyeong are particularly significant. When these textual interpretations are synthesized with archaeological findings, the spatial extent of Jungwongyeong is shown to correspond largely with the present administrative boundaries of Chungju City.
Current scholarship suggests that the administrative center was initially located in the Tappyeong-ri area of Jungangtap-myeon. Following the Silla–Tang War, however, the center appears to have been relocated to what is now downtown Chungju. This transition is supported by recent archaeological investigations at sites such as the Chungju Sago(National History Archives) Site and the Allim District excavation site.
Evidence from the Ruam-ri and Ha-guam-ri tumulus clusters, the Tappyeong-ri site, and newly identified remains in central Chungju indicates that Silla's political and military presence in the Jungwon region was firmly established by the mid-sixth century.
By the late seventh century, a planned urban structure—centered on the area of the present-day Chungju Eupseong(walled town)—had clearly emerged as the administrative core, reflecting the relocation of the governing center from Tappyeong-ri to downtown Chungju.
Finally, the identification of Gukwonseong, constructed in 673 CE during the reign of King Munmu, with the present-day Daerimsanseong is well supported. This interpretation is further supported by the broader international geopolitical context of the period, Silla's heightened defensive posture following unification, and the material characteristics of Unified Silla–period artifacts excavated from the Daerimsanseong site.
Ⅰ. 머리말
2020년 6월 9일에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2023년 1월 17일에 개정되면서 지금의 행정구역상 충청북도를 중심으로 강원·경기·경북의 일부를 포함해 ‘중원역사문화권’이 설정되었다. ‘중원문화’, ‘중원문화권’이라는 명칭은 1980년대부터 충주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1980년대 충주댐 수몰지구에 대한 대규모 고고학적 조사가 진행되면서 구석기 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 폭을 가진 다양한 유적이 확인되면서 9개의 문화권 중 하나인 중원역사문화권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미 알려진 것처럼 ‘中原’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757년 경덕왕 16년에 ‘國原小京’을 ‘中原京’으로 개칭하면서부터이다. 그 뒤 충주를 중심으로 ‘中原’이라는 이름은 오래전부터 익숙한 명칭이었다. 충주는 2000년대 이후 고고학적인 조사자료가 축적되면서 중원경의 행정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인 치소(治所)의 위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원경의 도시구조를 파악하거나 치소의 범위를 설정할 만큼 학술적인 자료가 충분히 축적된 상태는 아니다. 따라서 단편적인 자료를 가지고 중원경의 모든 것을 규명하는 것은 아직은 이르다 생각하면서도 지금까지 조사·연구된 단편적인 조각을 모아 초보적이지만 중원경의 흔적을 정리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중원경과 관련된 선행 연구성과를 중심으로 중원경의 치소 범위와 구조를 문헌과 고고학적 조사 내용을 정리하면서 중원경의 핵심 치소가 어디에 존재했고, 개략적인 중원경의 범위와 핵심 치소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대한 기존의 연구성과를 톺아보고자 한다.
Ⅱ. 중원역사문화권과 중원경
중원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중원경의 범위와 유적의 분포양상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에서는 중원역사문화권의 범위를 지역성을 중심으로 설정해 충북 지역을 중심으로 강원·경기·경북의 일부지역을 포함해 중원역사문화를 형성하고 발전시킨 것으로 정의한다. 이러한 공간적 범위 설정에 따라 그동안의 고고학적 조사성과를 정리하면 중원역사문화권의 범위에 속한 주요 유적은 약 160여 개소로 정리할 수 있다.
전체 160여 개 유적 중에서도 중원역사문화권의 중심지인 충북에서는 청주와 충주가 집중적으로 분포하며, 강원도 원주·경상북도 상주와 영주 일부가 주목된다. 중원경의 치소가 있었던 충주에서는 신라의 중원진출과 관련된 유적과 함께 산성, 고분 등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서원경이 위치했던 청주에도 서원경과 관련한 생활유적이 두루 분포하고 있으며, 고분과 산성 등이 다수 확인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외에 강원도 원주의 북원경과 사벌주와 관련된 경북 상주지역에도 유적이 집중적으로 분포하면서 중원역사문화권의 외연을 넓히고 있는 모습이다.
중원경(中原京)의 치소(治所) 범위와 구조
중원경의 범위를 살펴볼 때 중원역사문화권과 관련된 유적의 분포 양상과 함께 살펴보아야 할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인간의 생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지리적 상황이다. 오래전부터 국경이나 행정구역의 경계는 주요 산맥과 강을 기준으로 설정하였다. 특히 큰 강과 산맥은 상호교류가 어려워 지역간 문화적인 차이가 발생하면서 삶의 방식과 언어까지 달라지면서 고유한 지역문화를 형성하기도 한다. 오늘날 중원경으로 알려진 충주를 중심으로 지리적인 위치를 살펴볼 때도 지역 간 언어와 풍습이 달라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지리적으로 경계를 짓는 대표적인 산맥을 중심으로 보면 크게 한반도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태백산맥과 그 지맥으로 충주의 동쪽을 경계 짓고 있다. 조금 더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영월지맥을 형성하는 원주 치악산과 영월 태화산을 이으며 충청북도와 강원도의 문화적인 경계를 형성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태백산맥에서 서쪽으로 뻗어 경기도와 충청북도를 나누는 차령산맥이 위치한다. 남쪽으로는 백두대간 소백산맥이 경상북도와 충청북도를 경계로 뻗어있다.
큰 강줄기도 지리적인 경계를 짓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데 충주는 한강을 끼고 있어 고대부터 영남과 서울을 연결하는 교통로로 주요 거점이었다. 또한 산맥으로 막혀 있는 강원도 영월과 연결하는 핵심 교통로이기도 하다. 미호천과 금강은 중원경과 서원경을 포함한 중원역사문화권의 주요 범위를 나누며, 중원경과 서원경은 다시 한남금북정맥 산줄기를 기준으로 충주 남한강과 청주 미호천·금강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렇게 형성된 산맥과 강줄기는 언어·풍습 등 문화적인 차이를 만든다. 이러한 차이를 쉽게 비교할 수 있는 것이 방언과 상장제례로, 지리적인 영향이 지역적인 문화권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넓은 중원역사문화권의 범위 안에서도 핵심지로 설정할 수 있는 중원경의 지리적 위치는 한강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차령산맥과 영월지맥으로 경계를 형성하고, 동으로는 소백산맥, 남쪽과 서쪽으로는 한남금북정맥이 가로지른다. 단순히 지리적인 위치로만 중원경의 영향범위를 설정한다면 현재의 충주를 중심으로 제천·원주·음성·괴산의 경계지역 일부를 포함한 범위로 예상해 볼 수 있다.
Ⅲ. 국원소경(중원경) 치소 범위와 구조
중원경 치소(治所)의 의미는 여러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중원경의 문화가 영향력을 미쳤던 범위 전체를 보아 ‘중원역사문화권’을 중원경의 치소 범위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중원경(中原京)의 치소(治所) 범위와 구조 이는 중원역사문화권이 서원경과 북원경까지도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으로 중원경의 행정력과 문화가 직접적으로 미쳤다고 보기에는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어 보인다.
실제 중원경의 치소 범위는 행정력의 직접 영향권으로 오늘날 행정구역상 충주를 중심으로 주변의 시군 일부를 포함하는 범위로 추정된다. 치소의 의미를 아주 작게 해석하면 중원경을 관할했던 지방관이 머물던 관청을 의미하며, 확대하면 관청과 관청을 보호하는 성곽이나 주요 시설이 밀집된 구역으로 도시의 구조를 갖춘 범위를 의미한다.
이번 글에서는 지리적 위치를 참고해 문헌과 고고학적인 자료를 비교해 중원경의 전체적인 범위에 대한 설정을 시도해 보고, 나아가 행정 관청과 관련 시설물이 밀집했던 핵심 치소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1. 기록을 통해 본 국원소경(중원경)과 치소 범위
중원경은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16년(757)에 명칭이 확정되었다. 이는 기록을 통해서 중원경의 명칭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중원경이 삼국사기 편찬 당시(1145) 충주(940)라고 지목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지명의 변화 과정도 기록해 두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국원성에서 신라가 충주에 진출한 이후 소경이 되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중원경으로 이름을 고친 것까지 남아 있어 중원경은 곧 충주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中原京, 本髙句麗國原城, 新羅平之. 眞興王置小京, 文武王時築城, 周二千五百九十二歩. 景徳王改爲中原京, 今忠州 『三國史記』 卷第三十五 雜志 第四 地理二 新羅 중원경(中原京)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국원성(國原城)이었는데, 신라(新羅)가 이를 평정하였다. 진흥왕(眞興王)이 소경(小京)을 설치하고 문무왕(文武王) 때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2,592보였다. 경덕왕(景德王)이 중원경(中原京)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지금 충주(忠州)이다.
十八年, 以國原爲小京. 『三國史記』 卷第四 新羅本紀 第四 眞興王 18년(557)에 국원(國原)을 소경(小京)으로 삼았다.
十九年, 春二月, 徙貴戚子弟 및 六部豪民, 以實國原. 『三國史記』 卷第四 新羅本紀 第四 眞興王 19년(558) 봄 2월에 귀족 자제와 6부의 부유한 백성을 옮겨 국원을 채웠다.
秋八月, 命阿湌春賦出守國原. 『三國史記』 卷第四 新羅本紀 第四 眞興王 二十六年 26년(565) 가을 8월에 아찬(阿飡) 춘부(春賦)에게 명하여 국원(國原)으로 나가서 지키게 하였다.
中原京 沙梁人也.…常與釡谷冶家之女野合情好頗篤… 『三國史記』 卷46 列傳第6 중원경(中原京)의 사량인(沙梁人)이다.…강수(634이전~692?)가 일찍이 부곡(釜谷)의 대장장이 집 딸과 혼인 전에 정을 통하였는데, 좋아하는 마음이 자못 돈독하였다.
王還國, 次褥突驛, 國原仕臣龍長大阿湌, 私設筵, 饗王 및 諸侍從. 及樂作, 奈麻緊周子能晏, 年十五歳, 呈加耶之舞. 『三國史記』 卷第六 新羅本紀 第六 文武王 八年 왕이 나라로 돌아오며 욕돌역(褥突驛)에 다다랐는데, 국원(國原) 사신(仕臣)인 용장(龍長) 대아찬이 사사로이 잔치를 벌여 왕과 여러 시종하는 사람들을 대접하였다. 음악이 시작되자 나마 긴주(緊周)의 아들 능안(能晏)은 나이가 15살인데 가야의 춤을 추어 바쳤다.
九月, 築國原城 · 北兄山城 … 『三國史記』 卷第七 新羅本紀 第七 文武王 十三年 9월에 국원성, 북형산성 … 을 쌓았다.
三月, 熊川州都督憲昌, 以父周元不得爲王反叛, 國號長安, 建元慶雲元年. 脅武珍 · 完山 · 菁 · 沙伐四州都督, 國原 · 西原 · 金官仕臣 및 諸郡縣守令, 以爲己屬. 『三國史記』 卷第十 新羅本紀 第十 憲德王 十四年 3월에 웅천주(熊川州) 도독(도독) 헌창(憲昌)이 아버지 주원(周元)이 왕이 되지 못한 것에 불만을 가지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나라 이름을 장안(長安)이라 하고 연호를 만들어 경운(慶雲) 원년이라 하였다. 무진주(武珍주), 완산주(完山州), 청주(菁州), 사벌주(沙伐州) 네 주의 도독과 국원경(國原京), 서원경(西原京), 금관경(金官京)의 사신(仕臣) 및 여러 군현(郡縣)의 수령(守令)들을 위협하여 자신의 아래에 예속시켰다.
陽生而英傑. 大和二年, 興德王三年, 爲固城郡大武, 尋拜中原大尹, 俄轉武州都督. 所臨有政譽. 『三國史記』 卷第四十四 列傳 第四 金陽 김양은 태어나면서부터 영특하고 용기와 기상이 뛰어났다. 태화(太和) 2년인 흥덕왕(興德王) 3년(828)에 고성군(固城郡) 태수(太守)가 되었고, 얼마 있지 않아 중원대윤(中原大尹)에 임명되었다가 잠시 후에 무주(武州) 도독(都督)으로 옮겼다. 임지에 갈 때마다 잘 다스린다는 칭찬을 들었다.
秋七月, 北原賊帥梁吉忌弓裔貳己, 與國原等十餘城主謀攻之, 進軍於非惱城下, 梁吉兵潰走. 『三國史記』 卷第十二 新羅本紀 第十二 孝恭王 三年 가을 7월에 북원(北原)의 도적 우두머리인 양길이 궁예가 자신을 배신한 것을 미워하여 국원(國原) 등 10여 곳의 성주들과 그를 칠 것을 모의하고 비뇌성(非惱城) 아래로 진군하였으나, 양길의 병사가 패배하여 흩어져 달아났다.
四年, 冬十月, 國原 · 菁州 · 槐壤賊帥淸吉 · 莘萱等, 擧城役於弓裔. 『三國史記』 卷第十二 新羅本紀 第十二 孝恭王 4년(900) 겨울 10월에 국원(國原) · 청주(靑州) · 괴양(槐壤)의 도적 우두머리 청길(淸吉)과 신훤(莘萱) 등이 성을 바치고 궁예에게 투항하였다.
중원경과 관련된 위의 기록에서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중원경은 통일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개칭하기 전까지 200년 가까이 고구려가 사용하던 국원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중원경(中原京)의 치소(治所) 범위와 구조
678년과 685년에 설치한 서원소경과 남원소경은 중원소경이란 명칭을 전제로 하여 명명하였다고 이해전덕재, 2025 되기도 하지만 실제 기록에 전하는 중원의 명칭은 경덕왕대가 처음이다. 또한 지방의 소경에는 지방관인 사신(仕臣)을 파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국원에 사신으로 파견된 자의 관등은 대아찬(大阿飡, 17관계 중 5등 관계)과 아찬(阿飡, 17관계 중 6등 관계)이 소경의 장관격인 사신으로 임명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특이하게도 중원경은 경덕왕 16년인 757년에 명칭이 확정되었음에도 9세기 이후의 기록에서는 ‘國原’과 ‘中原’이 모두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중원라는 명칭은 김양(金陽)이라는 인물이 828년 고성군 태수가 되고, 곧 중원대윤(中原大尹)으로 임명되었다는 기사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822년 김헌창의 난과 관련한 기록에서는 네 개 주의 도독(都督)과 국원경의 사신을 포함한 세 명의 사신(仕臣)을 위협하여 예속했다는 기사와 효공왕 3년(899)에 북원의 양길(梁吉)이 궁예(弓裔)에 대항하여 국원(國原) 등 10여 곳의 성주들과 그를 칠 것을 모의했다는 기사를 통해 볼 때도 중원이라는 명칭보다는 오히려 국원이라는 명칭이 신라 하대까지도 널리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중원경이 통일 후 5소경 중에서도 중원의 칭호를 가짐으로써 수위의 위치를 계속 지니고 있었지만, 일단 중원이라는 의미는 과거 제2의 왕도를 의미하는 국원에서 5소경의 하나로 격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통일 이후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중원보다 국원으로 표기되고 있는 것이 다수 보이는 데에는 국원소경이 제2의 왕도의 의미를 지닌 전통적인 칭호인 까닭에 다른 지역과 구별하기 위한 이유인 것으로 보기도 한다.홍성화, 2019 통일된 명칭이 사용된 것은 아니지만 기록에서 나타내는 국원과 중원은 모두 충주를 가리킨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9주 5소경의 행정체제에서 중원경의 범위는 어느 정도였을까? 중원경은 오늘날의 충주에 위치했던 것은 쉽게 알 수 있지만 행정력이 미친 범위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현실이다. 대략 오늘날 충주시의 범위에 경계를 맞닿고 있는 타 지역을 일부 포함해 중원경의 영향력이 미쳤을 것으로 추정하는 정도이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삼국사기 지리지를 기준으로 고려~조선시대 지리서·고지도·금석문에 나타나는 옛 지명 등을 분석해 7세기 국원소경(國原小京)의 행정범위를 추정한 연구가 있다.최경선, 2024 ; 최경선, 2025. 기존의 연구가 충주 시내를 중심으로 중원경의 행정관청이 존재했던 치소 중심으로 진행되던 연구와는 달리 국원소경의 외곽 경계를 개략적으로 정리한 것은 의미가 있다.
국원소경의 공간 범위를 추정하는데 관련 기록이나 자료가 부족한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위 표 1
표 1 7세기 신라 국원소경 주요 경계 설정표(최경선, 2024 요약)
| 현재지명 | 옛지명 | 경계 | 관련근거 |
|---|---|---|---|
| 제천 | 나제군 | 1안)제천천 동쪽 산줄기 2안)제천천 |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943)와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비」(1017) : 中原府故開天山淨土寺 |
| 제천 | 청풍현 | 계명산-마즈막재-남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와 동달천 사이 | 『三國史記』 제사지 小祀를 지내는 지역 중 月兄山에 대한 세주의 소재 지역 : 奈吐郡 沙熱伊縣 |
| 괴산 | 연풍현 | 충주 갈마고개와 수회리 사이 | 고려시대 長延·長豐縣 기록과 세종실록지리지 연풍현 세주 本高句麗上芼縣 등에서 지명에서 유추 소경에는 영현이 없다는 점에서 추정 |
| 괴산 | 괴양군 | 괴산 불정면과 괴산읍 괴산 소수면과 음성 소이면 사이 | 大東輿地圖, 大東地志 조선시대 불정면, 감물면 지도 분석과 송명산 명칭유래 등 지명 고증 |
| 음성 | 음성현 | 가섭산 산줄기 또는 요도천 | 고려 廣州道의 遙安驛이 음성의 관할과 충주 崇善寺 위치 등을 분석 |
| 음성 | 음성현(흑양군) | 망이산성 부근 : 음성군 삼성면의 일부 개산군(현 안성)에 포함 | 망이산성 서문지 출토 ‘□□/峻豊四年壬戌 大介山/竹州’銘 기와를 통해 제작처로 경계 설정 |
| 이천 | 음죽현 | 원통산에서 승대산 경계 | 「영월 흥녕사 징효대사탑비」 888년 음죽현 원향사를 선나별관에 속하게 한 기록(오갑산 일원은 당시 음죽현 추정) |
| 여주 | 향효현 | 청미천 또는 오갑산 남쪽 | 高麗史 김취려전에 1217년 김취려와 최원세가 이끄는 고려군이 적을 쫓아 황려현 법천사에 이르렀다는 기록에서 추정 |
| 원주 | 북원경 | 운계천과 청계산 산줄기 경계 소태재 | 1025년(고려 현종 16)에 세워진 原州居頓寺址圓空國師塔碑의 제액 高麗國原州賢溪山居頓寺과 忠州 靑龍寺址普覺國師塔碑를 통해 경계설정 |
중원경(中原京)의 치소(治所) 범위와 구조
2. 유적을 통해 본 국원소경(중원경) 중심 치소의 변화
중원경이 위치했던 충주는 남한강을 따라 중요 유적이 분포하고 있는 양상이다. 특히 충주 탑평리 일대는 삼국시대 유적이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곳으로 충주 고구려비, 장미산성, 루암리고분군, 황새머리고분군, 탑평리유적, 충주탑평리칠층석탑 등 백제, 고구려, 신라의 점유 흐름에 따라 분포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탑평리유적은 남한강의 충적대지에 백제-고구려-신라의 유적이 한 곳에 중첩되어 나타나고 있는 대규모의 생활유적으로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거점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탑평리 일대는 백제에 의해 처음 대규모 마을이 조성된 이후 충주지역 제철 생산을 통제하면서 남한강을 이용한 교통과 군사적 이점을 동시에 누렸다. 배후에는 유사시 적의 침입을 대비한 장미산성과 철 생산을 관리하고 생산 집단을 보호하기 위한 탄금대토성을 축조하였다. 이는 백제의 지방 거점으로 군사적·경제적 배경으로 발달했고, 이미 이렇게 형성된 거점을 시간 순서에 따라 고구려와 신라가 차례대로 점유하면서 주변에 루암리·하구암리에 대규모 고분군과 탑평리유적의 남쪽에는 사찰까지 조성하면서 국원소경의 치소로 발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는 한강유역을 점령한 다음 진흥왕 18년(557)에 소경을 설치하고, 이듬해인 558년에는 귀족 자제와 6부의 부유한 백성을 국원으로 이주시켰다. 여기에는 진골귀족 출신을 사신(仕臣)을 파견하여 다스리게 했다. 루암리 · 하구암리의 대규모 신라 고분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조사결과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국원소경 확보는 신라의 통일과정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삼국의 접점이라는 지리적 위치와 더불어 남한강의 주요 교통망을 확보하면서 고구려와 백제를 압박할 수 있었던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신라의 입장에서도 국원소경은 다른 소경들과 달리 오랫동안 유지했으며, 나아가 도시계획에 따라 새로운 곳에 치소를 설치하는 등 도시재편 현상도 나타난다.
충주에서 국원소경 또는 중원경과 관련된 신라~통일신라시대에 해당하는 유적은 20여 곳에 이른다. 우선 충주를 남북으로 흐르는 달천과 탄금대에서 달천과 합류하여 북쪽으로 흘러나가는 남한강을 기준으로 하나의 남북 축선을 설정할 수 있다. 크게 남한강을 기준으로 동서로 구분해 유적이 분포하고 도시 재편이나 치소의 변화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충주에서 한강을 기준으로 고분 · 생활 · 성곽유적 등에서 출토된 유물을 비교하면서 신라의 중원지역 진출에 관한 연구가 주목된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기존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신라의 변화를 4단계로 구분하였다. 1단계는 신라가 충주로 진출한 시기로 진흥왕이 소경을 설치한 557년을 전후한 시기로 루암리 · 하구암리고분군에서 출토되는 신라 전기양식 토기의 출토를 근거로 550년 이전에 충주로 신라세력이 진출한 것으로 보았다. 2단계는 국원소경의 중심지가 탑평리 일대에서 한강 동쪽의 충주시내로 이동한 시기로 설정했다. 673년 국원성을 축조한 기록을 참고했을 때 최근 충주읍성에서 존재가 확인된 통일신라시대 인화문 토기와 적심 건물지가 확인되면서 중심지가 이동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3단계는 대체로 소규모의 고분유적만이 확인된 시기로 중원경으로 개칭한 시점으로 보았으며, 4단계에 이르러 신라 고분이 입지하지 않았던 금릉동에 당식과대와 동경이 부장된 분묘가 확인되어 새로운 세력의 성장이 감지된다고 보았다.4)
중원경(中原京)의 치소(治所) 범위와 구조
충주에서 신라 고분의 분포양상과 존속기간을 봤을 때 신라는 루암리고분군을 중심으로 늦어도 6세기 중반에는 중원지역에 진출해 정착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단각고배와 부가구연대부장경호 등을 공반하며, 위계에 따라 이식과 과대금구 등이 부장되는 양상이다. 루암리고분군이 일찍 조성되면서 가까이 하구암리고분군까지 포함하는 대규모의 신라고분군이 조성되면서 충주 신라고분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또한 충주 시내에서도 소규모이긴 하지만 연수동고분군, 호암동복합유적 등에서 6세기 중반으로 편년되는 신라고분이 조사되고 있다. 8세기에는 고분의 규모와 구조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규모로 변화하는 양상을 나타내면서 남한강의 양쪽 지역에 모두 고분이 조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신라가 처음 충주에 진출했을 당시에는 한강의 동·서부 양쪽에 모두 자리를 잡았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만 한강 서부에 자리한 루암리고분군이 위계가 가장 높았던 점과 가까운 탑평리유적에서는 대규모로 조성된 신라시대 생활유적이 백제-고구려 유적과 중첩된 상태로 확인된다.
탑평리유적은 백제-고구려-신라의 유적이 순차적으로 중첩된 유적으로 백제에 의해 형성된 마을을 그대로 고구려와 신라가 점유하면서 중원지역 중심지로 자연스럽게 이어갔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탑평리유적은 치소의 중심지가 충주시내 쪽으로 이동한 후에도 일정기간 공존하면서 결국에는 자연스럽게 쇠퇴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사실은 8세기 말~9세기 초에 건립한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과 통일신라시대까지 존재했던 탑평리사지, 그리고 탑평리유적에서도 통일신라시대 건물지와 주거지가 일시적 또는 의도적으로 폐기한 흔적이 없는 50여 기 이상이 확인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탑평리유적의 중심지가 충주시내로 이동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유적이 최근에 충주읍성 일대에 대한 조사에서 확인되었다. 도시구조의 면모가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충주시내에 통일신라시대 관청이나 생활유적의 존재를 보여주는 유물과 관련 적심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탑평리 일대에서는 탑평리사지와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이 조영되는 등 특수한 목적에 따라 지속적으로 존속하기는 하지만 중심 생활유적인 탑평리유적에서는 7세기 후반에 해당하는 유물과 유구는 더 이상 확인되지 않는다. 비슷한 시기 충주시내에 위치한 충주읍성에서 새로운 생활유적의 흔적이 관찰되는 점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발굴조사 결과에서 층위양상은 모두 5개 층으로 나타났다. 그중에서도 가장 선행하는 통일신라~고려 문화층은 유적 전반에 걸쳐 확인되고 있다. 이 층에서는 두께가 1cm 정도 되는 선문류 기와 및 적심이 확인되어 이와 관련된 유구가 존재할 것으로 조사단은 보았다. 1호 건물지 일대를 노출하면서 출토된 단각고배 및 뚜껑, 인화문토기 등이 이 시기의 유물로 판단된다고 하였다.5
중원경(中原京)의 치소(治所) 범위와 구조
토기 유물 중에서 뚜껑의 인화문 중 가장 빠른 형태는 1호 건물지 조사과정에서 출토된 것으로 개신부에 반원점문과 수적형문이 결합된 것으로 시기는 7세기 말~8세기 초로 판단했다. 그리고 다변화문은 수적형문과 함께 7세기 중엽경부터 시작되는데 점열문과 결합된 것으로 보아 8세기 초·중엽경으로 보았다. 마제형문은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전반경까지 나타나고 연주문의 형태도 비교적 이른 7세기 후반경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점열문은 8세기 초경에 시작해 9세기 초까지도 대부완과 뚜껑편에 시문되며 파상문은 8세기 중엽경에 나타난다고 보면서 충주읍성 사고지 출토 인화문은 7세기 말경부터 출현하며 주로 8세기대 집중된 것으로 판단하였다.6)
3. 국원소경(중원경) 중심 치소의 이동 시점과 배경
국원소경의 치소는 어느 시점에 충주시내로 이동했을까? 이와 관련하여 문무왕 13년(673) 국원성 등 여러 성을 쌓았다는 기사가 주목된다. 이때 쌓은 국원성의 둘레가 2,592보로 약 4.6km7에 해당하는 대규모의 성이다. 국원성과 함께 10여 개의 성을 동시에 축조했는지는 신라의 국제적인 상황에서 살펴볼 문제로 국원소경이 충주시내로 이동한 이유도 비슷한 상황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신라는 648년 당나라와 나당동맹을 체결하고 삼국을 통일하기 위한 본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660년 백제를 점령하고, 668년에는 고구려까지 멸망시키면서 삼국을 통일하였다. 하지만 이 삼국통일은 웅진도독부나 안동도호부처럼 당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불안전한 통일로 당나라에 대한 신라의 불만이 가중되었다. 결국 신라는 670년 당나라를 선제공격하면서 나당전쟁(670년~676년)이 시작되었다. 672년 당나라의 4만 대군에 맞서 석문들판(현 황해도 서흥군) 전투 초기에는 승세를 잡았으나 이후 크게 패하면서 대아찬 효천(曉川)을 비롯한 7명의 장수와 상당수의 병력을 잃으며 크게 패하였다. 이후 신라는 대당전쟁의 전략을 김유신의 조언에 따라 수정하게 되는데 전면전을 피하고 수세적 전략으로 전환하였다. 또한 석문전투(672년 8월) 패배 직후 당나라에 사죄사(謝罪使)를 파견해 이후 전쟁을 대비할 시간을 벌었다. 이 과정에서 대규모의 축성을 하게 되는데 석문전투 패배 직후 주장성(현 남한산성)을 시작으로 이듬해에는 국원성과 10여 개의 성을 손보거나 새로 쌓았다.
이렇게 볼 때 국원성은 통일 직후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지방을 안정적으로 다스리고, 새로운 도시계획하에 소경을 보호하기 위한 축성보다는 수세적인 상황에서 당나라를 방어할 목적으로 쌓은 성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큰 틀에서 보면 이 시기 소경의 이동도 수세적인 측면에서 충주시내로 이동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같은 시기 축성 또는 개축한 성과 비교했을 때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축성과정에서 전쟁의 대상이 되는 당나라를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위치를 선정하는데 큰 강줄기를 북쪽에 두고 강의 남쪽에 성곽을 축조하고 있다. 최전방 방어선인 주장성의 경우에도 한강을 남쪽에 두고 방어성에 맞게 대규모로 축성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주양성과 사열산성 역시도 소양강과 남한강을 북쪽에 두고 방어적인 목적으로 강의 남쪽에 성을 쌓았다. 당군의 진격을 지체시키기 좋은 위치를 잡고, 유사시 후방으로부터 안전한 보급과 다음 방어선으로 퇴로를 확보하는 차원에서도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전략적 측면에서 국원성도 비슷한 입지를 택했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신라가 중원지역 진출 이후 처음 자리를 잡았던 탑평리 일대는 배후에 백제가 축성한 장미산성이 있기는 하지만 남한강을 등지고 있기 때문에 북쪽의 당나라의 공격에 방어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다른 방어적인 성들과 마찬가지로 국원성도 수성적인 전략체계에 맞게 입보형(入保形) 성으로 쌓았을 가능성이 높은 이유이다.
7세기 후반 소경의 충주시내 이동에는 공감하고 있지만 국원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연구자마다 조금씩 다른 의견이다. 현재 충주읍성 일원이 중원소경의 치소로 비정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 봉현성지(峰峴城址, 충주읍성 외성)는 기록에 있는 국원성의 규모 2,592보(약 4.6km)와 유사하고, 충주 시내를 감싸는 입지 등을 고려하여 나성형태의 소경성으로 비정한 바 있다.
봉현성지와 함께 국원성으로 거론되는 성은 둘레 4,906m 의 포곡식 토석혼축성인 대림산성이다. 충주의 진산인 대림산 정상을 감싸고 축성한 대림산성은 계립령과 조령으로 이어지는 길목이면서 달천까지 앞에 끼고 있어 교통과 방어에 유리한 곳이다. 대림산성을 국원성으로 비정
673년 축조된 국원성은 당의 공격을 방어하고 국원소경의 안전과 통치를 고려한 대규모 축성이다. 신라의 지방행정과 방어체계 재편단계에서 나당전쟁을 교훈으로 삼아 소경의 자체 방어체계를 구축한 것이다. 백제 때 축조된 장미산성과 신라의 중원지역 진출의 교두보 역할을 했던 충주 남산성, 그리고 통일신라시대 새롭게 축성한 대림산성은 충주 분지를 사방으로 둘러싼 방어체계를 완성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장미산성과 남산성의 기능은 점차 약화되면서 대림산성이 방어체계의 중심축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러한 점으로 봤을 때 대림산성을 673년 문무왕때 축성한 국원성으로 보는 것이 현재까지는 가장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면 국원소경의 관청과 시가지를 형성했던 핵심 치소의 범위는 어느정도였을까? 충주시내 충주천과 교현천 사이에는 완만한 구릉대의 평탄면이 형성되어 있는데 현재 충주읍성이 자리한 위치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7세기 후반 탑평리 일대에서 충주 시내로 소경이 이동해서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이 정확히 어디였는지 지목하는 것은 어렵다. 다만 삼국시대 통일전쟁과 나당전쟁의 혼란한 상황을 고려했을 때 처음부터 도시를 계획적으로 설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면 신라의 중원지역 전초기지였던 남산성을 배후성으로 삼으며, 가까이 교현천과 충주천 주변의 완만한 구릉대에 도시를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나당전쟁이 끝나고 신문왕(681~692)은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의 권한을 약화하기 위한 9주 5소경제와 지방통치체제 정비에 박차를 가한다. 국원소경(557), 북원소경(678), 금관소경(680)에 이어 신문왕은 서원소경과 남원소경(685년)을 설치하면서 수도의 편재(偏在)를 극복하고 지방 통치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5소경제를 완성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신라 왕경의 방리제(坊里制)를 모델로 소경의 도시계획이 이루어진 흔적이 확인되고 있다. 7세기 후반에 집중적으로 설치되기 시작한 9주 5소경의 거점 도시는 대부분 1방 440×440척(156×156m)이 적용된 신라 왕경Ⅱ의 도시계획이 적용되었고, 5소경 중 최종적으로 정비된 국원소경은 1방 450×350척(160×125m)인 왕경Ⅲ기의 구획 방식을 따랐다고 보았다.
충주시내에서 방리제의 직접적인 고고학적 증거는 아직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일제강점기 지도를 참고해 신라의 왕경과 지방도시의 구조를 비교해 충주 시내도 방리제를 갖춘 도시구조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남북 축선들의 이격 거리를 비교했을 때 대체로 160m 내외로 확인되는데, 이는 고구려척(35.5㎝)을 기준으로 할 때 450척 약 160m 에 해당한다. 또한 평행한 동서 축선들 간 이격 거리는 120~130m 로 확인되어 1방의 남북 규모는 350척 약 124m 이었을 것으로 보았다. 결국 동서 450척, 남북 350척의 장방형 구획이 국원소경 도시계획의 기본 구획 단위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또 시가지의 남쪽 범위는 충주 호암동 복합유적 내 토성 인근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이므로, 국원소경은 동서로 5방, 남북으로는 분명치 않지만 8방 이상의 남북으로 긴 장방형 도시 구조를 이룰 것으로 보았다.
국원소경이 757년 중원경으로 개칭이 되고 고려가 들어서기 전까지 완성된 핵심 치소의 범위는 7세기 후반 이후 충주시내 외곽에 조영된 신라고분의 분포상황과 12세기 말 ~ 13세기 초 몽고군의 침입에 대비해 쌓은 충주읍성 외성의 범위 등을 고려했을 때 중원경의 핵심 치소 범위도 현 충주읍성 외성의 범위를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의림사지 발굴조사에서는 고려시대 건물지 사이에서 인화문토기편이 확인되고 있고, 바로 인접한 충주 안림지구 도시개발구역 발굴조사에서도 통일신라 수혈주거지 9기
충주읍성 외성 기준으로 동쪽의 경계는 계명산에서 뻗어내린 만리산과 의림사지가 있는 안림동의 저구릉성 평탄지를 포함해 남산의 서쪽 말단부까지로 하고, 서쪽의 경계는 외성이 지나가는 사직산의 동쪽으로 설정할 수 있으며, 남쪽의 경계는 충주 호암동 복합유적 내 토성유적으로 설정했을 때 중원경 핵심치소의 범위는 최대 충주읍성 외성 범위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중원경의 전체적인 도시구조는 충주천과 교현천의 사이 저구릉성 대지를 중심 범위로 1방이 160×125m 인 동서 5방, 남북 8방의 장방형 도시구조로 설정해 볼 수 있다.
Ⅳ. 맺음말
지금까지 중원경의 치소범위와 구조에 대하여 그동안 진행되었던 선행 연구자료와 새롭게 확인된 고고학적 자료를 정리하여 중심 치소의 이동과 방리제를 적용한 중원경의 도시구조를 살펴보았다. 신라 5소경 중 가장 오래 존속했던 중원경 관련 연구는 신라 지방도시를 이해하고 나아가 중원문화를 규명하는 중요한 과제이지만 실제로 조사·연구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 현실이다.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최근 중원경의 실체에 접근하기 위한 새로운 자료들이 확인되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중원경은 신라 진흥왕이 옛 고구려의 국원성을 점령하고 557년 소경을 설치하면서 시작한다. 국원소경이 현재 충주에 위치했던 것은 알 수 있지만 행정력이 미친 범위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최근 삼국시대 지리지를 중심으로 고려~조선시대 지리서와 금석문에 나타나는 옛 지명 등을 분석해 7세기 국원소경의 범위를 추정한 연구가 있다. 연구결과 국원소경의 범위를 오늘날 충주시를 중심으로 주변 일부지역이 겹치는 정도로 설정했다. 기존의 연구가 중원경의 행정관청이 존재했던 치소를 중심으로 연구했다면 이 연구는 국원소경의 외곽 경계를 개략적이나마 제시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
최초 소경의 행정관청이 있던 핵심 치소는 충주의 다른 고분군보다 위계가 높은 루암리·하구암리고분군에 대규모 고분군이 조성되고, 백제와 고구려의 흔적이 혼재하는 탑평리 일대를 중심지로 존재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4 7세기 후반 신라는 나당전쟁의 혼란한 상황에서 수세적인 전략으로 둘레 2,592보인 4.6km 규모의 국원성을 쌓았고, 남한강과 달천으로 둘러싸인 충주 시내로 중심지를 옮겼다. 최근 충주읍성 사고지 복원사업 부지 내 유적에서 고려~조선시대 문화층 아래에서 통일신라시대 토기류와 적심이 확인되고, 충주 안림지구 도시개발구역과 의림사지에서도 통일신라시대 수혈주거지와 토기류가 확인되면서 치소의 중심이 이동했다는데 탄력을 받고 있다.
일제강점기 봉현성으로 알려진 충주읍성 외성을 국원성으로 비정하고 나성 형태의 소경성으로 이해한 기존의 연구는 2011년 호암동토성과 2013년 충주 호암동 복합유적 내 토성이 발굴되면서 12세기 말~ 13세기 초 몽고군을 대비해 처음 쌓은 성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국원성의 가능성이 낮아졌다. 대신 충주읍성 외성과 함께 국원성으로 비정되던 대림산성은 7세기 후반 국제적인 정세 속에서 같은 시기 쌓은 성들과 비교했을 때 입보형 산성으로 대림산성이 국원성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나당전쟁이 마무리되면서 신문왕은 중앙집권 강화와 귀족세력의 통제 등을 목적으로 9주 5소경의 지방행정체제를 갖추고, 9주 5소경에는 신라왕경과 같이 계획적인 도시가 건설되기 시작한다. 국원소경에서 방리제가 적용된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충주 시내의 지형과 고지도 분석 결과, 8세기 전후 시기에 남북으로 길게 전개되는 장방형 공간 구성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이를 방리제에 따른 도시계획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주의 왕경유적처럼 도로, 배수시설, 연속적인 건물지 등 보다 직접적인 고고학적 근거가 추가적으로 확보되어야 할 것이다.
본 논고에서 제시한 중원경의 치소 범위와 핵심 치소의 세부 구조는 기존 연구자료를 토대로 한 잠정적인 이해에 해당한다. 향후 충주 시내 및 인접 지역에 대한 지속적인 발굴조사와 자료의 축적을 통해 본 고의 논의는 보완·수정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중원경과 중원문화 연구의 심화를 위한 기초 자료로 활용되기를 기대한다.












표 2 충주 삼국~통일신라시대 주요 유적 단계(강진주, 2023, 재편집)
| 연번 | 공간 범위 | 성격 | 유적명 | 1단계 | 2단계 | 3단계 | 4단계 | |
|---|---|---|---|---|---|---|---|---|
| 6C 중~7C 초 | 7C 초~7C 후 | 7C 후~8C 후 | 8C 후반 이후 | |||||
| ① | 서부 | 고분 | 루암리고분군 | |||||
| ② | 하구암리고분군 | |||||||
| ③ | 용관동고분군 | |||||||
| ④ | 영평리야철지1유적 | |||||||
| ⑤ | 가주동유적 | |||||||
| ⑥ | 수룡리유적 | |||||||
| ⑦ | 생활 | 탑평리유적 | ||||||
| ⑧ | 문성리유적 | |||||||
| ⑨ | 사지 | 탑평리사지 | ||||||
| ⑩ | 관방 | 장미산성 | ||||||
| ⑪ | 견학리토성 | |||||||
| 1 | 동부 | 고분 | 연수동고분군 | |||||
| 2 | 안림동174-33유적 | |||||||
| 3 | 호암동복합유적 | |||||||
| 4 | 용산동유적 | |||||||
| 5 | 단월동고분군 | |||||||
| 6 | 목행동유적 | |||||||
| 7 | 금릉동쇠저울유적 | |||||||
| 8 | 금릉동301-4유적 | |||||||
| 9 | 생활 | 충주읍성 | ||||||
| 10 | 관방 | 충주 남산성 | ||||||
| 11 | 대림산성 |
표 3 충주읍성 층위양상(충주읍성사고 복원사업 부지 내 유적 발굴조사 약보고서 참조)
| 층위 | 문화층 | 해발고도 | 층위도 |
|---|---|---|---|
| Ⅰ~Ⅱ | 근대 이후 복토층 | 93~94m | |
| Ⅲ | 조선후기 문화층 | 92.8~93m | |
| Ⅳ | 고려말~조선전기 문화층 | 92.5~92.8m | |
| Ⅴ | 통일신라~고려 문화층 | 92~92.5m |
표 4 7세기 후반 신라의 대규모 축성 현황
| 구분 | 축성시기 | 성의 명칭 | 현재 위치 | 추정 성명칭 | 성의 규모 |
|---|---|---|---|---|---|
| 1 | 672년 8월 | 주장성 | 경기 광주 | 남한산성 | 7,545m |
| 2 | 673년 2월 | 서형산성 | 경북 경주 | 서악산성 | 2,900m |
| 3 | 673년 8월 | 사열산성 | 충북 제천 | 망월산성 | 495m |
| 4 | 673년 9월 | 국원성 | 충북 충주 | ? | 4,600m |
| 5 | 673년 9월 | 북형산성 | 경북 경주 | 북형산성 | 1,800m |
| 6 | 673년 9월 | 소문성 | 경북 의성 | 금성산성 | 4,000m |
| 7 | 673년 9월 | 이산성 | 경북 고령 | 주산성 | 700m |
| 8 | 673년 9월 | 주양성 | 강원 춘천 | 봉의산성 | 1,284m |
| 9 | 673년 9월 | 주잠성 | 강원 고성 | ? | - |
| 10 | 673년 9월 | 만흥사산성 | 경남 거창 | 거열산성 | 1,115m |
| 11 | 673년 9월 | 골쟁현성 | 경남 양산 | ? | - |
표 5 충주 삼국·통일신라시대 주요 성곽
| 연번 | 산성명 | 운영 시기 | 둘레 | 표고 (비고) | 조사내용 (유구) | 조사내용 (주요유물) |
|---|---|---|---|---|---|---|
| 1 | 장태산성 | 삼국~고려 | 내성 398 외성 1,283 | 126~132 (66) | 성벽(토류) | 백제초기 토기편, 금동불상편, 인화문토기편, 주름무늬병편, 평기와 등 |
| 2 | 탄금대토성 | 삼국 | 420 | 65~105 (40) | 성벽, 주거지, 저수시설 등 | 심발형토기, 장란형토기, 경배, 철정, 송풍관편 등 |
| 3 | 장미산성 | 삼국 | 2,940 | 125~336 (60) | 성벽(토성→석성), 목책치성, 배수로 등 | 삼족기, 고배, 철촉, 소찰갑편, 송풍관편 등 |
| 4 | 남산성 | 삼국 | 1,120 | 515~636 (435) | 성벽, 문지, 집수지, 건물지, 수구 등 | 부가구연대부장경호편, 병편, 호, 동이, 평기와, 재갈 등 |
| 5 | 한훤령산성 | 삼국 | 480(잔존) | 520~545 (360) | 성벽 | 신라계 연질 및 경질토기편 |
| 6 | 문주리산성 | 삼국 | 300 | 200~241 (120) | 성벽 | - |
| 7 | 용관동산성 | 삼국 | 370 | 230~277 (65) | 성벽 | - |
| 8 | 견학리토성 | 통일신라 고려 | 124 | 110~114 (20) | 성벽, 해자, 배수로 등 | 사면편병, 주름무늬병, U 자형 보습, 철촉 등 |
| 9 | 대림산성 | 통일신라 고려 | 4,906 | 95~489 (25) | 성벽, 용도, 치성, 건물지 등 | 인화문토기편, 고배 뚜껑편, 청자편, 기와류 등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