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본문

고려시대 청주지역 청동기명 제작체제 추론과 약화 요인: 청주 사직1구역·청주시청사 유적을 중심으로*

Inference on the Production System of Bronze Vessels in the Cheongju Area during the Goryeo Dynasty and Factors of Its Decline: Focusing on the Sajik 1-guyeok and Cheongju City Hall Sites

정춘택1
Chuntaek Jeong1

1 충청북도역사문화연구원

1 Chungcheongbuk-do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발행: 2025년 1월·Vol. 35, No. ·pp. 211-232

DOI: https://doi.org/10.71244/jojm.2025.35.211

초록

본고에서는 청주 사직1구역 유적과 청주시청사 유적을 대상으로, 청주지역 청동기명(靑銅器皿) 제작이 어떠한 방식과 체제 속에서 전개되었으며 13세기 후엽 이후 어떻게 약화·단절되었는지를 고찰하였다. 추정 용해로(鎔解爐)의 배치와 피열면의 중첩, 토제용범(土製鎔范)·도가니 및 폐기 양상을 종합한 결과, 평상시 분산 조업과 특정 시기 집중 생산이 병행되는 청동주조 체제가 가동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제작체제와 관련해서는 관청 수요에 대응한 관영 수공업과 사찰이 수요·발주·검수를 주도하는 사원 수공업의 두 가능성을 함께 검토하였으나, 이를 단정할 수 있을 만한 결정적인 고고학적 표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따라서 관영 수공업과 사원 수공업이 서로 다른 수준과 방식으로 얽힌 다층적인 제작체제를 상정하되, 어느 한쪽으로 단정하지 않는 것이 현 단계에서 보다 신중한 해석일 것이다. 출토 청자의 편년에 따르면 청동기명 제작은 10~11세기에 본격화되어 12~13세기 중엽까지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13세기 후엽 이후 카단 침입, 동소(銅所) 해체, 광물 수급 약화 등 대내외 요인이 겹치며 제작 기반이 약화·단절의 변동을 겪은 것으로 이해된다.

Abstract

This study examines the production methods and systems of bronze vessels in the Cheongju area, focusing on the Sajik 1-guyeok and Cheongju City Hall sites, and analyzes the factors behind their decline and cessation after the late 13th century. Based on the arrangement of presumed melting furnaces, overlapping heat-affected surfaces, and the analysis of clay molds, crucibles, and disposal patterns, it is suggested that a bronze casting system operated through a combination of decentralized routine operations and concentrated production during specific periods. Regarding the production system, the possibilities of government-run handicrafts responding to official demand and temple-run handicrafts led by Buddhist institutions were both considered. However, definitive archaeological evidence to confirm either has not yet been identified. Therefore, it is more prudent to assume a multi-layered production system where government and temple handicrafts were intertwined in various ways. According to the chronology of excavated celadon, bronze vessel production began in earnest in the 10th–11th centuries and reached its peak from the 12th to the mid-13th century. However, after the late 13th century, the production base underwent decline and disruption due to internal and external factors such as the Qadan invasion, the dissolution of Dongso (copper workshops), and the weakening of mineral supply.

주제어:청주청동수공업청동기명추정 용해로폐기장토제용범공반 청자
Keywords:CheongjuBronze HandicraftBronze VesselsPresumed Melting FurnaceDisposal SiteClay MoldAssociated Celadon

Ⅰ. 머리말

이 글에서는 최근 발굴조사로 확인된 청주지역의 청동기명(靑銅器皿) 제작유적1의 발굴조사 성과를 중심 자료로 삼아,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이르는 도시의 변화 속에서 이 제작 활동이 어떻게 개시되고, 어떤 틀로 운영되었으며, 왜 약화 되었는지를 차례로 살피고자 한다. 분석 대상은 청주지역의 청동기명 제작유적에서 발굴조사된 주조 관련 유구·유물로서, 추정 용해로(鎔解爐)의 배치, 토제용범(土製鎔范)·도가니의 공반된 폐기장,2 편년지표로서 활용할 수 있는 청자 등이다. 이러한 물질 지표는 신라말·고려초에 걸친 도시 질서의 재편(西原京–西原府–淸州牧으로의 격상과 界首官 체제), 도심 사찰군의 의례 운영(연등회 등), 13세기 후엽 몽골의 침입과 맞물릴 때 비로소 설명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청주지역 청동기명 제작유적의 발굴·검토 과정에서 다음의 세 가지 의문을 도출하였고, 이를 본 연구의 핵심 질문으로 설정하고자 한다. 첫째, 신라말·고려초 청주의 청동수공업 개시여건의 규명이다. 이를 위해 청주에서 청동수공업이 도심에서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배경은 무엇이었는가를 살피고자 한다. 둘째, 고려시대 청주지역 청동기명 제작 체제에 대한 추론이다. 즉, 고려시대 청주지역 청동기명 제작 체제가 민간 공방, 소(所) 수공업, 관영 수공업, 사원(寺院) 수공업 가운데 어느 쪽에 가까웠는가를 추론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유구의 배치, 출토유물(청자 중심)의 편년과 성격 등을 함께 분석하고자 한다. 셋째, 고려시대 청주지역 청동기명 제작유적은 13세기 후엽의 약화와 단절은 어떤 사건과 연계되었는지 그 요인을 찾고자 한다. 이를 위해 유적 내 14세기 청자(간지명청자)가 거의 없는 상황을 주요 지표로 삼아 대외요인과 내부요인을 함께 검토하여 변동 요인을 규명하고자 한다.

발굴조사 자료의 종합 정리와 출토품의 과학적 분석이 남아 있음에도,3 이 글은 현 단계 성과와 기존 연구를 교차 검토하여, 중원역사문화권의 주요 도시이자 공예 중심 도시 청주의 도시사·공예사 논의를 확장하기 위한 기초 자료를 제시하는 데 목적이 있다. 나아가 청주지역 청동수공업의 개시여건·제작체제·약화 요인에 대한 이해를 심화함으로써, 중세 지방도시 공예사 연구에 기여하고자 한다.

Ⅱ. 고려시대 청주지역의 청동수공업 개시여건 검토

청주지역의 청동기명 제작유적 내에서 확인되는 층위와 유물의 조합은, 청동기명 제작이 언제 개시되었는지를 가리킨다. 사직1구역 · 청주시청사 유적에서 통일신라시대에 해당하는 유구와 유물은 고려시대의 유구와 유물에 비해 소량 확인되었다4). 이는 기존 점유의 잔여 흔적으로 이해될 여지가 크다. 신라 말 청주가 호족의 분열과 군사 동원이 연쇄적으로 이어지던 국면이었음을 감안하면5), 최근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청주지역 청동기명 제작유적에서 확인된 것과 같은 대규모 · 지속적 조업은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통일신라시대 청동 주조 기술(특히 토제용범과 도가니를 통한 주입 · 탈형 체계)은 경주 인근에서 주로 확인된다[사진 1]

경주 동천동 791 유적 청동 용해로 모습 및 토제용범 · 복원도
[사진 1] 경주 동천동 791 유적 청동 용해로 모습 및 토제용범 · 복원도
6). 이 동천동 일원의 자료군은 통일신라시대 경주의 청동 주조 유적의 전형을 알려 주는 예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면, 청동기물 제작유적이 경주권을 넘어 청주지역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최근 조사가 완료된 청주 사직1구역 유적과 청주시청사 유적 외에도 청주 수동 133번지 유적7), 청주 문화동 15번지 유적8) 등이 청주지역에서 확인되었으며[사진 2]

청주지역 내 청동기명 제작유적의 분포
[사진 2] 청주지역 내 청동기명 제작유적의 분포
이들 유적의 중심연대는 고려시대로 보고되었다. 신라말 전란 종결과 고려 건국(936)을 축으로 한 정치·군사적 안정의 회복이 청동수공업 개시여건의 기본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 속에서 고려초 청주는 서원경-서원부-청주목으로 차례로 변화되었고, 983년(성종 2) 12목 설치 때 충주와 함께 牧이 되었으며, 1018년(현종 9)에는 主縣이자 界首官이 되어 고려 말까지 지방통치의 중심 도시로 자리하였다9).

이러한 도시·행정 체계의 정비는 청동수공업 개시에 필요한 물자의 조달과 검사, 납입의 절차를 일정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고, 장인을 상시로 부르거나 자재를 거듭하여 들여오는 일을 가능하게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보완하는 고고학적 편년 지표는 두 유적에서 공통으로 출토된 해무리굽완이다. 두 유적에서는 선해무리굽완·중간단계(중국식) 해무리굽완·한국식 해무리굽완·변형(퇴화) 해무리굽완이 청동기명 제작과 관련된 층위와 유구에서 토제용범과 함께 출토되었다[사진 3]

청주 사직1구역 유적 및 청주 청주시청사 건립부지 내 유적 출토 해무리굽완편
[사진 3] 청주 사직1구역 유적 및 청주 청주시청사 건립부지 내 유적 출토 해무리굽완편
10).

선해무리굽완은 10세기 2/4분기, 좀 더 구체적으로는 939년에서 949년을 시작점으로 보고 있다11). 그리고 변형(퇴화) 해무리굽완의 하한은 대체로 11세기 후반으로 보고 있다12). 이처럼 두 유적 모두에서 10~11세기로 편년 가능한 해무리굽완이 출토되었고, 해무리굽완이 출토된 층위에서 추정 용해로와 토제용범과 도가니가 공반되는 폐기장이 함께 확인된다. 이는 청동 수공업의 개시 시점을 10–11세기로 잡을 수 있는 1차 고고학적 단서가 된다.

물론 고려시대 청주의 지방 제도 변화와 고고학적 자료만으로 청주지역의 청동기명 제작 유적의 개시 여건을 모두 설명하기에는 불충분하다. 청주의 사례는 고려시대 불교 의례 수요의 증대가 도심 청동수공업의 개시 국면을 견인한 요인으로 작동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하여 광종 13년(962)의 용두사 철당간은 대형의 당간을 당시 청주 도심 한가운데 세운 사건으로[사진 4]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준풍(峻豊) 3년(962)
[사진 4]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준풍(峻豊) 3년(962)
, 특히 용두사지 철당간 조성기에 등장하는 김·손·경·한씨의 관직과 본관을 분석하여, 10세기 중엽 청주 도심에서 사찰과 재지 관반, 호족 가문이 군사·경제·교육 기능을 자율적으로 분담하는 지배 구조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음을 지적된 바 있다13). 특히 조성기 말미의 ‘鑄大▦▦’를 철장과 관련된 표현으로 보고, 용두사지 철당간 주성에 참여한 장인이 청주경씨 가문에 예속된 수공업장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제기되기도 하였다14). 이 대목에서 주목할 점은 발원을 주도한 청주 김씨와 실무를 담당한 청주 경씨를 비롯한 청주지역 유력 호족이 재료를 모으고 장인을 동원하여 감독·검수에 이르기까지의 절차를 실제로 수행했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금속을 다루는 기술이 호족과 장인을 중심으로 청주지역에 존재하였다는 점은, 또한 고려시대 청주지역 청동수공업의 개시여건 가운데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어 현종(顯宗, 1009~1031 재위)은 거란의 제2차 침입으로 나주에 피난하였다가 1011년(현종 2) 1월 21일 개경으로 귀환하는 길에 전주·공주를 거쳐 2월 13일 청주에 이르렀다. 청주에 머문 나흘 동안 현종은 행궁에서 연등회를 거행하였다. 이는 즉위 초부터 불교에 깊은 신앙을 지녔던 현종이 부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연등회와 팔관회를 부흥시킨 흐름의 연장선 이었다15). 이후 청주김씨 가문은 법상종·현화사의 중심 인맥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개성과 청주지역 사찰의 의례 운영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6). 이러한 흐름은 유사한 시기에 용두사지 철당간을 발원한 청주김씨 가문에서 현종(顯宗, 1009~1031 재위)이후 3대에 걸쳐 향완·병·광명대 같은 청동 의례구의 되풀이되는 발주로 이어졌을 것으로 보인다[사진 5]

청주 문화동 50-2번지 유적 출토 청동향완·청동표형병·청동광명대
[사진 5] 청주 문화동 50-2번지 유적 출토 청동향완·청동표형병·청동광명대
17).

또한 이 시기와 관련된 편년유물은 사뇌사(思惱寺)18) 출토품 가운데 ‘통화 15년(997년)’이 새겨진 청동 발우와 ‘태평 15(1035년)’이 새겨진 청동 접시가 있다[사진 6]

사뇌사 ‘통화 15년(997년)’이 새겨진 청동 발우·‘태평 15(1035년)’이 새겨진 청동 접시
[사진 6] 사뇌사 ‘통화 15년(997년)’이 새겨진 청동 발우·‘태평 15(1035년)’이 새겨진 청동 접시
. 다만, 이와 같은 향완·광명대·발우·접시 등 청동 공양구를 제작한 직접적인 토제용범은 아직까지 청주지역 청동기명 제작유적에서 확인되지 않아, 동일 제작처·동일 작품으로 곧바로 연결하기 어렵다. 따라서 양자의 관계는 정황적 연계에 근거한 가능성 제시 수준에 그쳐야 하며, 직접 연결성은 추가 분석과 신자료에 따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정리하면, 청주지역 청동기명 제작유적 내에서 확인된 해무리굽완의 편년, 추정 용해로·노 폐기장, 토제용범, 도가니의 공반은 이 생산이 10~11세기에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그 배경에는 신라말의 혼란기를 지나 고려초 행정이 정비된 조건이 있었으며, 여기에 광종의 철당간, 현종의 연등회, 법상종·현화사로 이어진 의례 확대가 겹친 것으로 보았다. 끝으로 아직 직접적인 연결에는 신중을 기해야 하지만, 문화동 유적 출토 향완·광명대와 사뇌사 출토품 가운데 ‘통화 15년(997년)’ 청동 발우와 ‘태평 15(1035년)’ 청동 접시는 이 시기의 정황과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청주의 청동기명 제작은 10~11세기, 행정 재편·사찰 의례 수요·호족 네트워크가 겹쳐지는 지점에서 개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어지는 Ⅲ장에서는, 이러한 개시 국면 위에서 청주 도심 청동기명 제작이 어떤 조직·체제 속에서 운영되었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Ⅲ. 고려시대 청주지역 청동기명 제작체제 추론

앞서 신라말·고려초 청주지역 청동수공업 개시여건을 검토한 결과, 청주지역 청동기명 제작유적은 10~11세기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보았다. 청주지역 청동기명 제작유적 내에서 출토된 청자를 통해 보면, 12세기를 지나 13세기 중엽까지 그 활동이 무르익었다 할 수 있다. 이에 본 장에서는 청주지역 청동기명 제작유적에서 확인된 유구와 유물을 바탕으로 어떠한 체제 아래에서 운영되었는가를 규명하고자 한다.

1. 유구 및 유물을 통해 본 제작체제의 단서

1) 유구

사직1구역 유적에서 확인된 추정 용해로의 모두 28기로서, 추정 용해로의 상부구조는 후대의 지형변화로 인해 대부분 삭평되었다. 이러한 용해로의 하부에는 숯, 폐기와, 점토 등을 깔아 방습하였으며, 피열면이 중첩되어 지속 사용된 용해로들도 확인되었다[사진 7]

청주 사직1구역 2호 추정 용해로, 3~8호 추정 용해로
[사진 7] 청주 사직1구역 2호 추정 용해로, 3~8호 추정 용해로
. 그리고 용해로들이 일정 간격으로 이격되어 동시에 조업한 듯한 정황도 확인된다[사진 8]
청주 사직1구역 25호 추정 용해로(직경 약 80~85cm)
[사진 8] 청주 사직1구역 25호 추정 용해로(직경 약 80~85cm)
.

청주시청사 유적에서 확인된 추정 용해로는 모두 7기로서, 일부 할석·점토를 활용하여 도가니를 고정하는 고상대(高床臺)가 확인된 사례 및 주조 공정을 유추할 수 있는 용해로 및 토제용범을 고정한 수혈이 세트로 확인된 경우도 있다[사진 9]

청주시청사 추정 용해로 및 주변 토제용범을 고정한 수혈
[사진 9] 청주시청사 추정 용해로 및 주변 토제용범을 고정한 수혈
. 이는 청동기명 주조 공정에서 가열-주입-탈형이 한 자리에서 이어지는 연쇄 동선의 정황을 보여준다.

사직1구역 유적과 청주시청사 유적에서는 모두 토제용범과 도가니가 추정 용해로 인근 폐기장에서 출토되었다. 폐기장의 평면형태는 대부분 부정형이며, 규모는 1×1m 정도의 초소형부터 19×22m 정도의 초대형까지 다양하게 확인되었다. 폐기 양상은 일정 기간 조업한 뒤 한꺼번에 버린 듯한 흔적과 지속적인 폐기가 이루어진 듯한 양상이 함께 확인된다[사진 10]

청주 사직1구역 12호 폐기장(집중 폐기 양상 추정)·청주시청사 5호 폐기장(순차적 폐기 양상 추정)
[사진 10] 청주 사직1구역 12호 폐기장(집중 폐기 양상 추정)·청주시청사 5호 폐기장(순차적 폐기 양상 추정)
.

사직1구역에서는 동일 지점의 추정 용해로 중복·보수와 다층 피열면이 확인되어 지속 조업의 흔적이 확인되면서도, 일정 간격으로 이격된 용해로들이 일정 간격으로 이격되어 동시에 집중 조업한 듯한 정황도 확인되었다. 청주시청시 유적에서는 추정 용해로와 토제용범을 고정한 수혈이 확인되어 가열→주입→탈형 동선을 추정할 수 있게 한다. 두 유적의 폐기장의 양상은 일괄 폐기 양상과 지속 폐기 양상이 함께 확인되었다.

따라서 두 유적은 상황에 따라 역할이 겹치지만, 기능적으로는 상호 보완적으로 운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평시에는 저강도의 지속 조업이 이루어지다, 의례·행사 시기에는 여러 용해로의 동시 가동을 통한 단기 집중 조업이 병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 유물

청주 사직1구역 유적과 청주시청사 유적에서는 앞서 살펴보았던 해무리굽완은 소량 출토되었으며 12세기에서 13세기 중엽경으로 편년할 수 있는 청자가 대다수를 이룬다. 먼저 청주 사직1구역 유적 출토 청자 가운데 12세기에서 13세기 중엽경으로 편년 가능한 것들은 청자음각국화문완편과 청자음각연판문완이 있다[사진 11]

청주 사직1구역 유적 출토 청자편 1
[사진 11] 청주 사직1구역 유적 출토 청자편 1
.19)

또한 해남산 철화청자의 파편으로 보이는 철화청자편, 국화문과 선문이 백상감된 상감청자편 등 12세기에서 13세기 전반을 중심시기로 갖는 청자편도 출토되었다[사진 12]

청주 사직1구역 유적 출토 청자편 2
[사진 12] 청주 사직1구역 유적 출토 청자편 2
.20)

그리고 청주 사직1구역 유적에서 출토된 청자류는 번조받침을 규석받침을 쓰고 유약을 전면에 고르게 시유한 양질의 청자편과 번조받침을 내화토빚음 받침을 쓰고 굽 주변에는 유약을 시유하지 않은 조질의 청자편 등이 함께 확인되었다[사진 13]

청주 사직1구역 유적 출토 양질청자 및 조질청자
[사진 13] 청주 사직1구역 유적 출토 양질청자 및 조질청자
.

청주시청사 유적에서도 12세기에서 13세기 전반으로 편년할 수 있는 청자가 다수 출토되었는데, 음각연판문·압출양각21)이 시문된 청자편과·백상감으로 이중원권을 시문하고 그 안에 모란문(?)을 흑상감과 백상감을 조합하여 시문한 상감청자편이 출토되었다[사진 14]

청주시청사 유적 출토 청자편
[사진 14] 청주시청사 유적 출토 청자편
.22)

한편, 청주시청사 유적에서는 복소법으로 소성하여 송(宋)-원(元)대 경덕진(景德鎭)계 요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백자가 출토되어 주목된다[사진 15]

청주시청사 유적 출토 중국백자편
[사진 15] 청주시청사 유적 출토 중국백자편
. 청주 사직1구역 유적과 청주시청사 유적 출토 자기들을 보면 중국 백자(경덕진계) 같은 위세품과 강진·부안 산으로 보이는 양질의 청자가 함께 확인된다. 이러한 양질의 자기는 청주지역 청동기명 제작유적 현장을 관리하던 사람들이 직접 사용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간지명청자’ 단계(13세기 후엽경 이후 또는 14세기 전엽 이후)의 양식적 특징을 가진 청자가 거의 보이지 않는 특징을 살필 수 있다.23)

이외 특기할만한 유물로는 청주 사직1구역 유적에서 출토된 도기수반이 있다. 이 도기수반은 전이 있는 토제 내범과 그 크기가 매우 유사[사진 16]

청주 사직1구역 유적 출토 도기편 및 토제 내범
[사진 16] 청주 사직1구역 유적 출토 도기편 및 토제 내범
. 이와 관련하여 사뇌사 청동수반과 청주 흥덕사지에서 출토된 청동수반편과 비교 가능하다[사진 17]
청주 사뇌사 출토품 청동수반과 청주 흥덕사지 출토 청동수반편
[사진 17] 청주 사뇌사 출토품 청동수반과 청주 흥덕사지 출토 청동수반편
.

19) 청주 사직1구역 유적에서 출토된 청자음각국화문완은 규석받침에 고른 시유가 확인되어, 강진 또는 부안에서 제작된 양질의 비색 청자로 보인다. 음각으로 국화문이 시문된 청자는 12세기 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편년 할 수 있다(장남원, 2006). 그리고 음각으로 연판문이 시문된 완의 경우 죽찰을 통해 13세기 전반의 청자 제작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태안 마도 1·2호선에서 출수되었다(이종민, 2011).

20) 청주 사직1구역 유적에서 출토된 철화청자편은 유색이 녹황색을 띠며, 두껍게 채색하여 짙은 색으로 발색된 문양의 시문형태를 통해 12~13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김태은, 2022).

21) 압출양각 청자는 강진 용운리 10-Ⅱ층위에서 확인되었으며, 이를 기준할 때, 대개 해무리굽 완의 소멸시기와 맞물리는 11세기 말경부터 13세기 전·중반경에 이르는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파악되었다(장남원, 2004).

22) 상감기법의 편년자료의 수는 많지 않으나, 본격적인 상감청자를 동반하는 유적은 마도 1호선부터이다. 출수된 표형주자에는 상감으로 능화창, 이중원권을 배치하고 그 안에 식물소재를 표현하고 있어 이들의 소재와 구도는 상감기법 단계설정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이종민, 2016). 이 연구에 의하면 청주시청사 유적 출토 상감청자편은 13세기 전반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23) 간지명청자는 고려 후기에 주로 제작된 기사(己巳), 경오(庚午), 임신(壬申), 계유(癸酉), 갑술(甲戌), 임오(壬午), 정해(丁亥), 을미(乙未) 등의 간지가 그릇의 내저면에 흑상감되어 있는 그릇으로, 가장 먼저 보이는 ‘기사(己巳)’의 연대를 1269년으로 볼지, 1329년으로 볼지를 두고 견해가 갈린다(강경숙, 2012, 293쪽.). 다만 본고에서 고찰하는 유적에서는 13세기 후엽 또는 14세기 전엽으로 볼 수 있는 청자의 출토사례가 극히 드물었다.

2. 제작체제 추론

이상의 결과를 종합하여 청주지역의 청동기명 제작유적의 제작체제를 추론해보고자 한다. 고려시대 수공업은 관영·민영, 그리고 所수공업으로 나눌 수 있는데, 금속수공업 가운데 소 수공업은 원료를 주로 조달하므로, 제품 생산은 관영과 민영, 그리고 사원의 공장이 담당했다.24)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고려의 관청 수공업은 중앙·지방 관청이 관수(官需) 충당을 위해 전속 장인(工匠)을 조직·통제해 운영한 체제로, 금속 부문에서는 장야서(掌冶署) 소속 관속 공장이 핵심을 이루었다. 관속 공장은 장기간 근무(연 300일 내외), 공장안(工匠案) 편제와 세습 규정, 녹봉·토지(무산계) 지급 등 제도적 울타리 안에서 관리되었고, 필요 시 독립 공장(평시 자영·주문, 특정 기간 동원)도 병용되었다.25)

반면 소(所) 수공업은 국가가 특산·공납을 위해 설치한 행정구역형 생산체로, 철소·은소·묵소·지소·사소 등이 지역별로 분포하였다. 소는 본질적으로 원료·반제품의 공납을 지향했고, 중·후기에 이르러 소의 기반이 약화·해체되면서 장인이 민간 전환으로 이동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이와 별개로 민간 수공업은 주문·시장 수요에 반응하는 영역으로, 관영·소 체제와 교차하면서 성장하였다.26)

사원 수공업과 관해서는 고려 전기까지 주지 중심의 운영과 예속 인력(승장(僧匠)·사원노비)·수원승(随院僧)을 통해 사원 자체 수요품·의례구 제작, 나아가 일부 품목의 대외 유통·진상까지 수행할 수 있는 구조였다. 후대로 갈수록 전문화·상품화가 진전되며 금속 가공품 생산도 사원 단위에서 포괄된 것으로 본다.27)

이를 고려시대 청주 도심의 청동주조 유적에 대입해 보겠다. 먼저 관청 수공업과의 연관성을 상정하면 두 유적 모두 규격화된 토제용범의 출토, 정형화된 폐기 양상과 관리·감독의 주체인 관인(官人)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양질의 청자와 송-원대 경덕진 계로 추정되는 백자가 출토되었음을 이미 살펴보았다. 그리고 청주시청사 유적에서 확인된 공정의 연속성은 발주-감리-검수와 같은 공정 절차가 청동기명 주조 현장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관청 수공업을 단정적으로 뒷받침할 만한 관인(官印)이나 대규모 관영 창고 등 결정적인 고고학적 증거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현 단계에서 청주 도심 청동주조 유적의 제작체제를 곧바로 관영 수공업으로 규정하는 데에는 신중함이 필요하다. 다만 사뇌사 출토 청동기름말 명문에 ‘淸州牧官平校思惱寺傳受油斗印監副使判官錄住持重大師宗常加成’이라 하여, 청주목 관원이 사뇌사에 전하는 기름말을 평교(平校)·검수하였음을 밝히고 있는 점은, 사찰 의례구 제작과 관청의 관리·검수 체계가 일정 부분 맞물려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다[사진 18]

사뇌사명 청동기름말과 명문 내용 및 명문 해석
사진 18 사뇌사명 청동기름말과 명문 내용 및 명문 해석
.28)

그렇다면 고려시대 청주지역의 사찰 경제와 호족 등 인적 연결과 관련한 사원 수공업과의 연관성을 상정해보겠다. 고려시대 청주에서는 현종의 현화사 창건 이후 법상종이 중핵 교단으로 부상했고, 청주 김씨가 영념–순진–덕겸으로 이어지는 3대의 현화사 주지를 배출했다. 이는 청주의 유력 호족, 교단, 왕실을 잇는 통로가 형성되었음을 보여 주며, 사뇌사·흥덕사·용두사 등 도심 사찰군의 의례·장엄 수요의 증가를 낳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런 배경은 사찰 수공업 또는 사찰 주도의 발주–외주(민간 공방) 형태의 혼합형 사원 수공업의 운영이 작동하기 쉬운 조건으로 볼 수 있다. 아직 직접적인 연결은 힘들지만, 사뇌사 출토유물 사찰명과 시납(施納) 명문과 장인명(匠 新達), 향리 관여(戶長 등) 등이 확인되는 점은 사원 수공업과의 연관성을 엿볼 수 있는 지점이다[사진 19]

사뇌사명 청동금고와 명문 내용 및 명문 해석
사진 19 사뇌사명 청동금고와 명문 내용 및 명문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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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청주 사직1구역 유적과 청주시청사 유적에서는 불교용 완성품이나 그것과 직접 연관된 토제용범 등 확실한 고고학적 증거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사원 수공업의 직접적인 개입을 단정하기 어려운 한계도 존재한다. 다만 인근에 위치한 청주 수동 133번지 유적에서 뇌문(雷文)과 연뢰(蓮蕾)로 추정되는 6개의 원형 홈이 파여 있는 토제용범이 출토되어 고려 범종의 연곽(蓮廓)과 비교된 바 있어[사진 20]

청주 수동 133번지 유적 출토 토제용범과 주변 출토 고려 범종 비교
사진 20 청주 수동 133번지 유적 출토 토제용범과 주변 출토 고려 범종 비교
29) 향후 청주 도심 일대 청동주조 유적군을 사원 수공업과의 연관성 속에서 재검토할 여지를 열어 준다.

현재까지의 자료를 종합할 때, 고려시대 청주 도심 청동주조 유적의 제작체제는 관영 수공업과 사원 수공업 양 측면의 개입 가능성을 모두 열어 둔 채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규격화된 토제용범과 정형화된 폐기 양상, 관인 사용층으로 추정되는 고급 청자·수입 자기의 공반은 관청 수요와 그 관리 체계를 떠올리게 하는 한편, 사뇌사 명문 청동기와 도심 사찰군·호족·향리·장인을 잇는 인적 네트워크는 사찰 주도의 발주–외주 구조, 곧 ‘사원 수공업형 혼합 운영’이 일정 부분 작동했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두 유적에서 아직 관영 창고·관인, 불교의례용 완성품과 직결되는 토제용범 등 결정적인 표지가 확보되지 않은 이상, 어느 한쪽으로 단정하기보다는 관청·사찰·민간 공방이 서로 다른 수준과 방식으로 얽힌 다층적 제작체제를 상정하는 편이 더 신중한 해석일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향후 정식 보고서 발간 과정에서 도가니·토제용범에 대한 XRF·XRD·FE-SEM 분석과 공반 관계의 세밀한 검토, 동시기 문헌 자료의 보완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규명되어야 할 과제로 남는다.

Ⅳ. 청주지역 청동기명 제작유적의 약화 요인

청주지역 청동기명 제작유적이 13세기 후엽을 경계로 약화·단절되는 흐름은 앞서 살펴본 청자의 출토 정황으로 알 수 있다. 청주 사직1구역 유적은 해무리굽완–청자연판문완–철화청자-상감청자로 볼 때 13세기 중엽 직전까지는 생산 현장의 생활·소비 단서가 뚜렷하지만, 그 이후를 지시하는 간지명청자 단계(13세기 후엽 또는 14세기 전엽)의 청자는 단절에 가까울 만큼 거의 보이지 않는다. 청주시청사 부지 역시 13세기 후엽 이후에 해당하는 청자 자료가 사실상 공백이고, 이후 조선시대 유구가 확인되는 층위에서 15세기 전엽의 분청사기가 나타난다30.

출토된 자기를 통해 본 두 유적의 시차는 미세하게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13세기 후엽 이후 단절’이라는 특징을 공유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공백은 단순한 발굴 편차만으로 설명되기 어렵고, 동시기 외부 충격·내부 변화와 맞물린 지역 생산 기반의 수축으로 변동 요인을 설명할 수 있다.

이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외부 요인은 몽골과의 전쟁 과정, 특히 ‘카단(Qadan)’의 침입과 그 여파였던 것으로 보인다. 카단은 몽케의 사촌으로 1287년 쿠빌라이에 대항한 나얀 반란에 호응했다가 패망 후 잔여 세력을 이끌고 요동을 휩쓸며 고려로 들어왔다. 1290년 말 카단은 철령을 넘어 양근을 공격하고, 1291년 정월 원주에서 패퇴한 뒤 4월 충주산성을 공격했으나 고려군의 방호별감과 주민들의 항전에 밀려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충주 패전 뒤 카단군은 진로를 서쪽으로 틀어 청주를 경유하며 약탈을 자행했다 [그림 1]

그림 1
31. 카단(Qadan)의 침입은 지역 사찰의 금속기명 퇴장(退藏) 시기도 이 시기와 겹친다. 청주 사뇌사 유물의 퇴장(退藏) 시기와 관련하여 1249 · 1258 · 1260년 전후의 간지(干支) 명문과 카단의 침입 정황을 통해, 1291년 4월 카단군을 피해 사뇌사의 사람들이 급히 퇴장한 것으로 보았다 [사진 21]
사뇌사 퇴장(退藏) 유물 수습처리 모습
사진 21 사뇌사 퇴장(退藏) 유물 수습처리 모습
32. 곧, 카단의 침입으로 인한 청주지역의 큰 피해는 도심의 청동기명 제작현장에도 직접적이고 연쇄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내부적인 요인으로는 동 수급과 관련된 제도 · 재정 구조가 악화된 점도 지적된다. 고려의 동 생산은 본래 국가가 ‘동소(銅所)’를 통해 장악하고 민간 채굴을 금지하는 체제였고33, 중기 이후 광권 · 노역의 부담이 커지면서 소(所) 제도 자체가 무신 집권기와 원 간섭기를 거치며 해체 · 축소되었다. 소가 붕괴하자 국가는 농한기의 백성 · 군인을 징발해 채광 · 제련을 메꾸었고, 원 간섭기에는 은 · 구리의 중앙 수취를 위해 원이 직접 관원을 파견하는 일까지 벌어졌다34. 이 일련의 사정은 귀금속·구리의 안정적 조달을 어렵게 만들었고, 지방도시의 상시적 청동기명 주조에 구조적 제약을 가했다는 점에서 13세기 후엽 청주지역의 청동기명 제작유적 약화 국면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정리하면, 청주 도심의 청동기명 제작은 13세기 후엽 카단의 침입으로 인한 충격이라는 직접적인 외부요인, 동소 해체와 광물 수급의 제도적 약화라는 내부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동하여 청주 사직1구역 유적의 ‘13세기 후엽 이후 공백’과 청주시청사 유적의 ‘13세기 후엽 이후 공백-15세기 전엽 분청 재개’라는 시간적 간극과 변동 요인을 설명할 수 있다.

Ⅴ. 맺음말

본고는 청주 사직1구역·청주시청사 청동기명 제작유적을 대상으로, 개시 여건 검토, 제작 대상과 공정과정, 제작체제 추론, 그리고 13세기 후엽 이후 약화 요인을 검토하였다.

발굴조사를 통해 본 청주지역 청동기명 제작유적의 운영 특징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피열면이 중첩되어 지속 사용된 추정 용해로(鎔解爐)와 추정 용해로 여러 기가 일정 간격으로 배치하여 동시 조업하는 방식이 함께 확인된다. 둘째, 일정한 규격의 토제용범(土製鎔范)과 도가니가 추정 용해로 주변 폐기장에서 함께 출토된다. 셋째, 한때 대량으로 폐기한 흔적과 일상적으로 소량씩 폐기한 흔적이 공존한다. 이러한 사실은 평상시에는 분산적으로 가동하다가 의례나 행사가 집중될 때에는 다수의 용해로를 동시에 가동하여 단기간에 생산을 집중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추정했다.

이러한 양상을 도시사·종교사 맥락에서 보면, 광종 13년(962) 용두사 철당간 건립과 이를 둘러싼 청주 호족의 활동, 현종대 연등회 복구, 법상종 및 청주 김씨 가문의 영념·순진·덕겸이 연이어 현화사 주지를 맡은 사실 등은, 청주 호족·교단·왕실을 잇는 인적 관계망이 도심 사찰군의 의례 수요 확대와 발주·검수의 공적 경로 형성에 일정하게 기여하였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고려시대 청주지역 청동기명 제작체제에 대한 추정으로는, 관영 수공업과 사원 수공업 양 측면의 개입 가능성을 모두 열어 둔 채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규격화된 토제용범과 정형화된 폐기 양상, 관인 사용층으로 추정되는 고급 청자·수입 자기의 공반은 관청 수요와 그 관리 체계를 떠올리게 하는 한편, 사뇌사 명문 청동기와 도심 사찰군·호족·향리·장인을 잇는 인적 네트워크는 사찰 주도의 발주-외주 구조, 곧 ‘사원 수공업형 혼합 운영’이 일정 부분 작동했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다만 유적 내에서 관영 수공업을 단정할 수 있는 관인·관영 창고 유구 등이 드러나지 않았고, 불교 의례구 완성품과 직접 연관된 토제용범 등 확실한 고고학적 증거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현 단계에서는 관청 수공업과 사원 수공업의 가능성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수공업이 서로 다른 수준과 방식으로 얽힌 다층적인 제작체제를 상정하되, 어느 한쪽으로 단정하지 않는 것이 더욱 신중한 해석으로 본다. 이 점은 정식 보고서 발간 과정에서 과학 분석 결과와 세밀한 비교 분석을 통해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유적에서 출토된 청자의 편년에 기대어 청주지역 청동기명 제작유적은 신라말·고려초의 혼란기를 지나, 정치·군사적 안정된 토대 위에 10~11세기 개시되었으며, 12~13세기 중엽의 전성기를 지나 13세기 후엽에 공백에 가까운 상황이 확인된다. 두 유적 모두 13세기 중엽 직전까지는 자기군(해무리굽완, 음각연판문 청자, 철화청자, 상감청자)이 연속되지만, 그 이후의 유물은 급감하거나 공백을 보인다. 이는 카단 침입(1291)을 포함한 전란 충격, 동소(銅所) 해체와 광물 수급 약화 등 대내외 여건의 변화가 맞물리면서, 청주 도심 청동기명 제작기반이 점차 약화·단절된 결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연구는 약보고서와 제한된 현장 자료에 근거한 시론에 머문다. 합금 성분·미세조직·피열층·주입흔, 토제용범 재질에 대한 과학 분석과 유적 간 위계·기능 분담의 정밀 비교는 후속 과제로 남는다. 또한 불교 의례구 완성품과 제작 유적의 직접적 관련성은 단정할 수 없으며, 이는 추가 발굴과 문헌 교차 검증이 필요하다. 미비와 누락에 대한 선학의 비평을 구하며, 향후 연구로 보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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