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earch Article
7세기 고구려의 왕호 정비와 연개소문
동국대학교
발행: 2024년 1월 · 32권 · pp. 5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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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본고는 고구려 왕호에서 大王형 왕호로 분류되었던 세 명의 왕인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호의 역사적 의미를 파악하고 그들이 문헌 기록상에서 대왕으로서 남게 된 원인과 배경을 찾고자 한 것이다. 그 결과 대왕형 왕호의 성립이 연개소문의 정변과 보장왕의 즉위에 대한 정당성 확보의 필요에 의해 일어난 것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본문에서 확인한 내용들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먼저 고구려 왕호의 원초적인 형태는 諱형 왕호였고, 1~5대왕은 그러한 방식에 따라 왕호가 부여되고 전승되었다. 반면에 다수를 차지하는 왕호는 葬地名 왕호로서, 첫 장지명 왕호인 9대 고국천왕을 시작으로 광개토왕 이전까지 이어진다. 이른바 3대왕은 6~8대왕의 왕호로서 휘형 왕호와 장지명 왕호의 사이에 위치하면서도 왕호의 형태를 달리하는 독특한 위치를 지닌다.
그런데 왕호를 정하는데 기준이 되는 장지의 전승이 불완전한 데 반해, 휘의 전승은 구체적이라는 점에서 바라보면 3대왕은 본래 휘형 왕호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파악하였다. 특히 이들이 대내외적으로 뚜렷한 행적을 남긴 자들이라는 점에서 당시 고구려인들에게 분명한 기억을 가진 자들로서 인식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휘형 왕호가 전대의 왕호 부여 방식을 잇는다는 점에서도 보다 타당성이 있다고 보았다. 곧, 3대왕의 본래 왕호는 宮王, 遂城王, 伯固王이었으리라 이해하였다.
다음으로 이들이 3대왕으로 바뀐 시점으로는 종래 『신집』 편찬 시를 주목했던 것과 달리연개소문 정변 이후 정권의 정당성을 찾기 위한 목적에서 3대왕이 재조명 되었다고 보았다. 3대왕의 관계와 행적이 보장왕의 아버지인 대양왕을 비롯하여 영양왕-영류왕(무양왕)과 매우유사함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변을 통해 권력을 잡은 연개소문과 보장왕은 선대왕들과 그 형제에게 3양왕이라는 또 하나의 왕호군을 추숭하면서 3대왕을 선례로 삼았고, 3대왕의 행보가 신대왕의 즉위와 명림답부의국상 취임으로 귀결된 것처럼 3양왕의 행보가 보장왕의 즉위와 연개소문의 막리지 취임으로 귀결되도록 명분 만들기를 했다고 보았다.
먼저 고구려 왕호의 원초적인 형태는 諱형 왕호였고, 1~5대왕은 그러한 방식에 따라 왕호가 부여되고 전승되었다. 반면에 다수를 차지하는 왕호는 葬地名 왕호로서, 첫 장지명 왕호인 9대 고국천왕을 시작으로 광개토왕 이전까지 이어진다. 이른바 3대왕은 6~8대왕의 왕호로서 휘형 왕호와 장지명 왕호의 사이에 위치하면서도 왕호의 형태를 달리하는 독특한 위치를 지닌다.
그런데 왕호를 정하는데 기준이 되는 장지의 전승이 불완전한 데 반해, 휘의 전승은 구체적이라는 점에서 바라보면 3대왕은 본래 휘형 왕호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파악하였다. 특히 이들이 대내외적으로 뚜렷한 행적을 남긴 자들이라는 점에서 당시 고구려인들에게 분명한 기억을 가진 자들로서 인식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휘형 왕호가 전대의 왕호 부여 방식을 잇는다는 점에서도 보다 타당성이 있다고 보았다. 곧, 3대왕의 본래 왕호는 宮王, 遂城王, 伯固王이었으리라 이해하였다.
다음으로 이들이 3대왕으로 바뀐 시점으로는 종래 『신집』 편찬 시를 주목했던 것과 달리연개소문 정변 이후 정권의 정당성을 찾기 위한 목적에서 3대왕이 재조명 되었다고 보았다. 3대왕의 관계와 행적이 보장왕의 아버지인 대양왕을 비롯하여 영양왕-영류왕(무양왕)과 매우유사함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변을 통해 권력을 잡은 연개소문과 보장왕은 선대왕들과 그 형제에게 3양왕이라는 또 하나의 왕호군을 추숭하면서 3대왕을 선례로 삼았고, 3대왕의 행보가 신대왕의 즉위와 명림답부의국상 취임으로 귀결된 것처럼 3양왕의 행보가 보장왕의 즉위와 연개소문의 막리지 취임으로 귀결되도록 명분 만들기를 했다고 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