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본문

북원경·중원경·서원경의 설치배경과 역사적 의의

Background of the Establishment and Historical Significance of Bukwon-gyeong, Jungwon-gyeong, and Seowon-gyeong

이인재1
Injae Lee1

1 연세대학교

1 Yonsei University

발행: 2025년 1월·Vol. 35, No. ·pp. 1-36

DOI: https://doi.org/10.71244/jojm.2025.35.1

초록

삼국통일전쟁을 마무리한 신라는 옛 백제 사람, 옛 고구려 사람들이 온전한 신라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지방제도를 개편하였다. 지방제도 개편의 담당자는 설총의 문자혁명과, 그에 동반된 교육혁명으로 양성된 중상층 실무관료층이었다. 지방제도 개편의 수단은 중국식 군현제였지만, 남북국기 신라가 채택한 군현제는 삼국기 신라의 역사적 경험이 반영된 영속관계형 군현제였다. 삼국기 신라는 각 지방의 대등과 서울의 대등의 관계가 수평적·다원적인 연맹국가였다. 남북국기 신라는 이에 더해 각 지방세력들에게 자체 반차(班次)를 인정해 주는 관반체제 국가였다. 그런 지방세력을 재지관반이라고 불렀다. 이런 지방제도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남북국기 신라의 소경들이었다. 소경의 장관들은 대등들과 협력하여 정책을 마련하고, 촌주들과 함께 정책을 실현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이런 지방 운영은 전통 세력들과 충돌하여, 9세기 이후 변화함과 동시에 왕조 멸망을 초래하여 고려식 지방제도로 개편되고 말았다.

Abstract

Silla, which concluded the Three Kingdoms Unification War, reorganized the local system so that the old Baekje people and the old Goguryeo people could become complete Silla people. The person in charge of the reorganization of the local system was the middle-class working-level officials trained by the literary revolution of the Seolchong and the accompanying educational revolution.

The means of reforming the local system was the Chinese-style Commanderies and Counties system, but the Commanderies and Counties system adopted by Silla in the North-South States Stage was The System of Commandments and Counties based on the independent relationship style, reflecting the historical experiences of Silla in the Three Kingdoms period.

Silla during the Three Kingdoms period was a confederation state in which the relationship between local civil servants and central civil servants in Seoul was horizontal and pluralistic.

In addition, Silla, the North-South States, recognized a system that recognized each local power with its own order of classes. Such local powers were called The Local Administrative Influentials.

The best example of this local government system was the Silla' Little Seoul during the Northern and Southern States Period.

The ministers of Little Seoul worked with the Local Civil Servants to develop policies and implement them with the villagers. However, Silla's local administration clashed with traditional powers, and after the 9th century, it changed and led to the fall of the dynasty, which was reorganized into the Goryeo-style local system.

주제어:설총영속관계형 군현제대등관반소경
Keywords:Seol ChongPerpetual Relationship-based Gun-hyeon SystemDaedeungGwanbanSokyeong

Ⅰ. 통일전쟁 마감 이후 지방제도 개편의 필요성과 주도세력 양성

김춘추는 삼국시대에서 남북국시대에 걸친 신라의 제도 개혁을, ‘당이상잡(唐夷相雜)’이라 칭하였다. 중국의 유학적 천하질서와 한국의 전통적 자국질서를 융합한 제도 개혁이었다는 것이다. 고조선 이래 자국 역사에 자부심이 강했던 신라가 그러한 조치를 써야 할 배경에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큰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사실 삼국 통일 전쟁은 고구려, 백제, 신라 어느 나라든지, 지역에 따라 엄청난 인구의 감소 및 떠돔을 막을 수 없었고, 농토의 막대한 피폐를 감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660년 백제의 멸망부터 고구려 멸망, 당군의 격퇴에 이르는 수십 년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전쟁 수행자인 군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 농민들의 사망과 납치, 고향을 떠나 떠도는 사람(유민, 流民)들이 너무나 많았다. 군인으로건, 피난민으로건 고향을 떠나 타향을 떠도는 것은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전쟁 수습책으로 신라 정부는 전국 어느 마을이건, 토박이나 외지인을 가리지 않고 조사하여 거주 마을의 호구로 등록하고, 묵은 밭(진전, 陳田)이건 이미 경작하고 있던 토지(기경전, 起耕田)건 새로 개간한 토지(신전, 新田)건 누구라도 수긍할 만한 토지 측량, 즉 양전을 통해 소유와 권리를 명확히 해 주는 것을 기초로, 촌락을 정비하고, 지방행정을 수습하면서, 교통로를 뚫고, 수리시설을 보수, 확충하며, 가난하고 홀로 된 사람들을 보호함과 동시에 농지개간, 산전 개발, 농법 개발, 가축 사육과 증식, 뽕나무와 과일나무 키우기 등 농업과 양잠을 장려해야 했다.

이를 위해 신라는, 삼국기 신라가 아니라 남북국기 신라에 맞는 새로운 지방제도 정비가 필요하였으며, 새롭게 정비된 신라의 지방행정은 당연히 문서를 통해 공정성을 확보해야 했다.

다행히 통일 전쟁 와중에도 신라는 한자를 빌어 우리 말과 음을 표기하는 문자 생활을 본격화하고 있었다. 이전부터 써 왔지만, 삼국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었을 문자 생활을, 미래를 위해 표준화할 필요가 있었고, 이러한 작업의 선두에 신라 고승 원효의 아들, 설총(655~?)이 있었다.

설총은, ① 우리나라 말(방언, 方言)로 9경(經)을 읽어내, 후학들을 가르쳤다. 우리나라 말(방언, 方言)로 읽어냈다는 것은, 역경(易經) · 서경(書經) · 시경(詩經) · 예기(禮記) · 춘추(春秋) · 효경(孝經) · 논어(論語) · 맹자(孟子) · 이아(爾雅) 등 중국 고전 문장의 명사와 술어를 나타내는 용어들을 모두 분류하여, 각각의 한자 용어를 중국식 한자음이 아니라 한국식 한자음(방음, 方音)으로 바꾸어 정리했음을 의미한다.

이에 더해 ② 우리나라 한자음(방음, 方音)으로 중국과 주변 국가의 풍속과 물건 이름(화이방속물명 華夷方俗물명)을 표기한 사전을 만들어 소통할 수 있게 하였고(통회, 通會), ③ 중국 고전인 육경과 문학의 중국식 한자를 우리말 뜻(훈, 訓)으로 풀어 냈다(훈해, 訓解). 9경 가운데 6경과 중국 문학서들은, 해당 용어를 중국식 한자음이 아니라 한국식 한자음(방음, 方音)으로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해당 용어를 우리말 뜻(방훈, 方訓)으로 풀어냈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말(향언, 鄕言) ‘첫 새벽’의 뜻을 살린 한자어를 찾아내어 ‘원효(元曉)’로 쓰고, 이를 중국음이 아니라 우리나라 음(방음, 方音)인 원효라는 우리나라 말(방언, 方言)로 표기하는 것과 같은 것이고, 우리말(향언, 鄕言) ‘부처님 땅’의 뜻을 살린 한자어를 찾아내어 ‘불지(佛地)’로 쓰고 이를 우리나라 음(방음, 方音)인 ‘불지’라는 우리나라 말(방언, 方言)로, 우리말(향언, 鄕言) ‘처음 염’의 뜻을 살린 한자어를 찾아내어 ‘초개(初開)’로 쓰고, 이를 우리나라 음(방음, 方音)인 ‘초개’라는 우리나라 말(방언, 方言)로 표기하는 것도 같은 방법이었다.

이렇게 해야 같은 발음이 나는 한자어를 우리말 발음(방음, 方音)으로 하면서 생길 수 있는 문자 표기의 혼란스러움을, ‘향언→적절한 한자어 선택→방음→방언’ 체계로 정리할 수 있겠다는 발상이었겠다.

한자(漢字)가 중국 한(漢)나라 시대 문자라는 뜻임을 상기에 보면, 이미 중국 진한 제국 시절부터 들어와, 열국이나 삼국의 상층 지배층이나 실무관리들이 목간이나 금석문 등 각종 국가 문서에 사용하였지만, 지역별 계층별로 문자 표기의 차이가 엄청나게 벌어졌을 바로 그 한자를 활용하여, 마침내 설총이 우리나라 말과 음을 표기하는 새로운 토대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설총의 업적에 힘입어 이 시기 한국인들은 굳이 중국어를 공부하지 않고서도, 우리말로 중국 고전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한자와 이두(吏讀) 문자 생활이라는 문자혁명을 토대로 신라는, 682년(신문왕 2년) 국학을 설치하여, ① 15세부터 30세 사이의 학생들을 선발하여[선발대상], ② 9년 수학(修學) 기간 안에[교육 기간], ③ 우리나라 말(方言)로 정리된, 『역경(易經)』, 『상서(尙書)』, 『시경(詩經)』, 『예기(禮記)』, 『춘추(春秋)』 등 다섯 가지 경전과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등 세 역사책,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활약했던 여러 학자들의 저술(諸子百家)과 산술서(算術書) 등을 읽게 하였다[교육내용]. ④ 더구나 신라는 이러한 이두 문자 생활과 이두 안내서로 작성된 중국 경전과 역사서, 문학서와 산술서 등 국학 교과서로 학습을 마친 사람이라면, 정규 국학 졸업생(문적자, 文籍者)과, 가학자(家學者, 홈 스쿨링)를 차별하지 않았다[문적자와 가학자 차별금지].

그 결과 남북국기 신라는 골품관료 이외에 한문과 이두에 능한 중상층 실무 관료를 양성할 수 있었다. 중국 고전까지 익숙한, 폭넓은 세계관을 가진 인재들이 대거 등장한 것이다. 문자혁명에 이은 교육혁명이었다. 이렇게 양성된 중상층 실무 관료를 토대로 신라 정부는 지방제도 개편에 나섰다.

Ⅱ. 영속관계형 군현제와 9주·5소경

지방제도 개편의 목적과 수단 : 개편의 목적은 당연히 지방행정의 최전선인 마을과 고을에서 작은 차이이긴 하지만 기나긴 통일 전쟁으로 타향살이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을 해당 지역에 머물게 하고, 전쟁으로 무너진 상식을 회복시키기 위해 문서 생활로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마을마다 고을마다 조그맣게 남아 있는 텃세조차 버리라는 요청이었을 텐데, 그런 요청은 설총이 표준화해 놓은 이두 문자와, 중국 고전 공부를 통해 자국 전통에 대한 이해와 국제적 안목이 한층 높아진 중상층 실무관료들이 감당해야 할 문제였다.

문제는 신라가 선택한 ‘중국식 군현제’라는 개편 수단이었다. 진·한 제국 이래 중국은 수직적·일원적 형태의 제국帝國을 지향한 군현제를 운영해 왔던 것에 반하여, 고조선 이래 한국은 수평적·다원적 형태의 연맹 국가를 지향한 지방제도를 운영해 왔다. 농업사회의 특성을 고려하면, 제국보다는 연맹 국가 형태가 훨씬 자연스러운 대국大國 체제이다.7)

6) 후술할 소규모 광역 행정 구역의 지방관 파견이 구체화되면서, 중간 실무 관료 양성 필요성이 증가하자, 788년(원성왕 4) 종래 예부 주관으로 국학 출신 인재 중심으로 선발하던 체제에서 비 국학출신까지 포함한 광범위한 인재들을 선발하게 되었다. 유명한 자옥의 사례가 증거이다. 삼국사기 10 원성왕 4년 봄 “始定讀書三品以出身. 讀春秋左氏傳·若禮記·若文選, 而能通其義, 兼明論語·孝經者爲上, 讀曲禮·論語·孝經者爲中, 讀曲禮·孝經者爲下. 若愽通五經·三史·諸子百家書者, 超擢用之. 前祇 以弓箭選人, 至은攺之.” 삼국사기 10 원성왕 5년 9월 “자옥(子玉)을 양근현(楊根縣) 소수(小守)로 삼았다. 집사사(執事史) 모초(毛肖)가 반대하며 말하기를, “자옥은 문적(文籍)으로 선발된 사람이 아니므로, 지방관의 직분[分憂之職]을 맡길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시중(侍中)이 의견을 말하기를, “비록 문적으로 선발되지는 않았지만, 일찍이 당으로 들어가 〔국자감의〕 학생(學生)이 되었으니, 또한 〔지방관으로〕 쓸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그 의견을 따랐다.”

7) 우리나라 지방제도 체계의 기초는 마을과 고을과 나라이다. 마을에는 원님이 없지만, 고을부 중원문화연구 제35집 원래 전근대 농업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은 농민과 농토이다. 그 가운데 농토는 옮길 수 없다는 특성이 있다. 농토를 옮길 수 없으니, 농사를 짓는 농민도 이동의 자유가 제한된다. 양인 농민이건, 노비 농민이건 같은 처지이다. 토지에 긴박되는 것이다. 당연히 농토의 주인 역시, 해당 농토를 떠날 수 없다. 자경농은 물론이고, 중소 혹은 대지주라 해도 마찬가지이다.8)

마을과 고을을 기초로 하는 지방제도의 형성과 개편도 농민이 농토에 긴박되는 농업사회의 특성을 피할 수 없다. 지방제도의 토대에는 수많은 고을과 마을이 있었을 것인데, 개개 고을과 마을에는 농업사회의 특성상 대대로 해당 지역 농토와 마을, 혹은 고을을 관할해 왔던 토박이 권력의 역사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고을 경계가 견아상입지(犬牙相入地)라고 해서 개이빨처럼 들쑥날쑥한 것이나, 심지어 비지(飛地)라고 해서 남의 고을에 버젓이 자신의 고을 땅이 있는 것도, 오랜 기간 농토에 긴박되어온 농민들의 전통을 존중하였기 때문이었다.

농민들이 토지에 긴박되어 있기 때문에, 권력이건 돈의 힘이건, 웬만한 사정이 아니면 해당 고을에 이주해 온 사람들이 토박이 세력을 교체할 수 없다. 농업사회에서는 이주해 온 사람들도 어차피 대규모건 소규모건 농사를 짓지 않을 수 없고, 농사를 짓는 한 그 땅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이주민이 토착민이 된다. 이는 신분고하를 막론한다.

따라서 국토 균형발전이라든가, 권력과 지식의 이동을 목적으로 사민(徙民) 등을 비롯한 다양한 주민 이동 정책을 시행코자 하는 중앙정부는 이러한 특성들을 잘 고려해서 지방제도 개편을 시행해야 했다. 고조선 이래 열국과 삼국은 이러한 특성에 맞추어 마을과 마을간, 고을과 고을간, 소국과 소국간 수평적·다원적 형태의 연맹 국가를 우리의 환경에 맞는 국가 형태로 선택해 왔다. 정치, 경제, 군사 여러 분야의 운영이 그러하였다.

그런데 남북국기 신라가 선택한 지방제도 개편의 수단은 중국식 군현제였다. 주군현이라는 중국식 행정단위를 쓰고, 행정단위의 명칭을 한자로 바꾸긴 쉽지만, 역사와 전통이 다른 신라가 중국식 군현제를 그대로 가져다 쓸 수는 없었다. 그에 따라 당시 신라가 선택한 군현제는 군을 중심으로 몇몇 현을 묶어 소규모 광역행정단위를 만들어 운영하는 영속관계형 군현제였다.

영속관계형 군현제는 남북국기 신라와 고려전기에 시행하였다. 신라는 소규모 영속관계를 운영했지만, 고려 전기에는 중규모 영속관계를 운영하였다. 신라보다 고려가 농업사회의 특성에 맞게 수평적·다원적 정치·경제 관계로 운영되었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터는 원님이 있다. 거버넌스(의사결정조직)가 있었다는 것이다. 나라는 작은 나라(소국)도 있고, 큰 나라(대국)도 있다. 마을이 연맹해서 고을이 되고, 고을이 연맹하여 작은 나라가 되고, 작은 나라가 연맹해서 큰 나라가 된다. 예전에는 신분에 따라 원(員)·인(人)·명(名)·구(口)로 사람 숫자를 셌는데, 원님은 원(員)님으로, 이는 곧 원(員)이라 불릴 관원이 있는 마을, 곧 고을을 말한다. 한편 낙랑군이라는 군현제 경험에 대해선 후고를 기약해 둔다.

8) 자기 소유 농토와 함께 사는 지주를 재지(在地) 지주라 하고, 자기 소유 농토에서 벗어나 생활하는 지주를 부재(不在) 지주라고 하는데, 농업사회에서 농토와 농민 관리의 위험성이 높은 부재(不在) 지주로 사는 사람들의 비율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영속관계형 군현제 운영을 이해하는 것은 연맹국가 형태가 제국 지향의 군현제에 어떻게 녹아있는지를 알아보는데 매우 중요하다.

영속(領屬)관계형 군현제의 실체

삼국기 신라에 대등大等이 있었다. 대등은 기본어 ‘등(等)’에서 발전한 용어이다. ‘등(等)’은 향언(우리말) ‘빙글빙글 돌다’의 ‘돌’의 적절한 한자어를 택해 한국식 한자음(방언)으로 표시한 용어로서, 대등은 각 소국의 거버너스(‘간干’적 지배체제)에서 각 마을과 고을을 빙글빙글 도면서 공무를 집행하는 공무자(公務者)였다.9 이렇듯 대등은 원래 남북국시대에 시작된 의제적 군현제의 군현 이전 형태인 소국(小國 ; ‘干’적 지배체제)의 지배층이었다. 소국은 소국의 행정 치소가 있었던 고을과 여러 마을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각 마을에서 농경 생활을 하고, 고을에 모여 행정 및 문화생활을 하면서 공무를 집행하던 존재였다.

대등은 연맹 국가의 주변 소국(小國) 소속일 경우에는 스스로를 재지대등(在地大等)이라고 간주했지만, 연맹 국가(대국, 大國)의 주도 소국, 말하자면 왕성의 공무에 참가할 때에는, 주도 소국의 대등과 함께 재경세력의 신분제에 포섭된 재경대등(In-Kyong Daedeung)이 된다. 그 방법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용어가 마립간이다.

마립이라는 말은, 우리말(향언鄕言) ‘말뚝’의 뜻을 살린 한자어를 찾아내어 ‘麻立’으로 쓰고, 마립이라는 우리나라 말(방언方言)로 표기하는 것이다. 말뚝을 중국식 한자의 뜻을 살려 만든 말이 함조諴操인데, 함조는 말 그대로 (왕이 중심이 되어 주도 소국과 주변 소국의 대등들을) 조화를 이루어(和同) 부린다(操)는 뜻이다. (회의 참가자의) 직위 표시를 하기 위해 신라는 ‘말뚝’을 자리마다 설치하였는데, 왕 관련 인사들을 위한 말뚝이 주가 되고, 그 주변에 신하 관련 인사들의 말뚝을 벌려 표시하여 사람들이 늘어서게 했다.10

말하자면 마립간(=말뚝왕)은, 조정(朝廷)회의를 할 때 예하 소국들의 신하들을 도열하게 하였는데, 예하 신하들은 마립간이 서열을 나누어 표시해 놓은 말뚝 위치에 서서 회의에 참가했다는 것으로, 재지 대등이 주도 소국의 중심지, 즉 서울 어느 곳에 가서 왕을 중심으로 해당 소국의 대등과 함께 모여, 재경대등의 일원으로서 말뚝 표시에 따라 늘어세운 임금이 마립간이었던 것이다.

재지대등들이 서울에 가는 이유는, 연맹국가에 소속되는 소국들이 부여와 고구려의 회동과 같이 서울에 소집되었기 때문이었다. 회동會同은 조공 가운데 부정기적으로 만나거나(회) 단체로 만나는 것(동)으로서,이인재(2024) 부여와 고구려의 왕이 주변 소국들의 공무자를 서울로 모아 당해년의 국정 운영에 대해 의견 교환을 하는 행사였다.

9) 김광수(1996); 한편 이기백은 대등은 “① 귀족회의 구성원으로, ② 부족장이었다가 재경중심의 골품제로 편입된 족장층으로, ③ 나말여초 지방호족의 당대등과 대등 역시 같은 계통의 용어”라고 하였다. 이기백(1962).

10) 『삼국사기』 권3 눌지 마립간 원년 “麻立者, 方言謂橛也. 橛謂諴操, 准位而置. 則王橛爲主, 臣橛列於下, 因以名之.” 『삼국유사』 권1 남해왕 “或曰麻立干 立一작袖, 金大問云 麻立者 方言謂橛也. 橛標 准位而置, 則王橛爲主臣橛列於下, 因以名之.”

11) 이인재(2024).

그런데 고구려의 경우 회동 참가자인 왕 직할지 관할 가신들(사자조의선인)은 국가 전체를 관할하는 통치자들과 함께 격을 같이하는 사람들로 간주한 데, 반하여 대가 휘하의 가신들(사자조의선인)은 회동할 때에 자신들의 신상명세서를 왕 직할지 관할 가신들(사자조의선인)에게 제출해야 했다.12 위계가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이들이 서울에 모여 조정회의를 할 때, 말뚝 표시로 직위에 구별하여 회의장 안에 설지, 밖에 설지 왕을 중심으로 간격을 벌여 해당 말뚝 앞에 섰을 것이니, 말뚝으로 참가자의 위계를 정해 국정을 논의했다는 말뚝왕(마립칸) 시대의 신라가 행한 행사가 바로 회동의 동同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성에 따라 연맹국가 형태의 대국에서 대등은 서울 연고 중심의 재경대등(진골대등 : 진골로서 대등의 직을 가진 자 중심)이 있고,13 지역 연고 중심의 재지대등(지역 출신 대등)이 있었다.14 삼국기 신라는 양자의 공생을 토대로 국가를 운영하였다.

그런데 통일전쟁이 일단락되면서, 130여 군현의 원신라지역 외에 140여, 180여 옛백제지역과 옛 고구려지역이 새롭게 통치영역에 들어오게 되었다. 원신라지역을 활동공간으로 했을 때와 다른 방식이 필요하였다. 가령 삼국기에는 주변소국의 인재를 모우는 방향으로 재경대등을 형성하였다면, 남북국기에는 새로운 지역에 이주하면 정착할 수밖에 없다는 농업사회 특성에 맞추어 해당 지역에 재경대등을 이주시켜 옛 백제지역, 옛 고구려 지역 주도세력과 섞여 살게 하여야 농업도 발전시키고, 문화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물론 나름대로 골품관료와 함께, 원신라·원백제·원고구려 출신의 중상층 실무관료들을 양성해 왔지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 경주 출신 진골 대등들을 소경을 비롯한 전국 각지로 대거 이주시키는 것이, 신라 정부의 주요 정책이었다.15 514년(지증15) 정월 아시촌에 소경을 설치한 다음, 7월에 육부(六部)와 남쪽 땅(南地)의 인호(人戶)를 옮겼고,16 557년(진흥왕18) 인접한 충주에 소경을 두었을 때에도 경주의 귀척자제(貴戚子弟)와 육부호민(六部豪民)을 옮겼다.17 674년(문무왕14) 육도진골(六徒眞骨)들을 9주의 치소(治所)와 5소경에 이주시켰다는 것을 보면18 이 시기 지방제도 개편은 사민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삼국기 정복 전쟁이 한창일 때에는 정복지 지배층을 연고지로부터 유리시켜 연고지의 공동체의 단절을 꾀하면서 지배층을 회유하는 사민 정책이 일반적이었지만,19 통일전쟁이 본격화하면서부터 시대의 요청에 따라 육부(六部) 호민을 이주시켜 왕경 문화를 이식한 다음 경제·문화의 중심지로 만들고자 하였다.전덕재(2000). 이러한 정책의 연결선상에서 남북국기 신라도 9주·5소경의 치소에 이주한 육부호민들을 위한 공간을 두었다.

그러나 이는 일방적인 왕경문화의 전파가 아니라 쌍방적인 사회통합정책의 정신 아래 진행되었다. 별칭관명(別稱官名)에 주목하면 진골 귀족조차 9주와 5소경에 강제로 옮겨 일종의 향직(鄕職)에 봉사케 했다.한우근(1960). 이런 쌍방적인 사회통합정책의 대상은 원신라 지역 토착세력뿐만 아니라 옛 고구려와 백제 지역 유민들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이런 전통은 674년 경주 진골 출신과 호민들을 소경에 옮겨 살게 한지 십여년만인 685년(신문왕 5) 남원 소경에 여러 주군(州郡)의 민호(民戶)를 나누어 거주케 한 조치로 알 수 있다.22

영속관계형 군현제는, 삼국기엔 분명 소국으로 재지대등이 주도하고 있던 지역에, 통일전쟁 마무리 이후에 진골 출신과 호민 등 재경대등층을 사민시켜 섞여 살게 하되, 지역적 사정에 따라 크기를 조절해 외관을 파견하면서, 수직적·일원적이 아니라 수평적·다원적 연맹국가 성격을 살리고자 한 지방정책이었다. 삼국기에 각지의 주변 소국에서 경주라는 주도 소국의 서울에 모여 재경대등을 구성했던 것과 달리, 남북국기에는 재경대등들이 전국 각지로 옮겨 서로 섞여 살며 새로운 지방 농업, 문화, 정치, 사회를 주도하게 했던 것이다. 이것이 중국에서 기원했지만 삼국기의 전통과 충분히 섞인 신라식 영속관계형 군현제.

12) 『三國志』 동이전 “其國有王 其官有相加·對盧·沛者·古雛加·主簿·優台·丞·使者·皁衣·先人 尊卑各有等級 (중략) 其置官, 有對盧則不置沛者, 有沛者則不置對盧 왕의 종족, 그 대가는 모두 고추가라 일컫는다. (중략) 제대가 또한 스스로 사자·조의·선인을 두는데 그 명단이 모두 왕에게 보고되며, 경대부의 가신과 같아서 회동하여 앉고 일어설 때 왕가의 사자·조의·선인과 같은 열에 설 수 없다. 그 나라 안의 대가들은 농사를 짓지 않으며 앉아서 먹는 자가 만여 명이다.”

13) 『삼국사기』 권33 색복 “眞骨大等. 幞頭任意. 表衣·반비·고, 병금계수금라. 요대, 금연문백옥. 화금자피. 화대금은문백옥. 말임용릉이하. 리임용피·사·마. 포용이십륙승이하.” 재경대등의 대표 사례로는 진흥왕 순수비 마운령비, 황초령비, 창령비 등의 대등 사례를 들 수 있다.

14) 『高麗史』 권75 향직 성종 2년 “개주부군현리직, 이병부위사병, 창부위사창, 당대등위호장, 대등위부호장, 랑중위호정, 원외랑위부호정, 집사위사, 병부경위병정, 연상위부병정, 유내위병사, 창부경위창정.”

15) 고려의 경우 삼한공신 제도를 이용하여 전국의 지역 인재들을 개성으로 모우는 정책을 폈다. 원주의 경우 원극유가 그런 사례이다. 김광수(1973) ; 이인재(2016).

16) 『삼국사기』 권4 지증마립간 15年 春正月 “置小京於阿尸村” (同 秋七月), “徙六部 및 남지인호를 옮겨 이를 충실히 하였다.”

17) 삼국사기 권4, 진흥왕 19年 春2月 “徙貴戚子弟 및 六部豪民 以實國原”

18) 삼국사기 권40, 직관 下, 外位 “文武王十四年 以六徒眞骨出居 然五京九州 別稱官名”

19) 실직국이 반하였을 때 신라가 군대를 동원하여 평정한 후 남은 무리들을 사민하는 정책을 폈다. 삼국사기 권1 파사니사금 25年 秋7月 “悉直叛 發兵討平之 徙其餘衆於南鄙”

20) 전덕재(2000). 49~50쪽.

21) 한우근(1960), 114쪽.

22) 삼국사기 권8 신문왕 5년 3월 “置南原小京, 徙諸州郡民戶分居之”

6~8세기 영속관계형 군현과 북원경·중원경·서원경의 설치

고구려와 백제와의 통일전쟁에서 최종 승자가 된 신라는, 전국 군현 지역을 9주로 개편하였다.23) 원신라 지역 130여 군현을 3주(상주, 양주, 강주)로, 옛 백제 지역 140여 군현을 3주(웅주, 전주, 무주)로, 옛 고구려 지역 160여 군현을 3주(한주, 삭주, 명주)로 450여 군현을 나누었다.24) 연이어 757년 12월 경덕왕이 중심이 되어 전국의 군현 명칭을 한국식 한자음(방음, 方音)으로 표기가 가능해진 한자로25) 변경하는 정책도 과감히 추진하였다.26)

3주씩 각각 원신라, 옛백제, 옛고구려 지역이었다는 역사에서 출발한 9주(州)라는 광역(廣域) 행정구역 아래, 최소한의 지방관 파견으로 가능한 영속관계를 통해 소규모 광역통치단위의 지방문서 행정을 감당하고자 한 것이다. 그것이 옛 고구려, 옛 백제지역에 살다가 갑자기 신라 사람이 된 해당 주민들에게까지 공정성을 인정받는 길이었다.

당연히 9주의 주(州)는 예하에 최소 35개 군현에서 최대 77개 군현을 거느린 광역행정 단위이지만, 주 장관이 예하 군현을 수직적·일원적으로 관할하지 않았다.27 수평적·다원적 전통과, 옛 삼국의 지역 연고 역사성을 인정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각 광역행정의 중심 도시(주, 州 치소, 治所), 말하자면 지금의 도청 소재지에 해당하는 주 치소의 현재 명칭은 상주(尙州), 양산(梁山), 진주(晉州), 공주(公州), 전주(全州), 광주(光州), 광주(廣州), 춘천(春川), 강릉(江陵)이다. 이들 지역은 자체적으로 소규모 광역통치단위였다.

신라는 이와 함께 큰 서울(대경大京)인 경주와 함께 소규모 광역통치단위이면서 작은 서울(소경小京)인 5소경을 두었다. 옛 고구려 지역에 2곳(원주= 북원경, 충주= 중원경), 옛 백제지역에 2곳(청주=서원경, 남원=남원경), 원 신라 지역에 1곳(김해=금관경)이었다. 김해를 제외한 네 소경은 모두 경주에서 소백산맥을 넘었을 때 사용했을 큰 고개 너머 지역인데, 원주는 죽령, 충주는 계립령과 조령, 청주는 화령과 추풍령, 남원은 팔랑치 너머 큰 고을이었다.

특히 원주와 충주, 청주는 남한강 상류와 금강 상류로 서로 연결할 수 있는 고을이기도 하였다.28) 뭍길과 물길로 촘촘히 연결시킨 것이다. 이렇게 신라는 경주와 전국 15개 농업 도시를 거점으로, 영속관계형 군현제로 구성된 전국의 수많은 소규모 광역통치 행정단위와 협업을 하여, 군현제이면서 연맹 국가 전통을 인정해 주었다.

영속현은 교통로를 감안하여 구성하였다. 가령 나성군(영월)의 경우라도 대략 25㎞ 내외인데, 평창강과 주천강, 동강, 남한강을 주요 교통로로 하여 단독 군(郡), 단독 현(縣) 만큼은 아니지만 물길과 뭍길, 산길 등을 이용해서 그래도 쉽게 오갈 수 있는 범위였다.29)

23) 『삼국사기』 권34 지리1 “始與髙句麗·百濟地錯犬牙, 或相和親, 或相㓂鈔, 後與大唐侵滅二邦, 平其土地, 遂置九州”

24) 『삼국사기』 권34 지리1 “九州所管郡縣, 無慮四百五十”

25) 향언(鄕言)을 한국식 한자음을 활용한 방언(方言)으로 표기하는 방법

26) 『삼국사기』 권9 경덕왕 16년 12월.

27) 박성현(2019) ; 전덕재(2021).

나성군(영월)만큼 물길이 발달하지는 않았지만, 영현 2곳을 둔 나제군(제천)은 뭍길을 중심으로 반경 25㎞ 정도일 것이고, 영현이 없는 괴양군(괴산)도 달천 주변에 같은 규모의 영역을 소(小)규모 광역통치 단위로 운영하였을 것이다. 괴양군(괴산)은 속현없는 단독현이지만, 중원경과 서원경 연결의 교두보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3소경과 역할이 거의 같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남북국기 신라의 영속관계형 군현제의 운영은 3소경을 통해 그 운영 방식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28) 정요근(2011) ; 이인재(2023) ; 권순홍(2024).

29) 우리나라의 수계에 대해서는 다음 지도가 유효하다. http://www.wamis.go.kr:8081/Water Map2013/watermap.aspx?param Tab=watermap

Ⅲ. 6~8세기 북원경·중원경·서원경의 설치와 운영

연혁(沿革)과 강경(疆境) : 충주와 원주는 모두 고구려 땅인 국원성(國原城)과 평원군(平原郡)이었고30, 청주는 백제땅인 상당현(上黨縣)이었는데, 모두 옛 고구려, 옛 백제땅이었다31. 그러다 565년(진흥왕26) 충주가 신라 영향권에 들면서 국원소경이 설치되었고32, 원주는 678년(문무왕18) 북원소경이 설치되었으며, 청주는 695년(신문왕5) 서원소경이 설치되었다33. 경덕왕(742~765) 때 작은 서울이라는 소(小)를 떼고, 각각 중원경, 북원경, 서원경으로 불렸고, 9세기 들어 신라는 당나라의 부제(府制)를 참고하여 중원부(장관 大尹, 小尹)와 중원경, 〇강부와 북원경, 서원부와 서원경이라는 중규모 광역통치단위로 확대하였다34.

북원경·중원경·서원경의 설치배경과 역사적 의의

소경의 강경은35 그림 5

최경선 수정 중원경 강경
그림 5 최경선 수정 중원경 강경
)와 같은 남북국기 신라의 중원경 강경과 지금은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36, 현재의 강경과 그다지 차이는 없다. 견아상입지적 출입은 어느 시대에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강경은 다시 소경 치소(治所)(평지읍성)인 읍중(邑中)과37 경내(境內)로 나눌 수 있다. 근대 국가와 착각하여 치소 즉 읍중에 모든 권력이 모인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농업사회에서 치소는 후술할 읍사(소경의 경우 소경사(小京司), 주 치소의 경우 주사(州司)와 같이 행정하는 사람들이 주로 모여 있는 곳일 뿐이다. 이 시기 재경대등들을 전국 주요 지역에 이주시키는 것이 신라 영속관계형 군현제의 특징이므로, 육부 호민들이 소속 경내로 이주하고38 상호 연락하기 위한 연결 공간으로서 소경 읍중 일정 공간에 연락처를 겸한 이주 준비기관을 두었다. 읍중 보다 중요한 공간이 경내(境內)이다. 소경의 경내는 촌락문서에서 서원경 ○○○촌과 같이, 읍중(邑中)과 함께 수많은 행정촌(村)과 자연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촌에는 재지대등들이나 촌주들이 이끄는 마을도 있었고, 어떤 마을은 재경 출신 진골 대등들이 토착화하면서 대토지소유를 하면서 거주하는 마을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 경내(境內) 거주 농민들은 양민 농민들도 있고, 천민 농민들도 있었을 것이며, 수공업자와 상인들도 있었을 것이다. 소경에는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거주하면서, 문화생활도 하고, 경제생활도 하고 있었다.

소경 치소(治所, 평지읍성) : 중원경의 치소, 즉 평지 읍성과 둘레 2592보의 국원경성은 충주읍성터와 봉현성, 대림산성이었겠다39. 국원성 때의 탑평리와40 장미산성에서 이전한 것이다. 서원경의 치소, 즉 평지 읍성은 청주읍성 터로 볼 수 있고, 서원경성은 우암산성의 내성으로 생각된다41.

북원경의 치소(治所), 즉 평지읍성이 정확히 어디였는지는 기록에 나와 있지 않다42. 원주 원도심지역인 강원감영과 원주읍성터로 추정될 뿐이다. 단지 북원경성(北原京城)만 둘레 1,031보(步)의 성(城)으로 나와 있다43. 이 성(城)에 대해서는 평지에 있던 나성(羅城)으로 보기도 하고44 지금의 영원산성(鴒原山城)으로 보기도 하는데45, 『증보문헌비고』와 『대동지지』에 기록된 바와 같이 영원산성의 둘레가 1,031보였다는 것을 보면46 영원산성이 바로 북원경성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북원경성은 비상시에 사용하던 성(城)이었을 것이고, 영원산성에 오르는 주 진입로가 지금과 같이 금대리 영원사로 올라갔을 것이다.

소경의 치소(治所), 즉 평지읍성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이 읍사이다. 소경의 장관이 대등층과 정책의 방향을 정하고, 촌주층과 정책을 집행하는 것을 논의하던 공간이다. 장관과 대등층과의 관계 : 소경의 장관은 사신(仕臣) 혹은 사대등(仕大等)이라고 하였다47. 신(臣)이 곧 대등(大等)이다. 소경 통치 구조의 한 예로 북원경의 장관(知〇官)은, 17관등으로 서열화된 신라 관등제에서 9등급인 급벌찬에서 4등급인 파진찬 사이의 경위(京位)에 있던 인물이 임명된 사신(仕臣 = 사대등 仕大等)이었다48. 사대등은 대등(大等)을 사(仕)하는 존재인데, 사(仕)는 벼슬한다, 혹은 살핀다는 뜻이 있으므로, 사대등의 임무는 대등을 살피고 관리하는 일이었다49. 중앙의 외관이, 자체 ‘관반(官班)체제’를 갖춘50 지방의 대등과 정책을 협의하여 정책의 방향을 잡아 나가는 것이 영속관계형 군현제의 특징이다. 여기서의 관반(官班)이란 관의 반차(班次) 즉 관의 높고 낮은 차례를 말하여서, 당연히 반차(班次)는 중앙정부에서만 정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이 시기에는 재지 대등층도 독자적인 관의 반차를 주체적인 입장에서 설정하여 지방 통치에 활용하고 있었다.

북원경 장관과 협업하면서 자신만의 관반체제를 운영하면서, 정책의 방향을 정하던 재지 대등(大等)의 존재가 자료상으로 확인되는 것은 원주 흥법사 터에 있는 진공대사 충담의 비음기이다. 충담이 입적한 940년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세웠을 이 비의 음기에는 재가제자(在家弟子)와 삼강전(三綱典), 주관(州官)이 기록되어 있는데 주관(州官, 원주의 관반)에는 낭중 2인과 시랑 2인과 함께 상대등(上大等) 1인이 나온다51. 이 자료의 상대등은 고려 성종 2년 향직 개편 시에 호장(戶長)과 부호장(副戶長)으로 개편되는 당대등(堂大等)과 대등(大等) 가운데 당대등을 말하는데52, 그렇다면 북원경에도 상대등과 함께 대등층(大大層)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53. 이들은 각각의 지역과 집안 사정에 따라 아찬을 쓰기도 하고, 대등을 쓰기도 하며, 시랑 혹은 경을 쓰기도 했다. 훗날 호정(戶正)에 해당하는 낭중은 2인, 병정(兵正)에 해당하는 병부경은 2인54, 창정(倉正)에 해당하는 창부경 역시 3인이다55. 이들 주관(州官)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낭중(郎中)은 민회(旻會) 내말(㭆)과 김순(金舜) 내말(㭆)이고, 시랑(侍郞)은 흥림(興林) 대등(大ホ)과 수영(秀英) 대등(大ホ)이었다. 상대등은 신희(信希) 대등(大等)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향리직의 하나로 간주되는 낭중이 먼저 쓰이고, 시랑을 그 다음에 쓰고, 상대등을 맨 나중에 기록했다는 것이다.

낭중은 당대등과 대등·낭중·원외랑·집사 가운데의 낭중이다. 성종 2년 주부군현의 향리직 개편 때 호정(戶正)이 되는 직제로 향리직의 하나이다56. 향리직의 하나라면 당연히 읍사에 소속되었을 것인데, 낭중은 원주의 읍사 즉 주사(州司)에 소속된 사람들이었다57. 문제는 시랑이다. 이 시랑은 성종 2년 향리직 개편 때에는 찾아볼 수 없다. 향리직 계통은 아니라는 뜻이다. 925년(태조 8) 경북 영천지역인 고울부 장군 능문이 왕건에게 귀부할 때 휘하의 시랑 배근과 대감(大監) 명재·상술·궁식 등을 개경에 머무르게 한 기사에 보인다58. 이 경우 대감은 촌장(村長)임이 분명하나59, 여전히 시랑의 지위는 불분명하다. 그런데 시랑이 보이는 것은 개경의 광평성(시중·시랑·낭중·원외랑)과 서경의 낭관(시중·시랑·낭중·상사·사)이다. 그러므로 흥법사 진공대사 음기에 보이는 시랑은 당시 재지관반도 재경관반과 마찬가지로 중앙의 광평성과 같은 기구를 만들어서 지방통치에 임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60. 그렇다면 자료에 보이는 상대등은 당대등으로 읽혀지는데, 당대등 역시 광평성의 시중 격이 된다고 보아도 되지 않을까 한다. 더구나 흥법사 진공탑비문을 작성한 이가 고려 태조 왕건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적어도 왕건은 비 음기에 기록된 재지관반 사호(司戶)의 시중 – 시랑 – 낭중 – 원외랑 구조가 재경관반 광평성의 구조와 똑같다는 점을 양해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만큼 관반체제는 한국중세사회를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한 제도라 하지 않을 수 있다61.

충주 정토사 법경 현휘승탑비 음기에 등장하는 공경(公卿)으로 불리는 지역대표자(부로, 父老)에 대한 기록도 흥미롭다62. 중세사회 수령은 이서(吏胥)에 대해 군신의 분별을 가진 토주(土主)였기 때문에 쓸 수 있는 용어가 공경부로(公卿父老)인데, 음기에는 아찬(阿粲) 5인63, 대등(大等) 6인64, 시랑(侍郞) 10인65, 경(卿) 12인66 등 총 33인의 공경급 인물이 등장한다.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기에 등장하는 당대등 김희일의 경우가 또 다른 예이다67. 김희일은 지방의 수장격인 당대등(堂大等)이면서 중앙의 위계로는 정조(正朝)이고, 공복은 단삼(丹衫)이면서, 어대는 은어대(銀魚袋)를 차고 있었다68. 나말여초 재지관반의 수장급은 중앙의 관리로도 인정되며, 그 예하의 직은 지방이라는 단서가 있으나 역시 관반이라 칭해지고 있었다. 사실 이 철당간은 김희일의 종제인 당대등 김예종이 자신의 몹쓸 병을 부처님의 도움으로69 극복하고자 조성하고자 하였으나 본인이 주도하지 못하고 종형인 김희일이 주도하여 조성한 당간이었다. 김예종과 김희일 집안이 주리(州里) 호가(豪家)였고, 향려(鄕閭) 관족(冠族)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일을 추진한 사람들이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대등이 한 지역에 여럿 있다는 것이고, 대내말과 내말, 대사 등 신라 경위를 쓰는 사람들이 여전하다는 것이다. 청주지역이 고려의 영향력에 흡수된 지 45여년이 지나고, 신라가 망한지 27년이 되던 해인데도, 당간 주조의 사령탑을 맡은 사람들이 모두 신라 관계를 쓰고 있다. 이는 신라 중앙정부가 요청한 것도 아니고, 고려 중앙정부가 요청한 것도 아닐 것이니, 이런 명칭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서원경, 청주 지역 재지지배층의 오랜 역사적 관록에서 나온 것이겠다. 당간 주조의 실무 책임자까지 기록하지 않았지만, 청주에서 도운 관반들(輔州官班)이 있었을 것이다.

경북 예천군 상리면 명봉리에 있는 명봉사(명봉사 경청선원) 자적선사(882~939) 홍준승탑비 음기에는 939년(태조22) 이두문으로 쓰여진 첩문(帖文)이 있다. 홍준승탑비가 있는 곳은 상주 산하 예천군의 4영현 가운데 하나인 적아현이다70. 첩문의 내용은71 홍준 큰스님의 열반을 기념하여 조성될 경천선원 절터가 자리 잡을 명봉산은 큰 산이므로 절터는 특별한 지주(地主)가 없다는 것을 적아현 입경사 김달(金達) 사지(舍知)를 통해 보고하였다. 이에 태조 왕건은 교지를 내려, 일을 맡은 스님들이 호정(戶丁)의 땅에 있는 사람들을 부리는 것을 허락하고, 주(州)와 군(郡)과 현(縣)을 막론하고 주변 열 넷 고을이 추인하도록 한 다음, 정조 인겸이 성조사로서 돕도록 하였다. 그러면서 이 조처와 관련된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말미에 주 즉 상주(尙州)에서 도운 관반(輔州官班)과 현 즉 적아현(赤牙縣)에서 도운 관반층도 기록하였다. 상주 치소와 적아현 치소의 관반층으로 기록된 사찬은 경위 8등에 해당하는 관등명인데, 사찬이 상사찬, 제2사찬, 제3사찬으로 나뉘어 있는 점이 흥미롭다. 상주 치소에서는 사찬 지위의 여러 촌주들이 관련 군현의 사람부리는 실무책임자를 맡았다는 것인데, 구체적인 정보는 상주 소속 사찰의 재무나 보급의 책임을 맡은 촌주인 특히 상주의 관반인 사경촌주의 도움을 받았다. 경천선원이 자리할 적아현의 세 명의 촌주는 해당 실무를 담당했을 것이다. 이렇듯 당시 수장급 재지지배층은 스스로의 선택과 지방 분위기에 따라 신라 관등도 쓰고, 고려 관계를 쓸 수 있었다. 이렇듯 소경의 장관이 읍사에서 대등층과 협업하며 정책의 방향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소경의 장관들이 자국의 전통과 중국 고전에 밝은 그런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같은 입장에 있었던 수많은 대등층과, 경제와 문화, 정치와 외교를 논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앙 정부가 사용하던 관반을, 지방 대등층이 보주관반으로 사용하더라도 충분히 양해가 가능했다. 그런 이해의 토대 속에 소경의 행정은 촌주층과 협력하면서 집행되고 있었다.

장관과 촌주층과의 관계 : 소경의 행정 실무층에 해당하는 존재로는 촌주층(村主層)이 있다. 행정실무의 목표는 안전(족병, 足兵)과 민생(족식, 足食)이다. 주 치소의 촌주 조직과 운영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연지사 종명과72, 현치소의 촌주조직을 알 수 있는 자료가 규흥사 종명이다73. 연지사 종명에 따르면 주 치소의 실무 총책은, 주치(州治) 전체의 사무를 관장하던 상급 촌주인 경촌주(卿村主)가 맡았다. 경촌주 산하에서 촌민(村民)들로부터 노동력, 때로는 군사력을 동원하던 직책이 작한사(作韓舍)이다. 작한사는 작상을 잇는 직책이었는데, 특별히 작한사를 맡은 촌주가 군사력동원과 직접 관련되는 군사(軍師)라는 직명을 띤 것을 보면, 해당 지역이, 군사력 동원이 상설화된 주치소이기 때문일 것이다. 주 州 치소의 촌주 및 그 예하 직제는, 경촌주(卿村主) 밑에 단위 촌주로 군사(軍師)의 직책을 띤 작한사(作韓舍)와 사(史), 성박사(成博士) 등이었다. 한편 규흥사 종명에 따르면, 현 치소의 실무는 현치(縣治) 전체의 사무를 관장하던 상급 촌주인 상촌주(上村主)였다. 상촌주는 제2촌주, 제3촌주와 의논하면서 현치의 실무를 총괄하였다. 한편 신라 촌락문서의 서원경 사례에서 보듯이 당시 소경이 관할하는 촌(村)이 있었다74.

촌락문서에는 각 현을 중심으로 여러 촌을 묶어 공무를 맡은 촌전(村典)이 실무책임을 맡은, 호구조사와 양전, 그리고 계연으로 계산한 작정(作丁)의 결과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75. 마을이 살지 못하면, 고을도, 나라도 지속할 수 없다는 연방국가의 전통이 계연과 작정 실무에 담겨 있었다. 여러 촌이 묶인 사실은 규흥사 종명에서 확인할 수 있다. 856년(문성왕18)의 규흥사 종명에 보면, 현령 밑에 상촌주, 제2촌주, 제3촌주가 있었다76. 이로 보아 다른 소규모 광역행정단위와 마찬가지로 소경의 행정업무도 다수의 촌주층이 담당하였을 것이고, 이들이 행정업무를 맡았을 때 소요되는 비용은 촌주위답(村主位畓)에서 나오는 비용으로 충당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3소경을 비롯한 영속관계형 군현의 장관은 대등층의 합의를 이끌어내면서 행정의 방향을 정하였고, 촌주층을 동원하여 지방정부 실무를 담당하는 방식으로 통솔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Ⅳ. 소경에서의 경제생활과 문화생활

1. 경제 생활

소경에 사는 사람들은 1) 소경 장관과 소경 장관의 행정운영을 지원하는 촌주층 2) 진골 대등과 같이 경주에서 내려온 유력 계층들, 3) 재지 대등과 같은 지역사회 토박이 4) 소경 행정권 안에서 생활하는 여러 층위의 농민, 수공업자, 상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음악을 비롯한 예술 생활도 즐기고 있었고, 다양한 방식의 학문도 배우고 소통하고 있었다. 이렇게 문화생활도 하고, 교육 및 학술 활동을 하려면, 그에 걸맞는 경제활동도 해야 했다.

소경 성은 보통 평지 읍성과 산성을 모두 구비하였는데, 평시에는 평지 읍성에서, 비상시에는 산성에서 생활하였다. 평상시 평지 성내에는 소경 장관과 소경 장관의 행정 및 군사를 집행하는 인력들이 주로 생활하였을 것이고, 다른 거점 지역과 마찬가지로 성내 공간을 경주 육부 이름으로 나누어, 원신라권 출신 진골 대등들이 성내 공간에 머물다가, 소경 경내로 이동하는 중간 경로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가령 강수의 경우, 강수의 선대 누군가가 원신라권인 가야 출신으로 무슨 사정이 있어 중원경 경내로 거주지를 옮길 경우, 먼저 중원경 평지 읍성 내 구역명칭의 하나인 중원경 사량부 지역을 거쳐, 읍성 밖이지만 중원경 경내(境內) 농경지와 연계하여 생활근거지를 마련하였을 것이다. 충주 누암리와 하구암리 고분 피장자가 Ⅰ형(대금구와 이식 공반), Ⅱ형(대금구만 출토), Ⅲ형(이식만 출토), Ⅳ형(대금구와 이식 미출토)으로 위계가 있었다는 점을 보면, 소경에는 다양한 사연의,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섞여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전근대는 농업사회이므로, 수공업기술이 있거나, 상인이 아닌 경우 농토를 떠나서는 생활할 수 없었다.김종구, 2017.

사전(賜田) : 원고구려 지역, 원백제 지역인 한주, 삭주, 명주나 웅주, 전주, 무주의 경우, 고구려나 백제가 관할하던 공유지나 국유지, 혹은 무주지인 경우, 통일 전쟁이 끌날 무렵 해당 토지 관할권은 자연스럽게 신라가 차지하게 된다. 이 경우 신라는 해당 토지의 소유권을 신라 연고의 새로운 지배층에게 줄 수밖에 없다.이인재, 1997. 이하 경제 생활 관련 내용은 위 논문에서 재인용한 것임.

문무왕 2년 국가에서는 전쟁에서 공을 세운 김유신과 김인문에게 사전(賜田)을 하였으며,삼국사기 권 6, 文武王 2年. 문무왕 14년 육도진골(六徒眞骨)을 9주 5소경에 출거(出居)시킨 다음,삼국사기 권 14, 職官下. 신문왕 7년에는 모든 문무관료들을 대상으로 사전(賜田)을 하였다.삼국사기 권 8, 神文王 7年. 당시 이들이 받은 토지는 사다함의 경우와 같이 국가가 소유하던 좋은 토지였을 수도 있지만,삼국사기 권 4, 眞興王 23年 9月. 대개 통일전쟁을 겪으면서 황폐화된 무주(無主) 진전(陳田)을 지급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식읍과 녹읍 : 구체적 사례는 김구해·김유신·김인문·박뉴·장보고·김주원 등에 불과하지만,삼국사기 권 4, 法興王 19年 ; 卷 43, 金庾信傳 下 ; 卷 44, 金仁問傳. 식읍도 중요한 토지 나눔 혹은 확보 제도 중의 하나였고, 수조권 분급제인 녹읍을 활용한 토지 확보책도 지배층의 토지확보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식읍제도와 녹읍제도가 병행했을 당시, 식읍제를 통해 조세 전반을 장악하려는 각간가(角干家)와 녹읍제를 통해 수조권 분급제를 실시하려는 신진(新進) 관료층(官僚層)의 대립이 그것으로서,이인재, 1995. 이와 관련해서는 또한, 서의식, 1996 참조. 96각간(角干)의 난(亂)에서 보듯이 전국 각지에 상당한 세력을 보유하고 있었다.삼국유사 권 2, 惠恭王. 이 난은 신라국가 차원에서는 녹읍제의 전면적 실시로 일단락지었지만, 식읍제를 기반으로 전장(田莊)을 경영하려는 세력은 여전하였다. 839년에서 849년 사이에 김흔이 웅천주의 한 땅을, 자신의 8대조인 김인문이 식읍으로 받은 땅이라 하여, 스스로 낭혜화상에게 절터로 기증한 것을 보면,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1992, 「聖住寺 朗慧和尙塔碑」. 국가의 조치와 상관없이 지방에서는 식읍지배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가령 식읍을 받은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이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는데, 난이 실패한 후 239명의 종족(宗族)과 당여(黨與)가 사로잡혀 처형되고 그 민(民)은 다른 곳으로 옮겨진 일이 있었다.삼국사기 권 10, 憲德王 14年 3月. 여기서의 종당(宗黨)은 종족(宗族)과 당여(黨與)이다. 이 중 종족(宗族)으로 간주된 대가족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모르지만 부변(父邊)과 모변(母邊), 처변(妻邊)을 포함하였을 것이고, 당여(黨與)는 무적(武적) 세력(勢力)이 중심이 된 문객(門客)이었을 것이다.노태돈, 1978.

이들 종당(宗黨)이 바로 김주원이 받은 식읍을 토대로 한 전장(田莊) 경영(經營)을 통해 보전하려는 세력들이었고, 그 민(民)은 식읍민(食邑民)이었을 것이다. 또한 장보고가 이끌었던 만인(萬人)에도 종당(宗黨)과 식읍민(食邑民)을 포함되었을 것인데,삼국사기 권 10, 興德王 3年 4月. 청해진이 해체된 후 식읍민들은 벽골군으로 옮겨졌다.삼국사기 권 11, 文聖王 13年 2月. 이러한 식읍지배를 토대로 전장(田莊)을 경영한 부류로 앞서 서술한 각간가(角干家)(재상가, 宰相家)가 있다.신당서 권 220, 新羅傳.

녹읍(祿邑)을 기반으로 한 전장주(田莊主)의 경우, 당여(黨與)를 가신(家臣)이라고 하였다.고려사 권 2, 太祖 17年 夏5月. 녹읍계열(祿邑系列)의 전장주(田莊主)가 보전(保全)하려는 가족의 규모에 대해서는 별도의 자료가 없지만, 나말여초 가족관계가 기본적으로 양측적(兩側적) 친속조직(親屬組織)을 유지했음을 상기해보면,노명호, 1988. 이 역시 식읍(食邑) 계열(系列)의 전장주(田莊主)와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계통은 다르지만 왕경인(王京人)인 지증이 북원경 소재의 안락사에 토지를 기증한 배경의 하나로서 ‘친당(親黨)’이 다 죽었다는 것을 근거로 짐작해보면,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1992, 「鳳岩寺 智證大師塔碑」. 여기서의 친당(親黨) 역시 종당(宗黨)과 같은 의미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식읍주(食邑主)나 녹읍주(祿邑主)가 종당(宗黨)과 식읍민(食邑民)‧녹읍민(祿邑民)을 기반으로 전장(田莊)을 운영하고, 경우에 따라서 국가권력이나 왕권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두 제도를 통해 국가의 토지‧농민지배권을 양여받았다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기 소유토지에 식읍을 받아 공부(貢賦)를 제외한 조용조(租庸調) 삼세(三稅)를 위임받은 이들은 물론이고, 녹읍(祿邑)을 받아 전조수취권(田租收取權)만 위임받은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삼국사기 권 11, 眞聖王 3年.

금입택 : 경주에 금입택(金入宅)이라는 호화주택을 마련해 살고 있었는데, 그 수가 무려 39개나 되었다.삼국유사 권 1, 辰韓. 이런 이들이 소유한 토지는 물론 경주 부근에도 있었겠지만, 각 지역에 산재되어 있었다. 가령 39개 금입택(金入宅) 가운데 우비소리(于比所里)(우비소택亏比所宅)와 지택(池宅) 소유토지의 하나로서 간주되는 것이 전남 담양에 있었고,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1992, 「開仙寺 石燈記」. 북택(北宅) 청(廳)터는 강주계(康州界) 초팔현(草八縣)에 있었다.삼국유사 권 3, 伯嚴寺 石塔舍利.

그 밖에 장사택(長沙宅)·판적택(板積宅) 등 지방지명과 관련있는 것들이 꽤 있는데, 이는 해당지역에 금입택주(金入宅主)의 소유토지가 특히 많았기 때문에 붙어진 이름일 것이다. 이런 경우 전장주(田莊主)는 종당(宗黨) 가운데 한 사람을 소유토지가 있는 지역의 지방관으로 부임시켜 전장(田莊) 경영(經營)을 도왔을 것이다.

예를 들어 경명왕(917~924)의 왕비를 배출한 장사택(長沙宅)의 경우, 경명왕비의 조부祖父인 수종水宗 각간伊干이 858년 무주(武州) 장사현(長沙縣)의 부관(副官)을 지낸 기록이 있다.이기동, 1980. 그가 집안 전장田莊이 있는 지역의 부관을 지내면서 그 경영을 도왔을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진골대등과 재지대등 : 이러한 토지 경영 사례 중 소경과 관련 있는 주요 사례가 원주 거돈사 사례이다. 가령 879년(헌강 5) 지증대사가 자신이 소유한 장(莊) 12구(區)와 전(田) 500결(結)을 안락사에 기증한 일이 있다.

遂於乾符六年 捨莊十二區 田五百結 隸寺焉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1992, 「鳳岩寺 智證大師塔碑」

저택 소유 : 이를 보면 전(田)은 결(結)을 단위로 전답(田畓)의 면적을 계산하였고, 장(莊)은 구區를 단위로 면적을 계산하였다. 755년에 웅천주 출신의 향덕(向德)이 자신의 볼기살을 떼어 부모를 공양하자 이를 기특하게 여긴 왕이 ‘조(租) 300 곡(斛)과 택(宅) 1 구(區), 구분전(口分田)약간을 주었다’고 하였고,삼국사기 권 48, 向德傳. 도선이 왕융에게 36 구(區)의 집을 지으면 슬기로운 아들을 얻을 것이라고 하여 왕융이 그 말대로 집을 짓고 살아 왕건을 낳았다고 한다.고려사 世系.

이를 보면 구區는 택지(宅地)의 면적을 측량하는 단위였던 것으로 보인다. 제민요술(齊民要術) 에 의하면, 택지(宅地) 1구(區)는 전(田) 70 보(步)를 말하는 것으로서,齊民要術 권 1, 種穀 第三. 이렇게 보면 지증이 기증한 장(莊) 12구(區)는 자신이 소유했던 840 보(步) 면적의 대저택이 된다.日野開三郞, 1986. 북택(北宅) 청(廳)터에 백암사를 지었다고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삼국유사 권3, 伯嚴寺 石塔舍利. 이러한 저택은 전국 곳곳에 있었을 것이다.

전장 관리 : 시지(柴地)와 율지(栗枝)·좌위(坐位)와 더불어 곡물창고와 구유간, 택지, 전답으로 구성된 전장(田莊)을 관리하는 곳을 장사(莊舍)라 하였다. 장사(莊舍)의 총책임자는 장(莊)을 맡았다는 의미로 지장(知莊)이나 장임(莊任)이라고 불렀다. 세달사(世逵寺)의 장사(莊舍)는 명주(溟州) 㮈李郡에 있었는데, 본사에서는 장(莊)을 맡아 관리하는 사람으로 조신(調信)을 파견하였다. 그는 이 일을 맡으면서 상당한 부를 축적하였는데, 장임(莊任)을 면했을 때 사재(私財)를 털어 정토사(淨土寺)를 창건하였다고 한다.삼국유사 권 3, 洛山二大聖, 觀음 正趣 調信.

산림천택 소유 : 전장주(田莊주)는 이러한 저택과 함께 산림도 소유하였다. 성덕왕이 진여원을 지원하기 위하여 매년 봄·가을에 산 가까운 곳의 주현창(州縣倉)에서 조(租) 100 석(石)과 맑은 기름 1 석(石)을 항상 공급케 함과 동시에 진여원 서쪽 6000 보(步) 가량 떨어진 곳에 시지(柴地)(땔나무숲) 15결, 율지(栗枝)(밤나무숲) 6결과 함께 좌위(坐位)(집터) 2결이 있는 곳에 장사(莊舍)를 만들어준 것이 한 예이다.삼국유사 권 3, 臺山五萬眞身.

또한 말목장을 소유한 전장(田莊)도 있었다. 당나라에서 불법(佛法)을 공부하고 일본으로 돌아가던 엔닌(圓仁)의 관찰에 의하면, 무주(茂州) 남쪽의 구초도(丘草島)가 제(第)3 재상(宰相)이 말을 기르던 곳이라고 하였고,圓仁, 『入唐求法巡禮行記』. 안도(雁島)에는 내가(內家)에서 말을 방목하는 산이 있다고 하였다.

바로 이 구초도(丘草島)와 안도(雁島)가 문무왕 9년 삼국을 통일한 후에 논공행상으로 분배한 마장(馬場) 174개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삼국사기 권 6, 文武王 9年. 이와 함께 염분(鹽盆)을 소유한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당시 전장주(田莊主)는 전국 각지에 택지와 산림지, 산림천택지를 마련하여 경영하였다.한국역사연구회 편, 1996, 「대안사 광자대사비」.

2. 문화생활

진골대등, 재지대등층이 지방사회에서 한 역할로서는 음악과 함께 전통적인 신라의 지식과 기술과 지역사회 고유의 지식과 기술을 교통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가령 원주에는 비마라사가 있다. 일연 스님은 자신이 저술한 삼국유사에서, 의상이 열 곳의 절로 하여금 불교를 전하게 하였는데, 태백산 부석사와 원주의 비마라사, 가야산 해인사, 비슬산의 옥천사, 금정산 범어사, 남악산 화엄사가 그곳이라는 것이다.삼국유사.

일중일체다중일 一中一切 多中一 하나 속에 모두 있고 모두 속에 하나 있어 일즉일체다즉일 一卽一切 多卽一 하나가 모두이고 모두가 하나이네 일미진중함시방 一微塵中 含十方 하나의 티끌 가운데 온 우주를 머금었고 일체진중역여시 一切塵中 亦如시 낱낱의 티끌에도 모두 다 그러하네

의상 스님은 한국식 화엄인 해동 화엄을 연 스님이다. 의상 스님의 대표작인 화엄일승법계도 華嚴一乘法界圖에는 위와 같은 글이 있다. 개체(일, 一)와 전체(다, 多)가 서로 융합하여 걸림이 없는(상즉상입, 相卽相入) 관계라는 것으로, 미미해 보이는 티끌도 우주적 존재이고, 우주도 티끌과 같은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668년 7월 15일 중국 당나라에 유학 중인 44살의 의상 스님이 수십만 자의 화엄경을 210자의 화엄일승법계도로 정리하면서, 하나의 티끌에도 온 우주가 머금어져 있다는 한국 전통 사상을 기준 삼아 화엄경 가르침을 요약했다는 것인데, 이런 불교 철학과 신앙의 거점을 전국 10곳에 마련하면서, 원주(북원경)도 그 중의 하나로 두었다.

원주 남쪽, 남한강이 남류하다가 북류로 바뀌던 그곳에 있었던 원주 비마라사가 해동 화엄을 알리고 있었다면, 원주 북쪽 남한강과 섬강이 만나는 곳을 둘러싼 고달사와 흥법사에서는 유명한 선종 스님이었던 유학파 현욱 스님(787~837)과 국내파 염거 스님(?~844)이 한국형 선종 공부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후일 두 스님의 학풍을 계승한 심희 스님(854~923)은 중국 유학에의 필요성을 묻는 후학 스님들에게 “선종 禪宗은 이미 동류 東流 하였는데, 무슨 이유로 중국 유학을 갈 것인가, 나는 이미 혜목학풍에서 그 경지를 접할 수 있었다”고 자부하고, 제자 자적 홍준(882~939)에게 “조사에서 조사로 서로 전하여 저 백암에게 전해져 우리 동해에 이르렀으니, 단절되지 않게 하여 그 도를 더욱 아름답게 해 왔다”고 현욱과 이관의 학풍을 설명하였다.이인재, 2016.

원주 흥법사 충담스님의 비문을 직접 지었던 고려 왕건 태조가, 943년(태조 26) 후대 왕들이 지켜야 할 고려 국가 통치 원칙의 대강(大綱)을 설명하면서, “우리나라는 오래 전부터 당나라 풍을 존중하여 문물예약이 모두 당제를 준수해 왔는데, 풍토도 다르고 인성도 다르니(殊方異土) 반드시 같을 필요가 없다(不必苟同)”고 설파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고려사 권2 태조 26년 4월. 북원경 원주의 해동 화엄과 불법 동류에 대한 깊은 공부가 있었다.

각 소경 사람들이 누린 문화적 활동에 불교 철학과 불교 신앙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신라는 551년(진흥 12) 가야의 궁중 악사였던 우륵于勒을 충주에 안치安置시킨 후, 신라인인 대나마 주지(법지)와 계고, 대사 만덕 등을 보내어 가야금 공부를 시킨 일이 있었다.삼국사기 권32 樂.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신라 출신 3인이 우륵이 원래 가르쳐 준 열 한 곡을 배웠는데, 신라인이 듣기에는 원 노래 열 한 곡이 너무 번잡하다고 하여 다섯 곡으로 줄이니, 이에 우륵이 반발하였다가, 실제 다섯 음률을 듣고 수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경주에 거주하던 일부 인사들은 신라 출신들이 변주한 곡들조차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것이었다. 가야에서 나라를 망친 음악이라는 것이다. 이에 진흥왕이 직접 의견 조율에 나서서 가야가 망한 것은 가야왕의 문제이지 음악 때문이 아니라고 강력 변호하였다. 그 결과 우륵의 음악이 신라에 널리 통용될 수 있었다.

가야 음악만이 아니었다. 가야 춤도 충주에 전승되었다. 가령 668년(문무왕 8) 왕이 충주를 지나갈 때, 국원경의 장관 용장이 왕을 위한 잔치를 벌였는데, 이 잔치에서 15살 먹은 능안이라는 젊은이가 가야 춤을 추어 문무왕을 기쁘게 하였다고 한다.삼국사기 권6 문무왕 8년.

이렇게 가야금과 가야춤이 국원소경이 있었던 충주가 중심이 되어 신라에 퍼졌다면, 거문고는 남원소경이 있던 남원을 중심으로 신라에 퍼졌다.

고구려 사람 왕산악이 만든 곡조 1백여 곡은 신라 출신 옥보고가 지리산 운상원에서 연구하여 30곡으로 신라인의 정서에 맞는 변주곡을 만들었고, 이 곡이 속명득과 귀금에게 이어져 나왔지만 지리산에 국한되어 곡이 연주되어 신라에 퍼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신라왕이 이찬(伊湌) 윤흥(允興)을 남원경의 장관으로 임명하여 고구려 계통의 악곡을 전수받고자 하였다. 윤흥이 남원 출신 안장과 청장을 선발하여 귀금에게 보내 거문고 악곡을 공부시켰으나 중요한 부분은 3년이나 지나는 동안에도 수업을 받지 못했다. 이에 남원경 장관이었던 윤흥이 처와 함께 부부가 직접 귀금을 찾아가 호소한 결과 전체 악곡을 전수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삼국사기 권32 樂.

그런데 이찬 윤흥이 866년(경문왕 6) 동생들과 반역에 나서는 것을 보면 이 기록에 나오는 신라왕은 아마도 경문왕이나 혹은 헌안왕이었을 것인데, 그렇다면 신라인인 옥보고와 속명득, 귀금으로 전래되는 기간을 한 세대 30년 총 90년으로 잡아도 776년, 그렇다면 고구려가 멸망한 후 100여년간은 고구려 출신이 직접 거문고 악곡을 계승하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이 기록과 앞서 685년(신문왕 5년) 여러 주군(州郡)의 민호(民戶)를 남원소경에 나누어 거주케 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보면, 남원으로 사민된 민호 중에는 고구려 유민이 있었을 것이고, 신라의 통합 정책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백제 유민 역시, 남원으로 사민된 사람들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치를 북원경에 적용해 보면 북원경에도 원주 토착세력과 경주 출신 이주 세력들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계 유민들도 옮겨와 거주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와 관련하여 원주의 토착세력인 원주 원씨의 시조를 고구려 계통의 원경에 대고 있는 것은,원인식 편, 1986. 신라 통일기 원주에 고구려 유민들이 거주하면서 생긴 이야기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문무왕에게서 문장(文章)으로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은 강수(强首)가 중원경 사량인 출신으로, 충주에서 스승을 모셔 효경과 곡례, 이아, 문선 등과 같은 주요 교재를 공부하고, 정식 혼례가 아닌 자유 연애 방식으로 같은 지역에 사는 대장장이 딸과 첫 결혼을 했음에도, 후일 경주에서 당나라 외교 문서를 해설해 주고, 당 황제의 조서에 감사하다는 회답의 표문을 짓는 등, 국가 규모에서 활동을 하였다. 소경에서 공부하고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전국구로 활동해도 장애 요인이 없었다는 것이 당시 소경의 교육 수준이었다. 이로 보면 통일 전·후기 신라 전국 각지에서 지식과 기술의 교통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고 아마도 이런 전파의 중심에는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던 진골 대등층이 있었을 것이다.

Ⅴ. 9~10세기 중규모 광역통치단위로서의 부(府)와 소경(小京)

신라는 808년(애장왕 9) 전국의 9주와 3도128 방면에 군읍(郡邑)의 영역을 점검하는 사신을 파견하여,129 군읍(郡邑), 즉 한 개의 군에 몇몇 현을 묶은 소규모 광역행정단위, 영속관계형 군현제 운영 성과를 검토하였다.130 검토 결과는 북원경, 중원경, 서원경 등 소경 지역에, 국한된 중규모 광역행정단위의 시범 운영이었다.131 북원부, 중원부, 서원부라는 새로운 행정구역의 등장이자, 군읍이 아닌 경읍(京邑)의 확장이다.132

신라가 소경 지역에 부제를 실시할 수 있었던 명분은 당나라의 5부5경제였다. 당나라는 713년(개원 원년),133 723년(개원 11년),134 757년135 등 40여년간 3차례에 걸쳐 5경에 5부를 설치하였다. 당나라 현종이 즉위하면서 수도 행정의 권위와 효율성을 높이려는 조치였다. 805년(애장왕 6) 신라는 중국 당나라 율령 형식을 빌려 쓴 공식(公式) 20여조를 반포한 바 있는데,136 이 시기에 이미 신라는 당나라 5부 5경제를 변경한 5부 5소경제를 기획했을 것이다.

그런데 당나라와 달리 영토가 작은 신라에서 3부 3소경제를 시행하면서 나타난 현상이 북원부·중원부·서원부 강경(疆境)이 맞닿게 된다는 것이다. 북원경과 중원경이 맞닿은 것과는 또 다른, 3부 3소경 벨트가 생기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미리 예측하고 시행했던 신라 정부는, 이 정책이 3부 3소경 벨트에 흩어져 살던 경주 출신의 진골대등을 지원하는 정책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 신라 전성시대 서울 인구가 17만 8936호, 거의 90만명이나 될 수 있었던 것도 5부 5소경 정책의 효과일 수 있다.137

그런데 일연스님이 ‘염불하는 스님’ 이야기를 수록한 기록에, 스님의 염불하는 목소리가 하도 낭랑해서 성안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다고 하면서, 당시 도성 안 규모는 1천360방 가운데 360방이라는 정보를 기록해 두었다.138 나머지 1천방은 도성 밖에서 찾아도 된다는 것이다. 5부 5소경 소속 치소 공간이 각각 대략 200방씩 모두 1,000방이었다고 간주한다면, 당시 경중(京中)이란 왕도와 5부 5소경을 모두 포함한 것일 수 있다.139 이렇게 군읍(郡邑)과 경읍(京邑)을 굳이 구별할 만큼 당시 신라를 이끌던 골품 관료들의 생각은 고루하였다.

정작 3경3소경 벨트를 본격적으로 활용한 이들은 진골대등이 아니라 이미 지역마다 자체 관반체제를 갖추고 있었던 재지관반들이었다. 실제 3부 3소경 벨트라는 신세계를 경험한 재지관반들은 나말여초 사회변동이 생기자, 곧바로 후삼국 건국으로 신라를 궁지로 몰았다. 신라를 재건하려던 5부 5소경제가 오히려 신라를 고려로 전환시키는 그런 제도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Ⅵ. 맺음말

삼국간 통일전쟁을 겪는 와중에 엄청난 인구의 유동과 막대한 농토의 피폐가 전국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인구 유동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이전의 고구려 사람, 백제사람이 모두 신라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남북국기 신라가 원 삼국 사람들이 모두 납득할 수 있도록 중국제도와 한국제도를 섞어 쓰는, 당이상잡(唐夷相雜)을 활용한 이유였다. 그 결과 본질은 다르지만 형태는 동일한 것처럼 보이는 의제적(擬制的) 중국식 군현제, 의제적 중국식 관료제 등이 역사에 등장할 수 있었다.

중국식 의제적 제도가 활용 가능하게 된 배경에는 원효의 아들, 설총의 문자혁명이 있었다. 설총은 「역경(易經)」·「서경(書經)」·「시경(詩經)」·「예기(禮記)」·「춘추(春秋)」·「효경(孝經)」·「논어(論語)」·「맹자(孟子)」·「이아(爾雅)」 등 중국의 주요 고전,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등의 중국의 주요 역사책, 주요 문학서,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활약했던 여러 학자들의 저술(諸子百家)과 산술서算術書 등을 한국식 한자(方言)로 읽을 수 있게 이두의 표준화 작업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중국과 주변 국가들의 풍속과 물품 등을 우리나라 음(方音)으로 읽을 수 있게 해 주었다.

문자혁명의 결과 교육혁명도 할 수 있었다. 이전의 골품관료 외에 말 그대로 국가가 제시한 주요 교재를 익혀 실력만으로 국학을 졸업한 문적자(文籍者)와 해당 주요 교재를 집에서 익힌 가학자(家學者)도 문적자(文籍者)와 같은 대우를 하여, 말 그대로 중상층 실무관료층을 대거 마련할 수 있었다. 지방제도 개혁은 설총의 문자혁명과, 그에 동반된 교육혁명으로 양성된 실무관료층 덕분에 가능한 사건이었다.

뭍길과 물길이라는 교통로로 엮어진 지방제도 개혁은 경주와 9주 5소경이라는 전국 15개 거점도시를 중심으로 실행되었다. 경덕왕대 전국 450여 곳의 군현을, 영속관계(領屬關係)로 묶은 소규모광역통치단위로 운영한 것이었다.

소규모광역통치단위로 묶은 이유는, 고려가 본관제를 활용하여, 삼한공신이라 하여 전국의 주요 가문의 대표를 개성에 모아 거버넌스(의사결정조직)를 만드는 방법과 달리, 이미 5백년에 걸쳐 형성된 원신라 지역 출신 지배층(진골대등)을 전국에 분산시킬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국분산 정책의 중심에 외관제가 있었을 것인데, 백여곳의 외관 파견 지역 가운데, 신라 정부의 지방제 개혁, 곧 원신라 지역 출신 지배층의 전국 분산에 핵심 역할을 한 곳이 교통 거점에 위치한 신라의 작은 서울, 곧 5소경이었다. 특히 원고구려 지역의 원주와 충주, 원백제 지역의 청주와 남원 등 4소경 지역이 중요했다. 고구려와 백제가 관할하던 수많은 국유지와 공유지, 그리고 두 지역 통치에 전념했을 고구려 지방 인재, 백제 지역 인재들의 공백을 신라가 메꿀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신라는 가야연맹체의 핵심 거점이었던 김해를 금관경으로 운영해 본 경험이 있었다.

소경의 장관은 사대등이다. 사대등은 대등(大等)을 사(仕)하는 존재인데, 사(仕)는 벼슬한다, 혹은 살핀다는 뜻이 있으므로, 사대등의 임무는 행정실무를 맡은 촌주층과 함께 대등을 살피고 관리하는 일이었다.

소경의 경내(境內)는 읍중과 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읍중, 즉 읍성 내에는 소경 장관과 행정실무를 맡은 촌주층, 그리고 읍중을 거쳐 경내 여러 마을로 옮겨 갈 재경 출신 진골대등들이 살고 있었다. 경내에서 제작한 여러 수공업 물품들이나 생활용품들이 주로 소비되는 곳이 읍중이었을 것이다.

경내의 여러 마을에는 재경출신 진골대등과 재지대등들이 농업경영을 하면서 경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재경출신 진골대등들은, 원백제, 원고구려 지역에서 백제나 고구려가 관할하던 국유지나 공전들을 사전(賜田)을 통해 나누어 받았고, 이에 더해 전통적인 식읍과 녹읍, 그리고 전장을 통해 마을 한 곳이나 여러 마을에 걸쳐 대토지소유와 경영을 하였다.

이들의 풍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불교계를 지원해 해동화엄이나 불법동류를 이끄는 후원자가 되기도 하였고, 음악이나 춤, 학문을 융성케 하기도 하였다. 전국에 화엄십찰을 건립한다거나 주요 지역의 선종 사찰이 활성화된 것도 이들의 후원이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원주 남쪽에는 화엄십찰의 하나인 비마라사가 있었고, 북쪽에는 흥법사와 고달사가 있어 새로운 선종 문화의 산실이 되기도 하였다. 충주의 우륵과 남원의 옥보고 같은 가야와 고구려 음악을 새롭게 해석한 음악가들이 등장하고, 강수와 같은 지식인들이 활약하기도 하였다.

674년(문무왕14) 진골 출신 육도진골(六徒眞骨)들을 9주의 치소(治所)와 5소경에 이주시키면서, 별칭관명(別稱官명)을 쓰도록 했다는 점에 주목하면, 신라 정부의 정책기본은 진골 귀족조차 9주와 5소경에 강제로 옮겨 일종의 향직(鄕職)에 봉사케 하는 것이었다. 초기엔 서울로 돌아가자는 생각이나 서울생활과의 비교 때문에 96각간의 난 등이 일어났으나, 점차 전국 각지에 흩어져 거주하는 기간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재지세력이 되어 버렸다.

9세기 이후, 소경의 경내가 주변 군현들을 흡수하는 방향으로 확대되는 부제(府制)의 실시는, 내용적으로 재지세력의 독자성을 확대하고, 경주의 간섭을 줄이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소규모 광역통치단위에서 중규모 광역통치단위로의 전환이었다. 그리고 실제 역사의 방향은 재지세력들의 활동을 보장하는 고려 현종대 중규모 광역통치단위로 실현되었다. 신라의 작은 서울이라는 5소경 지역에 9세기에 등장한 부제(府制)는 신라국가의 지속적인 지방통치 염원과 달리, 고려왕조로의 교체의 디딤돌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끝).

9주 5소경의 치소
그림 1 9주 5소경의 치소
3소경 관련 군현 영속관계
그림 2 3소경 관련 군현 영속관계
세 고을 연결 물길과 영월군
그림 3 세 고을 연결 물길과 영월군
네이버 지도 상 원주·충주·청주
그림 4 네이버 지도 상 원주·충주·청주
중원경 치소 추정지
그림 6 중원경 치소 추정지
서원경 치소 추정지
그림 7 서원경 치소 추정지
북원경 치소 추정지
그림 8 북원경 치소 추정지
원주 관반
그림 9 원주 관반
화엄일승법계도
그림 10 화엄일승법계도
3부3소경과 속현
그림 11 3부3소경과 속현

표 3 읍사(邑司) 산하 향직과 향리직 (원주 사례)

관할기구職 名
읍사 (邑司) 지관 (知官) 소경사 (小京司) or 주사 (州司) 鄕職 대등층 土官司 (司戶) (侍中?) 上大ホ 信希 大ホ (戶長) 侍郞 興林大ホ 秀英大ホ (副戶長) 大監․弟監 (村長‧村正)
(事審官) 大ホ 郞中 旻會 㭆 金舜 㭆 (戶正) 員外郞 (副戶正) 執事 (史)
鄕吏職 (州吏) 촌주층 兵部 (司兵) 足兵 안전 卿 (兵正) 筵上 (副兵正) 維乃 (兵史)
倉部 (司倉) 足食 민생 卿 (倉正)

표 3 청주 관반

직책성명관등직책성명관등전직
檀越兼令金希一堂大等監司孫 熙大奈末前 侍郞
金守□大等慶柱洪大奈末前 兵部卿
金釋希大等韓明寔奈末學院卿
金寬謙大등慶奇俊大舍前 司倉
孫仁謙學院 郞中

표 4 주 관반과 현 관반 (상주와 적아현)

輔州官班縣 官班
上沙湌元吉上沙湌宗偘
第二純偘第二今岳
第三英希第三主道
寺卿村主吉萱村주行悟
村주能直
村주宣直

표 5 3소경小京과 3부府 (고려사 지리지의 충주, 청주, 원주 속현)

충주(중원경)과 중원부 청주(서원경)과 서원부 원주(북원경)과 북원부
괴주槐州 괴산 연산군燕山郡 청주 문의면 영월군寧越郡 영월
장연현長延縣 괴산 연풍면 목주木州 천안 목천 제주堤州 제천
음죽현陰竹縣 음성 음죽 진주鎭州 진천 평창현平昌縣 평창
음성현陰城縣 음성 전의현全義縣 세종 전의면 단산현丹山縣 단양
청풍현淸風縣 제천 청풍면 청천현淸川縣 괴산 청천면 영춘현永春縣 영춘
도안현道安縣 증평 도안면 주천현酒泉縣 주천
청당현靑塘縣 괴산 청안면 황려현黃驪縣 황려
연기현燕岐縣 연기 연기리
회인현懷仁縣 보은 회인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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