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본문

신라말·고려초 남한강을 통한 불교문화의 교류와 불상의 조성

Exchange of Buddhist Culture and Creation of Buddhist Statues through the Namhan River in the Late Silla and Early Goryeo Periods

서지민1
Jimin Seo1

1 충북대학교

1 Chungbuk National University

발행: 2025년 1월·Vol. 35, No. ·pp. 155-182

DOI: https://doi.org/10.71244/jojm.2025.35.155

초록

이 연구에서는 신라 말부터 고려 초기까지 남한강 일대가 불교미술의 중요한 교류 공간이라는 사실을 불상을 통해서 논의하였다. 당시 이 지역에서 확인되는 불상들은 크게 통일신라 전통양식을 계승한 유형과 고려 초기에 새롭게 등장한 도상을 반영한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통일신라 양식을 계승한 대표적인 불상은 단양 용부원리사지 석조여래입상과 충주 원평리 석조여래입상이다. 단양 용부원리 석조여래입상은 약 4미터가 넘는 거대한 크기로 우전왕상식 대의를 입고 하체에 V 자형 군이 표현되어 있으며, 머리 위 원형 구멍이 뚫린 보개가 있었다는 점에서 보관을 쓴 초기 석조여래입상으로 중요하다. 충주 원평리 석조여래입상 또한 전반적으로 통일신라 후기 양식을 갖고 있지만, 4-5등신으로 신체 비례가 작고 형식화가 진전되어 있어 고려 초기에 제작되었다고 추정된다. 반면 고려 초기 남한강 유역에 조성된 새로운 도상의 불상들은 왕경의 불상양식이 지역으로 전래되어 토착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해주 영파리 석조보살입상 유형은 보관 없이 보발을 높이 틀어 올린 형태와 우전왕상식의 대의를 착용하는 점이 특징이며, 미륵보살상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처럼 남한강 유역 불상들은 통일신라와 고려 불상 양식의 계승·변용·융합 양상을 하나의 문화권 내에서 보여준다.

Abstract

This study discusses the fact that the Namhan River area was an important exchange space for Buddhist art from the late Silla to the early Goryeo period through Buddhist statues. The Buddhist statues identified in this region at that time can be largely divided into types that inherited the traditional style of Unified Silla and types that reflected newly emerging iconography in the early Goryeo period. Representative statues inheriting the Unified Silla style include the Standing Stone Buddha of Yongbuwon-ri, Danyang, and the Standing Stone Buddha of Wonpyeong-ri, Chungju. On the other hand, Buddhist statues of new iconography created in the Namhan River basin in the early Goryeo period show the process of the royal capital's Buddhist style being transmitted to the region and becoming localized. The type of Standing Stone Bodhisattva in Yeongpa-ri, Haeju, is characterized by a high topknot without a crown and the wearing of a Udayana-style robe. As such, the Buddhist statues in the Namhan River basin show the patterns of inheritance, transformation, and fusion of Unified Silla and Goryeo Buddhist styles within a single cultural sphere.

주제어:단양 용부원리사지 석조여래입상충주 원평리사지 석조여래입상서울 진관동 석조보살입상서울 상부암 석조보살입상원주 신선암 석조보살입상원주 매지리 석조보살입상
Keywords:Standing Stone Buddha of Yongbuwon-ri Temple Site in DanyangStanding Stone Buddha of Wonpyeong-ri Temple Site in ChungjuStanding Stone Bodhisattva of Jingwan-dong in SeoulStanding Stone Bodhisattva of Sangbuam in SeoulStanding Stone Bodhisattva of Sinseonam in WonjuStanding Stone Bodhisattva of Maeji-ri in Wonju

Ⅰ. 머리말

남한강은 오대산 계곡에서 발원하여 한반도 중부 지역을 동서로 가로질러 흐른 뒤 서해로 유입되는 약 390km 길이의 큰 하천이다. 이 강을 따라 단양, 제천, 충주, 원주, 이천, 여주, 양평, 광주 등이 자리하여 예로부터 수로를 통한 물류 유통의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또한 충주에서 계립령과 조령, 단양에서 죽령으로 이어지는 길은 영남지방과 연결되었으며, 충주와 단양에서 문경으로 이어지는 소백산맥 횡단 육로를 통해 낙동강 수로와도 이어졌기 때문에, 충주를 거점으로 한 남한강 일대에는 한반도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내륙 수로망이 형성되었다. 이처럼 남한강 유역은 우리나라의 동·서·남·북을 잇는 중심축이자 인적·물적 교류가 집중되는 공간으로서, 경제·문화적으로도 매우 풍요로운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남한강은 삼국시대부터 전쟁에 필요한 병력과 군수 물자가 이동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중시되었으나, 교역로로서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통일신라시대부터이다. 당시에는 경주에서 선산·상주·함창·계립령·충주·여주(혹은 죽산)·당은포로 이어지는 길을 통해 서해를 건너 당나라까지 나아갈 수 있었으므로, 이 노선은 국제 교역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수로를 활용해 조세를 운송하는 조운제가 시행되면서 전국에 12~13개의 조창이 설치되었고, 남한강 유역에는 흥원창(興原倉)과 가흥창(可興倉, 덕흥창으로도 불림)이 있었다. 현재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에 있었던 흥원창과 충주시 가금면 가흥리에 있었던 덕흥창은 강원도와 경상도 일대의 조세를 거두는 거점으로서, 수세 구역이 가장 넓은 편이었을 뿐 아니라 육상 교통로와도 연계된 이점을 지녔다. 이와 같이 흥원창과 덕흥창은 곡물뿐 아니라 각종 특산물과 수공업품 등 다양한 물자가 모이는 남한강 교역망의 핵심 거점으로 성장하였으며, 남한강 교역로는 국가 재정을 확보하는 수단이자 물품을 공급하는 중요한 통로로 기능하였다. 아울러 남한강 유역은 문화 교류의 창구로 작용하면서 불교문화의 전개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이에 본고에서는 신라 말·고려 초 남한강을 통해 이루어진 불교문화의 교류와 불상의 조성에 대해서 고찰하고자 한다. 우선 남한강 유역 사찰에 전하는 불교미술품과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도자류·기와류 등의 출토품을 검토하여, 이 지역 불교사원이 왕실과 호족의 후원을 바탕으로 강력한 사세를 형성하는 과정과 그에 따라 전개된 불교문화 교류의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다음으로 남한강 유역에 전해지는 불상 가운데 당시 왕경에서 지역으로 전해졌던 불교문화 교류 양상을 잘 보여주는 작품들을 선별하여 검토함으로써, 문화적 교차로에 위치한 이들 불상이 신라 말·고려 초 불교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의의를 밝히고자 한다.

Ⅱ. 신라말·고려초 남한강 유역의 불교사원 조영(造營)

신라 말·고려 초에는 불교가 매우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였으며, 왕실과 호족의 지원을 바탕으로 막강한 사세를 구축하면서 다양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왕사와 국사의 탑비에 새겨진 내용을 통해 잘 드러난다. 당시 남한강 유역에 조영된 불교 사원에서는 최고 수준의 각종 불교미술품들을 제작, 사용하였다. 이 장에서는 이러한 양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하여 기존의 관련 연구에 주로 다루어졌던 문헌 자료는 물론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도자와 기와 등의 출토 유물까지 함께 검토함으로써, 신라 말·고려 초 남한강 유역 불교 사원의 조영 양상과 성격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제천 월광사지

월광사는 본래 도증(道證)이 창건한 법상종 사찰이었다.1) 월광사가 자리한 월형산(月兄山, 월악산)은 경상도와 충청도를 잇는 계립령이 위치한 요충지이자, 신라 왕실이 소사(小祀)를 올리던 성산(聖山)이다.2) 월광사를 선종 대찰로 중창한 원랑(圓朗, 816~883)은 845년에 구족계를 받은 뒤 자인선사(慈忍禪師)를 만나 선을 배우고, 이후 무염(無染) 문하에 들어갔다. 856년에 당에 유학하여 앙산(仰山) 징허대사(澄虛大師)에게서 선을 배우고 866년에 귀국하였으며, 경문왕 7년(867) 자인선사의 권유로 월형산 월광사에 주석하여 883년 입적할 때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대통이 월광사에 머문 뒤 그 명성이 높아져 칭송이 궁중에까지 미쳤다고 전한다.3)

1998년 충청대학교 박물관의 발굴·조사에 따르면, 월광사는 효소왕 대 도증(道證, ?~702)에 의해 창건되어 조선 전기까지 존속한 것으로 파악된다. 절터에는 원랑선사탑비가 서 있던 자리가 있고 부도 부재가 흩어져 있으며, 3단으로 조성된 대지에 석축을 중심으로 각종 기와편·토기편·자기편이 수습되고 있다. 이들 출토 유물을 통해 월광사는 8세기 초에 창건되어 16세기경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8세기의 당초문 암막새와 격자문 암키와는 도증이 8세기 초 월광사를 창건하였다는 원랑선사탑비의 내용을 뒷받침해 준다. 월광사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는 원랑선사가 주석하던 신라말·고려초로 보이는데, 발굴조사에서 당시 기와류와 도자류의 출토 비중이 높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4)

2. 충주 정토사지

정토사는 신라말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태조 대에 국사로 추앙된 법경대사(法鏡大師) 현휘(玄暉, 879~941)가 주석하였고, 뒤이어 홍법국사(弘法國師) 등 선종의 고승들이 머물렀던 대찰이었으므로 상당한 규모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법경대사 현휘는 906년에 입당(入唐)하여 선을 수학한 뒤 924년에 귀국하였다. 이에 태조는 현휘를 국사로 예우하고, 충주(中州) 정토사(淨土蘭若)에 머물 것을 청하였다. 현휘가 정토사에 주석한 이후로 인파가 몰려들었다고 한다5. 941년 현휘가 입적하자 개천산 북봉 남쪽 기슭에 유골을 안치하고 곧바로 부도(慈燈塔)를 세웠으며, 최언위가 비문을 짓고 태조가 친히 제액을 쓴 법경대사탑비는 943년 6월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법경대사탑비는 충주댐 건설로 원 봉안처가 수몰되면서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177-6번지로 이전되어 전하고 있다. 한편 정토사지 법경대사 자등탑은 일제강점기에 반출된 뒤 현재까지 소재가 확인되지 않고 있는데, 제자인 홍법국사의 부도와 마찬가지로 탑신부가 구형(球形)이었다고 전한다. 고려 목종은 ‘자등(慈燈)’이라는 탑명을 내리고 손몽주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으며, 홍법국사탑은 1017년에 건립되었다. 이 탑은 일반적인 부도와 달리 팔각원당형의 기본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탑신부를 구형으로 조성한 점이 매우 독특하다.

永除□□之災 別封此山 表元勳也 曾授錄於金剛 又傳名於仙記”3 4 5 “便臣奉迎郊外寵榮之盛冠絶當時翌일延入九重降於三等虔心鑚仰待以國師 (中略) 上事佛精勤深求親近仍于中州淨土蘭若請以住持” 「忠州 淨土寺址 법경대사탑비」

정토사지에 대한 발굴조사는 1983년부터 1984년까지 이루어졌다. 조사 결과 고려 전기부터 조선 전기까지 사용된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며, ‘정토사(淨土寺)’, ‘개천사(開天寺)’ 등의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어 사찰의 명칭이 밝혀졌다. 정토사의 가람 배치는 남향을 기본 축으로 하는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 구조로, 중문–탑–금당–강당이 일직선상에 놓이고 각 건물이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탑 주변에는 부도와 석등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강당과 요사채는 중심 불전 주변에 배치되어 불교 의례 공간과 승려들의 생활 공간이 적절히 분리되도록 구성되어 있다.6)

3. 충주 김생사지

김생사지(金生寺址)는 충북 충주시 금가면에 위치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충주목 불우(佛宇)」조에 따르면, 신라의 명필 김생(711~791)이 세속의 욕망을 떨쳐내기 위해 충주 북진 언덕에 절을 짓고 수행하였으며, 고려 시대에 이르러 크게 번창하였다고 전한다. 발굴조사를 통해 ‘함통 13년(咸通十三年, 872)명 암막새’와 ‘김생사(金生寺)’ 명 기와 등이 출토되어 이러한 문헌 기록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충주 김생사지에서는 청자·분청사기·백자 등 다양한 종류의 도자기가 출토되었는데, 그 가운데 청자가 약 절반을 차지하여 가장 높은 비율을 보인다. 청자류 중에는 잔과 주자·주구 등 고급 다기(茶器)가 포함되며, 중국 월주요 계통의 청자완과 요주요 계통으로 보이는 청자완 등 수입 중국 청자도 확인되어 당시의 대외 교류 관계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7)

4. 충주 숭선사지

충주 숭선사지는 충주시 신니면 문승리에 위치한 사찰터로, 2000년부터 2018년까지 모두 7차례에 걸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8) 숭선사는 고려 제4대 왕인 광종(光宗)이 954년에 어머니 신명순성왕후(神明順聖王后) 유씨(劉氏)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당(願堂)으로 창건하였다.9) 발굴조사 결과 금당지·강당지·탑지·영당지 등 중심 사역과 그 주변의 회랑, 남문·동문지, 배수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금당 기단은 장대석을 사용한 3단 석축 구조로 축조되었으며, 탱주를 세운 뒤 장대석을 채워 쌓는 방식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축조 기법은 고려 궁궐 건축에서 보이는 고급 기술로, 개경 만월대 정전(正殿)과 상통한다. 이에 따라 숭선사 금당은 왕궁 건축 양식을 따르는 최고 수준의 건축물로 파악된다【도 1

숭선사지 금당지 기단부 고려초기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문승리
도1 숭선사지 금당지 기단부 고려초기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문승리
】. 또 길이 약 65~73m 에 이르는 암거식 배수시설이 확인되었는데, 일반 사찰에서는 보기 드문 것으로 만월대의 배수시설과 유사하다. 이처럼 금당지의 축조 방식이나 배수시설을 볼 때, 고려 중앙 관청의 기술자를 동원해 건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숭선사지에서는 금동보살상 편, 금동 연봉형 와정 등을 비롯해 다양한 기와류와 도자류가 출토되었는데,10 특히 다양한 도자기가 망라되어 있어 당시 숭선사의 사세가 매우 융성했음을 짐작하게 한다.11

5. 원주 거돈사지

거돈사지는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에 위치한 사찰터로, 충주에서 원주와 여주로 이어지는 수로의 중간 지점에 자리한다. 거돈사의 전신은 안락사(安樂寺)이며, 지증 도헌(智證 도헌)이 경문왕의 누이 단의장옹주(端儀長翁主)의 청으로 864년부터 879년까지 15년간 주석하였다고 한다. 이를 볼 때 안락사는 이미 신라말부터 존재했으며, 왕실의 후원을 받는 사찰로 발전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11세기 초엽 고려 현종 때의 법안종 승려 원공 국사(圓空 智宗)는 거돈사에서 입적하였으며, 1025년에 국사 칭호가 추증되었다. 당시 최충이 비문을 짓고 김거웅이 글씨를 쓴 부도와 탑비가 세워졌는데, 이는 거돈사의 높은 사격을 말해준다.12 발굴에서는 청자, 백자, 흑유자를 비롯하여 중국제 백자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도자기류가 출토되었는데,13 대체로 11-12세기에 집중되어 있어 당시 거돈사의 사세가 막강했음을 말해준다.

6. 원주 흥법사지

흥법사(興法寺)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어, 진공대사(眞空大師) 충담(忠湛, 869-940)이 주석했던 고려초에는 대찰로 조영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충담은 신라 귀족 출신으로 고달사(高達寺)에 주석했던 원감국사(圓鑑國師) 현욱(玄昱)과 진경대사(眞鏡大師) 심희(審希)의 법통을 계승한 최고의 승려이다. 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합한 직후 충담을 궁궐로 초빙하여 설법을 듣고 왕사(王師)에 추대하였으며, 흥법선원(興法禪院)을 중창하여 주석하도록 하였다고 한다14. 이때부터 흥법사는 원주의 중심 사찰로 부상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충담은 940년 7월 월 흥법사에서 입적하였으며 그의 탑비는 이듬해인 941년에 조성하였다.

흥법사지는 남향의 평지 위에 1탑 1금당식 가람배치로, 금당 앞에 탑이 일직선상으로 배치되는 구조이다. 발굴조사 결과 신라말부터 조선 전기까지 법등을 밝혔던 것으로 보인다15. 해무리굽완이나 상감청자가 출토되고 있어 고려 전기에 사세가 융성했음을 말해준다16.

7. 원주 법천사지

법천사지는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명봉산 자락에 위치한다. 창건과 관련한 자료는 명확하지 않으나 발굴조사에서 통일신라시대 유물들이 출토되었고, 9세기경 관단(官壇)이 설치되었다는 사실로 보아 신라말에 창건으로 추정된다17. 고려시대에 법상종 승려인 지광국사(智光國師) 해린(海麟)의 하산소로 선정되며 사세가 커지고 1070년 해린이 입적하자 부도(현묘탑)와 탑비를 법천사에 세웠다18.

법천사지는 2001년부터 2007년까지 5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친 19동의 건물지와 석축, 계단지 등이 확인되었다. 남북 72.6m, 동서 52.5m 의 장방형 회랑 영역 안에 금당과 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되고, 금당 앞에는 2기의 탑이 있었다. 여러 건물들이 영역을 이루며 구획되어 있어서, 고려 전기 법상종 사찰의 가람 배치와 구조를 살펴볼 수 있다. 발굴에서는 불상을 비롯하여 다양한 기와류와 자기류가 출토되었다19. 특히 월주요계 청자, 요주요계 청자, 정요·경덕진요계 백자·청백자 등 중국제 도자기들이 출토되어 고려시대 법천사가 매우 번영했음을 알 수 있다【도 2

법천사지 출토 중국제 도자편 10-12세기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도2 법천사지 출토 중국제 도자편 10-12세기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20.

8. 여주 고달사지

고달사(高達寺)는 764년부터 있었다고 전하나21, 실제는 경문왕대(861-868)에 창건되었다고 추정된다22. 『조당집(祖堂集)』 「동국혜목산화상」조에 따르면, 현욱이 837년에 본국에 돌아와 남악 실상사에 머무르자, 민애대왕, 신무대왕, 문성대왕, 헌안대왕이 차례로 제자의 예를 다하였다고 한다. 이후 경문왕이 현욱을 고달사에 주석하도록 배려하였다고 한다23. 혜목의 뒤를 이은 심희는 중국에 유학하지 않았으나 혜목산의 종지를 계승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질 만큼, 당시 고달사의 사세는 매우 융성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24. 971년에는 고려 광종이 희양원과 도봉원과 함께 고달원을 부동사원(不動寺院)으로 지정하는 조서를 내렸다. 이에 따라 고달원은 국가의 후원을 받는 대찰로 입지를 굳히며 조영되었다. 이 무렵 고달원에 주석하며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인물은 원종대사 찬유(元宗大師 璨幽, 869-958)이다. 태조는 찬유를 예우하여 광주 천왕사(天왕寺)에 머물 것을 청하였으나, 얼마 뒤 그는 고달원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25. 찬유는 태조의 건국을 도왔으며, 광종이 불교 교단을 정비하는 데도 기여하였다. 찬유는 958년에 입적하였는데, 967년에 승탑을 조성하고, 977년에 탑비를 완성하였다26.

고달사지의 가람 배치는 크게 다섯 시기로 구분된다. 1~2기는 8세기 중엽에서 10세기 중엽에 걸쳐 형성되었고, 3기인 10세기 중엽에서 11세기까지, 4기인 12세기에서 13세기에는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졌고, 5기인 14~17세기에는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으로 조영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창건기 고달사는 팔각원당형 목탑을 중심으로 동·서·북의 세 방향에 금당을 배치한 1탑 3금당(一塔三金堂) 구조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고려 전기에 해당하는 3기에는 1탑 3금당의 기본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사역이 확장되어 다양한 기능의 불전이 조성되었다. 고려 후기인 4기에는 법안종 사원으로서 조영되면서 건물 수가 증가하고, 부속 건물 및 생활 공간이 명확히 분리되면서 사찰의 기능과 규모가 크게 확대되었다.

여주 고달사지에서는 다양한 도자기가 출토되었는데, 특히 12세기에서 13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도자기가 다수를 차지한다27. 한편 길이 11m 에 달하는 대형 철제 약연이 출토되어, 당시 고달사가 의료적 기능을 겸한 사찰이었음을 보여준다28.

9. 여주 원향사지

여주 원향사지는 경기도 여주시 점동면 원부리의 오갑산 북서쪽 기슭에 있다. 원향사는 흥녕사지에 전하는 징효대사보인탑비(澄曉大師寶印塔碑)에 사자산문의 실질적인 개창자인 징효대사 절중(折中)이 886년에 난을 피해 사자산 흥녕사를 떠나 남쪽으로 가다가 888년에 원향사에 머물며 선나별관(禪那別觀)을 열었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을 볼 때, 원향사는 신라말 사자산문에 속하는 선종사찰로 파악된다. 이후 11세기에서 12세기에 호족의 후원으로 대규모 중창이 이루어졌으며, 13세기 중엽 몽고의 침입으로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末結苑於慧目山埵景文大王命居高達寺奇香妙藥聞闕必供暑臈寒裘待時而授九年秋解夏之始忽告門人曰我今歲內法緣當盡你等宜設無遮大會以報百巖傳授之恩終吾志也十一月十四日중야忽尒山谷震動鳥獸悲鳴寺鐘擊而不響三일十五일未曙遽命侍者撞無常鐘脇席而歿享年八十二僧臘六十耳” 『祖堂集』 卷17, 東國慧目山和尙 條.

“或問曰大師雖備遊此土遍謁玄關而巡歷他方須參碩彦大師答云自達摩付法惠可傳心禪宗所以東流學者何由西去” 「鳳林寺眞境大師碑」, “太祖大王以大師玄道周行法身圓對艿請住廣州天왕寺遂從之住焉居則化矣” 「驪州 고달원원종대사혜진탑비문」 한국역사연구회(1996), 283-298, 374-394쪽. 경기문화재단(2014), 213쪽. 나상철(2024), 154-178쪽.

발굴·조사 결과 금당지와 목탑지를 포함하여 총 21기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초기 가람은 남동향으로 배치되었으나, 중창되면서 가람의 중심축을 동북향으로 바꾸고 신앙 영역과 생활 영역을 구분하여 건물을 배치하는 등의 가람배치에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소조 나한상, 소탑, 금동 탄생불상, 청동 범종을 비롯하여 토기, 기와, 청자, 백자, 중국제 도자기 등 다양한 도자기가 출토되었다. 특히 11~12세기대 유물이 집중되어 있어서 원향사의 사세가 당시에 융성했음을 말해준다.29

10. 양평 보리사지

보리사는 언제 창건되었는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고려 초기에 선종 사찰로 대경대사(大鏡大師) 여엄(麗嚴, 862-930)이 주석해 당대 불교계를 이끌었다. 여엄은 909년에 중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무주 승평을 거쳐 소백산에 은거하면서 풍기 호족인 강공훤(康公萱)의 후원을 받았는데, 그가 고려에 귀부하면서 함께 태조를 만나게 되었다. 이때 태조는 여엄을 스승으로 모시고 보리사에 주석하도록 하였다. 930년에 여엄이 입적하자 939년에 태조는 ‘대경(大鏡)’이라는 시호와 ‘현기(玄機)’라는 탑명을 내리고 부도를 건립하였다고 한다30. 보리사 대경대사 현기탑비는 1914년 원래 자리에서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안치되어 있다. 이 탑비는 태조 22년(939년)에 제작되었으며, 문장은 최언위가 짓고 이환추가 썼으며, 제자인 최문윤이 새겼다.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는 대경대사 현기탑으로 추정되는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탑이 있다31.

이처럼 남한강 유역의 사찰들이 신라말·고려초에 대찰(大刹)로 조영된 것은 지역 통치 체제가 정비되지 못한 고려 왕실 입장에서는 왕권에 제약이 될 수 있는 호족 세력을 견제하고 지역민들의 지지를 얻는 수단으로 불교를 후원하였다고 이해된다. 호족 역시 자신들의 권한을 공고히 다지고자 유명 고승들을 후원하며 민심을 얻으려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32.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대중적인 신망을 받은 선승들이 남한강 유역 사찰에 주석하였다는 사실은 당시 이 지역이 매우 중요한 곳이었음을 반증한다. 남한강 유역은 중요 요충지이자 교역로로서 반드시 통치해야 하는 중요 거점이었기 때문에 사찰 조영에 전폭적인 후원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파악된다.

신라말·고려초 남한강을 통한 불교문화의 교류와 불상의 조성

한편 남한강 유역은 신라의 왕경인 경주와 고려의 왕경인 개성을 잇는 교차로이기 때문에 신라말·고려초의 불교문화가 교류하는 장이기도 했다. 즉 남한강 유역 사찰들에 왕사나 국사들이 주석하면서 국가적인 차원의 불사가 이루어졌고 그런 과정에서 당시 최고 수준의 불교미술품들이 남한강 유역의 사찰에서 제작, 사용되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Ⅲ. 신라말·고려초 남한강 유역 불상의 특징과 의의

신라말·고려초 남한강 유역의 사찰들은 국가적인 차원의 후원을 받아 거대한 사원을 조영하였으므로, 중요한 예경(禮敬)의 대상인 불상 역시 당대를 대표할 만한 작품들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막강한 사세를 자랑했던 남한강 유역 사찰에 봉안되었던 불상은 현재 거의 전하지 않는다. 발굴조사에서는 휴대할 수 있는 작은 크기의 불상이나 완전한 형태를 확인하기 어려운 불상 편들만 출토되어 당시 불교조각사의 경향을 살피는 데 참고될 뿐,33) 기술적·예술적인 면에서 최고의 완성도를 갖추었을 불상은 확인할 수 없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남한강 유역인 제천, 충주, 원주, 이천, 양평, 광주, 서울 등지에는 신라말·고려초에 조성된 불상 약 80구가 전한다.34) 이들 불상에 대해서는 후원자나 장인을 추정하거나 다른 지역과의 영향 관계를 살펴서 지역성을 도출하는 등의 논의가 이루어졌다.35)

신라말·고려초에는 중앙 귀족이나 지역 호족 등 권세가에서부터 한미한 기층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분층이 불상을 조성했으며, 불상 제작 목적도 사회 질서 유지, 국가적 중대사 실현부터 개인 및 가족 안녕, 내세 평안과 같은 사적 목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또한 불상을 제작한 장인 역시 국가나 지방에 소속된 관장(官匠)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사장(私匠)과 사찰에 소속된 승장(僧匠) 등 여러 집단이 존재했다. 이처럼 신라말·고려초에 조성된 불상은 발원자, 조성목적, 장인이 다양하다. 그러나 남한강 유역에 전하는 신라말·고려초 불상 대부분은 이런 정보를 제공하는 조성기가 없어서 연구에 어려움이 따른다.

이런 남한강 유역의 신라말·고려초 불상에 대해 접근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으로 남한강이 내륙 및 수상 교통로로 활용되어 왕경인 경주(慶州)와 개경(開京)의 불교문화가 교차하는 곳이라는 역사적인 사실에 비추어, 통일신라 양식을 계승한 유형과 고려 양식을 반영한 유형으로 구분하고 그 대표적인 예들을 살펴서 그 특징과 의의를 고찰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신라말·고려초 남한강 유역의 불상이 통일신라 불상 양식을 토대로 신라말에 지역 나름의 특색을 갖추게 되는 양상과 분단으로 인해 그 면모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고려초 개경지역 불상의 전파와 변형을 살펴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주석 및 참고문헌 인용 정보

33) 최성은, 2015, 69-102쪽.

34) 민활, 2015, 39-69쪽.

35) 다수의 철불과 석불이 전하는 원주지역 불상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성과로 임영애, 2001, 39-63쪽; 손명수, 2007이 있다. 이외에도 이들 지역의 철불에 대한 연구성과로 최성은, 1996, 21-35쪽이 있으며, 경남지역 신라말 불상의 지역성을 규명한 서지민, 2018, 131-161쪽. 충주지역 철불의 지역성이 드러나게 된 이유를 당시 불교문화사적 관점에서 논의한 서지민, 2023, 257-289쪽이 있다.

1. 내륙 교통로를 통한 통일신라 불상 양식의 전파와 변형

1) 단양 용부원리사지 석조여래입상

단양 용부원리사지 석조여래입상은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사지(전 보국사지)에 위치한다. 이 불상은 머리와 상반신 대부분이 파손되어 원형을 파악하기 어렵지만, 잔존 높이만 376cm 에 달하며 머리를 포함하면 4m 가 넘는다. 이 불상에 대해 최초로 보고한 신라오악태백산유적조사단에 따르면, 발견 당시 불두와 불신이 분리되어 불신은 3조각으로 절단·파손된 상태였으며 머리 위에 원형 구멍이 뚫려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파손된 불상을 접합하여 대좌에 결구해 세워두었다. 불상은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고 왼손은 옆구리에 붙여 아래로 내렸다. 상반신에 비해 하체가 길고, 상반신은 파손이 심해서 착의법이나 옷주름 등의 세부 표현을 정확하게 알아볼 수 없다. 하체에는 우전왕상식(優塡王像式)으로 두 다리에 옷주름이 각기 표현되었으며, 대의 아래 군(裙)은 V 자형으로 흘러내린다. 허리가 잘록하고 가슴, 팔뚝, 허벅지에 양감이 풍부하며, 신체 비례가 늘씬해 체구가 건장하다【도 3】

용부원리사지 석조여래입상 통일신라 8세기 후반-9세기 전반 충북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
도3 용부원리사지 석조여래입상 통일신라 8세기 후반-9세기 전반 충북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
. 이런 수인이나 착의법 등을 볼 때, 용부원리 석조여래입상은 통일신라시대에 널리 유행한 불상 형식임을 알 수 있다. 이 불상 형식은 8세기 전반 일본 쓰시마 가이진신사 금동여래입상처럼 상체 대의를 바짝 추켜올려 가슴 아래를 드러내지 않는 유형과 8세기 중반 국립중앙박물관 금동여래입상처럼 대의를 느슨히 걸쳐 가슴에 내의를 드러내는 유형으로 나뉜다【도 4】
금동여래입상 통일신라 8세기 일본 쓰시마 가이진신사(海神神社) 소장
도4 금동여래입상 통일신라 8세기 일본 쓰시마 가이진신사(海神神社) 소장
. 하지만 용부원리사지 석조여래입상은 상반신이 파손되어 어떤 유형에 속하는지 알 수 없다.

신라 왕경지역에서 조성된 같은 불상 형식의 예로는 경주 내남면 마석산 자락의 백운대 마애여래입상이 있다【도 5】

경주 백운대 마애여래입상 통일신라 9세기 후반-10세기 전반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
도5 경주 백운대 마애여래입상 통일신라 9세기 후반-10세기 전반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
. 군위 하곡리 석조여래입상이나 봉화 천성사 석조여래입상은 수인의 형태는 다소 변형되었지만 법의 착의법이 같아서 이 불상 형식이 왕경에서 시작되어 점차 지역으로 퍼져 나갔던 것으로 여겨진다【도 6】
봉화 천성사 석조여래입상 통일신라 9세기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금봉리
도6 봉화 천성사 석조여래입상 통일신라 9세기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금봉리
. 그런데 용부원리 석조여래입상은 경주와 군위, 봉화의 석조여래입상들보다 8세기 전반~중반의 가이진신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금동여래입상에서 간취되는 전형적인 특징을 더 잘 간직하고 있다. 즉 머리가 크고 불신이 둔중해진 백운대 마애여래입상이나 군위 하곡리 석조여래입상, 봉화 천성사 석조여래입상보다 불신이 균형을 갖추고 있다. 또한 석재를 사다리꼴로 연결하여 팔각형을 이뤄 지대석을 만든 점이나 대좌 상면 중앙에 원형의 홈과 불상 하부에 원형 촉을 결구하여 불상을 세우는 방식, 불상의 발을 대좌와 함께 조각하지 않고 따로 만든 점을 볼 때 같은 불상 형식의 군위 하곡리 석조여래입상이나 봉화 천성사 석조여래입상보다 용부원리 석조여래입상이 먼저 제작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양식적 특징들을 감안할 때 8세기 후반이나 9세기 전반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용부원리 석조여래입상은 처음 발견될 당시에 불두가 전하고 있었는데 머리 위에 원형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런데 2007년 조사 때 석조여래입상 옆에 놓여 있던 원형의 홈이 있는 옥개석 형태의 석조 부재가 불상의 보개(寶蓋)일 가능성이 제기된 바 있다. 이 추정이 맞다면 용부원리 석조여래입상은 경남 거창 양평동 석조여래입상처럼 머리에 보개를 쓰고 있는 석조여래입상이므로 도상적인 면에서 학술적인 가치가 크다 【도 7】

거창 양평동 석조여래입상 통일신라 8세기 후반-9세기 전반 경남 거창군 거창읍 양평리
도7 거창 양평동 석조여래입상 통일신라 8세기 후반-9세기 전반 경남 거창군 거창읍 양평리
.

한편 삼국유사 에는 효소왕대의 화랑인 죽지랑이 죽령 고갯길을 개척한 뒤 북쪽에 장사지내고, 석조미륵불상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 내용을 제작 시기가 다른 용부원리 석조여래입상에 결부시킬 수는 없지만, 이 일대가 신라의 교통로 개척과 상관되며 왕경의 불교문화가 전해졌던 사실을 말해주고 있어서 용부원리 석조여래입상이 왕경의 불상양식과 연결되는 특징을 갖게 된 배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참고문헌 및 주석

김선·장기동, 2021, 455-490쪽.

진홍섭, 1981, 23쪽. 이후 용부원리사지 석조여래입상에서 나발과 육계의 흔적이 있는 불두 파편이 발견된다고 보고 되거나[충청북도, 1982, 599쪽], 육계와 나발 파편이 불상 주변에서 수습된다고 보고되기도 하였다. 박상일, 1987, 38쪽.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우전왕상식 불상 형식인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과 같은 유형의 불상에 대해서는 김리나, 1989, 180-184쪽; 곽동석, 1999, 219-221쪽.

단양군·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2007, 294쪽의 단양 보국사지 석조여래입상 유적 개요 참조. 이 유적 개요는 필자가 미술공예분야 조사원으로 참여, 작성한 것이다.

‘처음에 술종공(죽지랑의 아버지)이 삭주도독사가 되어 그의 임지로 부임하러 가려하는데, 이때에 삼한(三韓)의 병란이 있었으므로 기병 삼천명으로 그를 호송하게 하였다. 행렬이 죽지령에 이르자 한 거사가 길을 잘 닦고 있었다. 공이 그것을 보고 매우 탄미하자 거사 또한 공의 위세가 매우 놀라운 것을 보고 존대하게 되어 서로가 마음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공이 고을의 임소에 부임한지 한달이 되었다. 꿈에 거사가 방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부부가 같은 꿈을 꾸었으므로 더욱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다음날 사람을 보내어 그 거사의 안부를 물었다. 사람이 말하기를, "거사가 죽은 지 며칠이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사자가 돌아와서 그 사실을 고하니 그 날이 꿈꾸었던 날과 같은지라, 공이 말하기를, "아마 거사가 우리 집에 태어날 것 같소" 라고 하였다. 다시 군사를 보내어 고개 위 북쪽 봉우리에 장사를 지내게 하고 돌로 미륵불 한 분을 새겨 무덤 앞에 세우게 하였다. 공의 아내는 꿈을 꾼 날부터 태기가 있더니 아이를 낳았는데 이런 이유로 죽지라 이름 지었다. 이 죽지랑이 커서 벼슬을 하게 되니 유신공을 따라 부수(副帥)가 되어 삼국을 통일하였다. 진덕, 태종, 문무, 신문의 4대에 걸쳐 재상이 되어 이 나라를 안정시켰다’ “初 述宗公爲都督使 將歸理所 時三韓兵亂 以騎兵三千護送之 行至竹 有一居士 平理其領路 公見之歎美 居士亦善公之威勢赫甚 相感於心 公赴州理 隔一朔 夢見居士入于房中 室家同夢 驚怪尤甚 翌日使人問其居士安否 人曰 居士死有日矣 使來還告 其死與夢同日矣 公曰 殆居士誕於吾家爾 更發卒修葬於嶺上北峯, 造石彌勒一軀 安於塚前 妻氏自夢之日有娠 旣誕 因名竹旨 壯而出仕 與庾信公爲副帥 統三韓 眞德大宗文武四代爲冢宰 安定厥邦 初得烏谷 慕郞而作歌曰 去隱春皆理米 毛冬居叱沙 哭屋以憂音 阿冬音乃叱好支賜烏隱 兒史年數就音墮支行齊 目煙廻於尸七史伊衣 逢烏支惡知作乎下 advisory 是 郞야慕理尸心 未 行乎尸道尸 蓬次叱巷中 宿尸夜音有叱下시” 『삼국유사』 권2 孝昭王代 竹旨郞 條.

2) 충주 원평리 석조여래입상

원평리 석조여래입상은 높이 6m 에 이르는 거대한 불상으로 둥글고 넓적한 얼굴 형태나 후덕한 인상, 장대한 불신 등 전반적으로 신라말의 불상 양식을 보인다. 불두에 비해 어깨가 좁고 불신은 왜소해 전체적인 비례가 적절하지 않은데, 어깨는 벌어져서 당당한 감은 있지만 하체는 양감 없이 편평한 편이다【도 8】

충주 원평리 석조여래입상 고려초기 충북 충주시 신니면 원평리
도8 충주 원평리 석조여래입상 고려초기 충북 충주시 신니면 원평리
.

살집이 두둑한 네모난 머리에 비해 불신은 4-5등신에 불과해 균형이 맞지 않으며, 상반신은 짧고 하반신은 긴 불신은 국립경주박물관 소장의 8세기 사암제 여래입상이나 9세기 경주 두대리 마애여래입상과 흡사하다【도 9】

사암제 석조여래입상 통일신라 8세기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도9 사암제 석조여래입상 통일신라 8세기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 이런 통일신라 후기 왕경지역 불상양식은 예천 흔효리 석조여래입상이나 군위 대율리 석조여래입상 등으로 이어진다【도 10】
예천 흔효리 석조여래입상 통일신라 9세기 경북 예천군 풍양면 흔효리
도10 예천 흔효리 석조여래입상 통일신라 9세기 경북 예천군 풍양면 흔효리
. 충주 원평리 석조여래입상은 이런 불상 양식을 계승하는 것으로 앞 시기 불상보다 허리의 굴곡이나 다리의 부피감이 줄어들어 불신이 편평해졌다.

원평리 석조여래입상은 오른손은 손등을 밖으로 향하게 한 채 가슴에 대었으며, 왼손은 손바닥을 보이면서 아래로 내리고 있다. 이런 수인은 7세기 후반 경주 남산 왕정골 석조여래입상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도 11】

경주 남산 왕정골 석조여래입상 통일신라 7세기 후반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도11 경주 남산 왕정골 석조여래입상 통일신라 7세기 후반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 8세기 전반 경주 장항리사지 석조여래입상이나 8세기 후반 경주 남산 삿갓골 석조여래입상은 현재 왼손이 파손되어 원형을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오른손을 가슴 정중앙에 두면서 왼손은 내리고 있어서 같은 수인일 것으로 여겨진다. 9세기 청도 합천리 석조여래입상이나 영주 영주리 석조여래입상도 같은 불상 형식의 예인데【도 12】
영주 영주동 석조여래입상 통일신라 9세기 경북 영주시 가흥동
도12 영주 영주동 석조여래입상 통일신라 9세기 경북 영주시 가흥동
, 이 불상들은 어깨와 가슴, 다리 등에 양감이 있고, 대의가 불신에 밀착되어 풍만한 몸매가 잘 드러나서 원평리 석조여래입상보다 앞서 제작되었다고 판단된다.

원평리 석조여래입상에서 주목되는 것은 보개(寶蓋)를 쓰고 있다는 점이다. 보개는 팔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삿갓처럼 끝이 뾰족하게 솟아 있다. 보개 아랫면 가장자리는 한 단 낮게 조각하여 빗물이 불상에 흘러 들지 않게 장치했으며, 보개 중앙의 원통형 기둥으로 불두와 연결되게 하였다. 불상의 머리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이 뚫려 있어서 장식을 매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특징을 볼 때 석등의 옥개석 같은 다른 부재를 불상의 머리 위에 얹어 잘못 복원한 것이 아니라, 거창 양평동 석조여래입상처럼 원래부터 야외에 봉안된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보개를 씌웠던 것으로 파악된다【도 7】.

원평리 석조여래입상은 통일신라 불상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이런 불상 유형은 8세기 무렵 왕경에서 나타나기 시작하며, 그 이후 왕경과 그 인근에서 조성된 석조여래입상들은 신체의 균형감이 무너지고 불신이 둔중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원평리 석조여래입상은 이런 통일신라 불상 양식을 잇고 있으면서도 부은 듯 불룩 튀어나와 있는 눈자위, 뭉툭하게 짧은 코, 도드라진 입술 등의 이목구비의 표현, 같은 간격으로 V 자형을 이루면서 흘러내리는 법의 주름, 왼팔 팔꿈치에서 손목으로 이어지는 부위가 뒤틀린 듯 부자연스러운 등 형식적으로 처리된 점이 많아서 제작 시기는 고려 초기로 추정된다.

원평리 석조여래입상과 유사하게 비교되는 불상들이 현재 경북지역에 다수 분포한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고대부터 원평리 석조여래입상이 위치한 충주와 왕경의 북부인 현재 경북지역은 죽령, 계립령, 조령 등의 고갯길을 통해 연결되어 군사·경제·문화적 왕래가 빈번한 교통로였다. 특히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서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로 통하는 해발 525m 의 포암산과 부봉 사이에 위치한 계립령은 신라말·고려초에 많은 물적·인적 자원의 왕래가 이루어지면서 불교문화가 전해지는 통로였다.41) 원평리 석조여래입상을 통해서도 이런 불교문화사적인 흐름 속에서 왕경 불교문화가 지방으로 전래되어 토착화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은 1514년(조선 중종9, 正德 甲戌年) 7월에 과거(別試)를 보기 위해 육로를 통해 경주에서 한양으로 향하다가 충주를 지나는데, 단월역에서 하룻밤을 묵고 달천(獺川)을 건너 미륵원(彌勒院)을 지나면서 원평리 석조여래입상(彌勒院)을 보고 다음과 같은 기행시를 남겼다.

“충주에서 서쪽으로 사십 리 지점(忠西四十里), 오래된 역원 옆에 미륵이 있어(古院有彌勒), 담장으로 싸인 채 높이 섰는데(屹立繚垣墻), 높이가 무려 수십 척이나 된다(身長數十尺). (중략) 게다가 누가 다시 큰길 옆에다(誰復大道左) 공공연히 돌부처를 세워 놨는가(公然立胡質)”42)

이언적은 경주에서 출발하여 영천, 의성, 상주, 함창을 지나 충주를 거쳐 한양으로 갔다. 이런 그의 경로는 고대부터 사용되던 경주와 충주를 연결하는 내륙 교통로인데, 이는 당시 왕경의 불교문화가 충주로 전해진 불교문화 교류의 경로이기도 하다. 한편 이 기행시에 따르면 원평리 석조여래입상은 주요 교통로에 숙박이나 식사 등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설치된 역원인 미륵원(彌勒院)의 불상으로, 원래는 돌담으로 두른 석실(石室) 안에 봉안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1921년 촬영된 사진을 보면 원평리 석조여래입상 주위로 돌담이 둘러져 있어서 이언적의 기록이 사실임을 확인시켜 준다【도 8-1

도8의 일제강점기 촬영본 1
도8-1 도8의 일제강점기 촬영본 1
, 8-2
도8의 일제강점기 촬영본 2
도8-2 도8의 일제강점기 촬영본 2
】. 신라 왕경에서 비롯되어 점차 경북 내륙으로 확산되면서 변형, 발전한 불상 양식은 육상 교통로를 통해 충주로 전해지고, 다시 남한강 유역으로 퍼져 나갔다.

“멍에를 풀고 고원에 들어가니(稅駕入古院), 마른 입술을 축일 길이 없구려(燥吻無由澆), 시인의 어깨는 가을 산처럼 솟고(詩肩秋山聳), 나그네 한은 펄럭이는 깃발처럼 흔들리네(旅恨風旌搖), 우리 대사를 예전에 알지 못하였는데(吾師舊未識), 기쁘게 맞이하여 주누나(欣然肯相邀) (중략)”43)

위에 인용한 시는 고려의 이규보(1168-1241)는 1196년 병진년 5월부터 넉 달가량 상주와 선산 지역에 머물다가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충주 미륵원에서 숙박하는데, 승려가 주찬(酒餐)을 열어줘서 사례를 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43) 따라서 미륵원은 이규보가 방문했던 1196년 이전부터 조영되었음을 말해준다. 또 13세기 무렵 경북과 충주가 내륙 교통로로 연결되어 있었고, 다시 충주에서 남한강을 통해 개경으로 왕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규보는 충주에서 배를 타고 개경으로 가기 위한 기착지(寄着地)이자 고향인 여주(驪州)로 가면서 다음의 시를 지었다.

“동남의 길을 두루 밟았으니(踏遍東南遊), 내 고향에 가서 쉬련다(吾鄕欲去休), 다시 송경(松徑)의 즐거움을 찾으리(更尋松逕樂), 장기 낀 곳에 노는 것이 매우 싫어져(深厭瘴天遊), 산마루 지나며 붉은 햇살 만지고(過嶺捫紅日), 강을 따라 푸른 흐름을 굽어보네(循江瞰碧流), 어젯밤엔 충원에서 잤는데(忠原昨夜宿), 미녀가 애교를 부려도 머무르기 어려웠네(越女笑難留)”44)

이규보의 여정처럼 고려시대 경북 내륙지역은 육로를 통해 충주와 연결되고, 다시 충주에서 남한강 수로를 통해 수도 개경으로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충주는 사통팔달(四通八達)의 거점으로 물류의 이동뿐만 아니라 당시 불교미술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문화적 교차로이기도 했다고 생각된다.

2. 수상 교통로를 통한 고려 불상 양식의 전파와 변형

1) 해주 영파리 석조보살입상 유형 ; 서울 진관동 석조보살입상, 서울 상부암 석조보살입상, 원주 매지리 석조보살입상, 원주 신선암 석조보살입상

해주 영파리 석조보살입상은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 사진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고 실제 조사할 수 없어서 양식적인 특징을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원주 매지리 석조보살입상, 원주 신선암 석조보살입상, 서울 진관동 석조보살입상, 서울 상부암 석조보살입상과 양식적으로 흡사해서 같은 계통의 불상 형식으로 분류된다45. 이런 불상 형식의 시원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런 불상 형식들이 고려 수도 개경 인근인 해주와 서울, 원주에 분포하고 있어서 남한강 수운을 통해서 불교문화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해주 영파리 석조보살입상은 보관을 쓰지 않고 보발을 높게 틀어 올려 꽃모양 장식이 있는 띠로 묶었다. 일반적인 보살상과는 달리 대의를 입고 있다. 이처럼 보살상임에도 천의가 아닌 대의를 착용하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미래불로 석가의 가사(袈裟)를 물려받은 미륵보살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도 13】

해주 영파리 석조보살입상 고려초기 일제강점기 촬영본
도13 해주 영파리 석조보살입상 고려초기 일제강점기 촬영본
.46)

서울 진관동 석조보살입상 역시 보발을 틀어올리고 보계로 장식했다. 네모난 얼굴에 이목구비가 작게 표현되었다【도 14】

서울 진관동 석조보살입상 고려초기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도14 서울 진관동 석조보살입상 고려초기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 보발 한 가닥이 귀를 감싸 흘러내리고 있어서 보살상임을 알 수 있지만 영파리 석조보살입상처럼 우전왕상식의 대의를 입고 있다. 그런데 어깨에는 대의에서 볼 수 없는 꽃모양 장식이 있다【도 14-1】
도14의 세부 (두부)
도14-1 도14의 세부 (두부)
. 상체는 짧고 하체는 길며 가슴을 한껏 앞으로 내밀고 서 있어서 늠름해 보이는 자세나 가슴 앞까지 들어 올린 오른손과 아래로 내린 왼손의 위치도 영파리 석조보살입상과 같다. 다만 얼굴과 보발의 세부적인 표현이 영파리 석조보살입상이 더 정교하고 신체의 비례도 더 늘씬해서 좀 더 앞서 조성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서울 광장동의 상부암 석조보살입상도 진관동 석조보살입상과 같은 불상 형식으로, 우전왕상식 대의 착용, 보발 보계 장식, 수인을 결한 손의 위치, 배 앞으로 내민 자세 등이 유사하다. 그러나 머리카락의 표현이 없고 옷주름도 보다 도식적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진관동 석조보살입상 보다는 좀 더 늦게 제작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도 15】
서울 상부암 석조보살입상 고려초기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도15 서울 상부암 석조보살입상 고려초기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 한편 이 두 석조보살입상은 고려시대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진관동 석조보살입상은 최치원이 화엄십찰 중에 하나로 언급했던 청담사에 봉안되었던 불상으로 추정되기도 한다.47) 그러나 이 보살입상은 개경과 남경을 잇는 역로망인 청교도(靑郊道)의 장단도로에 위치하고 있다. 장단도로는 개경-송림현(장풍군 고읍리 일대)-장단현(연천군 장남면 일대)-장단도(장단현과 적성현 사이의 나루)-적성현(파주시 적성면)-견주(양주시 양주1·2동 일대)-양주(서울시 광진구 일대)로 이어지는 교통로이다.48) 상부암 석조보살입상도 장단도로에 위치하며 또 남한강 수운의 광진(廣津) 나루터가 있던 곳에 자리하고 있다.

원주 봉산동 신선암의 석조보살입상도 같은 불상 형식에 속한다. 신선암 석조보살입상은 다리 아래 부분이 파손된 상태이다. 같은 형식의 불상들처럼 2단으로 높게 틀어 올린 머리, 한껏 살이 올라 통통한 얼굴, 작은 코와 입, 수인의 형태, 우전왕상식의 대의 착의법, 배를 내밀고 서 있는 자세, 하체가 긴 불신의 비율 등이 같다【도 16】

원주 신선암 석조보살입상 고려초기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
도16 원주 신선암 석조보살입상 고려초기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
.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에 있는 매지 저수지의 거북섬에 위치한 매지리 석조보살입상도 신선암 석조보살입상과 같은 불상 형식이다. 매지리 석조보살입상도 신체 비례, 자세, 보발, 상호 표현, 수인, 대의 착의법 등에서 같은 형식의 석조보살입상과 공통적이다. 다만 매지리 석조보살입상이 영파리 석조보살입상이나 진관동 석조보살입상, 상부암 석조보살입상에 비해 얼굴에 살이 더 올라 네모나게 각이 졌고 불신도 둥그스름하고 펀펀하게 옆으로 퍼져 있다. 또 같은 계통의 다른 석조보살입상 보다 옷주름의 간격이 듬성듬성해졌고, 왼손을 아래로 내려뜨리지 않고 허벅지 위에 두고 있다. 이런 양식적 특징을 볼 때 매지리 석조보살입상은 영파리 석조보살입상이나 진관동 석조보살입상, 신선암 석조보살입상의 불상 형식이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조성된 것으로 이해되므로 제작시기는 같은 형식의 다른 석조보살입상보다 좀 더 늦을 것으로 여겨진다 【도 17】
원주 매지리 석조보살입상 고려초기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
도17 원주 매지리 석조보살입상 고려초기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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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원주 봉산동 석조보살입상이나 원주역사박물관에 소장된 석조보살입상, 그리고 현전하지 않는 원주 화천리 석조보살입상, 원주 법천리 석조보살입상도 같은 형식의 불상으로 분류할 수 있겠으나, 보관이나 보개의 착용, 수인, 착의법, 상호와 불신 표현 등에서 변형이 두드러지고 지역적인 토착화가 더욱 진전되어 있다 【도 18】

원주 봉산동 석조보살입상 고려초기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
도18 원주 봉산동 석조보살입상 고려초기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
.

2) 여주 도곡리 석조여래좌상

남한강 수상 교통로를 통해서 개경의 불교문화가 유입되는 과정에서 도상을 수용한 불상으로 여주 도곡리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이 불상은 주먹 쥔 오른손 약지와 소지를 곧게 펴서 배 앞의 왼손 손바닥에 대고 있다 【도 19】

여주 도곡리 석조여래좌상 고려초기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도곡리
도19 여주 도곡리 석조여래좌상 고려초기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도곡리
. 이런 특이한 수인은 개경 현화사지에 전하는 석조여래좌상과 같다.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현화사지 석조여래좌상을 보면, 원형의 불두에 불신은 건장한 편으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영향이 드러나지만 대의 착의법이나 옷주름의 처리 방식 등에서 고려시대 불상의 새로운 양식특징이 간취된다 【도 20】
개성 현화사 석조여래좌상 고려초기 황해북도 개성시 월고리 일제강점기 촬영본
도20 개성 현화사 석조여래좌상 고려초기 황해북도 개성시 월고리 일제강점기 촬영본
. 이 불상의 제작 시기는 고려 현종이 1020년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현화사를 창건한 무렵인 11세기로 추정되며, 현화사가 미륵을 주존으로 신앙했던 법상종의 총본산이므로 이 수인은 미륵의 도상으로 생각된다.

같은 불상 형식의 예가 1024년경 경주 불국사 석조사리탑의 불상, 남원 신계리 마애여래좌상, 천안 삼태리 마애여래입상 등에서도 확인된다 【도 21】

경주 불국사 석조부도의 여래좌상 고려초기, 1024년경 경북 경주시 진현동
도21 경주 불국사 석조부도의 여래좌상 고려초기, 1024년경 경북 경주시 진현동
.49) 고려 전기에 유행한 이 불상의 도상이나 그 전거에 대해서 앞으로 추가적인 연구가 이루어진다면 더 명확해지겠으나, 이런 불상 예들을 볼 때 이 불상 도상은 개경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전파된 것으로 여겨진다. 여주 도곡리 석조여래좌상은 당시 남한강 수로를 통해 당대 최고의 고승들을 비롯하여 왕실과 귀족, 호족 집단들이 왕래하면서 개경의 불교문화가 지방으로 유입되는 과정에서 조성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Ⅳ. 맺음말

신라말·고려초 남한강 유역에 대찰들이 조영되면서 다양한 불교미술품의 제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현재 남한강 유역의 사찰에 전하는 불교미술품들은 당시 불교문화 교류의 구체적인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제천 월광사, 충주 정토사, 김생사, 숭선사, 원주 거돈사, 흥법사, 법천사, 여주 고달사, 원향사, 양평 보리사에서 발굴·조사된 도자기나 기와 등도 왕실과 호족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사찰을 조영하고 각종 불교미술품의 조성을 후원하는 상황 속에서 제작·사용된 것들이다. 따라서 이 유물들은 당시 최고위층에서 사용하던 최고 수준의 물품으로 평가된다. 이렇듯 남한강 유역의 사찰들은 중앙과 지방 권력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찰의 건립과 운영에 필요한 각종 물자를 용이하게 조달할 수 있었으며, 또한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갖춘 장인들이 투입되어 이런 유물들을 제작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남한강 유역의 불상은 기존의 통일신라의 전통적 불상 양식과 새로운 고려의 불상양식이 변화,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불교조각사적 의의가 크다. 본고에서 살핀 단양 용부원리사지 석조여래입상이나 충주 원평리사지 석조여래입상은 통일신라시대 불상양식을 계승, 발전하고 있다. 또 서울 진관동 석조보살입상, 서울 상부암 석조보살입상, 원주 신선암 석조보살입상, 원주 매지리 석조보살입상은 해주 영파리 석조보살입상 유형의 불상으로 고려 초기의 새로운 불상양식을 보여주며 점차 지역색을 더하면서 불교미술의 지역화 양상을 보여준다. 이런 사실은 신라말·고려초 불교조각사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본고를 마무리하면서 덧붙이고 싶은 바는 앞으로도 남한강 유역 사찰에 대한 지속적인 발굴과 조사가 더욱 강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특히 불교문화의 교류라는 관점에서 남한강 유역의 불상을 비롯한 불교미술품 조성의 사회적, 문화적, 신앙적 배경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요구된다. 또 불교미술품의 제작 기술과 재료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이루어진다면 기존 연구 성과를 수정 보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조사와 연구가 이루어진다면 본고에서 미흡하게 언급하는데 그쳤던 신라말·고려초의 남한강 지역이 불교문화가 이동하고 융합하면서 새로운 문화가 창출되는 공간이었다는 의의가 보다 구체적으로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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