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호강 중·하류역의 공간적 특징과 성곽의 변천과정 연구
A Study on the Spatial Characteristics and the Transition Process of Fortresses in the Middle and Lower Reaches of the Miho River
1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
1 Gaya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DOI: https://doi.org/10.71244/jojm.2025.35.251
초록
본 논문은 중원지역의 서쪽에 해당하는 미호강 중·하류역 일대의 시대적 흐름에 따른 시기별 공간적 특징의 변화와 그에 따른 이 일대 성곽의 변천과정 간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주목하였다.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인하여 미호강 중·하류역 일대는 역사상의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통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여겨져 왔다. 이는 이 일대에 축조된 성곽들의 분포 양상과 기록에서 확인되는 군현, 서원경, 청주목 등으로 대표되는 행정단위의 모습으로 확인된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본 논문은 미호강 중하류역 일대에서 확인되는 공간적 성격을 군사적 성격, 행정적 성격의 두 가지 성격으로 설정하였으며, 각 성격에 따른 이 일대 공간의 특징 변화와 이 일대 성곽의 변천과정 사이의 연관성을 확인하는 데 주목하였다. 분석 결과 미호강 중·하류역 일대의 성곽들은 중심지역인 청주 일대와 그 주변 지역이 군사적, 혹은 국내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크게 행정적, 군사적 성격을 보였으며 그에 따라 성곽의 운용 양상도 함께 변화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일대가 행정적 성격을 가질 때는 행정치소를 중심으로 하는 중심방어적 성격을 보이는 반면, 이 일대가 군사적 성격을 가질 때는 이 일대로 진입하는 교통로를 조망할 수 있는 지점을 위주로 성곽이 축조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Abstract
This study focuses on the correlation between the changes in spatial characteristics by period and the transition process of fortresses in the middle and lower reaches of the Miho River, which corresponds to the western part of the Jungwon region. Due to its geopolitical importance, this area has been regarded as a historically significant region from the Three Kingdoms period to the Joseon Dynasty. This is confirmed by the distribution of fortresses built in the area and the administrative units such as Gun-Hyeon, Seowon-gyeong, and Cheongju-mok identified in records. In this context, this paper sets the spatial characteristics identified in the middle and lower reaches of the Miho River into two categories: military and administrative. The analysis shows that the fortresses in this area exhibited administrative or military characteristics depending on the political or military situation of Cheongju and its surrounding areas. When the area had an administrative character, it showed a central defensive nature centered on the administrative office. Conversely, when it had a military character, fortresses were constructed mainly at points where transportation routes entering the area could be overlooked.
Ⅰ. 머리말
성곽(城郭)은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흙이나 돌 또는 나무 등을 이용하여 구축한 방어시설로, 『管子』에는 ‘안에는 성을 쌓고, 성 밖에는 곽을 쌓는다(內爲之城 城外爲之廓)’고 하여 내성(內城)과 외곽(外廓)으로 구분하고 있다(양시은, 2013, 132쪽). 고대 국가에서 성곽은 한 국가의 지배영역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해당 국가의 국력을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이는 성곽의 축조가 막대한 인력과 공력을 들이는 것과 결부지어 생각할 수 있다. 즉, 각 지역에서 방어와 지방 행정 기능을 수행한 산성과 평지성 등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성곽들은 국가의 통치와 방어를 수행하는 정(政)과 군(軍)의 기능이 집속된 복합유적으로 볼 수 있다.
본 연구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지역인 미호강 중·하류역의 경우 지리적으로는 한강 유역과 남쪽의 영남, 호남 지역을 이어주는 중심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육상 및 주요 강을 통과하는 수로를 모두 활용할 수 있는 교통로 상의 요충지에 해당한다.
이러한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인하여 이 일대는 한국사 전체의 흐름상 군사적, 혹은 행정적 중심지로 기능하면서 크게 군사적 성격, 행정적 성격 두 성격을 보여왔다.
구체적으로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각축을 벌이는 접경지대로써 군사적 성격을 보이는 공간이었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주변의 위협이 사라진 이후 중앙정부의 영향이 반영된 계획된 중심지역인 서원경(西原京)이 설치되면서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기능하게 된다. 이후의 고려, 조선 시기에도 청주목(淸州牧), 병영이 설치되면서 행정적 성격을 강하게 보이는 시기가 확인된다.
이상의 크게 두 가지 성격을 보이는 미호강 중·하류역 일대의 성곽에 대하여 다양한 고고학적 논의와 기록에 기반한 지역사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지금까지도 활발한 발굴조사와 추가적인 연구가 계속 진행되고 있어 이 일대의 공간적 특징과 성곽 운용의 변화에 대한 연구는 향후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Ⅱ. 미호강 중·하류역 일대의 공간적 특징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미호강 중·하류역 일대는 한강 유역과 남쪽의 영남, 호남 지역을 이어주는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형적으로는 미호강의 중·하류의 본류와 무심천과 보강천을 비롯한 지류를 중심으로 차령산지와 소백산지, 그리고 세종시 부강면 일대의 산지들로 둘러싸인 지역을 이른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충청북도 청주시 전체와 진천군, 증평군의 일부, 그리고 충청남도 천안시 일부와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을 포함한다.
미호강 중·하류역의 주변을 살펴보면 북쪽으로는 진천-증평과 접하여 한강 유역으로 이어지게 되어있고, 동쪽은 괴산-증평과 접하여 충주 일대로 나아가는 길이 이어지며 남쪽은 세종시 부강면과 공주시로 이어져 남쪽의 금강 유역으로 이어지고 있다.
구체적인 지형을 살펴보면 미호강은 충청북도 음성에서 발원하여 청주를 가로질러 남쪽의 금강 본류로 흘러가며 청주분지 일대의 한 가운데를 관통하고 있다. 오늘날 청주시의 시가지를 가로지르는 무심천은 청주시 상당구 남쪽의 산지에서 발원하여 미호강과 합류한다. 무심천의 서쪽으로는 석남천이 남이면에서 발원하여 각각 가경천과 미호강으로 합류한다.
미호강의 본류 주위로는 북동-남서 방향의 장축으로 발달한 미호평야가 형성되었으며, 그 아래로 무심천을 중심으로 하는 분지가 형성되었다.
그 주위로 우암산, 상당산, 부모산, 팔봉산, 망월산 등 비교적 험준한 산들이 분포하여 미호평야와 청주분지를 둘러싸고 있다(손미선, 2009, 6-7쪽.).
다음으로 시기별 미호강 중하류역 일대의 행정구역 변천과정을 검토하고자 한다. 삼국시대의 미호강 중·하류역 일대는 백제와 고구려, 그리고 신라가 차례대로 이 일대로 진출하면서 각 국가에 의해 군현이 설치되면서 삼국이 힘을 겨루는 각축장이 되었으며,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서원경과 청주목 등 지방행정의 중심도시가 설치되어 각각 양광도와 충청도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즉, 이 시기에 설치되었던 군(郡)과 영현, 속현들이 관할하였던 행정범위는 오늘날 미호강 중·하류역 일대의 행정구역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각 시기별로 나타나는 이 일대의 행정단위를 살펴보면서 당시의 시대상을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다. 기록에서 확인되는 미호강 중·하류역 일대의 행정구역 변천과정은 [표 1]
[표 1] 기록상 확인되는 미호강 중·하류역 일대의 시기별 행정구역명
| 수정 | ||
|---|---|---|
| 삼국시대 | 백제 | 熊川州, 西原, 臂城, 子谷, 一牟山郡, 未谷縣 (『三國史記』 雜志 熊川州) |
| 고구려 | 仍斤內, 今勿奴, 仍忽 등 (『三國史記』 雜志 漢山州) | |
| 신라 | 熊州 | |
| 통일신라시대 | 西原京, 燕山郡, 昧谷縣 등 (『三國史記』 雜志 地理 新羅 熊州) | |
| 고려시대 | 楊廣道 淸州牧, 燕山郡, 木州, 鎭州, 全義縣, 淸川縣, 道安縣, 靑塘縣, 燕岐縣, 懷仁縣 등 (『高麗史』 志 地理 楊廣道 淸州牧) | |
| 조선시대 | 天安郡, 沃川郡, 文義縣, 木川縣, 淸安縣, 鎭川縣, 竹山縣, 稷山縣, 平澤縣, 牙山縣, 新昌縣, 溫水縣, 全義縣, 燕岐縣, 木川縣, 懷仁縣, 靑山縣, 黃澗縣, 永同縣, 報恩縣 등. (『世宗實錄』 地理志 忠淸道 淸州牧) | |
삼국시대의 미호강 중·하류역 일대는 상술하였듯이 백제, 고구려, 신라가 국경을 맞대고 힘을 겨룬 각축의 장이었고, 각 국가가 이 일대로 진출하면서 성곽을 축조하거나 군을 설치하였다.
삼국시대의 미호강 일대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관련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 중 가장 먼저 이 일대로 진출한 국가는 백제로, 기록에 따르면 웅천주(熊川州)에 속하였다. 웅천주의 관할으로 설치된 군현은 각각 서원(西原), 비성(臂城), 자곡(子谷)의 지명이 확인되며, 오늘날의 청주시 문의면으로 비정되는 일모산군(一牟山郡), 보은군 회인면으로 비정되는 미곡현(未谷縣)의 기록이 확인된다.1)
백제 다음으로 이 일대로 진출한 국가는 고구려이다. 고구려가 한성을 공략하여 개로왕을 참수한 이후 남진하여 확보한 영토들에 대한 지방지배에 대한 의견은 직접통치였는지, 혹은 간접지배의 형식을 취하였는지에 대하여 지금도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문헌기록을 기반으로 하는 문헌사 연구는 한강 유역을 16개 내외의 군(郡)으로 편성하여 군사적 거점 지배에서 점진적으로 영역지배 형태로 전환했다는 점을 통해 직접지배의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와 비교하여 고고 자료에 입각한 연구에서는 문헌 기록을 함께 검토하였으나,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현재 이 일대에서 지방행정의 치소로 비정할 만한 중대형의 산성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고구려가 영역지배를 구현하지 못하고 간접지배를 시행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고구려의 지배방식은 영역지배설과 거점지배설이 제시되고 있으나, 관련 자료의 부족으로 인해 명확하게 판단하기는 어렵다.
『삼국사기』 지리지의 한주(漢州) 조에는 고구려가 설치하였던 군현명이 다수 기록2)되어 있다. 주로 내(內), 노(奴), 홀(忽) 등 고구려 계통의 어미를 가지는 지명이 다수 확인된다. 이 중 미호강과 청주 일대에서는 천(川)과 양(壤)을 뜻하는 내(內)와 노(奴)와 관련된 잉근내(仍斤內, 괴산)와 금물노(今勿奴, 진천), 성(城)을 뜻하는 홀(忽)과 관련된 지명은 잉홀(仍忽, 음성), 나혜홀(奈兮忽, 안성), 사복홀(沙伏忽, 안성 양성) 등이 확인된다. 이와 같이 청주 외곽 주변지역의 지명은 기록상에서 일부 확인되고 있으나, 미호강 중·하류역의 중심지역인 청주 일대에 직접적으로 설치된 고구려의 지명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는다(여호규, 2022, 83-84쪽).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차례대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미호강 일대에 당시 행정단위 중 가장 큰 단위인 주(州)로 웅주(熊州)가 설치되었다. 이후 신라가 지방행정단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백제 유민들을 포섭하고 옛 백제 영역의 통치 안정화를 위하여 서원경을 설치하였다.3 인근 지역의 군과 현으로는 연산군(燕山郡)과 매곡현(昧谷縣)이 있는데, 연산군은 백제의 일모산군(一牟山郡)이었고, 매곡현(昧谷縣)은 백제의 미곡현(未谷縣)이었다.4
고려시대의 미호강 일대는 성종 대에 전국을 5도와 양계지역으로 개편하는 과정 중에 양광도(楊廣道) 청주목(淸州牧)에 편입되었다. 고려사 의 기록에 따르면 청주목(淸州牧)5과 청주목에 속한 군현으로 연산군(燕山郡), 목주(木州), 진주(鎭州), 전의현(全義縣), 청천현(淸川縣), 도안현(道安縣), 청당현(靑塘縣), 연기현(燕岐縣), 회인현(懷仁縣)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오늘날의 행정단위로 고려해보면 청주목은 오늘날 충청북도 청주시, 괴산군, 보은군의 일부,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면, 세종시 연기읍·전의면을 포함한다.
조선시대의 미호강 중·하류역 일대는 조선 전기에 전국을 8도로 개편하여 정비하는 과정 중에 충청도에 속하게 되었고,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청주목(淸州牧)이 설치되어 충주(忠州)와 더불어 충청도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조선시대 청주목에 속한 군현(郡縣)은 2개 군 17개 현으로, 천안군(天安郡)과 옥천군(沃川郡), 그리고 문의현(文義縣)과 목천현(목천현 중복 제거 필요하나 원본 유지 시) 목천현(木川縣), 청안현(淸安縣), 진천현(鎭川縣), 죽산현(竹山縣), 직산현(稷山縣), 평택현(平澤縣), 아산현(牙山縣), 신창현(新昌縣), 온수현(溫수縣), 전의현(全義縣), 연기현(燕岐縣), 목천현(木川縣), 회인현(懷仁縣), 청산현(靑山縣), 황간현(黃澗縣), 영동현(永同縣), 보은현(保恩縣)에 해당된다. 정리하자면 조선시대의 청주목은 청주시와 괴산군의 일부를 포함하는 범위이고, 관할 군현으로 경기도 평택시, 진천군, 괴산군, 보은군, 옥천군, 영동군, 충청남도 천안시와 아산시의 일부를 관할한 것으로 보인다.
1) 『三國史記』 권37 잡지 제6 지리4 웅천주. “熊川州(一云 熊津)熱也山縣 伐音支縣 西原 一云臂城一 云子谷 … (중략) … 一牟山郡 … (하략) … .”
2) 『삼국사기』 권37 잡지 제6 지리4 한산주. “ … (상략) … 今勿奴郡 一云 萬弩 道西縣 一云 都兮 仍忽 皆次山郡 奴音竹縣 奈兮忽 … 중략 … 잉벌노현 제차파의현 … (하략) … .”
3) 삼국사기 권36 잡지 제5 지리3 신라 웅주. “西原京 神文王五年初置西原小京 景徳王改名西原京 今清州.”
4) 삼국사기 권36 잡지 제5 지리3 신라 웅주. “燕山郡 本百濟一牟山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二 … 昧谷縣 夲백제미곡현 景徳王改名 今懐仁縣.”
5) 高麗史 지, 권제십, 지리1, 양광도 청주목. “淸州牧本百濟上黨縣 新羅神文王五年 初置西原小京 景德王 陞西原京 太祖二十三年 改爲淸州 成宗二年 初置十二목 주기일야 십사년, 치십이주절도사 호전절군 속중원도 현종삼년 폐위안무사 구년 정위목 위팔목지일 속군이 현칠 영지사부일 지사군이 현령관이.”
Ⅲ. 미호강 중·하류역 일대 성곽의 분포 현황
이상으로 미호강 중하류역 일대의 지리적 환경과 시기별 이 일대의 행정구역을 기록을 통해 살펴보았다. 이번 장에서는 미호강 중·하류역 성곽들의 분포양상을 시기별로 검토해보고 그 특징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분석대상으로 선정한 성곽들 중 일부는 발굴조사가 진행되어 그 축조 배경과 성격에 대해 일정정도 규명된 성곽들도 있지만, 이외의 경우 대부분 광역 지표조사만 실시되어 그 위치를 파악하고 주위에서 채집된 지표조사 유물을 통해 시대를 추정할 수 있는 소략한 정보만 제시되고 있다.
발굴조사를 통해 어느 정도 축조시기와 주체가 밝혀진 성곽으로는 증평 추성산성, 천안 동성산성, 청주 부모산성, 정북동토성, 석화리 목책성, 양성산성, 상당산성, 우암산성, 당산토성, 청주읍성, 태성리토성, 쌍청리 다중환호, 학천리 다중환호, 세종 남성골산성이 있다. 이 중 정북동토성의 경우 발굴조사가 수차례 실시되었으나, 그 성격에 대해서는 백제 축조설과 신라 축조설, 나말여초 축조설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유적들은 상술하였듯이 기초자료에 보고된 지표조사를 통해 채집된 유물들을 통해 대략적인 시기만 제시되고 있어 그를 통해 초축 및 운영시기를 밝히는 데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최근까지 미호강 일대에서 성곽들에 대한 조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성곽뿐만 아니라 취락, 분묘유적 등 다양한 유적들이 함께 조사되고 있어 향후 구체적인 미호강 중·하류역 일대의 시기별 공간적 특징의 변화양상과 성곽 운용 간의 연관성에 대한 진일보한 연구를 기대해보고자 한다.
다음으로는 시기별 성곽의 분포현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삼국시대의 성곽 운용은 미호강 중·하류역 일대로 진출할 수 있는 교통로를 조망할 수 있는 지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대의 교통로는 삼국시대에 이르러 과거 소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역적인 교통망을 국가 주도 차원으로 정비하면서 형성되었다. 교통로 개척은 험준한 산맥과 고갯길을 개척·장악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들 교통로는 물자의 운반 및 주변 지역에 대한 군사적 통제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으며 특히 군사적 목적의 교통로 개척은 성곽의 축조와도 긴밀한 연관성이 있다. 미호강 중·하류역을 포함하는 한반도 중부 지역에서의 교통로 발달은 백제와 신라가 각기 고대 국가로 성장하는 과정과 시기적으로 일치한다(서영일, 2002, 143-146쪽).
교통로 주변에 축조된 성곽들은 교통로의 확보, 그리고 주변 일대의 통제 및 조망을 주목적으로 하고, 그에 더하여 적의 이동을 감시·지연시키는 목적을 가진다. 이후 성곽이 축조된 주변 지역이 군사적으로 안정화되고 추가적인 외부로부터의 위협이 사라지게 되면 성곽은 그 목적과 기능을 다해 폐성되거나, 새로운 행정치소로 지방통치의 중심지로 활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교통로 주변에 설치되는 성곽들의 특징은 본 논문에서 다루는 미호강 중·하류역의 성곽들에서도 확인된다.
미호강 중·하류역에 분포하는 성곽들은 크게 미호강 본류와 지류에 축조되어 미호강과 금강수로를 통제할 수 있는 지점에 축조되었거나, 이 일대를 둘러싼 산지의 정상부에 축조되어 미호강 중·하류역과 이 일대를 통과하는 교통로를 감시할 수 있는 지점들을 중심으로 축조되었다.
권역별로 살펴보면, 우선 미호강 중·하류역 동쪽은 남한강 수계를 통하여 제천-충주를 거쳐 미호강 중·하류역으로 진입할 수 있는 지점으로, 이 일대에 증평 추성산성과 청주 낭비성, 노고성, 구라산성이 해당 방면에 축조되었다.
미호강 중·하류역의 남쪽에 해당하는 세종시 부강면 일대에는 금강 수로와 그 주변의 공주-대전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통제하기 위한 성곽들이 밀집되어 축조되어 있으며, 특히 세종 남성골산성의 경우는 발굴조사 결과 고구려가 한강 유역 이남으로 진출하여 축조한 성곽으로 밝혀져 고구려의 남진과정 연구와 관련된 중요한 성곽으로 알려져 있다.
미호강 중하류역의 남동쪽에는 영남지역의 상주·김천으로부터 보은-옥천-영동을 거쳐 청주로 이어지는 추풍령로(秋風嶺路)와 상주-보은-회인-문의로 이어져 괴산, 청안으로 이어지는 화령로(化嶺路)로 대표되는 이 일대의 교통로를 통제하기 위한 성곽들이 축조되었다.
마지막으로 미호강 중·하류역의 서쪽인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에는 부모산을 중심으로 부모산성과 소규모 보루군들이 밀집하여 분포한다. 가장 높은 지점인 부모산에 축조된 부모산성은 세종-대전으로 이어지는 육상 교통로 및 금강 수로로 이어지는 미호강 본류와 지류, 그리고 오창·청주 중심지 일대를 넓게 조망할 수 있다. 또한 북서쪽으로 병천-천안 방향의 차령산지 일대와 진천·음성으로 이어지는 잣고개 고갯길과 주변의 교통로에도 성곽들이 밀집 분포한다.
가장 먼저 미호강 일대로 진출한 국가는 백제로, 백제가 이 일대로 고구려에 의해 축성된 성곽은 남성골산성이 확인된다. 남성골산성은 목책성으로 주변의 대전 월평동유적, 안성 도기동산성 등과 함께 장수왕 대 고구려의 남진 경로와 금강 유역으로의 진출을 알려주는 성곽이다.
미호강 중·하류역의 남쪽에 해당하는 부강면 일대에는 소규모의 성곽들이 이 일대를 둘러싼 산줄기를 따라 조밀하게 축조되어 있다. 이는 부강면의 남쪽인 옥천·대전 동부지역까지 동일한 양상으로 확인되는데, 이들은 서로 대치하는 양상으로 축조되어 관산성 전투 이후로 이어진 금강 상류 지역을 차지하려한 신라와 백제의 대립양상을 반영하고 있다(조순흠, 2018, 112-113쪽).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여러 축성기록으로 볼 때, 신라가 추풍령로6)와 화령로7)를 통과하여 이 일대로 진출하는 시기는 대략 5세기 후반을 전후한 시기로 추정된다. 특히, 보은 삼년산성(三年山城), 옥천 이성산성(二聖山城)은 이 시기의 대표적인 축성 사례로 신라는 두 성의 축조를 통해 상주-보은-옥천-문의 일대에 이르는 지역을 영역화할 수 있었다.
삼국통일 이후 미호강 중·하류역의 중심지역인 청주에는 무심천 동쪽 평탄지 일대에 서원경이 설치되어 새로운 중심지가 조성되었고, 지방행정을 위한 미호강과 무심천으로 대표되는 금강수로와 이 일대를 통과하는 교통로의 활용이 강조되었다. 새롭게 조성된 서원경을 방어하기 위한 주요 성곽으로 이전 시기부터 사용된 부모산성과 양성산성을 개축, 보수하여 활용하였고 상당산성을 축조하여 서원경의 배후방어성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소백산지 일대의 구라산성, 낭비성, 낭성산성에서도 지표조사 시 늦은 시기의 신라 토기편이 일부 수습되었다고 보고하고 있어 이들 또한 늦은 6세기 후반부터 통일신라 초기에 이르는 시기 동안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강민식, 2017, 23-25쪽).
9-10세기 경에는 지방에서 반란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지방의 호족들이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함에 따라 다시금 전란의 시기가 찾아왔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는 미호강 중·하류역 일대의 성곽 운용의 변화를 야기하였다.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가 이 일대로 진출하여 청주 일대를 점유하였으며, 주변의 일부 세력은 후백제에 가담해 대치하는 국면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변화하는 시대적 배경 아래에 새롭게 쌍청리·학천리 다중환호가 등장하였고, 이들은 미호강 중·하류역을 포함하는 금강 수로를 통제할 수 있는 지점에 조성되었다. 또한 양성산성으로 대표되는 이전 시기에 활용되었던 성곽들도 개축하여 재사용되었다.
특히 나말여초시기에 이 일대에 등장하는 다중환호의 경우, 쌍청리 다중환호와 학천리 다중환호 모두 미호강 중하류역의 강안 낮은 구릉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조성되어있다. 환호의 입지를 볼 때, 이들 다중환호는 미호강을 중심으로 하여 금강-미호강 수로를 통제함과 동시에 주변 지역을 관할하는 위치에 조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4. 고려~조선시대
고려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이 일대에는 청주목이 설치되었고, 치소성인 청주성과 그를 방어하는 외곽의 나성 축조 기록이 확인된다. 그러나 나성의 존재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청주 우암산성 발굴조사에서 3개의 복곽 구조가 확인되었으며, 나성은 우암산의 내성과 산성 양쪽으로 서남쪽을 둘러싼 외성이 이어져 나성의 형태를 이룬다고 보고하고 있어 나성과 우암산성의 연관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여기에 배후 방어성인 상당산성이 지속적으로 함께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 청주목의 속현인 청천(괴산군 청천면)에도 석축산성인 미륵산성이 축조되었다(차용걸, 2012, 26-29쪽).
조선시대에는 청주성과 상당산성, 그리고 미호강 중·하류역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주요 산 정상부에 축조된 봉수들이 하나의 조합을 이루는 조선시대만의 특징적인 성곽 운용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Ⅳ. 공간적 특징의 변화와 성곽 운용의 변천양상 검토
이상으로 시기별 성곽의 분포양상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번 장에서는 미호강 중·하류역에 축조된 성곽 중에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성곽의 축조 및 운영 시기가 규명된 성곽들을 대상으로 하여 입지와 축조 형태, 상대고도, 규모 등 제반 속성을 정리하여 이를 시기별 공간 특징의 변화와 성곽 운용 변화의 연관성에 대하여 검토해보고자 한다.
검토에 앞서 여러 속성의 특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상대고도는 성곽들이 입지한 지형의 가장 높은 지점과 주변의 산지, 혹은 구릉 하단부의 가장 낮은 지점의 표고 차이를 나타내는 값이며, 이 값이 해당 성곽의 실질적인 고도라고 볼 수 있다8. 따라서 해발고도가 아닌 상대고도를 검토할 때 더 합리적으로 성곽의 입지를 검토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성곽의 상대고도가 낮을수록 주변에서부터 접근이 용이하여 방어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따라서 해당 성곽들의 경우 방어적 성격보다는 행정 치소 및 교통로 상의 거점의 가능성이 더 높으며, 반대로 성곽의 상대고도가 높을수록 성 내부로의 접근이 어려워져 군사 방어적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이승우, 2022, 73쪽).
축조 형태의 경우 성곽의 입지, 규모와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산정식산성의 경우 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축조한 형태로, 평면 형태가 원형, 타원형이 대부분이다. 산 정상부라는 환경으로 인해 성 내부의 생활공간이 부족하고, 수원 확보 또한 어려워 대규모의 병력이 장기간 주둔하기는 어렵다. 즉, 교통로 상 요충지 등 군사적, 전략적으로 필요한 위치에 축조되는 사례가 많다. 미호강 중·하류역의 경우 진출입로에 축조된 산지의 정상부의 삼국시대 산성들의 사례가 이에 해당한다.
포곡식산성은 성 내부에 계곡부를 포함하고 산 능선을 따라 축조한 형태로, 산의 형태와 자연 지형에 따라 불규칙한 부정형의 평면 상을 보인다. 계곡부를 흐르는 물은 집수시설의 형태로 한곳으로 모여 수원을 형성하여 대규모의 병사들이 장기간 주둔, 방어할 수 있다(양시은, 2016, 127쪽). 전쟁을 통해 영토가 확장되고 그 공간이 비교적 안정되었을 때는 군사방어 목적의 산정식산성 이외에도 효율적인 지방 지배를 위한 평지성, 혹은 하곡평지형 포곡식 산성이 활용되었다. 입지 변화에 따른 규모의 확장을 통해 성 내에 다양한 건물이 들어서는 양상은 군사 방어적 성격에 지방통치의 기능을 더한 변화로 볼 수 있다(양시은, 2013, 66-67; 76쪽).
1. 삼국시대
삼국시대의 미호강 중·하류역과 주변 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대립하는 힘의 각축장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아래에 이 일대는 군사적 중요성이 강화되어 공간의 성격이 군사적 성격을 보이게 되었다. 이 시기의 성곽들은 삼국이 청주 일대를 관통하는 미호강과 그 지류들로 대표되는 수상 교통로와 추풍령로, 화령로 등의 육상 교통로를 통해 청주 일대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축조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삼국의 힘이 부딪히는 핵심 공간인 청주를 중심으로 하여 세종(부강), 진천, 증평, 보은, 옥천, 대전 등 주위 공간과의 군사적 관계가 부각되는 시기였다.
삼국시대 이전 시기에 미호강 중·하류역에서 확인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정치체는 마한이다. 이는 최근 발굴조사가 진행된 송절동유적에서 동시기 최대 규모의 취락과 고분, 제철 유구들이 집중적으로 확인되고 있어 이 일대에 4세기대 마한의 중심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송절동-봉명동-신봉동으로 묘역의 확장이 이루어졌는데, 특히 신봉동 고분군에서는 백제 한성기의 유물이 확인되고 있어 5세기를 전후한 시점으로 이 일대는 점차 한성 백제의 영역으로 변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 일대에서 한성백제가 초기에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 중에 남쪽으로 진출하는 교통로인 미호강 중하류역 북쪽의 차령산지 일대에는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소규모의 산성들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 오래전에 이루어진 지표조사에서 별다른 고고학적인 근거 없이 삼국시대 · 백제의 성곽으로 보고된 성곽들이다. 이들은 산봉우리에 축조된 산정식산성으로, 대체로 석축으로 보고되고 있다. 이는 최근까지 조사된 한성기 백제의 산성이 대부분 토성이라는 점에서 이 성곽들을 한성기 백제 성곽으로 추정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향후 추가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이들 성곽과 관련된 내용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
청주 부모산성과 주변 보루 일대에서는 점토대토기와 흑도저부편, 두형토기 등 다량의 초기철기시대의 유물이 수습되고 있다. 이를 통해 부모산성 일대에 일정 규모의 취락이 있었음을 추정해볼 수 있으나, 이 시기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방어시설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부모산성과 주변 보루의 축조시기와 관련된 가장 이른 시기의 유물은 부모산성과 제 1보루 일원에서 출토되는 한성기∼웅진기 토기편과 6세기 전반으로 편년되는 백제계 기와이다.
증평 추성산성은 이 일대에서 확인되는 유일한 한성백제 시기의 성곽으로 백제의 미호강 일대로의 진출과 관련된 중요한 성곽이다. 추성산성의 경우 성벽 외부에 토제를 설치하고 거기에 4∼5차례의 성토공정을 더해 축조하였다. 이를 부모산성 제1보루의 축조양상과 비교해보면, 제1보루의 경우 1차 토축부는 토제를 설치했지만, 2차 토축부는 1차 토축부의 외측을 덧대어 축조하는 모습을 모이고 있어 축조방법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증평 추성산성의 경우 한성백제의 진출과 관련된 성곽인 것에 비해, 청주 부모산성과 주변 일원 보루군의 축조 시기는 추성산성보다는 더 늦은 5∼6세기에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조순흠, 2019, 82-83쪽).
백제 다음으로 이 일대로 진출한 국가는 고구려이다. 최근까지 이 일대에서 확인된 고구려 성곽은 세종 남성골산성이 확인된다. 남성골산성은 해발 106m 정도의 낮은 산자락에 내·외곽 이중의 목책을 둘러 축조한 성이다. 남한 내에서 확인되는 다른 고구려의 성곽인 경기 지역의 고구려 성곽들과 아차산 보루군의 경우는 석축으로 축조되었던 것과는 달리, 남성골산성의 경우는 목책성으로 조성된 것으로 볼 때, 당시 긴박한 상황 아래에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축조되었고 방어적으로 비교적 취약한 편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남성골산성은 석축으로 그 형태가 전환되지 못한 채 폐기된 것으로 추정된다(양시은, 2010, 120-121쪽).
마지막으로 이 일대로 진출한 국가는 신라이다. 신라는 5세기 후반경에 소백산맥 이북으로 진출하였다. 신라의 거점성으로 이 일대에는 보은 삼년산성이 축조되었고 주변 일대에 신라의 점유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 고분이 분포하고 있다. 보은·옥천·영동 일대로 진출한 후 신라는 오늘날 청주시 미원면 일대까지 진출한 것으로 보이며, 이 일대에서는 미천리 고분군이 확인된다.
이후 5세기 중반에 보은·옥천·영동·미원 등 미호강 중하류역의 남쪽에서 보은 삼년산성·옥천 이성산성 등 신라의 성곽과 고분유적이 조성되나, 이후 서쪽의 백제나 북쪽의 한강유역까지 진출하는 모습은 확인되지 않는다(윤상덕, 2021, 90-91쪽). 6세기 중반에 이르러 삼년산성에 거점을 구축한 신라는 아직까지 미호강 중·하류역 일대로 진출하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청주 부모산성에서 확인되듯이 이 일대를 회복한 백제 세력이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통일에 이르는 시기 동안 미호강 중·하류역 일대는 부모산성을 기준으로 서쪽은 금강 수로를 통해 진출해온 백제가, 동쪽은 신라가 소백산맥으로부터 진출하여 영역화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부모산성의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진 성벽 축조 양상에서의 백제와 신라의 혼재된 모습은 이 일대에서 백제와 신라가 격렬히 대립하는 구도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2. 통일신라시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당나라와의 전쟁이 끝난 이후 미호강 중·하류역 일대는 군사적 위협이 제거되면서 서원경이 설치됨에 따라 새로운 지방행정의 중심지가 형성되었다.
이 일대가 군사적 성격이 감소함에 따라 이전 시기의 감시 및 통제라는 운용 목적을 상실한 외곽산지의 성곽들은 더 이상 기능하지 않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청주 부모산성과 양성산성도 삼국 통일전쟁 시기까지는 활용된 듯하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폐성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새로운 행정 중심지인 서원경을 설치하여 무심천 서쪽의 기존 취락들을 폐기하고 새로운 계획도시를 건설하게 되었는데, 이는 무심천 동쪽의 평탄지 일대에서 조사된 통일신라시기 석축유구와 도로, 건물지 등으로 당시의 범위를 대략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신라가 기존의 취락을 폐기하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한 배경에는 기존의 재지계 세력을 견제하고 동시에 약화시켜 이 일대를 장악하고자 한 의도가 반영되었다. 새롭게 설치된 서원경은 현재 그 모습이 확인되지는 않지만, 무심천 동쪽의 평탄지 일대에서 확인되는 통일신라시대의 적심 건물지, 담장시설, 구획된 도로 유구가 다수 확인된다. 이 유구들이 가지는 특징은 일련의 정형성을 가지는 것으로, 이전 삼국시대와는 다른 철저한 계획도시가 형성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윤여헌, 2020, 61-67쪽).
이 시기에는 새로운 행정 중심지를 방어하기 위한 청주 상당산성과 우암산성 등 대규모의 포곡식 산성이 축조되었다. 우암산성은 통일신라∼고려시대, 상당산성은 통일신라∼고려시대, 조선 후기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규모는 약 4km 내외로 이전 시기에 비해 대규모로 확장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두 성곽 모두 무심천 동쪽의 강안 평지를 둘러싼 배후산지에 축조된 포곡식산성이다. 이 시기의 성곽들이 삼국시대에 사용되던 성곽보다 규모가 더 확장되는 원인은 다양하겠지만, 대표적인 이유로 성 내 거주하는 인구의 증가를 고려할 수 있다(차용걸 2012: 22-23). 즉, 이전 시기인 삼국시대에는 주위 국가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군사방어적 성격의 성곽을 축조했다면, 이 시기에는 군사 방어적 기능에 더하여 지방통치를 위한 민정(民政) 기능이 더해지게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성 내에는 대민행정기능 혹은 대규모 군대의 장기간 주둔을 위한 대형의 건물지가 위치할 공간이 요구되었고, 이는 성의 규모 확대로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3. 나말여초시기
나말여초시기에는 중앙에서 왕위 계승을 둘러싼 혼란이 발생함에 따라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가 약화되었다. 이로 인해 각 주요 지방에서 새롭게 발흥한 지방호족들의 중심지로 추정되는 다중환호 유적들이 미호강 강안의 비고 약 50m 이하의 낮은 구릉지 정상부에서 조성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미호강 중·하류역과 주변 지역이 후백제와 고려의 각축장으로 변화함에 따라 공간의 성격이 다시금 행정적 성격에서 군사적 성격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공간의 성격이 변화함에 따라 이전 시기에 사용되던 산성을 보수하여 사용하였다. 이전 시기에 사용한 성을 보수하거나 지속적으로 사용한 대표적인 사례로 청주 상당산성과 양성산성이 확인된다.
이 시기에 확인되는 특수한 사례인 다중환호는 쌍청리 다중환호·학천리 다중환호 2개소가 확인되고 있다. 이들 환호는 미호강과 병천천 인근의 강안 구릉에 입지한다. 쌍청리 다중환호는 병천천의 서쪽에 입지하여 병천천과 조천이 합류하는 평야에 접하고 있으며, 학천리 다중환호는 부모산 서쪽 능선 아래 일대에 위치하고 있어 미호강 남서쪽의 평야지대를 접하고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부모산성과 주변 보루군들의 기능이 약화됨에 따라 이들 다중환호로 이 일대의 군사적 기능이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환호 내부에서 수습되는 철제 무기류와 다량의 시루·동이편들로 볼 때 일정 수준의 병력이 주둔한 것을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쌍청리 다중환호의 경우 ’양오가불촌주’명 명문기와와 군사적 성격을 띄는 철제 유물들이 수습되는 것으로 보았을 때, 이 시기의 다중환호들은 미호강 중하류역 일대의 방어 거점일 뿐만 아니라 호족들의 거점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들 환호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 자연스럽게 폐기된 것으로 추정된다(박한철, 2019, 14-16쪽).
4. 고려~조선시대
고려 태조가 936년 일리천 전투에서 신검을 격파하여 다시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 청주는 청주목이 설치되어 다시금 지방행정의 중심지가 형성되었다. 이 시기 성곽은 고려시대의 기록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청주성(淸州城)’과 ‘청주산성(淸州山城)’, 그리고 청주 ‘나성(羅城)’의 사례로 확인된다. 현재 고려시대의 ‘청주성’의 실체적인 모습은 확인되지 않지만, 기록의 내용과 이 일대 성곽의 발굴유적 내용을 함께 고려했을 때, 이전 시기에 형성된 중심지 일대로 추정할 수 있다.
나성과 관련된 성곽으로는 무심천 동쪽의 배후 산지에 위치한 청주 우암산성이 있다. 우암산성은 내성과 외성, 그리고 3개의 자성(子城)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산 능선부를 따라 축조된 외성은 나성의 구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암산의 내성을 이루는 산성이 있고, 그 양쪽으로 시가지를 둘러싸는 외성이 나성의 형태로 무심천 동쪽의 평탄지 전체를 둘러싼 모습을 보인다. 또한, 당산토성은 우암산성의 부성으로 이 또한 나성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나성을 축조한 기록은 수도인 개경, 부도인 서경, 그리고 청주 나성을 제외하고는 확인되지 않아 특수한 사례에 해당한다. 이러한 청주 나성의 특수성은 축조 당시에 후백제와 마주한 지리적 요인을 감안하여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통일신라시대에 서원경의 설치 목적 중 하나가 기존의 재지계 세력을 통제하고자 한 것처럼 청주 나성 또한 이 일대가 후백제의 거점 지역이었음을 고려하면 재지계 세력을 통제하고자 한 목적 아래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차용걸, 2012, 26-27쪽). 그러나 이 일대에서 나성의 전체적인 구조와 그 성격에 대하여 지금까지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아 향후 추가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나성과 관련된 내용을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고려시대에 미호강 중·하류역 일대에 축성을 한 기록은 잘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는 추정하건데, 고려시대의 외부 침입이 주로 북쪽의 양계(兩界) 지역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주로 오늘날의 평안도와 함경도 남부, 그리고 황해도 일대에 집중적으로 성곽이 축성되었기 때문이다. 미호강 중·하류역 일대를 포함하는 하삼도 지역은 고려 전기~후기에 이르는 시기동안 외부로부터의 침입이 상술한 북계지역과 비교했을 때는 상대적으로 적었기에 성곽의 축조도 적극적으로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전기에는 청주목이 설치되어 통일신라-고려시대의 지방행정의 중심지 기능을 계승하였다. 이 시기의 특징적인 축성으로는 지방행정의 중심지이자 방어거점인 읍성의 축조가 이루어졌다.
고려말부터 연해의 왜구를 방어하기 위한 방어기능과 지방행정 기능이 집속된 읍성이 축조되기 시작하였는데, 고려 말~조선 전기에는 이전의 거란과 몽골 같은 육로를 통한 대규모 군단에 의한 침입보다는 연해 지방에서 소규모의 왜구에 의한 피해가 심각했다. 이로 인해 기존의 대규모 군단에 대비한 산성의 중요도는 떨어지게 되었고, 산성보다는 읍성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방어전략을 수립하였다.
초축시기는 확인할 수 없으나 문헌상에서 세종 5년에 관련 기록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를 전후하여 청주읍성이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미호강 중·하류역 일대는 내륙에 위치하고 있어 조선 성종 시기에 이르러서야 청주읍성을 보수한 기록이 확인된다.
상당산성의 경우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청주목 조에 청주읍성은 성곽(城郭)조에 기록된 반면, 상당산성은 고적(古跡) 조에는 고상당성(古上黨城)으로 기록되어 있고, ‘지금은 폐하였다(今廢).’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에는 한동안 사용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청주읍성은 통일신라-고려시기에 지속적으로 사용된 무심천 동쪽의 평지에 입지하고 있으며, 이를 방어하기 위한 배후 방어산성인 상당산성을 조선 후기에 대대적으로 보수, 두 성곽을 함께 운용하였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전국의 방어를 위해 봉수(烽燧)를 설치·운영하였다. 봉수 제도는 태종·세종 시기에 정비된 것으로 보이며, 세조·성종 대에 이르러서는 국가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규범으로서 기록되었다. 미호강 중·하류역을 통과하는 봉수의 구체적인 경로는 지리지인 여지도서 청주목과 문의현 조에 그 경로가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경상도 김산(金山, 김천) 고성(高城) → 황간(黃澗) 눌이항(訥伊項) → 황간 소이산(所伊山) → 영동(永同) 박달산(朴達山) → 옥천(沃川) 월이산(月伊山) → 옥천 환산(環山) → 회덕(懷德) 계족산(鷄足山) → 문의(文義) 소이산(所伊山) → 청주(淸州) 거질대(巨叱大) → 진천(鎭川) 소을산(所乙山) → 충주(忠州) 망이산(望伊山)
미호강 일대에는 청주 상당산성 남쪽의 것대산 봉수, 문의면의 소이산 봉수, 강내면의 저산성 봉수 3곳의 봉수대가 설치되었다. 청주 것대산 봉수와 문의 소이산 봉수는 추풍령로를 통과하여 황간-영동-옥천-회덕을 거치는 노선에 해당하며, 강내 저산성봉수는 공주-연기 용수산-청주 것대산으로 이어지는 노선에 해당한다. 이처럼 조선시대 전기에는 성곽과 봉수가 하나의 조합을 이루는 조선 전기의 방어체계를 이루었다.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조선 후기에는 기존의 읍성 위주의 방어전략이 대규모의 일본군과 육상의 청나라 군대의 침입을 방어하는 데 실패하면서 허점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에 기존의 방어전략을 수정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다시금 이전의 산성 위주의 방어전략을 수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방어전략의 수정으로 인해 미호강 중·하류역에서는 정유재란 시기인 1596년(선조 29)에 충청병사 원균에 의해 상당산성이 보수되었고, 효종 시대에는 대대적으로 개축되어 충청병영이 해미에서 이동되어 이 일대의 주요 거점방어성이 되었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는 기존의 청주읍성과 봉수대에 방어전략의 수정에 따라 대규모로 보수된 상당산성이 더해져 조선 후기의 방어체계를 이루었다.
5. 소결
이상으로 미호강 중·하류역 성곽들의 변천과정을 공간적 성격의 변화와 결부시켜 어떠한 연관성을 가지는지 살펴보았다. 이 일대의 성곽들은 역사적 흐름 속에서 중심지역인 청주와 미호강 중·하류역의 주변 지역이 가지는 공간적 성격이 군사적·정치적 상황에 따라 크게 군사적 성격, 공간적 성격의 두 성격으로 변화하면서 성곽의 축조 및 운용 또한 함께 변화를 보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 번째 공간적 특징은 각 국가가 국경을 맞대고 대치하는 전쟁의 중심지가 되는 군사적 성격을 보이는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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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5세기 고구려의 남하와 그에 대항하는 백제, 신라의 연합한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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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6~7세기의 신라의 북진과 그에 대항하는 백제와 고구려가 대치하는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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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9~10세기 지방의 유력 호족의 할거와 고려, 후백제의 대치가 이루어지는 시기
이상의 세 시기가 해당하며, 이 시기에는 군사적인 목적 아래에 미호강 중·하류역으로 진입하는 외곽의 차령산지, 소백산지, 그리고 세종시 부강면 일대의 산지에 산성들이 축조되어 교통로를 통제하고자 하는 성격이 강했고, 나말여초 시기에는 기존의 폐성된 성곽을 일시적으로 보수하여 활용하거나 새로운 형태인 다중환호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두 번째 공간적 특징은 미호강 중·하류역 주변의 군사적 위협이 사라지고, 그에 따라 군사적 긴장감이 완화되어 하나의 국가에 의해 이 일대가 점유, 안정되어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기능하는 행정적 성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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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삼국통일 이후, 신라가 지방행정체제를 정비하면서 서원경을 설치한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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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 지방행정체제를 정비하면서 청주목을 설치한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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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조선시대에 왕조 교체 이후 새롭게 지방을 정비, 청주목을 설치하는 시기
이상의 세 시기가 해당하며, 이 일대가 이와 같이 행정적 성격을 보이는 시기에에는 지방의 행정 기능을 담당하는 중심 행정치소와 그를 방어하기 위한 방어성곽이 하나의 조합으로 기능하는 양상을 보인다.
Ⅴ. 맺음말
이상으로 본 글에서는 미호강 중·하류역 일대의 시기별 공간적 성격 변화와 그에 따른 성곽 운용의 변천과정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미호강 중·하류역 일대, 특히 오늘날의 청주와 그 주변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성곽들에 대한 기존의 선행연구는 연구주제가 특정 시기, 특히 삼국시대에 편중되고 있어서 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통시적인 성곽의 변화 양상을 종합적으로 파악해 보려는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성곽은 어떠한 한 시점에 축성된 이후 그 시기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일정 시기에 축성된 이후 폐성이 될 수도 있지만, 필요에 의하여 수·개축하여 뒷시기에도 지속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통일신라시대에 축성된 성곽이 통일신라시대 이후에도 조선시대까지 연용(連用)되는 모습을 보이기에, 일정 시기에 편중된 성곽 연구는 한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미호강 중·하류역 성곽의 발굴조사 성과와 역사적 흐름에 따른 공간적 성격의 변화와 성곽 운용의 변천과정 간의 연관성에 주목하여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 이 일대 성곽의 통시적인 변화양상과 그 원인에 대하여 종합적으로 검토해보았다.
그 결과, 여러 국가가 미호강 중·하류역 일대에 존재할 때는 이 일대가 각 세력의 힘이 부딪히는 각축장이 되어 공간의 성격이 군사방어적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적들의 진입을 방어하기 위한 금강 수로와 중심지인 청주로 진입해 오는 주요 교통로 상에 다수의 성곽이 축조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변으로부터의 위협이 사라져 이 일대가 한 국가에 의해 안정화되었을 때는 지방행정의 중심지인 치소성과 이를 방어하기 위한 배후 방어산성들이 축조되어 운용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하여 기존 연구상에서 비교적 소홀하게 다루어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성곽의 운용양상을 함께 살펴보면서 이 일대 성곽의 변천과정과 배경 및 원인을 검토하여 그 의미에 대해 살펴볼 수 있었다. 또한 상술한 문제점들을 보완하고, 미호강 중·하류역에서 확인되는 군사적·행정적 두 공간적 특징과 성곽 운용의 변천과정 간의 연관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일대 성곽들의 발굴조사가 일부만 이루어졌기에 향후 추가적인 발굴조사를 통하여 성곽의 축성 시기와 그 목적에 대한 자료가 축적되어 미호강 중·하류역 일대의 성곽에 대한 더욱 진전된 연구를 기대해 보고자 한다.







표 2 발굴조사 된 미호강 중·하류역 일대의 성곽 현황
| 대상유적 | 입지 | 형식 | 해발고도 | 상대고도 | 둘레 | 축조재료 | 활용연대 |
|---|---|---|---|---|---|---|---|
| 증평 추성산성 북성 | 산 정상부 | 산정식 | 259 | 198 | 429 | 토축 | 삼국(한성백제) |
| 증평 추성산성 남성 | 산 정상부 | 산정식 | 242 | 181 | 1,411 | 토축 | 삼국(한성백제) |
| 천안 동성산성 | 산 정상부 | 산정식 | 237 | 127 | 933 | 석축 | 삼국(한성백제) |
| 청주 석화리 목책성 | 구릉 정상부 | 구릉성 | 56 | 19 | 106 | 목책성 | 삼국(사비백제) |
| 세종 남성골산성 | 산 정상부 | 산정식 | 106 | 43 | 447 | 목책성 | 삼국시대(고구려) |
| 청주 정북동토성 | 강안 평지 | 평지성 | 37 | - | 675 | 토축 | 삼국시대 |
| 청주 부모산성 | 산 정상부 | 산정식 | 231 | 162 | 1,135 | 석축 | 삼국~통일신라 |
| 청주 양성산성 | 산 정상부 | 산정식 | 297 | 11 | 985 | 석축 | 삼국~통일신라 |
| 청주 쌍청리 다중환호 | 구릉 정상부 | 구릉성 | 60 | 10 | 141~453 | 다중환호 | 나말여초시기 |
| 청주 학천리 다중환호 | 구릉 정상부 | 구릉성 | 75 | 13 | 80~100 | 다중환호 | 나말여초시기 |
| 청주 우암산성 | 산 정상부 | 포곡식 | 339 | 267 | 4,857 | 석축 | 통일신라~고려시대 |
| 청주 당산토성 | 산 정상부 | 산정식 | 104 | 50 | 550 | 토축 | 통일신라~고려시대 |
| 청주 태성리토성 | 구릉 정상부 | 구릉성 | 50 | 2 | 85(잔존) | 토축 | 나말여초시기 |
| 청주 상당산성 | 산 정상부 | 포곡식 | 491 | 357 | 4,200 | 석축 | 통일신라~조선시대 |
| 청주읍성 | 강안 평지 | 평지성 | 52 | - | 1,773 | 석축 | 조선시대 |
표 3 미호강 중·하류역 일대 삼국시대 성곽의 속성
| 대상유적 | 입지 | 형식 | 해발고도 | 상대고도 | 규모 | 축조재료 | 활용연대 |
|---|---|---|---|---|---|---|---|
| 증평 추성산성 북성 | 산 정상부 | 산정식 | 259 | 198 | 429 | 토축 | 삼국(한성백제) |
| 증평 추성산성 남성 | 산 정상부 | 산정식 | 242 | 181 | 1,411 | 토축 | 삼국(한성백제) |
| 천안 동성산성 | 산 정상부 | 산정식 | 237 | 127 | 933 | 석축 | 삼국(한성백제) |
| 청주 석화리 목책성 | 구릉 정상부 | 구릉성 | 56 | 19 | 106 | 목책성 | 삼국(사비백제) |
| 세종 남성골산성 | 산 정상부 | 산정식 | 106 | 43 | 447 | 목책성 | 삼국시대(고구려) |
| 청주 정북동토성 | 강안 평지 | 평지성 | 37 | - | 675 | 토축 | 삼국시대 |
| 청주 부모산성 | 산 정상부 | 산정식 | 231 | 162 | 1,135 | 석축 | 삼국~통일신라 |
| 청주 양성산성 | 산 정상부 | 산정식 | 297 | 11 | 985 | 석축 | 삼국~통일신라 |
표 4 미호강 중·하류역 일대 통일신라시대 성곽의 속성
| 대상유적 | 입지 | 형식 | 해발고도 | 상대고도 | 규모 | 축조재료 | 활용연대 |
|---|---|---|---|---|---|---|---|
| 청주 우암산성 | 산 정상부 | 포곡식 | 339 | 267 | 4,857 | 석축 | 통일신라~고려시대 |
| 청주 당산토성 | 산 정상부 | 산정식 | 104 | 50 | 550 | 토축 | 통일신라~고려시대 |
| 청주 상당산성 | 산 정상부 | 포곡식 | 491 | 357 | 4,200 | 석축 | 통일신라~조선시대 |
[표 5] 미호강 중·하류역 일대 나말여초시기 다중환호의 속성
| 대상유적 | 입지 | 형식 | 해발고도 | 상대고도 | 규모 | 축조재료 | 활용연대 |
|---|---|---|---|---|---|---|---|
| 청주 쌍청리 다중환호 | 구릉 정상부 | 구릉성 | 60 | 10 | 141 ~ 453 | 다중환호 | 나말여초시기 |
| 청주 학천리 다중환호 | 구릉 정상부 | 구릉성 | 75 | 13 | 80 ~ 100 | 다중환호 | 나말여초시기 |
[표 6] 미호강 중·하류역 일대 조선시대 성곽의 속성
| 대상유적 | 입지 | 형식 | 해발고도 | 상대고도 | 규모 | 축조재료 | 활용연대 |
|---|---|---|---|---|---|---|---|
| 청주 상당산성 | 산 정상부 | 포곡식 | 491 | 357 | 4,200 | 석축 | 통일신라~조선시대 |
| 청주읍성 | 강안 평지 | 평지성 | 52 | - | 1,773 | 석축 | 조선시대 |
표 7
| 시기 | 미호강 중·하류역의 공간적 성격 | 입지형태 | 변화양상 | 대표성곽 |
|---|---|---|---|---|
| 삼국시대 | 군사적 성격 (고구려·백제·신라의 접경지) |
산 정상부 (미호강 중·하류역 외곽, 미호강 앙안) |
삼국의 진출로 방향에 따라 주요 교통로를 통제할 수 있는 지점에 축성 | 증평 추성산성 (백제) 천안 동성산성 (백제) 청주 부모산성 (백제→신라) 세종 남성골산성 (고구려) 청주 석화리 목책성 (백제) 청주 양성산성 (신라) 청주 정북동토성 (삼국) |
| 통일신라시대 | 행정적 성격 (지방행정의 중심지, 서원경) |
강안 평지와 배후 산성 (무심천 동쪽 평탄지) (배후 산지) |
기존의 군사적 성격의 성곽 폐성, 새로운 지방행정 중심지 위주의 방어 | 청주 상당산성 (통일~조선) 청주 우암산성 (통일~고려) 청주 부모산성 (신라) 청주 양성산성 (신라) 서원경 (중심지) |
| 나말여초시기 | 군사적 성격 (지방호족의 발흥, 고려·후백제 접경지) |
산 정상부 (미호강 중·하류역 외곽) 강안 구릉지 (미호강 강안) |
중앙정부의 지방통제 약화. 지방 호족의 발호 · 고려·후백제의 대립으로 성곽 재사용 | 청주 쌍청리 다중환호 (나말여초) 청주 학천리 다중환호 (나말여초) 청주 양성산성 (후삼국) 청주 태성리토성 (후삼국) |
| 고려·조선시대 | 행정적 성격 (지방행정, 청주목 설치) |
강안 평지 (청주 무심천 동쪽) 배후 방어산성 (상당산성) + 지방 봉수 체계 |
후삼국 통일 후 지방제도 정비 (고려) 왕조 교체 이후 지방제도 정비 (조선) |
청주성 (고려시대 추정) 청주 우암산성 (통일~고려) 청주 상당산성 (통일~조선) 청주읍성 (조선시대 추정) |
| 군사 + 행정적 성격 (지방행정·군정의 중심지) (조선 후기) |
연해 방어의 필요성 제기, 읍성축조 (조선 전기) · 조선시대 전기 방어전략의 한계, 산성 중심 방어체계 (조선 후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