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원소경의 설치와 범위 및 치소에 대한 고찰
A Study on the Establishment, Scope, and Location of Bukwon-sogyeong
1 단국대학교
1 Dankook University
DOI: https://doi.org/10.71244/jojm.2025.35.63
초록
3세기 중·후반 고이왕대에 강원특별자치도 영서지역이 백제의 영향권에 편입되었고,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 사이에 신라가 죽령을 넘어 영서지역에 진출하면서 양자 간 충돌이 나타났다. 4세기 후반 근초고왕대에 백제는 원주지역의 정치세력을 통제하였는데, 법천리유적의 고분과 출토품을 통해 이를 입증할 수 있다. 396년에 고구려가 남진하여 백제로부터 58성 700촌을 빼앗았는데, 58성의 하나로서 오늘날 원주시로 비정되는 古牟婁城은 후일 平原城으로 개칭된 것으로 추정된다. 551년 신라가 한강 상류 10郡을 확보하면서 원주 역시 신라의 영토에 편입되었고, 신라는 여기에 平原郡을 설치하였다. 통일 이후 신라는 새로 편입된 옛 고구려지역 및 강원특별자치도 영서와 영동지역의 여러 군·현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목적과 더불어 石門戰鬪 이후 죽령로를 통한 당군의 침략에 보다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대책의 하나로 678년에 평원군에 북원소경을 설치하였다. 685년 9州 완비와 더불어 북원소경의 안전이 더욱 공고하게 다져졌으며, 당과의 긴장도 점차 완화됨에 따라 북원소경은 다른 소경과 마찬가지로 전국 통제력 강화를 위한 陪도로서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북원소경의 치소는 원주 시내 일원에 위치하였고, 신문왕 5년에는 오늘날 금대성으로 비정되는 북원경성을 축조하였다. 북원소경의 관할 범위는 오늘날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일원과 횡성군 서원면,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및 북내면의 일부를 망라하였다. 757년(경덕왕 16)에 북원소경을 북원경으로 개칭하였고, 9세기 후반에 北原京을 北原府로, 후고구려에서 이를 다시 原州로 고쳤다.
Abstract
In the mid-to-late 3rd century, during the reign of King Goi, the Yeongseo region of Gangwon-do was incorporated into Baekje's sphere of influence. Between the late 3rd and early 4th centuries, Silla advanced into the Yeongseo region across Jungnyeong, leading to conflicts. In the late 4th century, Baekje controlled the political forces in the Wonju area, as evidenced by the tombs and artifacts of the Beopcheon-ri site. In 396, Goguryeo moved south and took 58 castles and 700 villages from Baekje; Gomuru-seong, identified as present-day Wonju, is presumed to have been renamed Pyeongwon-seong. In 551, Silla secured 10 counties in the upper reaches of the Han River, and Wonju was incorporated into Silla's territory, where Pyeongwon-gun was established. After unification, Silla established Bukwon-sogyeong in Pyeongwon-gun in 678 to efficiently control the newly incorporated former Goguryeo territories and the Yeongseo/Yeongdong regions, and to respond to Tang invasions via the Jungnyeong route after the Battle of Seokmun. With the completion of the 9-province system in 685, Bukwon-sogyeong's security was strengthened, and as tensions with Tang eased, it functioned as a secondary capital (Baedo) to reinforce national control. The administrative center was located in downtown Wonju, and in the 5th year of King Sinmun, Bukwon-gyeongseong (Geumdae-seong) was built. Its jurisdiction covered present-day Wonju, Seowon-myeon in Hoengseong, and parts of Yeoju. In 757, it was renamed Bukwon-gyeong, then Bukwon-bu in the late 9th century, and finally Wonju during the Later Goguryeo period.
Ⅰ. 머리말
삼국시대에 원주시를 비롯한 영서지역은 시기에 따라 그곳을 지배하는 나라가 수시로 바뀌었던 점이지대였다. 삼국 초기에 중국 군현과 백제, 신라가 원주를 비롯한 영서지역에서 각축을 벌였고, 4~7세기에 한강유역을 둘러싸고 삼국 사이에 치열한 공방을 전개하면서 영서지역의 주인이 백제, 고구려, 신라의 순으로 변동되었던 것이다. 신라는 통일 이후 옛 고구려 지역 및 강원특별자치도 영서와 영동지역의 여러 군·현을 효율적으로 지배, 통제하기 위하여 가장 먼저 원주에 북원소경을 설치하였다. 통일신라기에 북원소경은 강원특별자치도 영서와 영동지역을 연결하거나 또는 영서지역과 충주 및 경상도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이에 따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북원소경에 사람과 물자가 집적되어 도시화가 진전되었다. 신라 말에 梁吉과 弓裔는 북원소경의 풍부한 인적·물적인 인프라를 이용하여 세력을 크게 떨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삼국시대 원주의 동향과 관련하여 원주시 부론면의 법천리유적이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현재 학계에서 법천리유적에서 발견된 횡혈식석실묘와 羊形靑磁, 靑銅鐎斗 등을 근거로 하여 4세기에서 5세기 전·중반까지 백제가 원주지역을 간접적으로 지배, 통제하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이인재, 2004; 이인재, 2016a, 35~44쪽 및 60~68쪽; 홍이지, 2025, 1~2쪽이 참조된다. 5세기에서 6세기 중반까지 원주시를 비롯한 영서지역은 고구려의 영역에 속하였다. 현재 학계에서 언제 고구려가 원주시에 진출하였는가에 관해서 논란이 분분하다. 396년 광개토왕이 58성 700촌을 차지하였을 때에 고구려가 원주지역에 진출하였다는 견해와(장창은, 2014, 58~70쪽; 이인재, 2016a, 68~80쪽; 홍기택, 2024, 43쪽) 5세기 중엽에 비로소 원주지역을 영역으로 편제하였다고 이해하는 견해가(서영일, 2003, 39~40쪽; 여호규, 2012, 207쪽. 한편 홍이지, 2025, 33~41쪽에서 고구려가 58성과 700촌을 차지한 396년과 신라를 구원하기 위하여 죽령로를 이용하여 출전한 400년에 섬강 중하류지역까지 진출하였다가 5세기 중엽에 남한강유역의 법천리지역까지 나아갔다고 이해하는 견해를 제기하였다) 제기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관건은 법천리고분 1호분 피장자의 동향, 광개토왕릉비에 전하는 58성의 위치 비정, 충주고구려비의 건립 연대 등을 해결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신라는 551년(진흥왕 12)에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고 한강 상류의 10郡을 차지하였는데, 이때 춘천시와 원주시를 비롯한 강원특별자치도 영서지역도 10郡의 영역에 포괄되었다. 이후부터 901년에 弓裔가 後高句麗를 건국할 때까지 원주지역은 계속 신라 통치하에 있었다. 이 기간 동안에 원주지역의 행정단위 명칭은 平原郡, 北原小京, 北原京, 北原府로 바뀌었다. 현재까지 5소경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지만, 북원소경 자체만을 깊이 있게 천착한 연구성과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었다. 특히 통일 이후 여러 소경 가운데 북원소경을 가장 먼저 설치한 이유 및 그 배경에 대해서는 제대로 규명하였다고 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여기다가 북원소경의 치소와 범위, 변천에 대해서도 여전히 보완할 사항이 적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본고는 바로 이와 같은 기존 연구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하여 준비된 것이다. 본고에서는 먼저 삼국시대 원주의 동향을 규명하고, 이어 북원소경의 설치 배경, 북원경성의 위치와 북원소경의 치소 및 범위, 그리고 그것의 변천을 고찰하는 순으로 논지를 전개할 예정이다. 본고의 부족한 점에 대해서는 추후에 수정, 보완할 것을 약속하며, 많은 질정을 바란다.
Ⅱ. 삼국시대 원주의 동향
삼국사기 잡지 제4 지리2 삭주조에 ‘北原京은 본래 高句麗 平原郡이었는데, 文武王이 北原小京을 설치하였다. 神文王 5년(685)에 성을 쌓았는데 둘레는 1,031步이다. 景德王은 이 이름을 사용하였다. 지금은 原州이다.’라고 전한다. 이를 통해 원주지역이 본래 고구려 영토였다가 문무왕대 이전 어느 시기에 신라의 영역이 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진흥왕 12년(551)에 居柒夫 등이 군사를 이끌고 한강 상류를 공격하여 빼앗은 다음, 신라는 거기에다 10郡을 설치하였다.5) 한편 일본서기 에 553년에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牛頭方을 차지하였다고 전한다.6) 우두방은 현재 춘천시를 가리킨다. 신라가 춘천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竹嶺을 넘어 단양-제천-원주-횡성-홍천을 연결하는 교통로를 활용하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신라가 이 교통로를 통해 우두지역에 진출하였다면, 551년에 신라가 차지한 한강 상류에 위치한 10郡 가운데 원주지역도 포함되었다고 이해하여도 異論이 없을 것이다.
고구려에서 郡制를 실시하였다는 증거는 없다. 따라서 고구려에서는 본래 平原城이라고 불렀고,7) 신라가 원주지역을 차지한 후에 그곳을 行政村·城으로 편제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주변의 행정촌·성 몇 개를 합하여 平原郡을 설치하였다고 볼 수 있다. 평원군의 중심 行政村·城이 平原城이었고, 行政村·城名을 郡名으로 삼은 것임이 분명하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9주의 경우는 領縣에 관한 기록이 전하는 반면, 북원경을 비롯한 5소경의 경우는 領縣에 대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신라에서 5소경에 領縣을 두지 않았음을 알려준다.8 그러면 북원소경을 설치하기 이전에도 평원군에 영현을 두지 않았을까가 궁금하다.
경덕왕 16년(757)에 郡은 모두 117개였다.9 이 가운데 영현이 없는 군은 商城郡, 槐壤郡, 水城郡, 獐口郡, 瀑池郡, 重盤郡, 栖巖郡, 狼川郡, 益城郡, 靈巖郡 등 10개에 불과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북원소경을 설치한 678년 이전에 춘천과 영주를 잇는 죽령로의 요지이면서도 남한강을 통해 충주와 직결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한 平原郡에도 領縣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한다. 678년 이전에 평원군의 주변에 위치하여 그 영현이었다고 추정되는 것으로 삼국사기 잡지 제4 지리2에 牛首州 領縣으로 전하는 橫川縣과 砥峴縣, 溟州 奈城郡 領縣으로 전하는 酒淵縣을10 들 수 있다. 특히 酒淵縣은 고려시대에 原州의 屬縣이었고, 게다가 뒤에서 살펴보듯이 조선 중기에 廢縣되어 原州牧에 편입되었음을 염두에 둔다면, 주연현의 경우 平原郡의 領縣이었다가 北原小京 설치 이후 奈生郡의 領縣으로 변경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판단된다. 주지하듯이 신라에서 642년 이후부터 685년 사이에 行政村을 縣으로 개편하였다.
551년 이전에 원주는 고구려의 영역에 속하였다. 그러면 고구려는 언제 원주지역을 차지하고, 그곳을 영역으로 편제하였을까가 궁금하다. 충주고구려비 전면에 ‘新羅土內幢주’와 ‘十二月卄三日甲寅’이란 표현이 전한다. 449년(장수왕 37) 12월 23일의 간지가 甲寅이고, 450년대 전반까지 신라 영토 내에 고구려군이 주둔하였다.12 이에 따른다면, 충주고구려비 전면의 내용은 449년에 발생한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고구려는 449년 이전 어느 시기에 원주지역에 진출하였을까? 이와 관련하여 광개토왕릉비에 永樂 6년(396)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여 58城 700村을 차지하였다고 전하는 사실이 주목된다. 비문에 전하는 58성의 이름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신라본기에 따르면, 450년 7월에 고구려가 신라의 북쪽 변경을 공략하였고, 그다음 해 10월에 고구려가 백제를 침략하자, 신라왕이 군사를 보내 구원하였다고 전한다. 신라본기에 따르면, 450년대 전반에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가 틀어졌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450년대 전반에 신라가 자국 영토 내에 주둔한 고구려군을 죽이고, 이로부터 두 나라 사이에 원한이 생기기 시작하였다고 봄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58성 가운데 阿旦城은 서울특별시 광진구에 위치한 阿且山城(峨嵯山城), 彌鄒城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 위치한 文鶴山城으로 비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16 閣彌城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고구려본기에 전하는 關彌城과 동일한 곳으로 이해된다.17 종래에 관미성을 오늘날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에 위치한 오두산성으로 비정한 견해가 제기되었다.18 彌沙城의 위치와 관련하여 漢州 來蘇郡의 본래 이름이 買省縣이었고, ‘彌’와 ‘買’가 상통하였음이 주목된다. 『동국문헌비고』 권7 輿地考2 歷代國界(下) 百濟國條에 ‘所夫里는 옛 省津이다. 방언에서는 省을 所라고 부르기도 하며, 所를 蘇로 쓰기도 한다. 예컨대 고구려의 買省郡은 후에 來蘇郡이 되었고, 백제의 省大號縣은 후에 蘇태縣이 되었다. 所는 또 所乙로도 轉化하였는데, 지금 영남 지방의 省峴을 俗稱으로 所乙峴이라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夫리란 ‘嘴’를 뜻하는 말로, 山嘴(가늘고 길게 뻗어 나온 산기슭의 끝)를 가리킨다.’라고 전한다.19 『삼국사기』 지리지에 買省縣과 省大兮縣을 경덕왕대에 來蘇郡, 蘇泰縣으로 개칭하였다고 전한다.20 따라서 省大號縣은 省대혜현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동국문헌비고』 기록을 통해 省을 所 또는 蘇로 音讀하였음을 인지할 수 있다. 한편 康州 河東郡 省良縣을 고려시대에 쇠라부곡(또는 소라부곡)으로 음독이 가능한 金良部曲이라고 개정한 사실도 확인된다.21 그런데 신라 6부명에 보이는 ‘喙’를 신라시대에 탁(닥) 또는 톡(독), 그리고 달 또는 돌로 音讀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22) 본래 신라인들은 ‘喙’를 () 또는 로 읽었을 텐데, ‘아래아’자가 사라지면서 이와 같이 다양하게 음독하게 된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법흥왕비와 혜공왕의 첫째 왕비, 민애왕의 어머니가 保刀夫人, 新寶夫人, 貴寶夫人이라 전하나 『삼국유사』 권제1 왕력제1에는 각각 巴刀夫人, 神巴夫人, 貴巴夫人이라 전한다. 이와 같은 여러 사례를 통해 고대에 ‘ㅂ’과 ‘ㅍ’을 동일하게 音讀하였고, ‘ㅗ’와 ‘ㅏ’도 通用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상에서 살핀 것처럼 ‘彌’와 ‘買’ 및 ‘ㅏ’와 ‘ㅗ’가 서로 통용되었음을 염두에 둔다면, 彌沙城은 買所城(買蘇城)으로도 치환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매성현, 즉 내소군은 현재 경기도 양주시 고읍동(옛 주내면 고읍리)으로 비정된다.
이상에서 閣彌城은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에 위치한 오두산성, 彌沙城은 양주시 고읍동, 阿旦城은 서울시 광진구에 위치한 阿且山城, 古利城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으로 비정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들 지역을 지도에 표시한 것이 그림 1
북원소경의 설치와 범위 및 치소에 대한 고찰 고대에 널리 쓰인 지명어미가 바로 伐, 夫里, 火 등이다. 이들 글자는 牟羅(牟盧)와 마찬가지로 모두 들(들판), 벌(벌판)에 위치한 취락 또는 읍락 등의 거주지 단위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런데 벌로 쓰인 지명어미를 한문으로 ‘~平(坪)’으로 표기하는 사례를 다수 발견할 수 있다.27 일반적으로 ‘平’이나 ‘坪’字는 평지나 산간 계곡의 구분 없이 평탄한 지형을 나타내는 지명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특히 농경지의 평탄지는 주로 ‘平’자를 쓰고, 평탄지에 위치하는 주거지의 경우는 보통 ‘坪’자를 많이 사용한다고 한다.
앞에서 牟盧城과 □舍蔦城이 한강 이북과 각미성-미사성-고리성-아단성을 연결하는 선 안에 존재한 지명일 가능성이 높다고 언급한 바 있다. ‘牟盧(模盧)’를 한자 ‘平(坪)’자로 표기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牟盧城을 漢字 平城(坪城)으로 치환하여 표기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이와 관련하여 고구려에서 한강 이북의 서울을 平壤이라고 부른 사실이 유의된다.29 고구려에서 ‘那’는 壤(襄, 讓), 川, 內, 奴 등으로 표기되어 訓讀 또는 音讀되었으며, ‘~那’라고 불리는 집단은 어떤 천변이나 계곡의 집단을 뜻한다고 한다.
그런데 광개토왕릉비에 전하는 58성 가운데 牟盧城과 동일한 성격을 지닌 지명이 전하는데, 牟婁城과 古牟婁城이 바로 그것이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제1에 未鄒尼叱今의 ‘味鄒’를 未炤, 未祖, 未召라고도 표기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삼국사기』 잡지 제3 지리1 尙州 條에 오늘날 경북 의성군 금성면에 해당하는 聞韶郡의 본래 이름이 召文國이라 전하고, 단양신라적성비에서 이곳을 鄒文村이라 표기하였음이 확인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4 신대왕 즉위년조에 新大王의 이름이 伯固 또는 伯句라고 전한다.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 고대에 ‘ㅊ’과 ‘ㅈ’, ‘ㅅ’이 서로 통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ㅗ’와 ‘ㅜ’를 서로 치환하여 사용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牟婁 역시 牟盧와 마찬가지로 큰 취락 또는 읍락을 가리키는 지명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고 하겠다.
고모루성의 위치와 관련하여 충주고구려비에 ‘古牟婁城守事 下部 大兄 耶□’가 전하는 사실이 주목된다. 守事는 4~5세기에 太守, 守, 宰 등과 함께 고구려에서 지방에 파견한 지방관을 이른다. 특히 수사와 태수, 수는 각 지역의 전략적 요충지에 파견되어 宰가 파견된 여러 城이나 谷을 관할하던 상급 지방관을 가리킨다고 알려졌다.
앞에서 牟盧城을 漢字로 平城으로 표기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牟婁城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하겠다. 한편 爾雅 釋地篇에 ‘大野曰平 廣平曰原 고평왈륙 대륙왈부 대부 왈릉’이라고 전한다. 삼국사기 잡지 제6 지리4에서 웅진도독부 分嵯州 예하의 首原縣의 본래 이름이 買省坪이라고 하였는데, 이를 통해 坪이 原과 대응되었음을 살필 수 있다. 이러한 기록들에 유의한다면, 원주지역이 평탄한 지형의 넓은 들판이기 때문에 고구려인들이 그곳의 지명을 平原이라 명명하였다고 유유추할 수 있다. 광개토왕릉비에 漢字式 지명이 보이지 않는다. 396년 이후에 고구려에서 기존의 백제 지명을 한자식 지명으로 개칭하였다고 보인다. 일본서기 에서 551년에 한강 이북의 서울을 平壤,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를 牛頭方이라고 불렀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이전 어느 시기에 고구려에서 한강유역의 백제 지명을 전면적으로 개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검토는 추후의 과제로 남겨두기로 한다. 원주가 평탄한 지형의 넓은 들판으로 이루어진데다가 춘천과 제천, 단양, 죽령을 연결하는 교통로의 요지일 뿐만 아니라 남한강 수로를 통해 충주와 쉽게 연결할 수 있었던바, 5세기에 고구려의 입장에서 원주지역은 지방통치의 전략적 거점으로서 매우 중시되었음이 분명하다. 여기에다가 牟婁城과 古牟婁城을 한자 平城, 古平城으로 치환이 가능하고, 고구려에서 원주지역에 平原城을 설치하였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守事가 파견된 고모루성은 원주로 비정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판단된다. 아마도 백제에서 원주지역을 牟婁城이라 부르다가 다시 다른 지역을 牟婁城이라고 부르게 되면서, 원주지역을 古牟婁城이라 명명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상에서 검토한 바에 따른다면, 고구려는 396년에 백제를 공격하여 58성을 차지하였을 때에 古牟婁城이라 불린 원주지역도 포함되었고, 551년 이전 어느 시기에 고모루성을 平原城으로 개칭하였다고 볼 수 있다.
396년 이전 원주의 동향과 관련하여 섬강유역에 위치한 건등리와 주산리, 법천리유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건등리유적은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문막읍 건등리 1440번지에 위치하였다. 여기에서 주거지 3기, 구상유구 2기, 수로유구 1기, 수혈유구 23기, 주혈 550여 기가 조사되었다. 주거지에서 고구려 토기편이 발견되었는데, 발굴조사자는 이를 근거로 건등리유적은 5세기 전반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주산리유적은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호저면 주산리 55번지에 위치하였다. 여기에서 석촌동고분군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연접식적석묘가 발견되었다. 주산리유적에 최소 10기 이상의 묘곽이 존재하였다고 추정되고 있고, 1호와 2호 묘곽을 중심으로 다른 묘곽들이 확장되며 서로 연접된 형태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묘곽 2기에서 유리제 환옥과 뼈조각, 타날문토기편 등이 확인되고, 1호 묘곽에서 출토된 유리제 연주옥은 연천 학곡리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형태로 알려졌다. 주산리유적은 2~4세기로 편년되며, 그 축조 주체는 백제와 밀접하게 연결된 존재로 이해되고 있다.35)
법천리유적은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1532번지 일대, 남한강가의 모래언덕에 위치하였다. 이곳은 남한강 수로를 통해 강원특별자치도와 경기도, 충청북도, 즉 원주권과 여주권, 충주권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면서 남한강과 섬강이 합류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고려·조선시대에는 興元倉(興原倉)이라 불리는 漕倉이 있어 원주와 개성·한양을 잇는 창구 역할을 수행하는 등 水運과 交易의 중심지로 기능하였던 바 있다. 법천리유적에서 토광묘, 횡구식석실묘, 횡혈식석실묘, 옹관묘, 횡구식석곽묘 등이 조사되었다. 횡구식석실묘로 추정되는 2호분에서 중국 南京 象山 7호분(322년 추정)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한 羊形靑磁가 출토되었다. 양형청자의 전세 기간을 고려하여 2호분은 4세기 중·후반으로 편년하고 있다. 1호분과 3호분은 횡혈식석실묘인데, 특히 1호분에서 金製耳飾, 金銅飾履, 木心鐵板皮鐙子를 비롯한 馬具, 鐵劍·鐵鉾·鐵鏃 등의 武具, 靑銅鐎斗 등이 출토되었다. 이 가운데 청동초두의 형태는 南京 象山 5호분(358) 출토 동진 청동초두, 풍납토성 출토 초두의 그것과 유사하였다. 청동초두의 전세 기간을 고려하고, 재갈과 등자 등의 馬具類의 편년에 근거하여 1호분은 5세기 전반~중반에 축조되었다고 추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35)36)
이상에서 양형청자가 출토된 법천리 2호분은 4세기 중·후반, 靑銅鐎斗와 靑銅飾履 등이 출토된 1호분은 5세기 전반~중반으로 편년되는 고분임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1호분과 2호분 등에서 토기가 다수 발견되었는데, 2호분 출토 直口壺 등은 서울지역에서 출토된 토기와 관련시킬 수 있지만, 그러나 법천리유적에서 서울지역에서 다수 출토되는 高杯와 三足器, 廣口壺 등은 출토되지 않았다.
앞에서 396년에 고구려가 원주지역에 진출하였음을 살핀 바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백제의 영향을 받은 횡혈식석실묘에 묻힌 1호분의 주인공에 대하여 어떻게 합리적으로 설명할 것인가가 문제로 제기된다. 이와 관련하여 양형청자나 청동초두 등은 전세 기간이 상당히 길었다고 추정되는 사실 및 법천리지역에서 서울지역에서 널리 출토되는 백제 중앙양식의 전형적인 토기들이 출토되지 않았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1호분의 편년에 대한 주류적인 견해를 따른다고 하더라도, 5세기 중반에 1호분의 주인공이 백제의 통제를 받았다고 단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4~6세기에 고구려는 각 지역 토착지배세력의 자치적인 통치력을 부정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바,39 법천리 1호분의 주인공이 고구려의 간접적인 통제를 받았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고려할 수 있지만, 396년에 고구려가 원주지역에 진출하고, 그 이후 어느 시기에 여기에 守事라는 지방관을 파견하면서 그곳에 대한 고구려 국가의 지배력이 한층 더 강화되었다고 상정해볼 수 있다. 건등리유적에서 고구려토기가 발견되는 점과 더불어 법천리 1호분 축조 이후에 강력한 토착지배세력의 고분이 더 이상 발견되지 않은 것은 이러한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까 한다.
이상에서 살핀 바에 따르면, 396년 이전인 4세기에 백제가 원주지역을 간접적으로 통제, 장악하였다고 정리할 수 있다. 백제는 4세기 후반 근초고왕대에 대외팽창을 활발하게 전개한 바 있다. 강원특별자치도 화천군 하남면 원천리에서 백제유적이 조사되었다. 중심 연대가 4세기이고, 하한이 5세기 전반경으로 편년되는 원천리 Ⅱ기의 유적에서 한성 백제 중앙양식의 토기와 더불어 다양한 철기류가 출토되었다.
종래에 3세기 중·후반 고이왕대에 백제가 영서지역에 진출하였고,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반 사이에 신라가 영서지역에 진출하여 백제와 충돌하였음을 살핀 연구성과가 제출된 바 있다.
Ⅲ. 678년 북원소경의 설치와 그 배경
신라는 678년(문무왕 18)에 平原郡에다 小京을 설치하고, 그것을 北原小京이라 불렀다. 이와 관련된 기록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Ⅰ-① 北原小京을 설치하고 大阿飡 吳起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置北原小京 以大阿飡吳起守之](『삼국사기』 신라본기 제7 문무왕 18년 봄 정월). Ⅰ-② 北原京은 본래 高句麗 平原郡이었는데, 文武王이 北原小京을 설치하였다. 神文王 5년(685)에 성을 쌓았는데 둘레는 1,031步이다. 景德王은 이 이름을 사용하였다. 지금은 原州이다(『삼국사기』 잡지 제4 지리2 삭주).
Ⅰ-①, ② 기록에 따르면, 신라는 문무왕 18년(678) 정월에 평원군에 北原小京을 설치하였다가 경덕왕 때에 북원소경을 북원경으로 개칭하였다고 볼 수 있다. 경덕왕 16년(757)에 州와 郡, 縣의 명칭을 漢式으로 개정하였는데, 이때 북원소경을 북원경으로 개칭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잡지 제4 지리2 한주조에 경덕왕이 國原小京을 中原京으로 개칭하였다고 전하나,44) 이를 그대로 신뢰하기 어렵다. 678년과 685년에 설치한 北原小京, 西原小京은 中原小京이란 명칭을 전제로 하여 명명하였다고 이해되기 때문이다. 결국 678년 이전에 국원소경을 중원소경이라 이름을 고치고, 경덕왕 16년에 중원소경을 중원경이라 개칭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45) 아마도 원주가 충주의 북쪽에 위치하고, 中原과 平原이란 지명 등을 두루 고려하여 원주에 설치한 小京의 이름을 北原小京이라 지은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는 북원소경과 더불어 680년(문무왕 20) 김해에 金官小京, 685년(신문왕 5) 남원과 청주에 南原小京, 西原小京을 설치하면서 5소경체제를 갖추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사항은 통일 이후 신라가 가장 먼저 원주에 小京을 설치한 이유가 무엇인가에 관해서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기록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Ⅱ-① 阿飡 春賦에게 명하여 國原으로 나가서 지키게 하였다[命阿飡春賦出守國原](『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 진흥왕 26년 가을 8월).
의 한 소국인 日華國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은 그리 높다고 보기 어렵지 않을까 한다. 게다가 일화국의 위치를 원주지역에 비정하는 논거도 명확하지 않은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Ⅱ-② 何瑟羅州로서 北小京으로 삼고, 沙飡 眞珠에게 명하여 지키게 하였다[以何瑟羅州爲北小京 命沙飡眞珠鎭之](『삼국사기』 신라본기 제5 선덕왕 8년 봄 2월).
『삼국사기』 잡지 제9 직관(하) 외관조에는 ‘仕臣<혹은 仕大等이라고도 한다>은 5명인데, 진흥왕 25년(564)에 처음 설치하였다.’라고 전한다. 진흥왕 25년에 소경의 장관으로 사신(사대등)이 처음 설치되었고, 그다음 해 8월에 아찬 春賦를 북원소경의 사신으로 처음 임명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Ⅱ-① 기록에 아찬 춘부를 국원소경의 사신으로 임명하였다는 직접적인 표현이 아니라, 단지 그로 하여금 나아가 국원을 지키게 하였다[出守國原]고만 서술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사찬 진주 역시 북소경의 사신으로 임명된 인물로 이해될 수 있으나, Ⅱ-②에도 동일하게 그에게 북소경을 지키도록[眞珠鎭之] 명하였다는 내용만이 기재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데 Ⅰ-① 기록에도 문무왕 18년(678)에 대아찬 吳起를 북원소경의 사신으로 임명하였다는 표현은 보이지 않고, 그에게 북원소경을 지키게 하였다[以大阿飡吳起守之]고만 기술되어 있다. 반면,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8 신문왕 5년 3월 기록에서는 ‘西原小京을 설치하고, 아찬 元泰를 사신으로 삼았다.’라고 전하고 있어 앞선 예들과 대조를 이룬다.
그렇다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吳起와 春賦, 眞珠를 각기 북원소경, 국원소경, 북소경의 사신에 임명하였다고 전하지 않고, 그들로 하여금 각 소경을 지키게 하였다고 전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가 궁금하다. 신라가 처음으로 지증왕 15년(514)에 현재 경북 의성군 안계면에 해당하는 阿尸村에 小京을 설치하였다. 진흥왕 18년(557)에 國原에 小京을 설치하였다. 그다음 해 2월에 貴戚子弟와 6部의 豪民을 국원소경으로 옮겨 그곳을 채웠다. 이후 아시촌소경에 관한 기록이 전하지 않은 것으로 보건대, 국원소경을 설치하면서 아시촌소경을 폐지한 것으로 추정된다. 553년에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新州를 설치하였는데, 이러면서 國原(충북 충주시)이 한강유역과 경상도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크게 부각되었고, 이에 따라 신라는 국원지역을 새로운 전략적 거점으로 삼아 집중적으로 개발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결국 그곳을 작은 서울, 즉 소경으로 삼은 다음, 거기에 6부인을 집단적으로 이주시켜 거주하게 하는 방향으로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지방통치라는 측면에서 국원은 새로 개척한 한강유역 및 소백산맥 주변 지역을 통제, 감독하기에 적합한 조건을 지닌 곳이었다. 그리고 군사적인 측면에서 보건대, 한강유역에서 소백산맥을 넘어 신라를 침략하는 外敵을 방비하는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향후 한강유역을 발판으로 더 북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전진기지로서의 성격도 동시에 지녔다고 볼 수 있다.전덕재(2023) 국원소경이 이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春賦를 國原小京의 仕臣에 임명하였다고 명시하지 않고, 단지 춘부에게 명하여 국원소경으로 나아가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고 서술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처럼 국원소경이 군사적 전략 거점으로서의 성격을 지녔음을 통해, 仕臣이 단순히 소경민을 다스리는 정치적 역할에 그치지 않고, 전략 거점을 방어하는 군사적 역할까지도 겸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신라는 선덕여왕 8년(639) 2월에 강릉에 北小京을 설치하였다. 그런데 신라는 태종무열왕 5년(658) 3월에 北小京을 폐지하였다. 북소경이 설치된 강릉은 현재 강원특별자치도 영동 지방의 중심 도시에 해당한다. 또한 경주에서 흥해, 영덕, 울진, 삼척을 지나 比列忽로 비정되는 북한의 강원도 안변군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결국 강릉은 안변에서 흥해에 이르기까지 동해안에 위치한 여러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에 매우 적합한 장소였다고 볼 수 있다. 신라가 안변(비열홀)까지 진출한 상황에서 강릉(하슬라)은 지방통치라는 측면에서 동해안의 여러 지역을 통제, 감독할 수 있는 요지로서 중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 측면에서 동해안을 통해 남하하는 고구려와 말갈 등의 침략을 저지할 수 있는 전략적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아찬 眞珠를 북소경 사신에 임명하였다고 표현하지 않고, 그에게 명하여 북소경을 지키게 하라고 명시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는 태종무열왕 5년(658) 3월에 북소경이 말갈과 서로 맞닿아 사람들이 편치 않으므로 소경을 폐지하였다. 이처럼 고구려와 말갈 등이 강릉 근처까지 진출하게 되면서 강릉은 더 이상 동해안에 위치한 여러 지역을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거점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을 것이다. 여기다가 소경 주민들의 안전이 위협받게 되자, 실직에 위치한 정군단을 하슬라에 전진 배치하면서 동시에 소경을 폐지한 것으로 이해된다.전덕재(2023)
신문왕 5년(685)에 完山州를 설치함으로써 비로소 9州가 완비되었다. 이때 청주는 경주에서 상주를 거쳐 화령고개를 넘어 신라에서 당나라로 출발하는 관문항인 당항진에 이르는 교통의 요지로 중시되었을 뿐이며, 외적의 침략을 저지할 수 있는 군사적 전략 거점으로서의 가치는 상당히 낮았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러한 이유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는 아찬 元泰에게 西原小京에 나아가 지키도록 명하였다고 표현하지 않고, 단지 그를 仕臣으로 삼았다고만 명시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에 반하여 678년에 설치된 北原小京은 강원특별자치도 영서와 영동지역에 위치한 여러 군·현을 통제할 수 있는 要地로서 기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당나라와 말갈 등 외적의 침략을 저지할 수 있는 군사적 전략 거점으로서의 가치도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중고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오기를 北原小京의 仕臣에 임명하였다고 하지 않고, 그에게 북원소경을 지키게 하였다고 명시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측면은 말갈과 인접하여 사람들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北小京을 폐지하였다고 전하는 사실과 함께, 북원소경 설치의 배경을 考究함에 있어 매우 주목할 만한 사항이라 할 수 있다.
문무왕은 答薛仁貴書에서 671년 무렵에 당나라가 다시 고구려, 즉 당시 옛 고구려지역을 통치하던 安東都護府에 卑列城(比列忽)을 넘겨주었다고 언급하였는데, 이것은 사실 그대로 믿기 어렵다. 삼국사기 잡지 제9 직관(하) 무관 범군호 6정조에 ‘牛首停은 본래 비열홀정이었는데, 문무왕 13년(673)에 比列忽停을 革罷하고 牛首停을 두었다.’라고 전한다. 673년에 정군단의 주둔지를 비열홀에서 우수로 옮겼음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이에서 673년에 신라가 계속 비열홀지역을 차지하고 있음을 추론할 수 있다. 그러면 문무왕의 언급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일까가 문제로 제기된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사기 잡지 제4 지리2 삭주조에 ‘井泉郡은 본래 고구려 泉井郡이었는데, 문무왕 21년(681)에 취하였다.’라고 전하는 사실이 주목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문무왕 21년 정월에 沙飡 武仙이 정예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比列忽을 지켰다고 전하는데, 이때 무선이 정예 군사를 이끌고 천정군을 공격하여 차지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따른다면, 당나라가 고구려, 즉 안동도호부에 넘겨준 군·현은 比列忽州 예하의 천정군과 그의 영현(買尸達縣·夫斯達縣·東墟縣)일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전덕재(2014)
이상에서 671년에 당나라가 천정군과 그 영현들을 안동도호부에 소속시켰다가 681년에 신라가 되찾았음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사실은 681년까지 동북지역에서 여전히 긴장관계가 계속 유지되었음을 시사해주는 것이기도 한다. 실제로 671년 이후에 강원특별자치도 서북지역 및 동해안지역에서 당군과 말갈이 신라를 여러 차례 공격한 사실이 확인된다. 675년(문무왕 15) 9월에 말갈이 阿珍押縣(북한의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으로 비정되는 阿達城을 공격하였고, 또한 赤木城(북한의 강원도 세포군 현리)을 공격하였다. 676년 7월에는 당나라 군사가 道臨城(북한의 강원도 고성군 염성리)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676년 11월에 伎伐浦에서 신라 수군이 당나라 해군을 물리치면서 나당전쟁은 마무리되었다. 신라는 당군과 말갈의 침략에 대비하여 675년 9월 買肖城戰鬪에서 승리한 이후 安北河를 따라 關과 城을 설치하고, 또한 鐵關城을 쌓았다. 신라는 唐과 靺鞨이 比列忽로 진출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安北河를 따라 關과 城을 설치하고, 鐵關城을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당과 말갈의 침략에 직접 맞서면서 동시에 여러 군단을 牛首州와 河西州에 증설하여 배치하였다. 삼국사기 잡지 제9 직관(하) 무관 범군호조에 河西州에 河西停을 비롯하여 10정의 하나인 伊火兮停, 河西州誓, 萬步幢, 河西州弓尺, 河西邊 등이 배치되어 있다고 전한다. 이 가운데 이화혜정은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원주의 방위와 직접 연결하여 이해하기 곤란하다. 萬步幢은 각 주에 2개씩 배치되었다. 신문왕 5년에 9주가 완비되었으므로, 하서주에 만보당이 설치된 시기는 그 이후라고 볼 수 있다. 하서변은 牛首邊, 漢山邊과 함께 신문왕 10년(690)에 설치되었다. 활을 전문적으로 사용한 부대를 가리키는 하서주궁척은한준수(2022) 진평왕 20년(598)에 설치되었다. 나당전쟁 기간 중인 672년(문무왕 12)에 하서주에 새로 배치된 군단이 바로 河西州誓이다. 牛首州誓와 함께 河西州誓에는 著衿騎幢主와 著衿監이 배속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 하서주서는 기병으로 구성된 군단이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앞에서 나당전쟁 기간 중인 문무왕 13년(673)에 比列忽停을 혁파하고 牛首停을 설치한 사실을 언급한 바 있다. 이외에 우수주에 萬步幢, 10停 가운데 하나인 伐力川停, 牛首州誓, 牛首州罽幢, 牛首邊 등이 배치되어 있었다. 만보당은 신문왕 5년(685) 이후에, 하서주서와 함께 우수주서는 문무왕 12년에, 우수변은 신문왕 10년(690)에 설치되었다. 벌력천정의 설치시기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하게 살필 예정이다. 문무왕 12년에 설치한 牛首州罽幢은 2罽幢 가운데 하나이다. 또 다른 계당이 漢山州罽幢인데, 삼국사기 직관지에 태종무열왕 17년에 설치하였다고 전한다. 태종무열왕은 재위 8년 만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태종무열왕 17년은 오류라 할 수 있다. 아마도 태종무열왕 7년(660)의 誤記가 아닌가 여겨진다.한준수(2017) 2계당은 外罽라고도 부른다. 외계라는 표현은 왕경 내에 太宗王 원년(654)에 설치한 罽衿幢을 염두에 둔 것으로 이해된다. 계금당에는 馬兵을 통솔하는 隊大監, 弟監, 監舍知, 騎兵을 통솔하는 少監과 火尺, 著衿騎幢主와 著衿監 등이 배속되어 있었다. 군관의 대부분이 기병과 관련된 군관이므로, 계금당은 기병을 중심으로 편성된 군사조직이라고 여겨진다.한준수(2017) 우수주계당과 한산주계당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보인다.
문무왕 12년(672)에 신라는 石門戰鬪에서 唐軍에게 크게 패배하였다. 이후 신라는 당군의 南進에 대비하여 문무왕 12년 漢山州 晝長城을 쌓고, 그다음 해에 沙熱山城을 增築하였으며, 國原城·北兄山城·召文城·耳山城·首若州 走壤城·達함郡 主岑城·居㤠州 萬興寺山城, 歃良州 骨爭峴城을 쌓았다. 황해도지역에서 한강유역 방면으로 진출하는 唐軍에 대비하여 晝長城(남한산성)을, 황해도지방에서 연천과 철원 등을 거쳐 춘천 방면으로 진출하는 唐軍에 대비하여 走壤城을, 동해안 방면으로 南進하는 당군과 말갈 등의 침략에 대비하여 達咸郡(達忽郡)정구복 외(2012) 主岑城을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문무왕 13년에 비열홀정을 혁파하고 우수정을 설치한 것도 석문전투 이후 당군의 진출에 대한 대응으로 이해된다. 우수주에 문무왕 12년에 牛首州誓, 牛首州罽幢을 설치하고 하서주에 河西州誓를 새로 배치한 것도 동일한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문무왕 12년에 우수주에 설치한 군단이 더 있었다. 牛首州三千幢과 奈吐郡三千幢이 바로 그것이다. 삼국사기 잡지 제9 직관(하) 무관 범군호조에 牛首州三千幢과 奈吐郡三千幢을 新三千幢 또는 外三千(幢)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新三千幢을 外三千幢이라도 부른 것으로 보아, 본래의 三千幢은 왕경에 위치하였다고 추론할 수 있다. 三千幢은 三千幢主, 三千監, 三千卒로 구성되었다. 삼국사기 잡지 제9 직관(하) 무관 제군관조에 三千卒의 총 인원이 150명이었다고 전하지만, 그대로 신뢰하기 어렵다. 각 삼천당마다 步兵 150명의 삼천졸을 배치하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한다. 신삼천당도 역시 삼천당주-삼천감-삼천졸로 구성되었고, 여기에 삼천졸 150명이 배속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천당은 후에 10정 예하의 군단으로 배치되었는데, 각 정에는 삼천당주 6인이 배속되어 있었다. 신삼천당에 삼천당주가 몇 명이 배속되었는가에 관하여 알려주는 자료는 전하지 않는다. 10정의 사례를 참고하건대, 신삼천당에도 복수의 삼천당주가 존재한 것으로 추정된다.한준수(2015) 나토군은 현재 충북 제천시에 해당한다. 문무왕 12년에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에 해당하는 우수주 및 홍천과 횡성, 원주를 연결하는 죽령로에 위치한 제천에 奈吐郡三천幢을 설치한 이유 역시 석문전투 패배 이후 당군의 남진에 대응한 군사적 조치의 하나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무왕 16년(676)에 신라는 오늘날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영월읍에 奈生郡三千幢을 하나 더 설치하였다. 676년 7월에 당나라 군사가 道臨城(북한의 강원도 고성군 염성리)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671년에 당나라가 泉井郡과 그 예하 領縣들을 안동도호부에 넘겨주었고, 신라는 681년에 이곳들을 되찾은 바 있다. 이처럼 동해안 방면에서 당군의 남진 가능성이 常存하였기 때문에 문무왕 16년(676)에 강릉과 삼천 등 동해안에서 죽령로 방면으로 침략하는 당군과 말갈 등에 대비하여 영월군 영월읍에 나생군삼천당을 추가로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한준수(2015)
672년에 신라는 牛首州에 牛首州誓와 牛首州罽幢, 牛首州三千幢을 설치하고, 이어 673년 비열홀에 駐屯하던 정군단을 牛首로 移置시켰으며, 문무왕 12년과 16년에 奈吐郡三千幢과 奈生郡三千幢을 설치함에 따라 군사적인 측면에서 춘천과 제천 사이의 죽령로의 요지에 위치한 원주의 안전이 충분하게 확보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신라가 北小京이 말갈과 인접하여 사람들이 능히 편안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소경을 폐지한 사실을 고려한다면, 676년 이후 평원군, 즉 원주는 강원특별자치도의 영서와 영동지역의 여러 군·현을 통제할 수 있는 죽령로의 요지에 위치하면서도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충분히 안전이 확보된 상태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그곳에 소경을 설치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갖추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676년 나당전쟁 종결 후에도 신라와 당과의 긴장관계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기록이 주목된다.
> 辛酉에 御駕가 京師로 돌아왔다. 上(高宗)이 장차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정벌하려 하자, 侍中 張文瓘이 병으로 집에 누워 있다가 친히 수레를 타고 궐에 들어가 아뢰기를, ‘지금 吐蕃이 侵寇하여 막 병력을 징발하여 서쪽으로 보내 토벌하려는 참입니다. 신라는 비록 不順하였으나, 아직까지 변경을 침범한 적은 없습니다. 만약 또다시 동쪽으로 정벌한다면, 신은 公私 모두 그 폐해를 감당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上이 이에 정벌을 멈추었다.
儀鳳 3年은 文武王 18年(678)에 해당한다. 676年 羅唐戰爭 종결 이후, 678年에 唐 高宗이 다시 新羅를 토벌하려 하였음을 알려주는 資料이다. 이처럼 唐이 新羅를 다시 침략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군사적인 측면에서 竹嶺路의 要地에 位置한 原州의 戰略的 價値는 여전히 높았다고 볼 수 있다. 文武王 12年에 竹嶺路에 位置한 春川과 堤川 등지에 여러 軍團을 새로 配置한 정황을 통해, 新羅가 唐軍이 주로 竹嶺路를 통해 침략하려 한다고 인식하였음을 추론할 수 있다. 이처럼 678년에도 여전히 北原小京이 군사적 전략 거점으로 중시되었기 때문에, 678년에 大阿飡 吳起를 북원소경 사신으로 임명하면서 동시에 문무왕이 그에게 북원소경에 나아가 지키도록 명하였는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후자만이 반영되어 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핀 내용을 종합한다면, 신라는 새로 편입된 옛 고구려지역 및 강원특별자치도 영서와 영동지역의 여러 군과 현을 원활하게 통제하기 위한 목적과 더불어 석문전투 이후 죽령로를 통한 당군의 침략에 보다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대책의 하나로서 통일 이후 가장 먼저 678년에 원주에 북원소경을 설치한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한편 10정은 한산주에 2개, 나머지 8주에 1개씩 배치되었다. 삼국사기 잡지 제9 직관(하) 무관 범군호조에서 10정은 혹은 三千幢이라 부르기도 한다고 하였다. 10정의 군관은 기병을 담당한 隊大監-少監-火尺으로 구성되었고, 여기에 지원부대로서 삼천당 6개가 각기 배속되어 있었다. 한편 무관 범군호조에서 진평왕 13년(591)에 四千幢을 설치하였다고 전하고, 무관 제군관조에서 사천당에 著衿騎幢主 3인, 著衿監 3인이 배속되어 있다고 하였다. 삼천당과 마찬가지로 사천당 역시 왕경에 주둔한 군단으로 추정된다. 9주에 각기 10정을 배치한 것으로 보건대, 10정 역시 9주가 완비된 신문왕 5년이나 그 이후에 정비되었다고 추정된다. 신라는 이때 왕경에 주둔하였던 四千幢을 본떠 10정의 본대를 편성하였고, 삼천당을 그 예하의 지원부대로 편제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즉 신라는 왕경에 위치한 사천당과 삼천당을 모델로 하여 9주에 10정을 설치하였던 것이다.전덕재(2018) 현재 10정은 일종의 경찰과 같은 기능을 수행한 군단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末松保和(1954); 이인철(1993); 이문기(1997)
10정 가운데 한산주에 배치된 南川停은 경기도 이천시, 骨乃斤停은 경기도 여주시에 위치하였고, 牛首州에 배치된 伐力川停은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홍천읍에 위치하였다. 이 가운데 골내근정과 벌력천정은 원주 근처에 위치하였다. 앞에서 신문왕 5년이나 그 이후에 각 주에 만보당 2개씩을 배치하였고, 신문왕 10년에 우수변과 하서변을 설치하였다고 언급한 바 있다. 신문왕대에 우수주와 하서주에 몇 개의 군사조직이 추가로 배치되면서 북원소경에 대한 안전이 더욱 더 공고해지기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신문왕과 효소왕이 재위한 21년 동안 신라는 2차례만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이를 통해 두 왕대에 나당 사이에 긴장관계가 여전히 유지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681년 문무왕이 사망하자, 당 고종은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문무왕의 태자 政明을 신라왕으로 책봉하고, 父王의 관작을 그대로 승계하게 하였다. 또한 692년에 신문왕이 薨去하자, 則天武后가 사신을 신라에 보내 조문·제사하게 하고, 이어 신문왕의 태자 理洪을 신라왕으로 책봉하였다. 694년(효소왕 3) 4월 29일에 당나라 수도 장안에서 金仁問이 사망하자, 측천무후는 大醫署令 陸元景 등에게 김인문의 靈柩를 호송하게 하였다. 7세기 전반 성덕왕대에 이르러 신라와 당은 나당전쟁 이전의 관계를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나당 사이의 긴장관계가 점차 누그러지면서 북원소경의 군사적 전략 거점으로서의 성격도 점차 약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북원소경은 다른 4개의 소경과 마찬가지로 왕경이 신라 영역 동남쪽에 편재한 관계로 전국적인 통제력을 강화할 필요에서 설치한 이른바 陪都(또는 副도)로서의 성격을 분명하게 지니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배도로서의 성격을 지닌 소경에 대해서는 이미 종래에 자세하게 살핀 연구성과가 제출되었기 때문에 여기서 더 이상 그에 관하여 논급하지 않도록 하겠다.
Ⅳ. 북원소경의 치소와 범위 및 변천
신라는 경덕왕 16년(757)에 州와 郡, 縣의 명칭을 漢式으로 개정할 때에 北原小京을 北原京으로 고쳤다. 북원경의 治所에 관한 자료는 전하지 않고, 다만 삼국사기 지리지에 신문왕 5년(685)에 북원경에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1,031步였다고 전할 뿐이다. 현재 이때 쌓은 北原京城을 鴒原山城으로 비정하는 견해와74 金臺城으로 비정하는 견해,75 원주 시내에 위치한 羅城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76 등이 제기되었다. 현재까지 원주 시내를 두른 羅城을 쌓았음을 알려주는 고고학 자료는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세 번째의 견해를 긍정하기가 쉽지 않다.77 이렇다면 신문왕 5년에 축조한 북원경성의 후보로서 영원산성과 금대성밖에 남지 않는다. 조선시대 지리서에 전하는 두 성에 관한 기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북원소경의 설치와 범위 및 치소에 대한 고찰
Ⅲ-① 『세종실록』 지리지 기록에서 靈原山석성이라고 표기하였고, 나머지 기록에서는 鴒原山城 또는 鴒原城으로 표기하여 차이를 보인다. Ⅲ-①에서 영원산석성의 둘레가 646步, Ⅲ-②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에서 영원성의 둘레가 3,749尺이라 하였다. 조선시대에 $1步 = 6尺$이었으므로, 영원산석성의 둘레는 3,876尺이라 볼 수 있다. Ⅲ-①과 Ⅲ-② 기록에 전하는 둘레와 泉의 숫자가 약간 다르긴 하여도, 둘레의 길이가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원산석성은 후대의 지리서에 전하는 鴒原山城을 가리킨다고 보아도 이론이 없을 것이다. Ⅲ-②~Ⅲ-⑥에 전하는 영원산성(영원성)에 관한 기록을 보면, Ⅲ-②, ④에는 영원산성의 둘레가 3,749尺이라 전하는 반면, Ⅲ-③, ⑤, ⑥에는 둘레가 1,031步였다고 전하는 것을 살필 수 있다. 1,031步는 6,186尺에 해당하므로, 영원산성의 둘레를 둘러싸고 서로 다른 자료가 존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로서 둘레가 1,031步라고 전하는 지리서에서는 반드시 영원산성을 신라 신문왕대에 쌓았다고 언급한 반면, 둘레가 3,749척이라고 전하는 지리서에서는 이에 관한 언급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지리지에 신문왕 5년에 북원경에 성을 쌓았는데, 1,031步라고 전하는 사실이 주목된다.
『동국여지지』는 磻溪 柳馨遠이 1656년(효종 7)에 찬술한 것이다. 유형원이 영원산성을 신문왕 5년에 쌓은 북원경성이라고 인식하였고, 이에 따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하는 영원산성의 둘레에 관한 기록을 무시하고, 『삼국사기』 지리지의 기록에 의거하여 그것의 둘레를 1,031步라고 수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1770년(영조 46)에 편찬한 『동국문헌비고』의 輿地考는 申景濬이 담당하였다.78 『대동지지』는 1860년대에 金正浩가 편찬한 것이다. 신경준과 김정호는 유형원의 견해를 수용하여 『동국문헌비고』와 『대동지지』에 반영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79 반면에 1760년대 영조대에 편찬된 『여지도서』에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인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세종실록』 지리서에서 靈原山石城의 둘레가 646보(3,876척),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鴒原城의 둘레가 3,749척이라고 언급하였던바,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북원경성의 둘레가 1,031步(6,186尺)라고 전하는 것과 분명하게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측면에서 영원산성(영원성)을 북원경성과 연결시켜 이해하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적지 않다고 판단된다. 금대성에 관한 기록은 『세종실록』 지리지에 전하지 않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보인다. 금대성에 관한 나머지 지리서의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였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Ⅲ-②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에서 金臺城의 둘레가 6,060尺이라고 언급하였고, 다른 지리서에서도 이를 그대로 전재하였다. 6,060尺은 1,010步에 해당한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전하는 북원경성의 둘레와 거의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른다면, 신문왕 5년에 쌓은 북원경성은 현재 금대성(해미산성)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한다. 2022년 6월에 강원고고문화연구원에서 해미산성(금대성)의 남서쪽 雉城을 시굴조사하여 통일신라시대에서 산성을 쌓는 일반적인 방식, 즉 대형의 지대석+치석한 할석으로 정층쌓기·들여쌓기로 외벽을 축조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은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80 그러나 이와 같은 해미산성(금대성)의 축조 방식과 더불어 1998년에 해미산성(금대성)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할 때, 통일신라시대의 기와가 다수 수습되었음을 고려하건대, 금대성을 신문왕 5년에 쌓은 북원경성과 연결시켜 이해하여도 이론이 없지 않을까 한다.81
금대성(해미산성)은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반곡관설동 산60-1번지 일원에 위치하고 있다. 산성은 치악산의 남쪽으로 뻗어 내린 지맥의 하나인 곰바위봉(629m) 정상부 일대와 남쪽·서쪽 줄기 능선을 에워싸며 축조되었다. 해미산성의 서벽에서 원주시의 중심지를 조망할 수 있고, 남벽에서는 원주와 제천, 단양을 연결하는 교통로를 한눈에 살필 수 있다. 이 교통로는 신라시대에 춘천과 원주, 제천, 단양, 죽령을 연결하는 죽령로에 해당한다. 금대성의 남쪽에 위치한 원주시 신림면에서 동쪽으로 주천면을 거쳐 동해안을 연결할 수 있고, 서남쪽으로 제천시 백운면을 거쳐 충주와 연결할 수 있다. 따라서 금대성은 춘천과 죽령 방면뿐만 아니라 동해안과 충주 방면에서 원주로 향하는 외적에 대비할 수 있는 關防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신라 정부는 금대성의 이와 같은 지정학적·군사적 가치 때문에 북원소경을 설치하고 여기에 북원경성을 쌓은 것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문제는 금대성, 즉 北原京城이 북원경의 治所로서 기능하였는가, 아니면 背後城으로서 기능하였는가의 여부에 관해서이다. 이는 북원소경의 치소가 어디인가 하는 문제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이와 관련하여 남원소경의 사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9 전라도 남원도호부 고적조에 ‘井田遺基가 있는데, 당나라 劉仁軌가 刺史兼都督으로 邑內에 井田法을 써서 9개 구역으로 구획하였으며, 지금도 그 터가 남아 있다.’라고 전한다.82 정전유기를 유인궤와 연결하여 이해하기 어렵고, 대체로 통일신라시대에 남원소경의 시가지를 도시계획에 의거하여 정비한 것과 연관시켜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83 실제로 蛟龍山城을 배후로 한 蔘川과 丑川 사이의 평지, 즉 현재 남원 시가지의 중심부를 형성하고 있는 향교동·동충동·도통동·옥정동·죽항동·쌍교동·하정동·금동·천거동 일대에 도로와 溝渠로 구획된 정연한 格子形 토지구획과 남원읍성의 형적이 남아있다고 한다.84 남원시의 중심부를 도시계획에 의거하여 정비하였다는 것은 통일신라시대 남원소경의 중심지, 즉 치소가 남원 시내에 위치하였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한편 삼국시대에 沙伐州의 중심지는 병풍산성이 있는 사벌면 일대였다가 신문왕 7년(687) 이후 사벌주의 治所를 현재의 상주 시내로 옮겼고, 이때 시가지를 도시계획에 의거하여 정비하였다고 이해한 견해가 제기되어 주목된다.86 남원소경의 치소가 남원 중심부의 평지였고, 통일 이후에 사벌주의 치소 역시 상주 시내의 평지로 옮겼음을 염두에 둔다면, 북원소경의 치소 역시 산성이 아니라 원주 시내 중심부의 평지였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한다. 현재 원주시 학성동유적에서 통일신라의 건물지와 경작유구가 발견되었다. 또한 행구동유적에서 통일신라시대의 건물지가 조사되었다. 이외에 반곡동고분에서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전반으로 편년되는 토기가 다수 발견되었다.87 원주시 원일로에 소재한 강원도 감영지로부터 학성동유적은 1.2km, 행구동유적은 2km, 반곡동고분은 약 5km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와 같은 고고학 자료를 참조하건대, 남원소경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북원소경의 치소, 즉 중심지는 원주천을 끼고 있는 강원도 감영지를 중심으로 하는 원주 시내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판단된다.88 다만 통일신라시대에 북원소경의 치소를 도시계획에 의거하여 정비하였음을 알려주는 고고학적인 증거를 찾을 수 없는데, 서원소경과 중원소경을 6부로 구획하였고,89 서원소경과 남원소경의 시가지를 도시계획에 의거하여 정비하였음을 고려한다면, 왕경 6부인들이 이주하여 거주하였을 가능성이 높은 북원소경의 경우도 그 영역을 6부로 구획하고, 중심지를 도시계획에 의거하여 정비하였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향후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이때 북원경성은 평지에 治所를 둔 北原京을 保衛하는 背後城의 성격을 지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의 [표 2]
표 2 조선시대 지리서에 전하는 원주목의 사방 경계
| 地理書 | 東 | 東南 | 西 | 西南 | 南 | 北 |
|---|---|---|---|---|---|---|
| 『세종실록』 지리지 | 平昌 84里 | 驪興 64里 | 忠州 30里 | 橫城 24里 | ||
| 『신증동국여지승람』 | 平昌 112里 堤川 52里 | 砥平 74里 | 驪州 63里 | 忠州 43里 | 橫城 30里 | |
| 『동국여지지』 | 平昌 112里 堤川 52里 | 砥平 74里 | 驪州 63里 | 忠州 43里 | 橫城 30里 | |
| 『여지도서』 | 平昌 125里 | 寧越 120里 堤川 50里 | 砥平 70里 驪州 70里 | 忠州 55里 | 橫城 30里 |
『동국여지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하는 원주목의 사방 경계는 원주에서 京都와의 거리에 관한 기록만이 약간 차이가 날 뿐이고,90 나머지는 완전히 일치한다. 유형원이 『동국여지지』를 찬술하면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대체로 轉載한 것으로 이해된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북쪽 橫城縣 경계와의 거리가 24里라고 언급한 반면, 나머지 지리서에는 모두 30里로서 동일하게 전한다. 반면에 동쪽 평창군, 남쪽 忠州牧과의 거리는 후대로 갈수록 점점 거리가 벌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외에 동남쪽의 堤川縣, 서쪽의 砥平縣, 驪州牧과의 거리는 조선 전기와 후기에 커다란 차이를 보이지 않았음을 살필 수 있다. 이상의 검토에 따른다면, 조선 전기에서 후기로 가면서 원주목의 관할 범위가 약간 확장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원주목의 관할 범위의 확대와 관련하여 1530년(중종 26)에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6 강원도 원주목조에 酒泉縣이 屬縣으로 전하지만, 1656년(효종 7)에 유형원이 편찬한 동국여지지 권7 강원도 원주목조에는 酒泉廢縣으로 전한다는 사실이91 유의된다. 아마도 주천현을 폐지하고 그것을 원주목에 合倂시킴과 동시에 원주목의 관할 범위를 약간 확대한 것이 아닌가 한다.92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고증은 추후의 과제로 남겨두고자 한다.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에 따르면, 조선 전기에 원주목은 동쪽으로 평창군, 동남쪽으로 충청도 제천현, 서쪽으로 경기도 지평현, 서남쪽으로 여주목, 남쪽으로 충주목, 북쪽으로 횡성현과 경계하였다고 정리할 수 있다. 물론 조선 중기에 주천현이 원주목에 합병되었으므로, 조선 전기에 동남쪽으로 주천현과 경계하였다고 볼 수 있음은 물론이다. 세종실록 지리지 충청도 충주목조에서 북쪽으로 원주에 이르기까지 40里라고 언급한 반면,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4 충청도 충주목조에서 북쪽으로 강원도 원주 경계까지 58里라 하였다. 그런데 세종실록 지리지 강원도 원주목조에서 남쪽으로 충주까지 30里,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6 강원도 원주목조에서 남쪽으로 충주까지 43里라고 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원주 중심부에서 충주 중심부까지의 거리는 70里가 되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른다면, 그것은 101里가 된다. 세종대와 중종대의 충주목과 원주목의 치소는 변동이 없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모순되는 내용이 전하는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에 전하는 원주목의 사방 경계에 관한 기록을 서로 비교하여 세종대보다 중종대에 원주목의 관할 범위가 확장되었다고 단정하기는 곤란하다고 하겠다. 이러한 측면에서 주천현을 제외한 조선 후기 원주목의 관할 범위와 조선 전기의 그것은 크게 차이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판단된다.
여지도서 에 원주목 관할의 面에 관한 기록이 전하는데, 邑內, 本部面, 沙斤寺面, 水周面, 左邊面, 右邊面, 富論面, 康川面, 池內面, 沙堤面, 旀乃面, 所草面, 好梅谷面, 古毛谷面, 正之安面, 地向谷面, 破面, 板梯面, 楮田洞面, 今勿山面, 加里破面 등이 바로 그것이다. 建陽 元年(1896) 8월 4일에 공포된 勅令 第36號 제5조에 의거하여 전국 23部를 폐지하고 13道로 개편됨에 따라 강원도가 부활되었다. 이때 원주군 외 3개군(평창, 영월, 정선)은 강원도로 편입되었으며, 원주군은 339군 가운데 4등급의 군으로 편제되었다. 1899년(광무 3)에 편찬된 『原州邑誌』 坊里條에 21개면이 소개되어 있는데, 『여지도서』에 소개된 것과 동일하다.93 이에 따르면, 1896년 원주군 소속의 면도 마찬가지였다고 볼 수 있다. 이후 1906년 9월 24일에 左邊面과 右邊面, 水周面이 寧越郡, 古毛谷面이 橫城郡, 康川面과 池內面이 京畿道 驪州郡에 편입되면서 원주군의 영역 범위가 축소되었다.94 21개면 가운데 좌변면과 우변면(현재 영월군 주천면), 수주면(현재 영월군 무릉도원면)은 본래 주천현에 속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조선 전기 원주목 관할 범위에서 제외하여야 한다. 반면에 본래 원주군 고모곡면이었던 현재의 횡성군 서원면, 본래 원주군 강천면이었던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본래 원주군 지내면이었던 여주시 북내면 금당천 동쪽 9개 里는 조선 전기와 후기에 원주목의 관할 범위에 속하였다. 따라서 조선 전기 원주목의 관할 범위는 오늘날 원주시 전체와 횡성군 서원면, 여주시 강천면 및 북내면의 일부를 망라하였다고 정리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原州에 寧越郡·堤州·平昌縣·丹山縣·永春縣·酒泉縣·黃驪縣이 소속되어 있었다. 고려시대에 원주 근처에 堤州와 平昌縣, 酒泉縣, 黃驪縣이 위치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원주의 북쪽에 春州의 屬縣 橫川縣, 서쪽에 廣州의 屬縣 砥平縣이 위치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한편 『삼국사기』 잡지 제4 지리2에서 북원소경 동쪽에 白烏縣(평창군 평창읍)과 酒泉縣(영월군 주천면), 서쪽에 砥平縣(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黃驍縣(경기도 여주시), 남쪽에 中原小京과 奈隄郡(충북 제천시), 북쪽에 潢川縣(강원도 횡성군 횡성읍)이 위치하고 있었음을 살필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북원소경 및 고려시대의 원주 근처에 위치한 여러 군·현을 감안하건대, 통일신라시대에 북원소경의 관할 범위 역시 조선 전기의 그것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고 추정하여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이에 따른다면, 통일신라시대 북원소경의 범위는 오늘날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일원과 횡성군 서원면,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및 북내면의 일부를 망라하였다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경문왕 10년(870)에 작성한 寶林寺北塔誌에 ‘西原部小尹 奈末金遂宗 聞奏 奉勅’이란 글귀가 보인다. 여기서 西原部는 西原府를 가리킨다고 보인다. 이를 통해 870년 이전에 西原小京을 西原府로 개칭하였음을 인지할 수 있다. 한편 鳳林寺眞鏡大師塔碑에서 ‘知金海府進禮城諸軍事明義將軍金仁光’, 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에서 ‘至金海府 蘇公忠子知府 及弟律熙領軍’이란 표현을 발견할 수 있다. 蘇忠子가 金海府의 知府가 된 시기는 효공왕 10년(907) 전후로 추정된다.95 그런데 소충자는 김인광보다 늦게 金官高城을 취하여 城主將軍이 된 자이기 때문에,96 그 이전에 김인광이 등장하였다고 볼 수 있다.95 아마도 진성여왕대 말기나 효공왕대 초기로 추정된다. 여하튼 위의 금석문을 통하여 신라 말기에 金官京을 金海府로 개편하였음을 살필 수 있다.
939년(태조 22)에 건립된 菩提寺大鏡大師塔碑에 仲源府, 944년(혜종 1)에 새긴 淨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 陰記 및 965년(광종 1)에 세운 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碑에 中原府란 표현이 보인다. 고려 초기에 中原府(仲原府)는 忠州의 별칭으로 사용되었다. 아마도 고려 건국 이전에 중원경을 중원부로 바꾸어 불렀기 때문에 고려 초기에 중원부를 忠州의 별칭으로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고려사』 지리지에 태조 23년에 南原小京을 고쳐 南原府로 삼았다고 전한다.97 여기서 남원소경은 南原京의 잘못이다. 아무튼 이 기록에 따른다면, 고려 태조 23년(940)에 南原京을 南原府로 개칭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을 사실 그대로 수긍하기 어렵다. 『고려사』 지리지에 태조 23년에 金海小京을 金海府로 개칭하였다고 전한다.98 여기서 金海小京은 金海京의 잘못임은 물론이다. 그런데 앞에서 신라 말기에 이미 金海京을 金海府로 바꾸어 불렀음을 살핀 바 있다. 김해부의 사례를 감안하건대, 남원경을 남원부로 개칭한 것은 고려 건국 이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99 동일한 맥락에서 신라 말기에 북원경을 북원부로 개칭하였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한다. 서원부의 사례를 참조하건대, 9세기 후반 경문왕대에 漢化政策을 추진하면서 당나라의 留守府制를 채용하여 小京을 府로 개편하였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한다. 府制의 실시 배경과 그 의의 및 영향에 대해서는 이미 전에 자세하게 살핀 연구성과가 제기되었기 때문에100 여기서 신라 하대 소경의 변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급하지 않을 것이다.101
『고려사』 지리지에 ‘原州는 본래 高句麗의 平原郡으로, 新羅 文武王 때 北原小京을 두었다. 太祖 23년(940)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顯宗 9년(1018)에 知州事가 되었다.’라고 전한다.102) 이 기록에 따른다면, 태조 23년(940)에 北原府를 原州로 개칭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태조 23년(940) 7월에 건립된 興法寺眞空大師塔碑에서 ‘高麗國原州’라는 표현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944년(혜종 1)에 새긴 淨土寺法鏡大師慈燈塔碑 陰記에 ‘元州 仁人員外’가 보이는데, 여기서 원주는 원주를 가리킨다고 짐작된다. 또한 944년(혜종 1) 6월에 건립된 寧越興寧寺澄曉大師塔碑의 陰記에 王侃大奈麻가 原州 출신이라 전한다. 이와 같은 금석문 기록들을 참고하건대, 태조 23년(940)에 원주란 지명을 사용한 것은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고려사 에는 태조 23년 이전에 원주란 명칭을 사용하였음을 알려주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Ⅳ-① 태조 11년(928) 8월 原州 山澗寺의 鐵佛이 3일간 땀을 흘렸다( 고려사 권54 지8 오행2 金).
Ⅳ-② 太祖는 사람을 보내 같이 힘써 싸워서 재앙과 변란을 평정하자고 타일렀다. 李悤言은 書信을 받고 매우 기뻐 아들 李永을 보내 군대를 이끌고 태조를 따라 정벌하게 하였다. 이영은 당시 18세였는데, 태조가 大匡 思道貴의 딸을 아내로 맞게 하였다. 이총언을 本邑將軍에 임명하였고, 이웃 邑의 丁戶 229호를 더 하사하였다. 또 忠州·原州·廣州·竹州·堤州 창고의 곡식 2,200石과 소금 1,785石을 주었다( 고려사 권92 열전5 王順式 附李悤言).
이총언은 태조 21년(938)에 사망하였고, 그가 태조에게 歸附한 것은 925년(태조 8) 무렵으로 이해되고 있다.103) 따라서 위의 기록들은 태조 23년 이전에 原州라는 지명을 사용하였음을 시사해주는 자료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고려사 五行志와 列傳을 찬술하면서 본래 北原이라 전하는 것을 고려시대의 지명인 原州로 改書하였을 가능성도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위의 두 기록을 태조 23년 이전에 원주라는 지명을 사용하였음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 자료로 보기 어렵다. 그러나 고려사 지리지에는 태조 23년에 지명을 개정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그 이전 시기에 이미 개정된 지명을 사용한 사례도 확인되고 있기 때문에 고려사 지리지의 기록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고, 따라서 태조 23년 이전에도 原州라는 지명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고 보인다. 북원경은 梁길의 起義地였으며, 궁예가 北原賊을 기반으로 후고구려를 세웠. 그가 王座에 있던 시기에 西原府를 淸州로 바꾸었듯,104) 北原府를 原州로 개칭하였을 것이라고 상정해볼 수 있고, 앞에서 살핀 Ⅳ-①·② 기록은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들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상에서 살핀 바에 따르면, 신라는 신문왕 5년(685)에 平原郡을 北原小京으로 改稱하고, 경덕왕 16년(757)에 北原小京을 北原京으로, 9세기 후반 경문왕대에 北原京을 北原府로, 궁예 집권 시에 北原府를 原州로 개칭하였고, 고려시대에 이를 그대로 사용하였다고 정리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원주에 寧越郡·堤州·平昌縣·丹山縣·永春縣·酒泉縣·黃驪縣을 소속시켰고, 성종 14년(995)에 原州와 忠州·淸州·剛州·歡州 등을 묶어 中原道를 설치하였다. 고려시대 원주의 변천에 대해서는 추후에 자세하게 살필 예정이다.
Ⅴ. 맺음말
이상 본문에서 삼국시대 원주지역의 동향, 북원소경의 설치와 그 배경, 치소와 범위, 변천 등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본문에서 살핀 내용을 요약 정리하여 맺음말에 대신하고자 한다. 3세기 중반에 강원특별자치도 영서지역에 領西濊가 거주하였다. 당시 원주시를 비롯한 영서지역은 낙랑군이 지배, 통제하였다. 3세기 중·후반 古爾王代에 오늘날 춘천시와 원주시를 비롯한 강원특별자치도 영서지역이 백제의 영향권 아래 편입되었고,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반 사이에 신라가 죽령을 넘어 영서지역에 진출하여 백제와 충돌하였다. 4세기 후반 近肖古王代에 백제는 북한강 상류의 화천까지 진출하였고, 남한강 수로를 통해 원주까지 진출하였다. 백제가 원주까지 진출하였다는 사실은 원주시 부론면의 남한강유역에 위치한 법천리유적에서 백제 양식의 고분 및 백제에서 법천리지역의 지배세력에게 사여한 靑銅鐎斗 및 羊形靑磁 등이 발견된 사실을 통해서 증명할 수 있다.
고구려 廣開土王은 396년에 백제를 공격하여 58城 700村을 빼앗았다. 58성 가운데 牟婁城, 古牟婁城이 있는데, 여기서 ‘牟婁’는 ‘牟盧’ 또는 ‘牟羅’와 함께 넓은 들이나 벌에 위치한 취락 또는 읍락을 뜻하는 것이다. 이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 글자가 伐, 火, 夫里, 平(또는 坪) 등이다. 충주고구려비에서 古牟婁城守事가 충주에 나아갔음을 살필 수 있다. 이를 통해 고모루성이 충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에 위치하였음을 추론할 수 있다. 충주에서 멀지 않은 지역에 위치하면서도 ‘牟婁’와 같은 의미를 지닌 ‘平’이란 글자가 들어간 지명으로 平原郡이 주목된다. 본래 백제에서 원주지역을 牟婁城이라 불렀다가, 후에 다른 곳을 牟婁城이라고 부르면서 원주지역을 古牟婁城이라 불렀다고 보인다. 고구려는 396년에 백제로부터 고모루성을 빼앗은 다음, 5세기에 거기에 守事라는 지방관을 파견하여 영서지역을 지배, 통제하는 전략 거점으로 삼았고, 후에 고모루성을 한자식 지명인 平原城으로 개칭한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는 551년에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상류의 10군을 차지하였는데, 10군에 춘천시와 더불어 원주시도 포함되었다. 신라는 平原城을 行政城으로 편제하고, 그곳을 郡治로 삼아 주변의 몇 개의 행정촌·성을 묶어 平原郡을 설치하였다.
신라는 678년(문무왕 18)에 平原郡에 小京을 설치하고, 원주가 충주의 북쪽에 위치하고 中原小京 및 平原郡이란 지명 등을 두루 고려하여 北原小京이라 명명하였다. 671년에 당나라는 泉井郡과 그 영현들을 安東都護府에 넘겨주었고, 신라는 681년에 그곳을 되찾았다. 또한 당나라와 말갈이 676년 7월까지 강원특별자치도 서북지역과 동해안지역을 침략하였다. 이에 신라는 동해안지역에서 당나라와 말갈의 침략에 대비하여 安北河를 따라 關과 城을 설치하고, 鐵關城을 쌓았다. 그리고 672년에 기병부대인 河西州誓를 두었다.
한편 672년에 신라는 당군에게 석문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전국 곳곳에 성을 쌓고, 우수주에 여러 군사조직을 추가로 배치하여 당군의 南進에 대비하였다. 672년에 기병부대가 주축을 이룬 牛首州誓와 牛首州罽幢을 牛首州에 배치하고, 673년에 停軍團을 比列忽에서 牛首로 移置시켰다. 또한 672년에 우수주에 牛首州삼천당을, 죽령로에 위치한 奈吐郡(충북 제천시)에 奈吐郡三千幢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동해안 방면에서 원주 방면으로 침략하는 외적에 대비하여 676년에 奈生郡에 奈生郡三千幢을 추가로 설치하였다. 우수주삼천당 등을 新三千幢이라 부른다. 이처럼 672년 석문전투 패배 이후 우수주와 나토군, 나생군 등에 여러 개의 군단을 추가로 배치하면서 군사적인 측면에서 평원군의 안전이 충분히 확보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678년에도 당나라에서 신라를 다시 침략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681년까지 동해안지역에서 당과의 긴장관계가 계속 유지되었기 때문에 군사적인 측면에서 죽령로의 요지에 위치한 원주의 전략적 가치는 상당히 높았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신라는 새로 편입된 옛 고구려지역 및 강원특별자치도 영서와 영동지역의 여러 군·현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목적과 더불어 石門戰鬪 이후 죽령로를 통한 당군의 침략에 보다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대책의 하나로 678년에 평원군에 북원소경을 설치하였다고 정리할 수 있다.
685년 9州 완비 후에 우수주와 하서주에 萬步幢을 2개씩 설치하고, 10정의 하나로서 경기도 여주시에 骨乃斤停 및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홍천읍에 伐力川停을 배치하였다. 이러면서 북원소경의 안전이 더욱 더 공고해지기에 이르렀다. 이와 더불어 이 무렵부터 당나라와의 긴장관계도 점차 누그러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북원소경은 나머지 4소경과 마찬가지로 왕경이 신라 영역 동남쪽에 편재한 관계로 전국적인 통제력을 강화할 필요에서 설치한 이른바 陪都로서의 성격을 분명하게 지니게 되었다.
통일신라시기에 북원소경의 치소는 원주시 원화로에 소재한 강원도 감영지 주변의 원주시내였고, 신문왕 5년(685)에 背後城으로 오늘날 金臺城(海美山城)으로 비정되는 北原京城을 축조하였다. 북원경의 관할 범위는 조선 전기 原州牧의 그것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고 추정되며, 그 범위는 대략 오늘날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일원과 횡성군 서원면,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및 북내면의 일부를 망라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신라는 9세기 후반 경문왕대에 당나라 留守府制를 수용하여 小京을 府로 개편하였고, 이때 북원소경 역시 北原府로 개칭한 것으로 보인다. 弓裔가 후고구려를 건국한 이후 梁吉과 그가 起義한 北原을 原州로 개칭하였으며, 고려에서도 이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표 1 광개토왕릉비에 전하는 58성15
| 1 | 寧八城 | 2 | 臼模盧城 | 3 | 各模盧城 | 4 | 幹氐利城 |
| 5 | □□城 | 6 | 閣彌城 | 7 | 牟盧城 | 8 | 彌沙城 |
| 9 | □舍蔦城 | 10 | 阿旦城 | 11 | 古利城 | 12 | □利城 |
| 13 | 雜珍城 | 14 | 奧利城 | 15 | 句牟城 | 16 | 古模耶羅城 |
| 17 | 頁□□ | 18 | □□城 | 19 | □而耶羅城 | 20 | 瑑城 |
| 21 | 於利城 | 22 | □□城 | 23 | 豆奴城 | 24 | 沸□□ |
| 25 | 利城 | 26 | 彌鄒城 | 27 | 也利城 | 28 | 太山韓城 |
| 29 | 掃加城 | 30 | 敦拔城 | 31 | □□□城 | 32 | 婁賣城 |
| 33 | 散나城 | 34 | 那旦城 | 35 | 細城 | 36 | 牟婁城 |
| 37 | 于婁城 | 38 | 蘇灰城 | 39 | 燕婁城 | 40 | 析支利城 |
| 41 | 巖門□城 | 42 | 林城 | 43 | □□□ | 44 | □□□ |
| 45 | □利城 | 46 | 就鄒城 | 47 | □拔城 | 48 | 古牟婁城 |
| 49 | 閏奴城 | 50 | 貫奴城 | 51 | 彡穰城 | 52 | 曾□城 |
| 53 | □□盧城 | 54 | 仇天城 | 55 | □□ | 56 | □□ |
| 57 | 58 |
표 1 북원소경의 설치와 범위 및 치소에 대한 고찰
| 번호 | 出典 | 名稱 | 記錄 |
|---|---|---|---|
| Ⅲ ① | 『세종실록』 지리지 江原道 原州牧 | 靈原山石城 | 在州東三十里 <周回六百四十六步 有二泉 四時不渴 又有倉九間> |
| Ⅲ ②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6 江原道 原州牧 古적 | 鴒原城 | 在雉嶽山남脊 石築 周三千七百四十九尺 內有一井五泉 今廢 ○ 三國史 弓裔投北原賊梁吉 吉委之以事 使東略地. 於是 出宿雉嶽山石南寺 行襲酒泉柰城鬱烏御珍等縣 皆降之. 諺傳此城梁吉所據 後元冲甲據此 破丹兵. |
| 金臺城 | 在州東三十里 雉嶽山腰 石築 周六千六十尺 內有三井 今廢. 州人松弼據此城叛 降州爲一新. | ||
| Ⅲ ③ | 『동국여지지』 권7 江原道 原州牧 古蹟 | 鴒原城 | 在雉嶽山南脊 石築 周一千三十一步 內有一井五泉. 新羅神文王時 起築 中廢 今復修築. ○ 三國史 弓裔投北原賊梁吉 吉委之以事 使東略地. 於是出宿雉嶽山石남寺 行襲酒泉柰城鬱烏御珍等縣 皆降之. 諺傳此城梁吉所據 後元冲甲據此 破丹兵. |
| 金臺城 | 在州東三十里 雉嶽山腰 石築 周六千六十尺 內有三井 今廢. 州人松弼據此城叛 降州爲一新. | ||
| Ⅲ ④ | 『여지도서』 江原道 原州牧 古跡 | 鴒原山城 | 在雉嶽山南麓 石築 周三千七百四十九尺 內有一井五泉 今廢. ○ 三國史 弓裔投北原賊梁吉 吉委之以사 使東略酒泉奈城鬱烏御珍等四縣 皆降之. 後元沖甲據此城 破丹兵有功. 宣廟壬辰 原州牧使金悌甲與驪州牧使元豪 爲倭奴所敗衄. |
| 金臺山城 | 在官門東三十里 雉嶽山腰 石築 周六千六十尺 內有三井 今廢. 州人松弼據此城叛 降州爲一新縣. | ||
| Ⅲ ⑤ | 『동국문헌비고』 권16 輿地考 11 關防1 城郭上 江原道 | 鴒原山城 | 原州 鴒原山城 在雉嶽山南麓 石築 <周一千三十一步 今廢> 內有井一泉五. 新羅神文王時始築. 三국史 北原賊梁吉使弓裔東略地 弓裔出宿雉嶽山石南寺 行襲酒泉奈城鬱烏御珍等縣 皆降之. 世傳 此城爲梁吉所據. 高麗時元冲甲據此 破丹兵. 本朝 宣祖 壬辰 原州牧使金悌甲·驪州牧使元豪 於此爲倭寇所敗衂. |
| 金臺山城 | 在雉嶽山腰 石築 <周六千六十尺 今廢> 內有井三. 州人松弼嘗據此城叛. | ||
| Ⅲ ⑥ | 『대동지지』 권15 江原道 原州 城池 | 鴒原山城 | 在雉嶽山之南. 新羅神文王築 高麗改築 本朝改築. 周一千三十一步 井泉六 四面皆峻險. |
| 金臺城 | 東三十리 雉嶽之腰 周六千六十尺 井三. 高麗高宗四十六年 州人松弼據此城叛 降州爲一新縣. 新羅聖德王二十年 徵何瑟羅丁부二천 築北原京城.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