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말여초 西原京의 변화와 지방사회의 동향
Changes in Seowongyeong and Trends in Local Society during the Late Silla and Early Goryeo Periods
1 충북대학교
1 Chungbuk National University
DOI: https://doi.org/10.71244/jojm.2025.35.129
초록
본 논문은 나말여초 시기 서원경의 변화와 지방사회의 동향을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삼국 통일 전쟁 이후 청주 지역에 설치된 서원경은 신라 말에 西原府로 개편되었다. 이는 당의 留守府制를 참고한 것으로 이해된다. 소경은 본래 주에 영속되었으나, 부로 개편됨으로써 그 위상이 승격되어 주에서 독립된 행정단위가 되었으며, 그 관할 범위도 확대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개편이 이루어졌던 계기로 822년 김헌창의 난을 주목하였다. 김헌창의 난 이후 신라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은 약화되었다. 때문에 신라 중앙은 소경을 부로 개편함으로써 지방을 안정시키고, 그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울러 지방 세력과 어느 정도 타협도 해야 했을 것이며, 이러한 변화 속에서 지방세력이 자립할 수 있는 여지도 생겨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신라말 잇따른 자연재해와 국가의 지방 지배력 약화는 신라 국가의 붕괴를 초래하였고, 각 지역에서 군사조직을 갖추고 자립하는 세력이 등장하였다. 청주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제 신라의 골품제가 무의미해지면서 서원경/서원부는 신라 골품제 하의 지배층이 모여 사는 副도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고, 궁예가 청주 지역을 차지하면서 ‘靑州’로 개편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전통적인 대읍으로서의 면모는 유지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청주 지역에는 많은 土姓이 존재하였으며, 고려 초에 재지세력은 다른 지역보다 높은 官班을 지녔다. 청주의 많은 호족세력은 궁예가 청주 인호를 철원으로 사민하면서 재경세력과 재지세력으로 분리되었다. 재지세력과 재경세력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중앙에 대한 입장을 달리하고 서로 견제 · 대립하는 모습도 나타났다. 왕건은 즉위 이후 잇달아 일어났던 반란 혹은 반란 모의를 진압하고, 청주에 직접 행차함으로써 청주 지역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왕건을 지지하는 청주의 재경세력 중 청주 김씨는 정치적 지위와 왕실과의 혼인 등 중앙에서의 세력을 바탕으로 지방사회에 영향력을 미침으로써 청주 지역의 재지세력은 청주 김씨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지방사회에서 청주 김씨가 주도권을 장악하는 과정을 통해 청주 지역은 고려의 지배체제 안으로 온전히 들어가게 되었을 것이다.
Abstract
This study aims to examine the changes in Seowongyeong and the trends of local society during the late Silla and early Goryeo periods. Seowongyeong, established in the Cheongju area after the Unification War of the Three Kingdoms, was reorganized into Seowon-bu at the end of the Silla Dynasty. This is understood to have been modeled after the Liushufu system of the Tang Dynasty. While the Sogyeong was originally subordinate to the Ju (province), its status was elevated through the reorganization into a Bu, becoming an independent administrative unit and expanding its jurisdictional scope. The rebellion of Kim Heon-chang in 822 is noted as a key turning point for this reorganization. Following the rebellion, Silla's control over the provinces weakened. Consequently, the central government likely sought to stabilize the provinces and strengthen control by reorganizing the Sogyeong into a Bu. However, they also had to compromise with local powers, potentially creating room for these local forces to become more independent.
Successive natural disasters and the weakening of state control led to the collapse of the Silla state, giving rise to independent local forces with military organizations. The Cheongju area was no exception. As the Golpum (bone-rank) system lost its significance, Seowongyeong/Seowon-bu lost its meaning as a secondary capital for the ruling class. It is estimated that the area was reorganized into 'Cheongju' when Gung-ye took control. Nevertheless, it maintained its character as a traditional major town. Many local surnames existed in the Cheongju area, and in the early Goryeo period, local forces held higher official ranks than those in other regions. Many powerful local families in Cheongju were divided into capital-based and local-based forces when Gung-ye forcibly moved Cheongju households to Cheorwon. These forces exhibited different stances toward the central government and engaged in mutual checks and confrontations based on their interests. After ascending the throne, Wang Geon suppressed successive rebellions and visited Cheongju personally to secure the region. It is estimated that the Cheongju Kim clan, a capital-based force supporting Wang Geon, reorganized the local society around themselves based on their political status and royal marriages, eventually integrating Cheongju fully into the Goryeo ruling system.
Ⅰ. 머리말
나말여초 시기에 청주 지역은 중요한 지역 중 하나였다. 신라 5소경의 하나인 서원경이 설치되었던 전통적인 대읍에 해당하였으며, 많은 호족세력이 존재하여 그에 대한 기록이 풍부하게 남아 있다. 따라서 나말여초 시기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 지역에 대한 연구는 중요하다고 하겠다.
먼저 서원경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로 新羅 西原小京 硏究 가 있다.1) 「신라의 청주지역 진출」(양기석), 「신라 5소경의 설치와 서원소경」(양기석), 「신라 서원소경의 유적과 유물」(강민식), 「서원소경의 위치와 구조」(차용걸), 「신라촌락문서에 보이는 촌락의 위치와 성격」(이우태), 「후삼국 건국세력과 청주 지방세력」(신호철), 「고려 건국기 청주호족의 정치적 성격」(신호철) 등의 연구를 통해 서원소경에 대한 여러 문제가 다각도로 검토되었다. 이외에 개별 연구로 서원소경의 설치와 행정체계에 관한 연구,2) 소경성과 치소에 관한 연구,3) 서원경의 공간 범위와 촌락에 관한 연구4) 등이 이루어졌다.
한편 후삼국기에서 고려 초에 이르는 시기의 청주 지역 호족 세력에 관해서도 일찍이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5) 청주의 호족세력과 후삼국의 지배세력 간의 관계, 청주의 호족 세력 중 여러 성씨집단, 호족세력의 이족화 과정 등이 연구되었다. 이와 같은 연구를 통해 청주 지역의 호족 세력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었다. 그러나 8 · 90년대에 집중적으로 연구가 이루어지고 후속 연구가 부족한 상황이다.
또 신라와 고려 시기를 단절적으로 보면서, 지금까지의 연구에서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이르는 시기에 나타나는 서원경의 변화에 대해서 다소 소홀하게 다루어진 듯하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신라 말 지방사회의 동요와 지배체제의 붕괴 과정에서 이루어진 서원경의 개편, 그리고 후삼국기 청주로의 개편과 청주 지방세력의 동향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Ⅱ. 西原京의 변화와 지방사회
1. 西原小京의 설치
먼저 서원소경의 성립과 관련된 기사를 살펴보겠다.
A. 〔신문왕 5년(685)〕 3월에 西原小京을 설치하고 아찬 元泰를 仕臣으로 삼았다. 南原小京을 설치하고, 여러 州郡의 民戶를 옮겨 나누어 살게 하였다.
삼국 통일 전쟁이 마무리되고 난 후, 685년 3월에 신문왕은 지금의 청주 지역에 서원소경을 설치하였다. 같은 해 봄에 완산주와 菁州를 설치하여 9주를 갖추고,
B. 〔문무왕 6년(666) 겨울 12월〕 고구려에서 지위가 높은 신하인 淵淨土가 12城 763戶 3,543명을 거느리고 항복해 왔다. 연정토와 그를 따르는 관리 24명에게 옷과 일상용품, 식량, 집을 주어 王都와 州府에 안치하였다. 그중 8성이 온전하였으니 모두 사졸을 보내어 진수하게 하였다.
666년 12월에 고구려의 연정토는 12성 763호 3,543명을 거느리고 신라에 항복하였다. 신라는 연정토와 그를 따르는 관리 24명에게 각종 물품과 식량, 집을 주고 王都와 州府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州府라는 표현이 주목된다. 州府는 州治 또는 州와 府의 합칭으로 이해된다.10) 이 중 후자를 뜻할 가능성을 고려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신라에는 府라는 지방행정단위가 없었다. 신라 말에 이르러서 소경이 府로 개편되었으므로,11) 이 기사는 개편 이후에 저술된 기록을 옮긴 것으로 이해된다.
신라는 백제 유민에 대해서도 이러한 조치를 취하였을 가능성을 고려할 수 있다. 삼국 통일 전쟁 과정에서 佐平 忠常, 達率 助服과 恩率 波伽 등의 사례에서 보이듯, 신라는 백제 지배층을 받아들이면서 경위와 관직, 토지와 집 등을 주었다.
백제의 옛 영토를 차지한 이후인 673년에는 백제 유민에 대한 관등 수여 기준이 마련되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C. 백제인의 관등 문무왕 13년(673)에 백제에서 온 사람에게 왕경과 지방의 관등을 수여하였다. 그 관등의 차례는 본국(필자주: 백제)에서의 관등에 견주었다. 京官인 大奈麻는 본국의 達率이다. 奈麻는 본국의 恩率이다. 大舍는 본국의 德率이다. 舍知는 본국의 扞率이다. 幢은 본국의 奈率이다. 大烏는 본국의 將德이다. 外官인 貴干은 본국의 達率이다. 選干은 본국의 恩率이다. 上干은 본국의 德率이다. 干은 본국의 扞率이다. 一伐은 본국의 奈率이다. 一尺은 본국의 將德이다.
신라에서는 백제 유민 중 지배층에 대해서 경위와 외위를 구분하여 수여하였다. 경위를 받은 자는 왕경 6부에 편적되고, 골품을 부여받았겠으나, 외위를 받은 자는 지방의 촌주와 같은 대우를 받았을 것이다. 경위를 받은 자가 모두 왕경에 거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며, 신분이나 정치적 영향력, 세력 등에 따라 구분되어 왕경과 주·소경에 각각 안치되었을 것이다. 685년 서원소경을 설치하면서 사민되었을 여러 주군의 주민 중에도 6부에 편적되고 골품과 경위를 받았으나, 왕경에 정착할 수 없는 자들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신라는 이들을 왕경 대신 소경에 모여 살게 함으로써 신라의 지배층으로서 대우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조치는 한편으로 유민들을 근거지로부터의 분리하여 옛 백제 영토에 대한 신라의 지배를 실현하는 데 일조하였을 것이다.16) 덧붙여 서원소경에 주변 지역의 백제 유민만이 아니라 고구려 유민도 정착되었을 가능성도 고려해 볼 수 있겠다.
서원소경이 설치된 지금의 청주 지역은 동남쪽으로는 소백산맥이, 북서쪽으로는 차령산맥이 뻗어 있고, 서쪽으로는 구릉지 및 충적지가 펼쳐져 있다. 청주분지 내에서 특히 미호평야는 충북 지역의 최대 곡창지대이다. 왕건이 청주에 대해 토지가 비옥하다고 한 말은 과거부터 청주 지역이 농토가 비옥하고 생산력이 풍부하였음을 보여준다.17) 이러한 조건은 도시를 건설하기에 유리하였을 것이다.
또 서원소경은 경주를 중심으로 한 교통로 상에서 중요한 위치에 자리하였다. 5소경은 왕도 경주에서 소백산맥을 넘어 그 외곽에 위치한 州로 나아가는 관문에 위치한 것으로 파악된다.18) 서원소경은 신라의 간선도로로 추정되는 5通 중 鹽池通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었다.19) 또한 청주 지역은 금강과 미호강 수로를 이용하여 웅주 일대에서 수취한 각종 물자를 집하한 다음 화령로를 통해 왕도로 운반할 수 있는 水路와 陸路의 결절점에 해당하였다.20)
신라는 이렇듯 지리상 요충지에 해당하며 농토가 비옥하고 생산력이 풍부한 청주 지역을 소경으로 삼아 삼국 통일 전쟁으로 새롭게 신라의 지배층으로 편입된 백제 유민이나 고구려 유민을 정착시켰던 것으로 추정된다.
2. 西原府로의 개편과 지방사회의 동요
767년(경덕왕 16)에 한화정책에 따라 州郡의 명칭이 바뀌었다. 이때 서원소경은 서원경으로 개칭되었다.21) 그런데 신라 말에 이르러서 또 한 번의 개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2)
D. 西原部 小尹 奈末 金遂宗 (「長興 寶林寺 北塔誌」, 870년)
사료 D 는 「長興 寶林寺 北塔誌」에서 경문왕에게 先王인 憲安王의 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탑 조성을 건의한 김수종의 관직과 관등이 표기된 부분이다. 여기에서 그의 관직명인 ‘西原部 小尹’을 주목해 볼 수 있다. 소경의 명칭으로서 ‘西原京’이 아니라 ‘西原部’가 표기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三國史記』와 금석문 자료에서 ‘部’와 ‘府’는 혼용된 사례가 있기 때문에 이는 ‘西原府’와 동일한 것으로 이해된다.23) 또 少尹이라는 관직은 『三國史記』 직관지에 소경의 차관직인 仕大舍의 이칭으로 전한다.24) 그런데 소윤은 중국식 직명에 해당한다. 아래의 기사가 참고된다.
E-1. 京兆·河南·太原府의 牧은 각각 1인으로 종2품이고, 尹은 1인으로 종3품이며, 少尹은 2인으로 종4품하이다. (…) 尹·少尹·別駕·長史·司馬는 부와 주의 차관으로서 모든 사무를 관리하고 각 조를 통판하는 일을 관장하며, 연말에 번갈아가며 입경하여 회계와 고과를 보고한다.25) (『당육전』 권30, 三府督護州縣官吏)
E-2. 경조·하남목, 대도독, 대도호는 모두 親王이 직명만 맡고 부임하지 않으며, 두 부의 정사는 尹이 주관한다.26) (『신당서』 권49하 백관지4하)
E-1에 따르면, 唐制에서 경조부·하남부·태원부 등 留守府의 장관은 牧이었고, 少尹은 尹과 더불어 차관직에 해당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신라가 당의 제도인 유수부를 참고하여 소경을 府로 개편하였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27) 또 E-2에서는 유수부의 장관인 목이 실제로 부임하지 않고, 그 역할을 사실상 윤이 담당하였음을 전한다. 윤이 실질적인 부의 장관이었던 것이다.
F. 金陽은 태어나면서부터 영특하고 용기와 기상이 뛰어났다. 太和 2년인 興德王 3년(828)에 固城郡 太守가 되었고 얼마 있지 않아 中原 大尹에 임명되었다가 잠시 후에 武州 都督으로 옮겼다. 임지에 갈 때마다 잘 다스린다는 칭찬을 들었다.28) (『삼국사기』 권44 열전4 김양)
F 에서는 흥덕왕대에 김양이 ‘中原大尹’이라는 관직에 임명되었음이 확인된다. 대윤은 소윤에 대비되며, 소윤보다 상위의 관직이므로 부의 장관직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장흥 보림사 북탑지」보다 앞선 시기인 흥덕왕대에 이미 소경은 부로 전환되었으며, 그와 더불어 부의 장관직은 대윤, 차관직은 소윤으로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소경이 부로 전환된 시기는 언제일까. 김양이 중원대윤에 임명된 시기는 고성군 태수에 임명된 828년과 흥덕왕이 사망하는 836년 사이이다. 그런데, 822년(헌덕왕 14) 김헌창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는 武珍州 · 完山州 · 菁州 · 沙伐州 네 주의 도독과 國原京 · 西原京 · 金官京의 仕臣[國原西原金官仕臣] 및 여러 郡縣의 守令을 위협하여 자신의 아래에 예속시켰다는 사실이 전한다.29) 또 그 이듬해에 서원경에서 하늘에서 벌레가 떨어지는 이변이 발생하였다고 하므로,30) 823년까지도 소경과 그 장관의 명칭은 그대로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823년과 836년 사이 헌덕왕이나 흥덕왕대에 소경이 부로 개편되었다고 판단된다.31)
당제에서 유수부는 지방행정단위 중 가장 격이 높은 행정단위였다. 수도나 陪都가 소재한 州의 지위를 높여 부를 두었다.32) 신라의 지방행정단위 중에서는 州가 최상위 행정단위였으며, 소경은 그에 영속되었다. 신라에서 소경을 부로 개편함으로써 그 격을 높이기 위했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다음 사료가 참고가 된다.
G. 新羅國□□ 漢江府月巖山月光寺∨∨∨詔諡圓郞禪史大寶禪光靈塔碑幷書(「堤川 月光寺址 圓朗禪師塔碑」, 890년)
사료 G 는 「제천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의 제액이다.33) 여기에서 월암산 월광사가 위치한 지역을 포괄하는 상위 행정단위로 □□ 漢江府가 표기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 漢江府는 中原府의 별칭으로 추정된다.34) 보통 9~10세기에 세워진 선사 비문에서 사찰이 소재하는 지역을 표기할 때 최상위 행정단위로서 州를 표기하였다.35) 그런데 「원랑선사탑비」에서 주가 아니라 □□ 漢江府가 표기된 것은 당시 □□ 漢江府가 주에 영속되지 않은 독립된 행정단위였기 때문일 것이다.36)
또 이 기록을 통해서 중원경이 府로 개편되면서 그 관할 범위도 확대되었다고 추정된다.37) 월광사가 위치한 월암산, 즉 지금의 월악산 일대는 신라 시기에 朔州의 ‘奈吐郡 沙熱伊縣’에 속하였다.38) 그런데 890년에는 □□ 漢江府에 속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소경이 부로 개편되어 그 위상이 승격되면서 관할 범위도 확대되고, 신라의 왕도였던 경주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지방행정구역에도 변화가 나타났음을 보여준다.
신라는 왜 이 시기에 소경을 부로 개편하였던 것일까. 이러한 변화의 계기로 김헌창의 난이 주목된다.
H. 〔헌덕왕 14년(822)〕 3월에 熊川州 都督 憲昌이 아버지 周元이 왕이 되지 못한 것에 불만을 가지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나라 이름을 長安이라 하고 연호를 만들어 慶雲 원년이라 하였다. 武珍州・完山州・菁州・沙伐州 네 주의 都督과 國原京・西原京・金官京의 仕臣 및 여러 郡縣의 守令들을 위협하여 자신의 아래에 예속시켰다. 菁州 都督 向榮은 몸을 빼 推火郡으로 달아났고, 漢山州, 牛頭州, 歃良州, 浿강鎭, 北原京 등은 김헌창의 역모를 미리 알고 병사를 동원하여 스스로를 지켰다.39) (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10 헌덕왕 14년 3월)
김헌창의 난은 신라 왕경에서 벌어졌던 기존의 왕위 쟁탈전과는 성격을 달리하였다. 단순히 왕위를 찬탈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長安’이라는 국호를 내세워 신라의 지배체제를 부정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40) 김헌창은 이때 여러 주현의 지방관을 위협하여 동조를 이끌어 냈는데, 여러 주현이 반란에 동참한 것은 단지 지방관의 협조만으로 가능했던 것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菁州 도독 향영의 경우, 김헌창이 반란 참여를 요구하자 良州의 推火郡(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으로 달아났다. 반란에 반대하였던 향영이 菁州에서 도망가야만 했던 이유는 菁州 지역에 반란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중에는 지방세력도 포함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충분히 고려해 볼 수 있다.41)
반란에 참여한 지역을 살펴보면, 西原京을 비롯하여 국원경, 금관경 등 소경 지역도 포함되어 있었다. 소경에는 6부에 편적되고 골품과 경위를 지닌 주민들이 중심지에 거주하였다. 이들은 지방민과 비교하자면 특권층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이러한 소경이 반란에 참여한 사실은 주목된다. 소경 중심지의 주민은 특권층이었지만, 왕경의 지배층과는 차별 대우를 받았을 것이며, 그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김헌창의 난 이후 신라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은 약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828년 지방민 출신에 불과하였던 장보고를 軍鎭의 책임자로 임명한 것이 단적인 예이다. 鎭의 장관은 6두품 이상이어야 임명될 수 있었는데, 골품이 없었던 장보고가 군진의 책임자가 된 것은 신라 골품제의 원칙에 벗어나는 일이었다. 골품제의 원칙을 어기면서까지 지방세력인 장보고에게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김헌창의 난 이후 지배체제가 흔들리자 신라 정부는 소경을 부로 개편함으로써 그 위상을 승격시켰다. 이는 지방을 안정시키고, 그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시키고자 하는 조치일 수도 있으며, 한편으로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된 상황에서 지방세력과의 타협의 산물일 수도 있다고 추측된다. 이러한 변화는 지방세력이 자립하는 데 바탕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Ⅲ. 후삼국기 靑州로의 개편과 지방 세력의 동향
1. 지방세력의 대두와 靑州로의 개편
신라 말 잇따른 자연재해와 국가의 지방 지배력 약화는 신라 국가의 붕괴를 초래하였다. 三國史記 진성왕 3년(889)의 기사는 이러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I. 3년(889) 나라 안의 모든 州郡에서 공물과 부세를 보내지 않아, 창고가 텅텅 비어 나라 재정이 궁핍해졌다. 왕이 사신을 보내 독촉하니 곳곳에서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때 元宗과 哀奴 등이 沙伐州에 근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42 ( 삼국사기 권11 신라본기11 진성왕 3년)
886년(정강왕 원년)에 나라 서쪽에 가뭄이 들었으며,43 887년(진성왕 원년) 겨울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 이상기온이 발생하였다.44 888년(진성왕 2)에는 가뭄이 발생하였다.45 그러한 상황에서 전국적으로 조세 수취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국가 재정이 궁핍해졌다. 신라 중앙의 압박은 지방의 반란과 도적떼의 출몰을 야기하였다. 약화된 국가 통제력으로 신라 정부는 상황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였다. 국가적 혼란 속에서 궁예와 견훤과 같이 각 지역마다 군사조직을 갖춘 세력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청주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J-1. 4년(900) 겨울 10월에 國原 · 靑州 · 槐壤의 도적 우두머리 淸吉과 莘萱 등이 성을 바치고 궁예에게 투항하였다.46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12 효공왕 4년 10월)
J-2. 〔光化〕 3년 경신(900)에 또 태조에게 명령하여 廣州, 忠州, 唐城, 靑州<혹은 靑川이라고도 하였다.>, 槐壤 등을 치게 하여 그곳들을 모두 평정하였다. 공으로 태조에게 阿飡의 직위를 주었다.47 (『삼국사기』 권50 열전10 궁예)
J-3. 〔光化〕 3년(900) 경신 弓裔가 太祖에게 명하여 廣州 · 忠州 · 靑州의 3주와 唐城郡 · 槐壤郡 등의 군현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모두 평정하니 그 공으로 阿粲을 제수하였다.48 (『고려사』 권1 세가1 태조 총서)
위의 세 기사는 900년에 광주, 충주, 청주, 당성군, 괴양군 등의 군현을 궁예가 차지하였음을 보여준다. 그 중 『三國史記』 신라본기의 기사가 눈에 띈다. 여기에서는 國原 · 靑州 · 槐壤의 도적 우두머리인 淸吉과 莘萱이 자발적으로 궁예에 투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청길과 신훤은 국원 · 청주 · 괴양을 근거지로 한 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전 해인 899년에 양길은 國原 등 10여 성 또는 30여 성의 군대를 동원하여 궁예를 공격하였다가 대패하였다.49 여기에 국원이 포함되어 있었음을 고려하면, 이듬해 청길과 신훤의 투항은 양길의 패배에 따른 결과로 이해된다. 즉, 청길과 신훤이 근거지로 삼은 國原 · 靑州 · 槐壤은 양길의 세력하에 있었던 것이다.50
K. 大順 2년 신해(891)에 竹州의 도적 우두머리 箕萱에게 의탁하였다. 기훤은 업신여기고 잘난 체하며 예우하지 않았다. 善宗은 속이 답답하고 스스로 불안해져서 몰래 기훤 휘하의 元會 · 申煊 등과 결탁하여 친구가 되었다.51 (『삼국사기』 권50 열전10 궁예)
891년에 궁예는 죽주의 도적 기훤에게 의탁하였다가 그가 제대로 대우해 주지 않자, 기훤 몰래 그 휘하의 元會 · 申煊 등과 결탁하였다. 여기에서 申煊은 J-1의 莘萱과는 한자 표기가 다르나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52 891년에 신훤은 竹州, 즉 지금의 경기도 안성시 일대를 근거지로 한 기훤 휘하의 세력이었다. 이러한 신훤을 청주 출신 호족세력으로 추정하기도 한다.53 그러나 신훤이 어느 지역 출신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신훤과 청길 중 한 명은 청주를 근거지로 삼았겠으나, 특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둘 중 한 명이 900년에 청주를 근거지로 삼았다고 하더라도, 청주 출신으로서 891년 이전에 이미 청주를 근거지로 삼고서 기훤의 휘하에 들어갔던 것인지, 아니면 양길 휘하에서 여러 군현을 복속시키고 명주에서 세력을 키웠던 궁예처럼 891년 전후에 기훤의 휘하에 있으면서 주변 군현을 복속시키는 과정을 통해 청주를 근거지로 삼게 되었던 것인지 구체적인 사실을 파악하기 어렵다.54 어쨌든 궁예는 900년에 청주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으며,55 청주 지역을 기반으로 한 城主가 900년 무렵에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J-1·2·3에서 지명 표기가 주의된다. 靑州라고 하여 西原京이나 西原府로 표기되지 않은 것이다. 靑州라는 지명은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 『高麗史』 지리지에서는 고려 태조 23년(940)에 淸州로 고쳤다고 하였다.56 지리지의 기록을 따른다면, J-1·2·3에 표기된 지명은 소급되어 표기되었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료에 같이 표기된 다른 지명을 보았을 때 지명이 소급되어 사용된 것인지 의문이다. 우선 國原은 경덕왕대 개정하기 이전의 명칭인데, 『三國史記』의 822년 김헌창의 난 기사에는 국원이란 지명이 사용되었다. 『高麗史』 지리지에는 태조 23년(940)에 충주로 고친 것으로 되어 있다.57 또 槐壤郡은 경덕왕대 개정된 명칭으로, 고려 초에는 괴주로 바뀌었다.58 唐城郡의 경우, 경덕왕대 개정되기 이전 명칭으로 경덕왕대 唐恩郡으로 개정되었다가 고려 인종대 唐城郡 명칭을 회복하였다고 하나,59 858년(헌안왕 2)에 당성군으로 표기한 사례가 있다.60 신라 말에 이미 당성군이라는 지명이 다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소급되어 사용된 지명이 아니라 당시에 사용하던 지명을 표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61 그렇다면 아마도 900년에 궁예가 청주 지역을 차지하게 되면서 靑州로 개칭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903년에 궁예가 왕건을 보내 金城郡을 공략하고서 금성군을 羅州로 고쳤던 사실로 보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62 또 918년에 고려 태조는 궁예가 신라의 관직과 郡號를 고쳐 새로운 제도를 시행한 지가 오래되었지만, 백성들이 혼란스러워하여 다시 신라의 제도를 따르게 하되, 그 이름이 알기 쉬운 것은 새로운 제도를 따르게 하였다.63 청주도 궁예에 의해 개칭되어 고려로 계승된 지명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64
州로 개편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신라통일기의 州는 3중의 의미를 지녔다. 첫째, 여러 군현을 영속하는 광역의 행정구역, 둘째, 몇 개의 영현을 포괄하는 군급의 행정구역, 셋째 영현을 제외한 주치로서의 주를 뜻하였다. 태봉 · 고려에서 군이나 현을 승격하여 주로 삼았던 점에서 주의 위상이 낮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태봉이나 고려에서 설치된 주는 더이상 광역 행정구역으로서의 州는 아니었다. 신라의 골품제에 기반을 둔 지배체제가 붕괴되고 소경이 州로 개편되면서 신라 골품제하의 지배층이 모여 사는 副都로서의 의미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태봉 · 고려에 의해 설치된 州 중에서 신라 때 소경이었던 지역은 전통적인 대읍으로서의 면모를 계속 유지하였다. 이러한 측면은 뒷시기 자료이기는 하나 고려 초 재지세력의 관반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고려 초 재지세력이 지녔던 大等・干의 관반 사례를 살펴보면, 大等 계열은 原州, 淸州, 忠州, 溟州 등 신라의 9주 5소경에 해당하였던 지역에서 나타난다. 대등은 신라의 중앙 관명에서 비롯된 것으로, 특정한 관부에 소속되지 않은 채 중앙정치를 운영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귀족회의의 구성원을 파악된다.65 나말여초에 대읍에 해당하는 지역의 재지세력은 독자적인 지배조직을 꾸리면서 이러한 신라 중앙관의 명칭을 모방하여 협의체의 상층부를 구성하였던 것이다.66
또 『세종실록』 지리지에 전하는 청주목의 土姓은 청주 지역에 많은 세력이 존재하였음을 보여준다. 청주목에는 韓・李・金・郭・孫・慶・宋・高・俊・楊・東方・鄭 등 12개의 토성이 존재하였고, 주변의 없어진 촌에는 朴・韓・申・葛 등 4개의 姓이 있었다고 한다.67 이렇듯 조선 초까지 많은 성씨집단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은 고려 시기에도 청주 지역에 많은 세력이 공존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태조는 궁예가 청주가 땅이 기름지고 사람 중에 호걸이 많아 그들이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였다고 하며,68 태조도 즉위 이후에 청주인 가운데 변란을 일으키려는 자가 많아서 일찍 대비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가 있을 것이라고 여겨 청주의 동향을 예의주시하였다.69 이렇듯 청주는 여러 세력이 공존하였고,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중앙에 대한 입장을 달리하고 서로 충돌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다음 절에서 자세히 살펴보겠다.
2. 청주의 재지세력과 재경세력의 동향
궁예는 898년 송악군에 도읍하였다가 905년 7월에 다시금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다.
L. 〔天祐 원년 갑자(904)〕 가을 7월에 청주 人戶 1,000을 옮겨 철원성에 들이고, 〔철원성을〕 京으로 삼았다.70 (『삼국사기』 권50 열전10 궁예)
그 과정에서 靑州의 인호 1,000을 옮긴 사실이 주목된다. 이에 대해 일찍이 궁예의 군사적 토대로 이해한 연구가 있다.71 대체로 이후 연구는 이를 따르고 있다. 한편, 사민된 이들이 강제 사민된 집단인질로서 군인으로 복무하고 역역에 동원되었을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72 후삼국기에 강주장군 閏雄이나 매곡성주 龔直의 사례와 같이 지방 호족이 귀부하면서 아들을 인질로 보내는 경우는 있으나, 청주 1,000호를 인질로서 파악하는 것이 적절한지 의문이다. 신라에서 소경을 설치할 때 6부의 주민을 사민시켰던 사례를 참조할 수 있을 것 같다.
M-1. 15년(514) 봄 정월에 阿尸村에 小京을 설치하였다. 가을 7월에 6部와 남쪽 지방의 人戶를 옮겨 채웠다.73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지증마립간 15년)
M-2. 19년(558) 봄 2월에 貴戚子弟와 6部의 豪民을 옮겨 國原을 채웠다.74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흥왕 19년 2월)
신라에서는 514년에 아시촌에 처음 소경을 설치하였을 때, 왕경 6부와 남쪽 지역의 人戶를 사민시켰으며, 557년에 국원에 소경을 설치한 이듬해에는 귀척자제와 6부의 호민을 사민시켰다. 소경은 왕경과 같이 6부에 편적되고 골품과 경위를 지닌 지배층이 거주하는 공간이었으므로, 소경에 걸맞은 지배층과 지배층의 생활을 뒷받침할 수 있는 평민 이하를 함께 사민시켰을 것이다. 궁예가 새롭게 왕경을 건설하는 데 있어서도 비슷한 과정을 통해 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을 것이다. 집단 사민된 청주 주민은 왕경인으로서의 대우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75
한편, 궁예가 송악에서 철원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송악군을 비롯한 패서 지역의 세력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신의 독자적인 세력을 키우고자 하였으며, 이에 따라 청주 1,000호를 자신의 지지세력으로서 사민시켰다고 보는 견해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된다.76 이러한 집단사민의 결과, 청주 세력 중 재경세력이 형성될 수 있었다.
N-1. 乾化 3년(913) 계유 (…) 靑州 사람 阿志泰가 본래 아첨하고 속이기를 잘하였는데, 弓裔가 참소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 이에 같은 고을 사람인 笠全 · 辛방 · 寬舒 등을 참소하였다. 有司가 그들을 조사하였지만 몇 년이 지나도 판결하지 못하자, 태조가 바로 진위를 가려내어 아지태가 죄를 인정하니 사람들이 통쾌해 하였다.77 (『고려사』 권1 세가1 태조 총서)
N-2. 무오일에 왕이 韓粲 聰逸에게 말하기를, “궁예[前主]가 참소를 믿어 사람을 죽이기 좋아하였는데, 卿의 貫鄕인 靑州는 땅이 기름지고 사람 중에 호걸이 많아 그들이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모두 죽이고자 하였다. 이에 軍人 尹全 · 愛堅 등 80여 인을 불렀는데, 모두 죄가 없는데도 포박된 채 오는 길에 있으니 경은 빨리 가서 〔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라.”라고 하였다.78 (『고려사』 권1 세가1 태조 원년 6월)
N-1과 2는 모두 궁예 정권하에서 벌어진 일이다. N-1은 청주 출신인 아지태의 참소에 의해 같은 청주 출신으로 수도에 있었던 笠全 · 辛方 · 寬舒 등이 고초를 겪었는데 이를 왕건이 해결하였음을 보여준다. N-2에서는 궁예가 변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여 청주의 軍人 尹全과 愛堅 등 80여 인을 서울로 압송하던 중에 태조가 즉위하여 이들을 풀어준 사실을 전한다. 두 사료 모두 궁예가 재경세력이든 재지세력이든 청주 출신이 이반하는 것을 우려하였음을 보여준다. 왕건이 왕위를 찬탈하여 고려를 건국한 이후에도 청주 세력의 동향은 예의 주시되었다.
O-1. 병신일 靑州의 領軍將軍 堅金이 와서 알현하였다.79 (『고려사』 권1 세가1 태조 원년 7월)
O-2. 堅金은 靑州 사람으로, 本州 〔청주〕 의 領軍將軍이었다. 태조가 즉위하자, 청주인 가운데 변란을 일으키려는 자가 많아서 일찍 대비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청주인 能達 · 文식 · 明吉 등에게 가서 상황을 살피게 하였다. 능달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그들에게 다른 뜻이 없으니 충분히 믿으실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다만 문식 · 명길은 개인적으로 청주인 金勤謙 · 寬駿에게 말하기를, “능달이 비록 다른 뜻이 없다고 아뢰었지만 새 곡식이 익으면 변란이 있을까 염려됩니다.”라고 하였다. 견금이 副將 連翌 · 興鉉과 함께 와서 태조를 알현하자 각각 말과 비단, 베를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견금 등이 주상에게 아뢰기를, “신들은 우직한 충성을 다하기를 바라며 두 마음이 없고자 합니다. 다만 도읍에 있는 본주 사람 김근겸, 관준, 金言規 등이 저희와 마음이 같지 않습니다. 이 몇 사람을 제거한다면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태조가 말하기를, “짐의 마음이 살생을 그치는 데 있어서 죄가 있는 자도 오히려 용서해 주고자 한다. 하물며 이 몇 사람은 모두 힘을 다해 도와준 공이 있다. 한 州를 얻고자 충성스럽고 어진 이들을 죽이는 일은 짐이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견금 등이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며 물러났다. 김근겸 · 김언규 등이 이 말을 듣고 아뢰기를, “지난번에 능달이 돌아와서 다른 뜻이 없다고 말하였지만, 신들은 진실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 견금 등이 말씀드린 것을 들으니 그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을 보장할 수 없겠습니다. 그들을 억류하여 변란을 살피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조가 그 말을 따랐다. 얼마 안 있어 견금 등에게 말하기를, “지금 비록 그대의 말을 따르지 않지만, 그대의 충성을 매우 가상하게 여기노라. 어서 돌아가서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견금 등이 말하기를, “신들은 충성과 정직함을 드러내고자 문득 이로움과 해로움을 말씀드린 것이었는데 도리어 무고한 이들을 참소한 것처럼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죄로 여기지 않으시니 은혜가 이보다 클 수 없습니다. 일편단심으로 나라에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 그러나 한 주의 사람들이 사람마다 각각 가진 마음이 있어 만약 화가 시작된다면 제어하기 어려울까 염려됩니다. 官軍을 파견하여 성원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태조가 그 말을 옳게 여겨 馬軍將軍 洪儒 · 庾黔弼 등을 보내어 병사 1,500명을 이끌고 鎭州에 진을 치고서 대비하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道安郡에서 아뢰기를, “靑州가 몰래 백제와 우호를 맺고 반란을 일으키려 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조가 또 馬軍將軍 能植을 보내어 군을 거느리고 진무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반란을 일으킬 수 없었다.80 (『고려사』 권92 열전5 諸臣 왕순식 견금)
왕건은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 청주인 가운데 변란을 일으키려는 자가 많다고 우려하여 재경 청주인을 보내어 청주 지역의 동향을 살피게 하였다. 그런데, 능달과 문식 · 명길의 입장이 달랐으며, 청주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한 문식 · 명길은 같은 재경 청주인인 김근겸 · 관준 · 김언규와 연관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견금의 알현은 청주 지역의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견금은 김근겸 · 관준 · 김언규를 제거할 것을 왕건에게 요청하였다. 재경세력인 김근겸 · 관준 · 김언규와 재지세력인 견금이 대립하는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이다.
견금은 靑州領軍將軍이었다. 영군장군이라는 직명은 이 사료 외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타 호족세력과 같이 견금이 자칭한 것일 수 있으며,81 혹은 900년에 투항한 청길이나 신훤 이후에 궁예가 견금을 새롭게 청주 지역의 장군으로 임명하면서 수여한 직명일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견금은 왕건의 고려가 성립되자 고려 왕조에 대한 복속을 표시하고자 왕건을 알현한 것이고, 이에 태조는 견금과 그 일행에게 말과 비단, 베를 차등 있게 하사하여 그들의 충성을 받아들였다. 918년 7월의 시점에 견금은 청주 재지세력의 대표였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견금이 한 주의 사람마다 마음이 달라 변란이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왕건에게 관군 파견을 요청한 것으로 보아, 청주의 여러 재지세력을 완전히 통합하여 주도권을 지니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한편, 김근겸 등은 왕건을 지지하여 왕건이 궁예를 쫓아내고 고려를 세우는 데 일정한 공을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왕건의 ‘皆有宣力扶衛之功’이라는 말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김근겸은 「圓證僧統德謙墓誌銘」(1150)에 따르면 현화사 주지였던 김덕겸의 6세조로 ‘守司徒 三重大匡’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근겸은 고려 초 관계 중 1품에 해당하는 삼중대광을 지녔던 것이다. 그런데 역시 태조대 활동하며 삼한공신에 책봉된 박수경의 경우, 정종대에 官階가 2품인 大匡에 오르고, 사후에 추증되어 ‘司徒 三重大匡’에 이르렀다.82 이를 참조하면, 김근겸의 ‘守司徒 三重大匡’도 사후에 추증된 관직과 관계일 가능성이 클 것이다.83 김근겸의 경우, 최종적으로 2품이나 3품 정도의 관계를 지녔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김언규는 918년 6월에 白書省卿으로 임명되는 一吉粲 金言規와 동일 인물로 생각된다.84 白書省은 국왕에 대한 정책건의기관으로 추정되며,85 卿은 차관직에 해당한다. 김근겸 등은 재경 청주인 중 비교적 고위직에 있었던 자들이라고 하겠다.
김근겸 등 재경 청주인과 견금으로 대표되는 재지세력은 서로 이해관계를 달리했고, 그래서 상대를 견제하고 제거하기까지 하려고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고려에 대한 입장 차이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의문이다.86 어쨌든 견금은 왕건을 알현하여 복속의사를 표시하였고, 설령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더라도 결과적으로 왕건에게 회유되어 충성을 맹세하고 변란이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먼저 관군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기까지 하였다. 이것이 기만책이 아니라면, 청주에서 발생한 반란은 견금이 아니라 또 다른 세력에 의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87 따라서 김근겸 등 재경 청주인과 견금으로 대표되는 재지세력 사이의 갈등과 대립은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볼 여지가 있을 것이다.
얼마 안 있어 9월에 수도에서는 또다시 청주 출신에 의한 반란 모의가 일어났다. 청주 출신 徇軍吏 林春吉, 裴忩規, 季川 출신 康吉・阿次, 昧谷 출신 景琮이 함께 반란을 모의하고 청주로 도망치려 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사형에 처해졌다.88 또 10월에는 靑州帥 波珍粲 陳瑄이 그의 동생 宣長과 더불어 반역을 꾀하였다가 사형에 처해졌다.89 그 이전인 8월에 熊州・運州(지금의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등 10여 주현이 고려를 배반하여 백제에 귀부하는 사태가 벌어진 바 있다.90 후백제의 세력이 고려보다 우세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청주를 비롯한 인근 지역의 세력은 동요하였을 것이다. 이듬해인 918년 가을 8월까지도 청주의 지역 세력은 여전히 반란의 가능성이 있었고, 유언비어가 자주 일어나 왕건이 직접 행차하여 위무해야 했다.91
이후에는 더이상 청주 세력의 반란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청주 지역이 안정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청주 인근의 문의, 보은, 공주 일대는 후백제의 세력하에 있었고,92 청주에서도 후백제와의 전투가 두 차례 있었다. 928년 정월에 왕건이 견훤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925년 임존성 전투와 927년 9월 공산 전투 사이에 청주에서의 전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93 또 928년 7월에는 왕건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삼년성을 공격했지만, 실패하고 청주로 후퇴하였는데,94 후백제에서 3,000명 군사를 보내 청주를 공격하였다. 이로 인해 왕건은 충주까지 물러나야 했으며, 탕정군에 있었던 유금필이 급히 청주로 가 후백제군을 물리쳐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하였다.95 이때의 전투는 왕건이 공산 전투를 떠올릴 만큼 고려군이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왕건은 930년 8월에도 청주에 행차하여 이 지역을 위무함으로써 청주 지역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힘썼던 것으로 보인다.96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재경 청주인, 특히 청주 김씨의 청주 지역에 대한 영향력도 확대되지 않았나 추측된다.
앞서 재경 청주인 중 김근겸, 김언규 등이 왕건을 지지하는 세력으로서 고위직에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김근겸과 김언규 등 청주 김씨 중에는 功臣에 책봉된 자도 있었을 것이다. 청주 이씨로 의종대 활동한 李公升의 6세조 李希能과 5세조 李謙宜는 모두 太祖를 따라 三韓을 통일하여 功臣이 되었다고 한다.97 『고려사』 기록에 특별한 활동이 기록되지 않은 이희능과 이겸의가 후삼국 통일을 도운 공으로 공신이 되었다면, ‘宣力扶衛之功’이 있는 김근겸, 김언규 등도 功臣으로 책봉되었을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司徒 三重大匡’로 추증된 박수경이 三韓功臣이었음을 고려하면,98 역시나 ‘守司徒 三重大匡’으로 추증된 김근겸도 공신으로 책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된다.99 재경 청주인 중 청주 김씨의 세력은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서도 살필 수 있다.
P-1. 淸州院夫人 金氏는 淸州 사람으로, 元甫 金兢律의 딸이다.100 (『고려사』 권88 열전1 后妃 혜종)
P-2. 淸州南院夫人 金氏는 元甫 金兢律의 딸이다.101 (『고려사』 권88 열전1 后妃 정종)
P-1, 2는 元甫 김긍률의 두 딸이 각각 혜종과 정종의 후비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청주 김씨인 김긍률은 김근겸과 친척 관계였을 것이다. 그가 지녔던 元甫(4품)가 최종적인 관계라면, 그는 김근겸보다는 지위가 낮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두 딸을 혜종과 정종의 후비로 들일 수 있었던 것은 김근겸 등의 세력 덕분이었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102 비록 왕건과 혼인 관계를 맺지 못하였으며, 후비이기는 하나, 왕건의 아들인 혜종·정종과 혼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청주 김씨는 왕실의 외척이 될 수 있었다. 청주 김씨는 이러한 중앙에서의 세력을 바탕으로 지방에까지 영향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사심관 제도가 주목된다.
Q. 이어서 〔김부를〕 경주의 事審官으로 삼아 副戶長 이하의 관직 등에 관한 일을 맡게 하였다. 이에 여러 功臣들도 또한 그의 사례를 따라서 각각 자신의 州의 사심관이 되었으니, 사심관 제도가 여기에서부터 비롯되었다.103 (『고려사절요』 권1 태조 18년 10월)
935년 10월 신라의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해오자 고려 태조는 그를 觀光順化衛國功臣 上柱國 樂浪王 政丞으로 삼고 食邑 8,000戶를 내려주면서 아울러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아 副戶長 이하의 관직 등에 관한 일을 맡게 하였다. 이 기사에서 특히 주목되는 바는 김부의 사례를 따라서 여러 공신들도 각각 출신 주의 사심관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앞서 김근겸이 공신으로 책봉되었을 가능성을 언급하였다. 이를 인정할 수 있다면, 그가 청주 지역의 사심관이 되었을 가능성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심관은 비록 副戶長 이하에 대한 제한된 권한이지만, 지방세력을 감독·통제하고 지방사회 운영에 관여하였다고 추정된다.104 사심관의 구체적인 역할은 충숙왕 5년(1318) 교서를 참조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사심관의 폐해를 문제 삼으며, 사심관을 설치한 본래 목적은 ‘宗主人民’·‘甄別流品’·‘均平賦役’ · ‘表正風俗’임을 밝히고 있다.105 ‘宗主人民’은 사심관이 지방민에 대해 宗주, 즉 대표 역할을 하였음을 뜻하며, ‘甄別流品’은 사심관이 개인이나 가문의 등급을 심사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또 ‘表正風俗’이라고 하여 사심관에게는 지방사회의 질서를 바로잡는 역할이 부여되었다. 사심관은 이러한 역할을 통해서 지방사회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청주 김씨는 이르면 904년에 중앙에 진출하여 왕건을 지원함으로써 중앙에서 비교적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다. 아울러 청주 지역에 연고를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10세기 초까지 청주 지역에는 여러 세력이 공존하였고, 지역사회에서 청주 김씨의 세력은 미미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962년(광종 13)에 龍頭寺 철당간을 세우는 데 堂大等 金芮宗, 그의 사촌으로 역시 堂大等 正朝(7품)이며 丹銀魚袋를 하사받은 金希一, 大等인 金守□ · 金釋希 大等 · 金寬謙 등 청주 김씨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점, 당대등 김예종의 사후에 그의 사촌이 당대등직을 계승한 점 등은 고려 초에 청주 김씨가 청주 지역의 실질적인 지배자집단이 되었음을 뒷받침한다.106 이러한 변화는 청주 김씨 중 재경세력의 중앙에서의 정치적 지위와 왕실과의 혼인 관계 등 그 세력을 바탕으로 지방사회에 영향력을 미친 결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107
청주에는 많은 세력이 있었고, 후삼국기에 재경세력과 재지세력으로 분리되었다. 각 세력은 이해관계에 따라 정권에 대해 각기 다른 입장을 보였으며, 서로 견제 · 대립하는 모습도 나타났다. 특히 재경 청주 김씨 세력과 견금 등 재지세력 사이의 대립에 주목하여 보았다. 재경 청주 김씨 세력의 경우, 중앙에서 고위직에 올랐으며,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었고, 공신에 책봉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바탕으로 사심관이 되어 마침내 지방사회에서의 주도권도 장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 재경 청주 김씨 세력과 견금 등 재지세력 사이의 견제와 갈등은 지방사회에서의 주도권 문제와도 관련이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Ⅳ. 맺음말
이상 나말여초 시기 서원경의 변화와 지방사회의 동향에 대해 살펴보았다. 삼국 통일 전쟁 이후 청주 지역에 설치된 서원경은 신라 말에 西原府로 개편되었다. 이는 당의 유수부제를 참고한 것으로 이해된다. 기존의 소경은 주에 영속되었으나, 부로 개편됨으로써 그 위상이 승격되어 주에서 독립된 행정단위가 되었으며, 그 관할 범위도 확대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개편이 이루어졌던 계기로 822년 김헌창의 난을 주목하였다. 신라 지방사회에서는 골품제를 근간으로 하는 신라의 지배체제를 부정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다. 이러한 욕구가 김헌창의 난을 계기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김헌창의 난 이후 신라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은 약화되었다. 때문에 소경을 부로 개편함으로써 신라 중앙은 지방을 안정시키고, 그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한편으로 지방세력과 어느 정도 타협을 해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지방세력이 자립할 수 있는 여지도 생겨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신라말 잇따른 자연재해와 국가의 지방 지배력 약화는 신라 국가의 붕괴를 초래하였고, 각 지역에서 군사조직을 갖추고 자립하는 세력이 등장하였다. 청주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제 신라의 골품제가 무의미해지면서 서원경/서원부는 신라 골품제하의 지배층이 모여 사는 副都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고, 궁예가 청주 지역을 차지하면서 ‘靑州’로 개편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전통적인 대읍으로서의 면모는 유지되었다. 청주 지역에는 많은 토성이 존재하였으며, 고려 초에 재지세력은 다른 지역보다 높은 관반을 지녔다. 청주에는 많은 호족세력이 존재하였고, 궁예에 의해 청주 인호가 철원으로 사민되면서 재경세력과 재지세력으로 분리되었다. 청주의 재지세력과 재경세력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중앙에 대한 입장을 달리하고 서로 견제·대립하는 모습도 나타났다. 왕건은 즉위 이후 잇달아 일어났던 반란 혹은 반란 모의를 진압하고, 청주에 직접 행차함으로써 청주 지역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왕건을 지지하는 청주의 재경세력 중 청주 김씨는 정치적 지위와 왕실과의 혼인 등 중앙에서의 세력을 바탕으로 지방사회에 영향력을 미침으로써 청주 지역의 재지세력은 청주 김씨를 중심으로 재편되어, 지방사회에서 청주 김씨가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청주 지역은 고려의 지배체제 안으로 온전히 들어가게 되었을 것이다.
표 1 재지관반의 大等 · 干 사례
| 관직 · 관위 | 지역 | 비고 |
|---|---|---|
| 上大等 大等 | 原州 | 「原州 興法寺址 眞空大師塔碑」(940) |
| 堂大등 大等 | 淸州 | 「淸州 龍頭寺址 鐵幢竿」(962) |
| 阿干 大等 | 忠州, 溟州 | 「忠州 淨土寺址 法鏡大師塔碑」(943) 「寧越 興寧寺址 澄曉大師塔碑」(944 건립) |
| 一吉干 | 堤州 | 「寧越 興寧寺址 澄曉大師塔碑」(944 건립) |
| 上沙湌 第二 第三 | 輔州(甫州), 赤牙縣 | 「醴泉 鳴鳳寺 境淸禪院慈寂禪師塔碑」(941) |
| 沙干 | 죽주, 신지현, 우곡현, 고미현 | 「寧越 興寧寺址 澄曉大師塔碑」(944 건립) 「古弥縣西院鐘記」(963) |
※ 尹京鎭, 2002, 96~97쪽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