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벌주로 본 통일신라 지방도시
Provincial Cities of Unified Silla through the Case of Sabeol-ju
1 세종문화유산재단
1 Sejong Cultural Heritage Foundation
DOI: https://doi.org/10.71244/jojm.2025.35.307
초록
본 연구는 사벌주의 고고학적 사례를 통해 통일신라 지방도시의 공간적 특성과 그에 내포된 정치적·경제적 함의를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삼국통일 이후인 687년(신문왕 7) 무렵, 사벌주의 치소는 종래의 방어 중심 산성에서 벗어나 교통과 행정 운영에 유리한 평지로 이전되었다. 이 과정에서 격자형 가로망을 갖춘 계획도시가 새롭게 조성되었으며, 자연발생적 읍락 공간이 계획도시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중심지에는 주거와 상업 기능이 결합되었고, 주변부에는 사찰을 중심으로 한 종교시설이 배치되었으며, 배후에는 방어 거점이 위치하는 복합적 도시구조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공간 재편은 도시 기능의 분화를 통해 공간 활용의 효율성을 제고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통일신라의 지방도시는 지정학적으로 전략적 요지에 설치되어 교통과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9주 5소경의 치소는 대체로 격자형 도시구조를 기본으로 하나, 지형적 조건에 따라 도시 형태와 공간 배치에는 차이가 나타난다. 특히 사벌주는 지리학적 특수성으로 인해 여러 주에서 생산된 물자가 집산되는 중간 거점으로서 통일신라 물류 체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사벌주가 단순한 지방 행정도시에 그치지 않고, 중앙집권적 국가 운영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하는 정치적·경제적 거점 도시로 기능하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이해될 수 있다.
Abstract
This study aims to examine the spatial characteristics and political/economic implications of provincial cities in Unified Silla through the archaeological case of Sabeol-ju. Around 687 (the 7th year of King Sinmun), the administrative center of Sabeol-ju was moved from a defense-oriented mountain fortress to a plain advantageous for transportation and administration. In this process, a planned city with a grid-like street network was newly established, marking the transition from naturally occurring settlements to planned urban spaces. A complex urban structure was formed, combining residential and commercial functions in the center, religious facilities centered on temples in the periphery, and defensive strongholds in the rear. This spatial reorganization is significant in that it improved the efficiency of space utilization through the differentiation of urban functions. Provincial cities of Unified Silla were established at strategic geopolitical locations and served as centers of transportation and administration. While the administrative centers of the 9 Provinces and 5 Small Capitals generally followed a grid-like urban structure, differences in urban form and spatial layout appeared depending on topographical conditions. In particular, due to its geographical specificity, Sabeol-ju likely played a key role in the logistics system of Unified Silla as an intermediate hub where goods produced in various provinces were collected and distributed. This can be understood as an important case showing that Sabeol-ju functioned not merely as a local administrative city, but as a political and economic hub that practically supported the centralized state operation.
Ⅰ. 머리말
삼국통일 이후 신라는 상주지역이라는 전략적 공간을 확보함으로써 금강 유역과 한강 유역으로의 진출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 지역을 중심으로 다양한 정치적·문화적 교류와 경제적 활동이 이루어졌으며, 그 핵심 거점이 바로 사벌주이다.
사벌주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는 1987년부터 문헌과 일제강점기 지도 자료에 의존한 평면 추정복원 중심의 접근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제한된 문헌과 충분한 고고학적 조사 부족으로 인해 치소 위치, 도시구조 등의 추론이 제한적이고 실증적 근거가 부족했다. 이후 2000년대 상주 복룡동유적의 발굴조사를 통해, 당시 지방도시의 치소에서도 왕경에 적용된 ‘이방제(里坊制)’가 준용되어 계획도시가 조성되었음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었다. 이방제는 고대 도시의 구조적 특성과 변화 과정을 이해하고, 이후 중세 도시의 발달 과정까지 분석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이는 오늘날 대부분의 도시 역시 과거 도시 및 지역의 형태를 계승·반영한 것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상주 복룡동유적의 발굴 성과는 일제강점기 지형도상 격자형 토지구획 흔적을 통해 막연히 추론되었던 9주 5소경의 도시구조 및 경관이 실증적으로 의미를 가지며, 통일신라 계획도시 건설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최근에는 통일신라 시대 14개 지방도시 전체로 연구 범위가 확대되었으며, 도시구조 유형 복원, 중심지 이동, 군·현 공간구조, 방어 체계 등 지방도시 전반에 대한 연구가 축적되고 있다(박달석, 2025, 4-11쪽). 그러나 여전히 고고 자료의 한계로 인해 실증적 분석에는 부족함이 존재한다.
신라는 삼국통일 이후 영역을 9주로 나누고, 각 주를 군·현 단위로 편제하였다. 각 행정 단위마다 치소를 설치하여 교통 중심지에 위치시키고, 지방 통치에 필요한 기능을 집적함으로써 공간 통합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였다. 사벌주는 687년(신문왕 7) 상주시 중심부에 주 치소를 설치함으로써 정치·경제·사회·문화의 핵심 거점으로 기능하였다. 특히 사벌주 치소는 기존의 산성 중심지인 이부곡토성을 벗어나 평지에 계획도시로 조성되었으며, 격자형 가로망을 갖춘 중심지와 주변부, 배후 산성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복합적 도시구조를 형성하였다.
본 연구는 이러한 고고학적 성과를 토대로 사벌주 치소의 도시구조와 통일신라 지방도시의 공간적 특성을 분석하고, 그 정치적·경제적 함의를 고찰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통일신라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지역 공간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그리고 지방도시가 단순한 행정 중심지를 넘어 정치·경제적 거점으로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였는지를 밝히는 데 목적을 둔다.
Ⅱ. 사벌주의 도시구조와 성격
[표 1] 사벌주 관련 『삼국사기』 기사
| 연번 | 문헌 | 원문 | 해석 |
|---|---|---|---|
| 1 | 「열전」 5 석우로조 | 沾解王在位 沙梁伐國舊屬我 忽背而歸百濟 于老將兵往討滅之 | 247~261년에 사량벌국이 전에 우리에게 속하였다가 갑자기 배반하여 백제로 돌아가므로, (석)우로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여 멸하였다. |
| 2 | 「잡지」 3 지리 상주조 | 尙州 沾解王時取沙伐國爲州 法興王十一年梁普通六年 初置軍主爲上州 眞興王十八年 州廢 神文王七年唐垂拱三年 復置 築城 周一千一百九步 景德王十六年 改名尙州 | 상주는 첨해왕 때에 사벌국을 빼앗아 주로 삼았다. 법흥왕 11년, 양나라 보통 6년에 처음으로 군주를 두어 상주로 삼았다. 진흥왕 18년에 주를 폐지하였다. 신문왕 7년, 당나라 수공 3년에 다시 (주를) 설치하고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1,109보였다. 경덕왕 16년에 이름을 상주로 고쳤다. |
| 3 | 「신라본기」 2 유리이사금조 | 十年 春二月 攺築沙道城 移沙伐州豪民 八十餘家. | 293년 2월에 사도성을 고쳐 쌓고, 사벌주의 호민 80여 가를 이주시켰다. |
| 4 | 「신라본기」 3 자비마립간조 | 十三年 築三年山城 三年者, 自興役始終 三年訖功, 故名之.. | 470년에 삼년산성을 쌓았다. 삼년이라는 것은 공사를 시작한 지 3년 만에 완공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
| 5 | 「신라본기」 3 자비마립간조 | 十七年, 築一牟·沙尸·廣石·沓逹·仇禮·坐羅等城. | 474년에 일모·사시·광석·답달·구례·좌라 등에 성을 쌓음. |
| 6 | 「신라본기」 3 소지마립간조 | 八年 春正月, 拜伊湌實竹爲將軍. 徵一善界丁夫三천, 攺築三年·屈山二城. | 486년 이찬 실죽을 장군으로 삼고, 일선 인근 정부 3천명을 징발하여 삼년성과 굴산성 두 성을 고쳐 쌓음. 일선군 중심지는 경북 구미시 해평면 일대로 추정 굴산성: 옥천군 청성면에 위치한 이성산성으로 추정 |
| 7 | 「신라본기」 3 소지마립간조 | 十年 秋七月, 築刀那城. | 488년 7월에 도나성을 쌓았다. *도나성은 상주시 모서면에 위치한 중모성으로 추정 |
| 8 | 「신라본기」 4 법흥왕조 | 十二年 春二月 以大阿湌伊登爲沙伐州軍主 | 525년 2월에 대아찬 이등을 사벌주 군주로 삼았다. |
| 9 | 「잡지」 9 직관 | 六停… 二曰上州停. 眞興王十三年置. | 552년에 설치하였다. |
| 10 | 「신라본기」 4 진흥왕조 | 十八年… 廢沙伐州 置甘文州 以沙湌起宗爲軍主 | 557년 사벌주를 폐지하고 감문주를 설치하여 사찬 기종을 군주로 삼았다. |
| 11 | 「신라본기」 4 진평왕조 | 三十六年 二月 廢沙伐州 置一善州 以一吉湌日夫爲軍主 | 614년 2월에 사벌주를 폐하고 일선주를 설치하여, 일길찬 일부를 군주로 삼았다. |
| 12 | 「열전」 1 김유신조 | 乙巳正月…王又拜庾信爲上州將軍 令拒之…… | 645년 정월에 다시 김유신을 상주 장군으로 임명하여 이를 막게 하니…… |
| 13 | 「신라본기」 6 문무왕조 | 元年秋七月…義服爲上州摠管 | 661년 7월… 의복을 상주 총관으로 삼았다. |
| 14 | 「신라본기」 6 문무왕조 | 元年九月…上州摠管品日 與一牟山郡太守 大幢 沙尸山郡太守 哲川等 率兵攻雨述城, 斬首一千級. | 661년 9월… 상주 총관 품일이 일모산군 태수 대당과 사시산군 태수 철천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우술성을 공격하여 1천명의 목을 베었다. 일모산군은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으로 추정 사시산군은 옥천군 이원면으로 추정 *우술성은 대전 계족산성으로 추정 |
| 15 | 「신라본기」 8 신문왕조 | 五年 春 復置完山州…以置菁州 始備九州…三月 置西原小京…置南原小京… | 685년 봄 완산주를 다시 설치하고, 청주를 설치함으로써 9주가 구비되었다. 3월에 서원소경, 남원소경을 설치하였다. |
| 16 | 「신라본기」 8 신문왕조 | 七年…春三月 罷一善州 復置沙伐州 以波珍湌官長爲摠管 …… 秋 築沙伐·歃良二州城 | 687년 봄 3월에 일선주를 폐지하고 다시 사벌주를 두어 파진찬 관장을 총관으로 삼았다. 그해 가을에 사벌주와 삽량주에 성을 쌓았다. |
| 17 | 「신라본기」 9 경덕왕조 | 十六年 冬十二月 改沙伐州爲尙州 領州一 郡十 縣三十 | 757년 겨울 12월에 사벌주를 상주로 고치고 1주·10군·30현2)을 거느리게 하였다. |
사벌주 치소의 위치와 도시구조에 대해서는 그동안 문헌사료와 고고학적 성과를 중심으로 부분적인 논의가 이루어져 왔다. 기존 연구에서는 신라가 삼국 통일 이후 지방 통치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주요 거점 지역에 계획적인 도시 공간을 조성하였다는 점에 주목하였으며, 사벌주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이방제(里坊制)1)에 기반한 도시였을 가능성이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사벌주 역시 이방제에 기반한 격자형 가로망 구조를 갖춘 계획도시로, 그 시행 시기를 687년(신문왕 7) 무렵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제시되었으며, 중심지는 현재의 상주시 중심부 일대로 이해되고 있다(황인호, 2023, 4-12; 박달석, 2025, 4-11쪽). 그러나 기존 연구는 사벌주 치소의 정확한 위치와 범위, 그리고 도시 공간의 구체적인 구성 양상을 체계적으로 복원하는 데에는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주로 개별 유적이나 단편적인 발굴 성과에 의존함으로써 도시 전체 구조에 대한 종합적 검토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한 측면이 있다.
한편 상주는 자연지리적으로 상주를 중심으로 한 상주분지와 소백산맥 지맥에 의해 구분되는 북부의 함창분지, 백두대간 서쪽의 중모분지와 화령분지로 나뉜다. 특히 상주 서부지역은 소백산맥의 고산준령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일반적인 양상과 달리, 산맥의 단절과 불규칙한 융기로 인해 여러 골짜기를 통해 영남과 호서지역이 비교적 평이(平易)한 통로로 연결되는 지형적 특성을 보인다. 이러한 지형적 조건으로 인해 상주는 낙동강·금강·남한강 수계를 연결하는 교통의 관문이자, 양 지역 세력이 맞닿는 지정학적 요충지로 기능하였다. 더불어 상주 동부 지역에 형성된 광범위한 농경지는 낙동강 유역에서도 손꼽히는 대규모 평야로, 일찍부터 농업생산이 발달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였다. 즉 상주는 교통과 물류의 결절점으로서 경제적·사회적 중요성을 지니며, 이러한 입지 여건은 다양한 경제 활동과 문화적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는 기반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1. 주치 도시구조
사벌주에 격자형 가로망 구획이 시행된 시기는 687년(신문왕 7) 무렵으로 판단되며, 그 중심 위치는 현재의 상주시 중심부에 해당한다. 신라는 삼국통일 후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지방 편제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지방 거점지역에 대한 계획적 도시 조성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이방제(里坊제)를 적용하여 격자형 가로망으로 도시 공간을 구획하고, 그 내부에 생활 공간을 배치하는 이른바 바둑판형 도시 구조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도시구조를 복원·검토하기 위해 본 연구에서는 1927년에 작성된 1:10,000 지형도와 1913년에 제작된 지적도, 항공사진을 활용하여 사벌주 치소의 대략적인 위치와 범위를 파악하고자 한다. 아울러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고고학적 자료를 종합적으로 검토함으로써 통일신라 시기 사벌주 치소의 도시구조와 공간 구성 양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1927년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1:10,000 지형도를 통해 사벌주 치소의 도시적 공간 구획 범위를 대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현재 상주시 중심부에는 동서 및 남북 방향으로 정연하게 배열된 격자형 토지 구획의 흔적이 뚜렷하게 확인된다. 해당 지역은 낙동강 지류인 북천과 남천(현 병성천), 서천(현 개운천)으로 둘러싸인 범위의 중앙부에 해당하며, 자연 지형을 경계로 형성된 평탄한 공간 위에 도시가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격자형 토지 구획이 확인되는 범위는 남북 약 1,440m, 동서 약 1,400m 이다. 이러한 입지와 공간 구획 방식은 신라 왕경의 도시구조와도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특히 격자형 가로망으로 공간이 체계적으로 구분된 영역에는 조선시대 상주읍성이 축조되어 있어, 통일신라시대에 형성된 도시 공간이 이후 시대에도 지역 중심 공간으로 지속적으로 계승·활용되었음을 시사한다.
본 산성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기존에는 토석혼축성으로 알려져 왔으나, 실제로는 오랜 기간 상부로부터의 자연적 퇴적으로 인해 토사가 덮인 결과일 뿐, 성벽의 대부분은 기본적으로 석축 구조로 축조되었음이 확인되었다(세종문화재연구원, 2018, 35쪽). 이러한 점에서 자산산성은 사벌주 치소의 배후에 위치한 군사적 거점이자, 비상시 주민과 관원이 입보하던 공간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산성은 격자형 가로망으로 구획된 사벌주 치소의 도시적 공간 범위와 약 2㎞ 이내의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여, 평지 치소와 유기적으로 연계된 방어 체계를 형성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1913년에 제작된 일제강점기 지적도를 보면, 사벌주 치소의 격자형 가로망으로 구획된 단위는 남북 9방×동서 9방으로 구성되며, 전체 평면 형태는 방형을 이룬다. 이러한 구획체계는 음양오행사상과 정전법을 바탕으로 한 주례 「고공기」에 제시된 도성 공간 구획 원칙, 즉 ‘국유구경구위(國有九經九緯)’의 개념에 기초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정방형 도시 안에 수직 방향의 9개의 도로와 수평 방향의 9개 도로를 배치하는 이상적 도시 모델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도성 계획 원리는 중국 당(唐) 장안성을 전형으로 하여 동아시아 고대 도시 전반에 공통적으로 적용된 도시 공간 구획 방식이며, 중앙 권력의 질서와 이념을 공간적으로 구현하는 수단이었다. 통일신라 지방도시 가운데 이러한 도시적 공간 구획 체계를 가장 충실하게 반영한 사례가 바로 사벌주 치소이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도시 구획의 중앙부에 해당하는 1열의 방(坊)은 동서 약 120m × 남북 약 160m 규모로, 평면 형태는 장방형을 이룬다. 이에 비해 그 외의 방들은 모두 약 160m × 160m 규모로 정방형에 가까운 평면형태를 보인다. 이는 도시구획 전반에서 정방형에 가까운 일정한 규모의 단위 구획을 기본으로 하되, 남북 축선상에 위치한 중앙 구역만을 기본 단위보다 동서 폭을 약 40m 축소하여 장방형으로 조정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방 단위의 면적은 가로망을 구성하는 도로와 배수시설의 폭이 포함된 범위이다. 도로와 배수시설은 도시 형성 및 공간 분할의 핵심 기준이 된다. 상주시 중심부의 지형은 중앙부에 돌출된 왕산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평탄하여, 일정한 치수(治水) 개념을 적용한 계획적 공간 구획과 물길 정비가 가능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그림 2]
복룡동유적 및 그 주변에 대한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성과를 종합하면 지적도에 보이는 토지구획 흔적[그림 4]
이러한 사벌주의 도시계획 범위와 관련하여 박태우(1987, 29-35쪽)와 야마다 타카후미(山田隆文, 2008, 15-17쪽)는 복룡동 256번지유적 동쪽으로 1열을 더 추가하여 동서 10방으로 설정하였다. 황인호(2014, 123쪽)는 복룡동 10-4번지유적의 4구역이 복룡동 256번지유적 동쪽으로 유구가 이어지고 복룡동 256번지유적 농로 북쪽으로도 유구가 이어지기 때문에 동서 10방×남북 10방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하였다[그림 5]
하지만 이곳에는 구획 흔적이 남아 있지 않고 복룡동 10-4번지유적 4구역의 동쪽과 복룡동 256유적 내 농로 북쪽으로는 고려시대~조선시대 유구만 확인되었을 뿐 통일신라시대 유구는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복룡동유적 동쪽으로 방의 구획은 끝나지만 방과 방 사이의 도로는 동서남북으로 모두 확장될 가능성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에 의미 있는 조사 결과가 있었다. 복룡동 256번지유적 농로(이방구획 북쪽 끝부분)의 동쪽에서 동-서 방향의 도로가 확인되었는데 이는 구획 범위 외곽의 소방천까지 이어지는 것이 확인되었다(금오문화재연구원, 2022).
따라서 사벌주 치소는 왕산(71.3m)을 중심으로 관청이 배치되고, 격자형 가로망으로 구획된 핵심구역이 형성된 도시로 이해할 수 있다. 이 핵심 구역은 중앙부에 동서 폭 120m 인 변형구획을 두고, 그 동·서 양측에 각각 일변 약 150m 의 기본 단위 방을 4개씩 배치함으로써 전체적으로 9방×9방 체계를 이루었다.
이들 방 내부에는 주거와 상업 기능이 함께 존재하는 공간이 조성되었으며, 도시의 실질적인 생활 영역을 구성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핵심 구역의 외곽에는 사찰을 중심으로 한 종교시설이 입지하고, 그 배후에는 주성인 자산산성이 자리하는 등 치소-주변부 시설-산성 방어 거점이 유기기적으로 결합된 도시공간구조가 상정된다[표 3]. 실제로 복룡동 256번지유적에서는 하나의 방 내부에 주거 시설과 상업 시설이 공존하는 양상이 확인되어,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박달석, 2012, 55–57쪽). 또한 복룡동 당간지주와 석불좌상의 존재를 통해, 인접 지역에 종교시설이 존재하였을 가능성도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특히 복룡동 256번지 유적은 도시계획 범위의 북동부에 해당하는 하나의 방에 위치하며, 격자형 가로망으로 구획된 도로 내부의 생활 공간에 해당한다. 이 방 내부에는 별도의 십자형 도로가 확인되지 않는 점에서, 격자형 가로망에 의해 더 이상 세분되지 않는 최소 단위의 공간 구획이었음을 알 수 있다.
2. 주치 내부구조와 성격
통일신라시대 사벌주 치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왕경을 하나의 표본으로 해서 격자형 가로망 구획에 의한 체계적인 도시공간이 조성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지금의 상주시, 도시공간구조의 근간이 형성된 시기이다. 또한 상주시 중심부에 대한 조사결과 4~6세기에 해당하는 유구와 유물들은 아직 확인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 신문왕대(681~692년) 이르러 사벌주의 설치와 더불어 본격적으로 개발이 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특히 사벌주 이방구획 범위의 북동쪽 경계부에 해당하는 복룡동 256번지유적은 복룡동 10-4번지유적 4구역에서 확인된 격자상의 남북도로와 동서도로의 북측 배수로에 의해 그 내부에 자연스럽게 평면 방형의 생활공간이 조성되었음이 확인된다. 그리고 도로와 배수로와 경계를 이루는 내부 생활공간에는 통일신라시대 주거시설인 적심건물지 20동과 수혈건물지 25동 그리고 우물 11기가 모여 일정한 군을 이루며 하나의 단위 취락을 이룬다. 특히 복룡동 256번지유적은 구획된 거주단위로서 하나의 방이 전면적으로 발굴조사 되어 사벌주 치소의 내부 구조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제공된다.
따라서 이를 중심으로 하나의 방 내부 구성 요소별 검토를 통해 내부 구조를 이해하고 그 형성 시기 및 성격이 검토될 것이다.
1) 방(坊) 내부 구성 요소별 검토
적심건물지는 동 시기 수혈3)을 파괴하고 조영되었는데 중심 좌향은 동서축의 정남향 또는 남북축의 정동향으로 격자형 토지구획선과 일치된다. 대부분 직경 1m 이상의 적심 규모와 10m 이상의 장축 길이로 보아 대형 건물지로 정면 3칸인 것과 1칸 혹은 2칸인 것으로 나뉜다. 특히 정면 1칸 혹은 2칸의 256번지 유적 B3G-1~4호와 B4G-2~4호는 일반 건물로는 보기 어려운 넓은 주칸 거리와 서로 대칭된 건물 배치 구조 그리고 B3G-2호와 3호 적심석 하단에서 나온 기와편이 서로 접합되는 등이 함께 고려될 때 해당유구는 몇 동의 건물이 하나의 단위공간을 구성하며 배치된 공공의 특수건물지로 추정된다 [그림 6

수혈주거지는 대부분 평면 방형으로 내부구조는 생활공간과 취사난방공간으로 분리된다. 구조적 변화를 보여주는 쪽구들을 기준으로 무시설(1식), 부뚜막(2식), 구들(3식)로 구분되고 구들은 다시 연도부를 제외한 부뚜막과 구들 평면형태에 따라 一자형(3a 식), ㄱ자형(3b 식)4), ㄷ자형(3c 식)으로 구분된다. 따라서 주거지 속성과 중복양상 그리고 출토유물[그림 7~10]
[표 4] 통일신라시대 수혈주거지 변화상
| 내용 \ 형식 | 1식 | 2식 | 3식 | ||||
|---|---|---|---|---|---|---|---|
| 3a | 3b-1 | 3b-2 | 3c | ||||
| 평면 (면적㎡) | 방형 | 23(10.7) | 40(12.0) | 방형-4(9.36) | 방형-13(11.1) | 1(11.2) | 2(13.5) |
| 장방형 | 4(14.0) | 7(14.6) | 3(15.2) | 1(12.9) | |||
| 부뚜막 | 없음 | 있음 | '一'자형 | 'ㄱ'자형 | 'ㄷ'자형 | ||
| 구들 | 배치 | 없음 | 없음 | ||||
| 면적 | 한 벽면의 1/2 | 한 벽면의 1/2 | 한 벽면의 2/3 | 두 벽면 이용 | |||
| 축조재료 | · | 흙+돌 | 돌 | 돌, 흙+돌 | 돌, 흙+돌, 흙 | 돌, 흙 | |
| 솥받침 | 1 | 1 | 1 or 2 | 2 | 2 | ||
| 시기 | 7C 중·후엽 | 7C 후엽-8C 초 | 8C 초-중엽 | ||||
[표 5] 복룡동 256번지 유적의 유구별 공반 관계
| 유구 \ 구분 | 제1군 | 제2군 | 제3군 | 제4군 | 제5군 | 제6군 | 제7군 | 제8군 | 제9군 |
|---|---|---|---|---|---|---|---|---|---|
| 적심건물지 | B3G -1~4호 B4G -2~4호 |
A4G -1호 |
C4G -1호 |
D4G -1호 |
D5G -1호 |
C3G -1호 |
C5G -2호 |
D6G -1~4호 |
D5G -2~4호 |
| 우물 | B4G -3호 |
A4G -5호 |
C4G -1호 |
D4G -1호 |
D5G -1호 |
C3G -1호 |
· | · | · |
| 수혈주거지 | A3G -15호 B3G -6호 |
· | C4G -16호 |
· | · | · | · | D6G -12호 |
· |
| 단위건물지 면적 | 334.5㎡ | 40㎡ | 78.4㎡ | 62.5㎡ | 69.1㎡ | 17.2㎡ | 18.8㎡ | 55.9㎡ | 18.6㎡+α |
2) 방(坊) 내부구조
적심건물지를 중심으로 개별 유구간 관계를 정리하면 [표 5]와 같다. 제1군은 평면 주칸 정면 1×1 또는 정면 2×1의 개별가옥 7동과 우물 1기 그리고 ㄱ자형 수혈주거지 2동이다. 제8군은 개별가옥 4동과 ㄱ자형 수혈주거지 1동이 서로 유구 복합체를 이루는 공적 건물지이다. 제2~5군은 평면 주칸 정면 3×1의 개별가옥 1동과 우물 1동이 유구 복합체를 이루고 제3군에는 ㄷ자형 수혈주거지 1동이 포함된다. 제6군은 평면 주칸 정면 4×1의 개별가옥 1동과 우물 1동이 유구 복합체를 이루는데 제2~5군과 함께 일반 주거용 건물지로 추정된다. 제7군은 단칸 건물지로 주거용이 아닌 다른 용도의 건물지로 추정된다. 제9군은 제5군과 시기를 달리하는 개별가옥 3동이 유구 복합체를 이룬다. 위의 개별 유구간 관계로 볼 때 일반 주거용 건물지는 우물 1기를 포함하여 별도로 3b-1식 또는 3c 식 수혈주거지와 서로 유구 복합체를 이루는 것을 알 수 있다[그림 11]
따라서 개별 유구의 상호 관계가 확인되지 않는 수혈주거지와 우물의 배치 관계는 A3G-2호와 A4G-6호 우물 주위로 3b-1식 수혈주거지 1동과 흩어져 산재하고 있는 적심들이 확인된다. 이것으로 볼 때 A3G-2호 우물과 A3G-20호 수혈주거지는 상호 관계를 가지는 건물지 1동과 A4G-6호 우물과 상호 관계를 가지는 건물지 1동의 존재가 추정될 수 있다. 그리고 3b-1식 수혈주거지에 선행하는 1식 수혈주거지와 2식 수혈주거지가 방(坊) 내부의 북동쪽에 10동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그 주위에 우물 2기가 분포한다. 또한 방(坊) 남서쪽 모서리에 공지가 확인되는데 이는 시장으로 추정된다5). 다만 신라 왕경에서 확인되는 석축방장(石築坊墻)과 같은 시설은 보이지 않는다[그림 11].
즉 사벌주 치소에서 하나의 방은 별도의 십자로가 없이 격자형 가로망에 의해 더 이상 분할되지 않는 가장 작은 단위의 생활 공간으로 파악된다(박달석, 2012, 56-57쪽).
3) 방(坊) 내부 거주민의 구성과 성격
방 내부에서 생산 활동과 관련된 시설물은 확인되지 않아, 해당 공간의 기능은 일반 주거군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발굴 자료가 제한적이므로 거주민의 사회적 신분을 정확히 규명할 수 있는 실증적 사례가 부족하다. 따라서 그 성격을 추정하기 위해 시대적 배경은 다르지만 『삼국사기』 옥사조6)에서 규정한 사회계급별 주택 규모를 참고하여 추론하고자 한다. 이를 바탕으로 비교는 건물 면적에 근거하여 단순하게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기준으로 보면, 발굴된 건물 면적만으로 판단할 때, 해당 주거군에는 진골, 6두품, 4두품 계층의 주민들이 서로 혼거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단순한 거주 공간의 구분을 넘어 통일신라 지방도시 내 사회적 계층이 혼합된 양상을 보여주는 사례로 이해될 수 있다.
한편 C4G-16호(3c 식) 건물은 유구별 세트 관계로 보아 가장 면적이 큰 제3군(진골귀족)에 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7). 또한 취락의 북쪽과 동쪽은 수원의 확보에 매우 유리한 평탄지가 넓게 조성되어 있어서 이곳 주민들에게 비교적 풍족한 경제적 이익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들은 도시적인 경관 속에 일정 수준 이상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들은 비교적 풍족한 지방의 물자를 누릴 수 있었지만 왕경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정치적 지위를 유지하는 데에는 불리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박성현, 2023, 33쪽).
Ⅲ. 통일신라 지방도시의 특성
신라는 삼국통일 후 685년에 지방행정구역을 9주 5소경으로 정비하였으며 최종적으로 687년 일선주를 폐지하고 사벌주가 재설치되어 9주 5소경 체제가 완비되었다[표 7]
[표 7] 『삼국사기』로 본 9주 5소경 설치 및 주성·소경성 축성 시기
| 구분 \ 내용 | 지금의 소재지 | 주·소경 설치시기 | 주성·소경성 축조시기 | 기사 | 문헌 | 경덕왕 16년(757) | |
|---|---|---|---|---|---|---|---|
| 9주 | 우수주 (牛首州) | 강원 춘천 | 선덕왕 6 (637) | · | 爲牛首州 | 잡지4 지리2 | 삭주 (朔州) |
| 문무왕 8 (668) | 置比列忽州, 仍命波珍湌 龍文爲摠管 | 신라본기 6 | |||||
| 문무왕 13 (673) | 置首若州 | 잡지4 지리2 | |||||
| 築首若州走壤城 | 신라본기 7 | ||||||
| 하서주 (河西州) | 강원 강릉 | 태종무열왕 5 (658) | · | 王以何瑟羅地連靺鞨, 人不能安, 罷京爲州 | 신라본기 5 | 명주 (溟洲) | |
| 한산주 (漢山州) | 경기 하남 | 문무왕 4 (664) | 문무왕 12 (672) | 以阿浪軍官為漢山州都督 | 신라본기 6 | 한주 (漢州) | |
| 築漢山州晝長城, 周四千三百六十步 | 신라본기 7 | ||||||
| 삽량주 (歃良州) | 경남 양산 | 문무왕 5 (665) | 신문왕 7 (687) | 割上州下州地, 置歃良州 築城, 周一千二百六十步 | 잡지3 지리1 | 양주 (良州) | |
| 築歃良城 | |||||||
| 청주 (菁州) | 경남 진주 | 신문왕 5 (685) | · | 挺居列州以置菁州, 始備九州 以大阿湌福世為揔管 | 신라본기 8 | 강주 (康州) | |
| 완산주 (完山州) | 전북 전주 | · | 復置完山州, 以龍元為摠管 | 전주 (全州) | |||
| 웅천주 (熊川州) | 충남 공주 | 신문왕 6 (686) | · | 以泗沘州為郡, 熊川郡為州 | 웅주 (熊州) | ||
| 무진주 (武珍州) | 전남 광주 | · | 發羅州為郡, 武珍郡爲州 | 무주 (武州) | |||
| 사벌주 (沙伐州) | 경북 상주 | 신문왕 7 (687) | 신문왕 7 (687) | 罷一善州, 復置沙伐州 築沙伐城 | 상주 (尙州) | ||
| 築城, 周一千二百六十步 | 잡지3 지리1 | ||||||
| 5소경 | 중원소경 (中原小京) | 충북 충주 | 진흥왕 18 (557) | 문무왕 13 (673) | 以國原為小京 | 신라본기 4 | 중원경 (中原京) |
| 築國原城 | 신라본기 7 | ||||||
| 周二千五百九十二步 | 잡지4 지리2 | ||||||
| 북원소경 (北原小京) | 강원 원주 | 문무왕 18 (678) | 신문왕 5 (685) | 置北原小京, 以大阿湌吳起守之 | 신라본기 7 | 북원경 (北原京) | |
| 築城周一千三十一步 | 잡지4 지리2 | ||||||
| 금관소경 (金官小京) | 경남 김해 | 문무왕 20 (680) | · | 伽倻郡置金官小京 | 신라본기 7 | 김해경 (金海京) | |
| 서원소경 (西原小京) | 충북 청주 | 신문왕 5 (685) | 신문왕 9 (689) | 置西原小京, 以阿湌元泰爲仕臣 | 신라본기 8 | 서원경 (西原京) | |
| 築西原小京城 | |||||||
| 남원소경 (南原小京) | 전남 남원 | 신문왕 11 (691) | 置南原小京, 徙諸州郡民戶分居之 | 남원경 (南原京) | |||
| 築南原城 | |||||||
7 공공의 건물지로 추정되는 제1군에는 개별가옥 7동에 수혈주거지 2동이 포함되고 제8군에는 개별가옥 4동에 수혈주거지 1동이 포함되기 때문에 면적에 따라 종속된 가구도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같은 진골 계급에서도 차이가 확인된다. 8 685년(신문왕 5)에 신라가 설치한 9주는 일선주(一善州: 경북 구미), 삽량주(歃良州: 경남 양산), 청주(菁州: 경남 진주), 한산주(漢山州: 경기 하남), 수약주(首若州: 강원 춘천), 하서주(河西주: 강원 강릉), 사비주(泗沘州: 충남 부여), 완산주(完山州: 전북 전주), 발라주(發羅州: 전남 나주)이다. 그리고 686년(신문왕 6) 2월에 신라는 사비주에서 웅천주(熊川州, 충남 공주)로 발라주에서 무진주(武珍州, 전남 광주)로 주치가 이동되어 재설치되었다. 또한 신문왕 7년(687) 3월에 신라는 일선주에서 사벌주(沙伐州: 경북 상주)로 주치가 이동되어 재설치되었다.
통일신라 지방도시 9주 5소경이란 신라가 삼국통일을 달성한 후 중앙집권의 강화를 목적으로 시행한 지방행정구역으로 사회·경제 구조와 국가체제에 입각하여 영역을 일정 구획 단위로 나누어 분절하고 이를 재조직한 것이다. 즉 국가권력의 기획 아래 영역이 인위적으로 재편되었다는 것이다(여호규, 2023, 135쪽).
1. 지방도시 치소의 비교
격자형 가로망 구획인 이방제(里坊制)에 따른 도시건설은 설치 시기와 입지 조건 등 제반 여건에 따라 세부적인 형태와 구조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9주 5소경의 치소가 설치되었던 12개 도시(삽량주‧북원소경 제외)의 중심지는 모두 정연한 도로망을 갖춘 계획도시로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9. 이러한 선행 연구 성과(박달석, 2025, 4-11쪽)를 바탕으로 9주 5소경의 중심지와 도시구조를 종합적으로 추론하면 다음과 같다[표 8]
[표 8] 9주 5소경의 도시구조 비교
| 내용 \ 주‧소경 | 하서주 (강원 강릉) | 한산주 (경기 하남) | 수약주 (강원 춘천) | 중원소경 (충북 충주) | 금관소경 (경남 김해) | 청주 (경남 진주) | |
|---|---|---|---|---|---|---|---|
| 설치시기 | 658년(무열왕) | 664년(문무왕) | 673년(문무왕) | 680년(문무왕) | 685년(신문왕) | ||
| 중심지 이동 (입지) | 강릉읍성 일대 (하천변 충적지) | 춘궁동 (하천변 충적지) | 우두동→근화동 (하천변 충적지) | 탑평리→충주읍성 (하천변 충적지) | 김해읍성일대 (하천변 충적지) | 진주관아 일대 (하천변 충적지) | |
| 구획 | 남북 | 1,330m | 980m(?) | 910m | 1,116m | 1,405m | 960m |
| 동서 | 760m | 840m(?) | 650m | 800m | 1,405m | 1,040m | |
| 형태 | 장방형 | 장방형 | 장방형 | 장방형 | 방형 | 방형 | |
| 구획방위 | 50° 편동 | 25° 편동 | 30° 편동 | 9° 편서 | 11° 편서 | 18° 편서 | |
| 구획체계 (동서×남북) | 7행×4열 | 6행×7열(?) | 5행×7열(?) | 5행×9열 | 9행×9열 | 7행×6열 | |
| 구획규모 (행×열) | 190m×190m(?) (방형) | 140m×140m(?) (방형) | 130m×130m (방형) | 160m×124m (장방형) | 160m×160m (방형) | 160m×160m (방형) | |
| 절반구획 (행방향) | ․ | ․ | ․ | ․ | ․ | 80m (중앙부) | |
| 배후산성 | 명주성 (3.5㎞ 이격) | 주장성(남한산성) (5㎞ 이격) | 봉의산성 (700m 이격) | 충주산성 (3.5㎞ 이격) | 분산성 (1.3㎞ 이격) | 진주성 (인접) | |
9) 야마다 타카후미(山田隆文, 2008)는 11개 도시를 분석하여 남북 중심축을 갖는 방형 구조의 도시(사벌주, 청주, 완산주, 남원소경, 금관소경)와 남북 중심축이 없는 장방형 구조의 도시(무진주, 우수주, 하서주, 서원소경, 중원소경)로 구분하였다. 또한 황인호(2014)는 10개 도시를 대상으로 평면 형태를 분석하여 방형 구조(금관소경, 청주, 완산주, 남원소경, 사벌주)와 장방형 구조(하서주, 수약주, 서원소경, 무진주, 중원소경)로 분류하였다.
1) 입지와 경관
격자형 가로망 구획이 시행된 범위는 현(구) 시가지 중심부가 위치한 하천변 충적지로 격자형 구획이 적용된 핵심 공간과 불교유적 등이 분포하는 주변 공간을 두고 그 배후 구릉지에 비상시 민(民)의 입보와 군사 전략적 역할을 수행하는 배후 산성이 조합된 형태의 공간구조가 상정된다. 다만 주와 소경의 도시적 구조 차이는 보이지 않는다. 한편 치소와 인접한 주변 공간에서 확인되는 평지 사찰 등 불교유적으로 볼 때 도시의 확장과 종교를 통한 정치적 목적을 생각할 수 있다. 즉 도시적 공간 구획이 시행된 초기에는 기본적인 도시 형태를 확정하고 그 이후에 공간적 활용에 따른 도시 확장이 이루어졌다. 또한 개인의 개별적인 신앙보다는 단일한 종교로 민(民)에게 귀의하게 하여 통일국가로서 사상적 통일을 통한 왕권 강화를 하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을 가진다.
치소의 입지적 특징을 보면 치소는 지역 중심 수계의 지류를 끼고 있는 폐쇄적 분지 지형으로 지리적 조건이 통치와 방어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기에 편리하다. 그리고 대부분 주변에 비옥한 넓은 경작지가 있어 농업생산력이 풍부하여 치소의 경비 조달에 유리하고 중앙에서 옮겨 온 지배층에게 풍족한 경제적 이익을 주었을 것이다. 또한 지리적으로 지역의 중심부에 위치하면서 교통의 결절지로 육로와 수로가 발달하여 지역간 교류 및 지방의 물자를 중앙(왕경)으로 운송하는데 유리하다. 이러한 입지적 특징으로 이곳에 조선시대 읍성 및 관아지가 분포하며 지금까지 지역의 거점 도시(정치·경제·문화의 중심)로 활용되었음이 파악된다.
치소의 경관적 특징을 보면 격자형 가로망 구획이 시행된 범위와 인접한 배후에 산성이 위치한다는 점이다. [표 8]에서 주성과 소경성의 축성과 관련된 기록은 모두 7개소이다. 그 중 나당 전쟁10 이후에 축성된 성은 5개소이고 성의 규모가 기록된 성은 삽량주성(687년)과 북원소경성(685년) 그리고 사벌주성(687년)이다.
여기에서 격자형 가로망 구획이 확인된 사벌주의 주성을 보면, 둘레가 1,109보(약 1.96km)이다. 이는 사벌주의 격자형 가로망 구획 범위와 불과 2km 이내의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면서 수구(水口)의 방향이 시가지 쪽으로 향하고 있는 자산산성의 둘레 약 1.86km 와 비슷하다. 또한 이곳에서 채집된 유물 중 ‘관(官)’자명 중판 타날판 기와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때 관용(官용)으로 사용된 시설이었음이 파악된다. 즉 주성과 소경성은 치소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지리적 요충지에 축성되어 비상시 민(民)의 입보와 군사적 역할을 수행하는 배후 입보성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통일신라 지방도시의 치소는 격자형 가로망 구획으로 도시적 경관을 갖춘 평지로 이동되었을 것이고 그 위치는 구획 범위의 중앙부 북변으로 추정된다.
10) 670년에서 676년까지 7년간 벌어진 신라와 당나라의 한반도 쟁패전으로 이러한 국운이 걸린 전쟁 과정에서 주·소경을 둘러싼 성을 신라가 축성하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2) 도시적 공간 계획의 특징
통일신라시대 지방 도시의 치소는 672년~680년(문무왕 12~20)과 685년~691년(신문왕 5~11)에 주(州)와 소경(小京)의 설치나 축성 기사가 집중적으로 보인다[표 7]. 따라서 이 무렵 격자형 가로망 구획에 의한 지방 도시가 본격적으로 정비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신문왕 대에는 9주 5소경 중 9개소의 주·소경 설치 및 주·소경성의 축성이 시행되어 주·소경 치소의 정비는 신문왕에 의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특징이다.
사벌주의 경우 하나의 방(坊) 전체가 조사된 복룡동 256번지유적에서 격자형 가로망과 건물 방향이 일치한 통일신라 적심건물지가 수혈주거지[표 4의 제1식~제3a 식]를 파괴하고 조영되었고 8세기 이후 관련 유물들이 점차 증가한다(영남문화재연구원, 2008). 이러한 점은 7세기 후반부터 도시적 공간에 이전 시기와 다른 형태의 가옥이 건축되고 8세기 이후에는 점점 그 모습을 갖추어 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9주 5소경의 지방도시는 조성 시기와 지형 조건 등 제반 상황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도시의 형태나 구조에서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치소를 중심으로 격자형 가로망이 구획된 계획도시로 정비되었다.
이는 신라가 당시 왕경의 2단계 도시계획을 기초로 정비하였다는 것과 관련된다(황인호, 2023, 246쪽). 신라 왕경에서는 6~8세기에 걸쳐 격자형 가로망으로 구획하여 도시를 정비하였는데 월성 주변에서 시작하여 외곽으로 3단계로 확대되었다. 구획 단위는 최초 단계(6세기 중엽~7세기 중엽)는 460척×460척(163.3m), 다음 단계(7세기 후반)에는 도로 폭을 20척 줄어 440척×440척(156.2m), 최종 단계(8세기)에는 다시 북천 북쪽은 450척×350척과 남천 남쪽은 380척×380척이었다. 마지막으로 7세기 후엽에서 8세기에 도시 정비가 이루어진 지역은 하천이나 산지 등 자연 지리적 영향으로 구획 단위 규모나 형태 그리고 주축 방향이 달라졌다(황인호, 2023, 255-262쪽).
이러한 9주 5소경의 치소는 단계별 계획에 따라 신라가 도시적 공간을 정비한 것으로 파악된다.
먼저 치소를 계획도시로 정비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대지의 조성이다. 치소의 입지가 하천을 끼고 있는 폐쇄적 분지 지형으로 통치와 방어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기에는 편리하지만 자연 재해에는 취약할 수 밖에 없다. 분명 신라는 하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제방을 축조하고 물 빠짐을 좋게 하는 등 치수를 통해 자연재해에 안전한 대지를 조성하였을 것이다[그림 12]
사벌주 치소가 위치한 상주시 중심부의 지형적 구조는 중앙부에 돌출된 왕산을 제외하면 전역이 평탄하므로 신라는 치수의 개념을 적용하여 도시적 공간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배수시설을 통해 물길을 외곽의 주변 하천으로 연결하고11) 동쪽에는 율수(栗藪, 趙公堤)와 서쪽에는 서수(西藪, 御令藪)라는 인공제방을 만들어 하천의 범람에 대비하였다. 1927년 지형도에 표시한 사벌주의 치수(治水) 현황도가 [그림 13]
이러한 치수에 따라 자연스럽게 도시적 공간의 정비가 이루어졌고 이는 격자형 가로망으로 공간이 구획되어 고대도시의 기본적인 틀이 갖추어 갔을 것이다.
따라서 9주 5소경 치소의 격자형 도시계획에는 치수와 도로망 구축이 가장 기본적인 중요한 사업이었다.
11) [그림 13] 지형도를 보면 동서로 흐르는 수로(溝) 방향이 남천과 서천으로 연결된다.
다음은 치소의 기본적인 공간 구획 범위 설정이다. 치소가 위치한 핵심 공간은 격자형 가로망 구획을 적용하였지만 주변 공간은 구획하지 않았다. 다만 도로는 외곽으로 연결되어 이후의 도시 확장에 이용되었다. 상주 복룡동 256번지유적의 북동쪽 모서리 부분(도시계획 범위 북동쪽 끝부분)에서 동쪽으로 최근의 발굴조사에서 동쪽으로 향하는 동서도로 유구가 확인되었다. 이는 통일신라시대 도시구획 범위 외곽의 소방천까지 이어진다(금오문화재연구원, 2022).
따라서 9주 5소경의 치소는 그 일대의 한정된 계획 범위만 먼저 구획되었고 이후 외곽으로 도시적 공간이 확장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았다. 즉 치소 정비 계획이 세워진 초기에는 기본적인 도시의 틀을 만들어 놓고 후대로 가면서 어떠한 고정된 틀이 없기 때문에 도시는 충분히 확장될 수 있었다. 이는 9주 5소경 치소의 도시계획 범위와 인접한 외곽에서 확인되는 평지 사찰과 당간지주 등 불교 유적의 분포와 구획 범위 외곽에서는 고려시대~조선시대 유구들만 확인되었을 뿐 통일신라시대 유구는 전혀 확인되지 않았는 것에서 암시될 수 있다[그림 13]. 즉 사벌주는 고려시대 이후 주변 하천 유역이 안정화되면서 하천 변까지 삶의 터전이 확대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조선시대 유구에 의해 파괴된 통일신라시대 도로 유구 등으로 볼 때 고려시대~조선시대 어느 시점부터 통일신라시대 도시적 공간은 확대되어 재생산된 것으로 추정된다[그림 14]
또한 9주 5소경의 치소는 지금까지 이 일대의 중심도시로 점차 가로망이 중복되고 종횡구획선이 다른 방향성을 보인다. 상주는 지금의 도로[그림 15의 좌-파란색]
끝으로 도시계획의 체계에 대해 검토될 필요가 있다. 이는 격자형 가로망에 의한 구획의 규모와 형태 그리고 방위를 통해 도시계획 체계가 검토될 것이다.
1) 도시구획의 규모와 형태 검토
첫 번째 유형은 하서주 · 수약주 · 중원소경에서 확인된다. 중심부의 중심축선에 절반구획이 없고 구획 규모가 장방형 모양으로 일정한 규모로 균등하게 구획되는 유형으로 모두 문무왕 때 설치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두 번째 유형은 무진주 · 웅천주에서 확인된다. 중심부의 중심축선에 절반구획이 있고 구획 규모가 장방형 모양으로 일정한 규모로 균등하게 구획되는 유형이다. 세 번째 유형은 청주 · 완산주 · 남원소경 · 사벌주에서 확인된다. 중심부의 중심축선에 절반구획이 있고 구획 규모가 방형 모양으로 일정한 규모로 균등하게 구획되는 유형이다.
2) 정방위를 지향하는 도시구획의 사례 검토
685년에 설치된 남원소경의 중심 축선은 지리적 지형과 달리 정방위를 지향한다. 만약에 지리적 지형에 따라 구획되었으면 북서-남동향으로 정방위에서 서쪽으로 약 34° 기울어진 방위로 지금의 남원시 신도심과 같다. 이러한 정방위를 지향하여 계획된 도시는 687년에 설치된 사벌주뿐이다[그림 18]
3) 도시구획의 체계 검토
하나의 방(坊) 규모는 금관소경 · 청주 · 서원소경 · 남원소경 · 무진주 · 사벌주는 모두 160m 의 방형이다. 또한 고대 중국의 도성에서 당 장안성은 장방형이고 낙양성은 방형으로 통일신라의 도시구획 체계는 기본적으로 낙양성을 모델로 한 것으로 파악된다. 다만 9주 5소경 치소의 도시 형태는 사벌주를 제외하고는 일제강점기 지도에 보이는 토지분할선을 토대로 추정 복원된 것이므로 어느 정도 한계성은 내포하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일제강점기 지도에서 그 흔적이 확인되는 토지 구획선은 통일신라의 도시적 공간 구획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3) 치소의 평면 형태 비교
격자형 가로망으로 구획된 통일신라 지방도시 치소의 평면형태는 장방형과 방형의 두 가지 유형으로 확인된다[표 8].
장방형 유형의 도시는 나당 전쟁(676년, 문무왕 16) 이전에 설치된 하서주 · 한산주 · 수약주 · 중원소경과 옛 백제 영역에 설치된 서원소경 · 웅천주 · 무진주 등 모두 7개소이다[그림 16]

방형 유형의 도시는 옛 백제 영역에 설치된 불분명한 완산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옛 신라(사벌주)와 가야(금관소경 · 청주 · 남원소경) 영역에 설치된 4개소이다[그림 18]. 특히 방형 유형의 도시는 신문왕 때 옛 신라 영역과 가야 영역(남원소경 제외)에 집중적으로 설치된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나당 전쟁 승리(676년) 이전에 설치된 치소와 옛 고구려와 백제 영역(불분명한 완산주 제외)에 설치된 치소는 평면 장방형 구조이고 685~687년 신문왕 때 옛 신라와 가야 영역(남원소경 제외)에 설치된 치소는 평면 방형의 구조이다. 또한 대부분 지리적 환경에 따라 중심 축선(산-하천-산)은 일직선으로 배치되었다. 이러한 중심축선에 따른 공간 배치는 조선시대 풍수설과 유사하며 하서주·중원소경·서원소경·무진주·완산주·금관소경·남원소경·사벌주 등 8개소의 치소에 남아 있는 읍성이 그 사례로 파악된다[그림 16]~18. 즉 이것은 주·소경과 조선시대 읍성이 위치하는 지리적 입지가 유사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도시적 공간의 근간이 통일신라시대 때 형성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종합하면, 통일신라 지방도시의 치소는 대부분 풍수지리적 입지에 도시적 공간이 단계별로 구획되었다. 치수에 따라 자연스럽게 도시적 공간의 정비가 이루어졌고 격자형 가로망으로 공간이 구획되어 고대도시의 기본적인 틀이 갖추어졌다. 그리고 한정된 계획 범위만 먼저 구획되었고 이후 외곽으로 도시적 공간이 확장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았다. 도시계획 범위에 위치하는 조선시대 읍성이 통일신라시대 격자형 가로망을 바탕으로 축성된 점을 보면 도시적 공간 형성의 근간은 통일신라시대 때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통일신라의 격자형 가로망 구획으로 시행된 도시적 공간은 그대로 고려~조선을 거쳐 지금까지 이 일대의 중심 공간으로 활용되었고 당시의 가로망은 후대의 읍성 축조 및 도시 확장으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따라 어느 시점부터 일부는 파괴되고 그 시대의 도시공간으로 재창출되면서 공간적 활용에 따른 중복 양상은 누적되었다.
통일신라시대 9주 5소경 치소의 도시구조는 장방형 유형과 방형 유형으로 구분되며 남원소경과 사벌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중심 축선이 지리적 지형에 따라 공간이 구획되었다. 격자형 가로망에 의한 구획12으로 지방 도시가 정비되었던 시기는 658년 하서주 설치부터 687년 사벌주 설치까지이며 신문왕대에 집중적으로 실시되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9주 5소경 치소의 도시구조 유형을 구분하는 중요한 획기는 나당 전쟁의 승리로 비로소 삼국통일을 완수한 시기(Ⅰ기)와 이후 진골 귀족 세력 견제와 왕권 강화를 통해 통일국가로서 체제를 정비하는 시기(Ⅱ기)로 구분될 수 있다13.
Ⅰ기(676년 이전)의 도시구조 유형은 나당 전쟁 승리(676년) 이전에 설치된 치소로 하서주·한산주·수약주·중원소경이 그 사례이다. 모두 옛 고구려 영역에 설치된 치소로 구획 형태는 평면 장방형이고 중심부 중심 축선에 절반구획이 없다.
Ⅱ기(680~687년)의 도시구조 유형은 2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1유형은 옛 백제 영역(불분명한 완산주 제외)에 설치된 치소로 완산주·서원소경·웅천주·무진주가 그 사례이다. 구획 형태는 평면 장방형이고 중심부 중심 축선에는 절반구획이 있다. 2유형은 옛 신라와 가야 영역(남원소경 제외)에 설치된 치소로 금관소경·청주·남원소경·사벌주가 그 사례이다. 구획 형태는 평면 방형이고 중심부 중심 축선에는 절반구획이 있다.
한편 중심부 중심 축선의 중앙 1열 규모는 청주·완산주·남원소경·웅천주는 80m 로 685~686년에 정비되었고 무진주와 사벌주는 100m~120m 로 686~687년에 정비된 점으로 볼 때 정비 시기에 따라 규격의 차이가 보인다. 그리고 그 기능에 대해 박태우(1987, 76쪽)와 야마다 타카후미(山田隆文, 2008, 38쪽)는 남북대로로 추정하였다. 하지만 그 규격이 80m~120m 로 당시 지방도시 치소의 남북대로로 보기에는 너무 넓다고 생각된다. 이 문제는 관청의 위치와 함께 결국 고고자료를 통해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구획 범위의 중앙부의 북변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중심 관청에서 남쪽으로 연결되는 남북도로가 있고 이것으로 좌우 공간이 축소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된다.
12) 격자형 가로망에 의한 구획은 도성 등 중심 취락에 도시적 주민의 집주(集住)와 최고 지배자의 거소를 비롯한 각급 계층별 및 직능별 주거지 배치 등의 새로운 공간 구분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시행되었다(박순발, 2024, 5쪽).
13) 하지만 주와 소경은 설치 배경이나 그 지역의 역사적 배경에는 차이점이 있지만 격자형 가로망에 의한 도시구조에서는 차이점이 확인되지 않는다.
4) 치소의 중심지 이동
사벌주의 중심지 이동[종래의 산성(이부곡토성) 대신 교통과 행정 운영에 유리한 평지지역(현 상주시가지)으로 중심지 이동] 사례는 통일신라 지방도시 형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전형을 보여준다. 그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웅천주와 금관소경 등 옛 도읍(都邑)을 제외하고는14 대부분 치소를 이동하여 계획도시로 정비되었다15. 치소 이동과 관련하여 세부적으로 보면 2가지 유형으로 파악된다. 1유형은 신라 영역화 과정의 거점지역에서 통일신라시대 때 새롭게 중심지가 형성된 곳으로 수약주(우두동에서 춘천 시내로 이동) · 중원소경(탑평리에서 충주 시내로 이동) · 사벌주(사벌국면에서 상주 시내로 이동)가 그 사례이다. 2유형은 옛 백제의 거점지역에서 통일신라시대 때 새롭게 중심지가 형성된 곳으로 서원소경(무심천 서쪽에서 청주 시내로 이동) · 북원소경(남한강 유역에서 원주 시내로 이동) · 무진주(나주에서 광주 시내로 이동)가 그 사례이다. 이러한 중심지 이동을 통해 신라는 영토와 민(民)을 전면적으로 재배치함으로써 기존 재지세력을 견제하였는데 이것은 사민(徙民) 그리고 국가권력에 의한 지방 지배와 수취체계의 정비와 관련한 재배치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측면에서 신라의 9주 5소경 지방도시 건설은 신라의 지방지배강화에 있어서 가장 큰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그림 19]
이와 관련하여 689년(신문왕 9) 신라의 달구벌(현 대구광역시) 천도 계획이 주목된다. 이는 신문왕이 장산성(현 경산시)에 행차하고 서원경성(현 청주시)을 축조하였으며, 바로 이 때에 달구벌로 도읍을 옮기려다 성사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16.
신문왕(681~691년)이 삼국 통합을 마무리하기 위해 추진한 일련의 작업들을 최종적으로 일단락 짓고자 시도한 것이 바로 달구벌로의 천도였다. 천도를 하고자 하는 이유와 관련된 학계의 연구성과로는 신라가 전통적인 진골 귀족 세력의 굴레를 벗어나 통일왕국으로서의 새로운 출발을 도모하기 위한 의도에서 달구벌천도를 기획하였다는 견해(이영호, 2004, 105쪽)와 신문왕이 강력한 왕권 확립을 목표로 하여 추진한 여러 개혁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달구벌로의 천도를 기획하였다고 보는 견해(전덕재, 2009, 117-120쪽) 등이 있다. 그리고 신문왕이 천도를 포기한 이유는 대부분 진골 귀족들의 강력한 반발과 막대한 재정적 비용의 부담에 주목하였고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천도 후에 뒤따를 엄청난 구조 변동을 스스로 감내하기 어려웠던 사정에서 기인한 것이라 하겠다(주보돈, 2023, 1쪽).
14) 웅천주는 475~538년까지 웅진 백제의 수도로 전통적인 백제 지역의 중심지이다. 금관소경은 금관가야의 중심지로 정복지의 옛 이름을 그대로 쓴 것이 특징이다.
15) 그 예로 수약주 · 중원소경 · 북원소경 · 무진주 · 서원소경 · 사벌주 등이 있다.
16)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 신문왕, “九年 秋閏九月二十六日, 幸獐山城, 築西原京城, 王欲移 도逹句伐, 未果(689년 가을 9월 26일 왕이 장산성에 행차하였다. 서원경성을 축성하고 왕이 달구벌로 도읍을 옮기려 하다가 실행하지 못하였다)”.
2. 사벌주 치소의 지리학적 특수성
9주의 치소는 신라 중고기 영토 확장 과정에서 확인된 지정학적 거점지역에 위치한다. 이곳은 왕경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결절지이면서 지역의 중심지에 위치했을 뿐만 아니라 지방 통치에 필요한 다양한 기능을 집적하여 공간 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사벌주의 치소는 영남 북부지역에 위치하여 북쪽에서 넘어오는 모든 길은 소백산맥을 넘어 상주로 연결되고 또한 영남지방의 젖줄인 낙동강 상류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영남 문물의 결절지라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 지리적 위치에 해당된다[그림 20]
한편 소경은 삼국통일 이전의 3소경(아시촌소경·국원소경·북소경)에서 5소경으로 확대, 재편되었다. 특히 5소경의 설치 위치는 원(原) 신라 지역이 아닌 소백산맥 외곽과 낙동강 하류 등 신라의 정복지로 주치와 주치를 연결하는 교통로의 요충지이고 중간 거점(금관소경 제외)에 해당된다[그림 21]
17) 모두 교통로상의 결절지이며, 또한 당시의 중요 물류인 철의 생산이 풍부한 곳이다.
사벌주 치소는 한강 이남의 내륙 중앙부에 위치하면서 서변은 거의 소백산맥을 넘어 호서지방의 충청북도와 경계를 이루고 다른 방향으로는 모두 영남지방의 경상북도 내 여러 시·군과 경계를 이룬다. 그리고 중원소경과 서원소경, 사벌주는 65㎞ 내외의 등거리에 위치하면서 삼각축을 이루는 고대 교통로의 결절지이다. 특히 낙동강 유역의 곡창지(함창평야·풍산평야·안계평야)에서 생산되는 물류의 결절지이기도 하다. 또한 한강 유역의 한산주와 수약주에서 생산되는 물류는 최종적으로 중원소경으로 운송되고 금강 유역의 웅천주에서 생산되는 물류는 서원소경에 집하(集荷)되어 육로를 통해 사벌주로 운송되었을 것이다[그림 20·21]1819.
이렇게 여러 지역, 즉 9주 가운데 4개 주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생산된 물류를 사벌주에 집중적으로 집산한 뒤, 이를 대규모로 신라 왕경으로 운송함으로써 물류 운영의 효율성을 크게 높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집산‧일괄 운송 방식은 운송 횟수를 줄이고 인력과 비용을 절감하는 동시에 왕경에 대한 안정적인 물자 공급을 가능하게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무거운 곡물을 수운을 통해 최대한 금호강 상류까지 가지고 온 뒤에 임고군(현 영천)에서 육로를 통해 왕경으로 운송되었을 것으로 파악된다[그림 22]
한편 주치 이동과 관련하여 685년(신문왕 5)에 9주 5소경이 완비된 후 3개 주(웅천주·무진주·사벌주)의 주치 이동이 있었다[표 7]. [그림 21]를 보면, 사벌주의 경우처럼 완산주와 남원소경 그리고 무진주 또한 50㎞ 내외의 등거리에 위치하면서 삼각축을 이룬다. 이는 686년(신문왕 6) 발라주(현 나주)에서 무진주로 주치를 이동했기 때문이다. 주치의 이동은 소경의 설치 위치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고 판단된다.
18 서원소경과 중원소경 치소는 소속된 주 영역 내에서 가장 외곽에 위치하면서도, 사벌주 방면과 가장 인접한 교통로상의 결절지에 자리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지방 행정 거점이 아니라, 인접 주와의 연결 및 광역 교통을 고려한 입지 선택이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이들 지역은 왕경으로 통하는 주요 간선 교통로상에 위치하여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중간 거점 역할을 수행하였다.
19 지방의 왕경으로 가져오는 데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물류의 결절지에 소경을 설치하고 지배층을 나가 살게 하여 그 물자의 일부를 소비할 수 있도록 하였다(여호규, 2002, 139-152쪽).
Ⅳ. 맺음말
통일신라 지방도시의 치소는 영토 확장과 행정체제 정비과정에서 지정학적 거점에 설치되어 왕경과 지방을 연결하는 통치 및 교통의 핵심 역할을 수행하였다. 본 연구는 사벌주의 고고학적 사례를 통해 통일신라 지방도시의 공간적 특성과 그에 내포된 정치적·경제적 함의를 고찰하고자 하였다.
사벌주는 영남 서북부의 교통 요충지로, 소백산맥을 넘어 북부로 통하는 관문에 위치하며, 낙동강 상류의 자연적 조건을 기반으로 영남 지역의 물자가 집결하는 결절점이었다. 한강 유역과 금강 유역에서 생산되는 물류는 각각 중원소경과 서원소경을 거쳐 육로로 사벌주로 집하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낙동강 유역 곡창지에서 생산되는 물자 역시 사벌주를 경유하여 수운을 이용해 신라 왕경으로 운송됨으로써 효율성을 높였다. 이러한 점에서 사벌주는 단순한 지방 행정 중심지를 넘어 영남 내륙 물류체계의 핵심 거점으로 기능하였다.
삼국 통일 이후 신라는 지방 행정체제를 재편하며, 687년(신문왕 7) 사벌주의 치소를 기존 산성 중심 방어도시에서 평지형 계획도시로 전환하였다. 도시 내부는 격자형 가로망으로 구획되었으며, 중심부에는 행정·주거·상업 공간, 주변부에는 종교·생산 공간, 배후에는 입보성을 포함한 복합 구조가 형성되었다. 특히 방형(9방×9방) 도시 구획 체계는 『주례』 「고공기」의 원리를 반영한 것으로, 신라가 자연발생적 읍락 구조를 탈피하여 중앙 계획원리를 지방에 이식한 과정을 보여준다. 사벌주는 통일신라의 행정·경제 통합정책이 구체화된 지방계획도시의 전형이자,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는 지역 중심도시 구조의 기원을 제시하는 중요한 고고학적 사례로 평가된다.
아울러 9주 5소경의 치소들도 설치 시기와 지역별 입지 조건에 따라 세부 구조에 차이가 있으나, 모두 일정한 격자형 도로망과 계획적 도시구조를 갖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지방도시 정비는 658년 하서주 설치에서 687년 사벌주 설치에 이르기까지 신문왕대를 중심으로 집중 추진되었으며, 통일국가 행정체제가 완비되는 계기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사벌주 치소의 입지와 도시구조 분석은 통일신라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지역 공간 속에서 어떻게 구체화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실증적 사례를 제공하며, 통일신라 지방도시의 공간적 특성과 정치적·경제적 함의를 고찰하는 데 학술적 의의를 가진다.




[표 2] 『삼국사기』 지리지 [경덕왕 16년(757)]로 본 사벌주 영역
| 연번 | 표제명 | 본명 | 금명(고려) | 현위치 | 영현 | 본명 | 금명(고려) | 현위치 |
|---|---|---|---|---|---|---|---|---|
| 1 | 상주(尙州) | 사벌국(沙伐國) → 상주(524) → 사벌군(557) → 사벌주(687) |
상주(尙州) | 상주시 | 청효현(靑驍縣) | 음리화현(音里火縣) | 청리현(靑理縣) | 상주시 청리면 |
| 다인현(多仁縣) | 달이현(達巳縣) | 다인현(多仁縣) | 의성군 다인면 | |||||
| 화창현(化昌縣) | 지내미지현(知乃彌知縣) | · | 상주시 내서면 | |||||
| 2 | 예천군(醴泉郡) | 수주군(水酒郡) | 보주(甫州) | 예천군 예천읍 | 영안현(永安縣) | 하지현(下枝縣) | 풍산현(豊山縣) | 안동시 풍산읍 |
| 안인현(安仁縣) | 난산현(蘭山縣) | · | 문경시 동로면 | |||||
| 가유현(嘉猷縣) | 근품현(近品縣) | 산양현(山陽縣) | 문경시 산양면 | |||||
| 은정현(殷正縣) | 적아현(赤牙縣) | 은풍현(殷豊縣) | 예천군 은풍면 | |||||
| 3 | 고창군(古昌郡) | 고타야군(古陁耶郡) | 안동부(安東府) | 안동시 | 직녕현(直寧縣) | 일직현(一直縣) | 일직현(一直縣) | 안동시 일직면 |
| 일계현(日谿縣) | 열혜현(熱兮縣) | · | 의성군 옥산면 | |||||
| 고구현(高丘縣) | 구화현(仇火縣) | 의성부(義城府) | 의성군 단촌면 | |||||
| 4 | 문소군(聞韶郡) | 소문군(召文郡) | 의성부(義城府) | 의성군 금성면 | 진보현(眞寶縣) | 칠파화현(柒巴火縣) | 보성(甫城) | 의성군 의성읍 |
| 비옥현(比屋縣) | 아화옥현(阿火屋縣) | 비옥현(比屋縣) | 의성군 비안면 | |||||
| 안현현(安賢縣) | 아시혜현(阿尸兮縣) | 안정현(安定縣) | 의성군 안계면 | |||||
| 단밀현(單密縣) | 무동미지현(武冬彌知縣) | 단밀현(單密縣) | 의성군 단밀면 | |||||
| 5 | 숭선군(嵩善郡) | 일선군(一善郡) → 일선주(614) → 일선군(687) |
선주(善州) | 구미시 해평면 | 효령현(孝靈縣) | 모혜현(芼兮縣) | 효령현(孝靈縣) | 군위군 효령면 |
| 이동혜현(尒同兮縣) | · | · | 군위군 의흥면 | |||||
| 군위현(軍威縣) | 노동멱현(奴同覓縣) | 군위현(軍威縣) | 군위군 군위읍 | |||||
| 6 | 개령군(開寧郡) | 감문소국(甘文小國) → 감문주(557) → 감문군(661) |
개령군(開寧郡) | 김천시 개령면 | 어모현(禦侮縣) | 금물현(今勿縣) | 어모현(禦侮縣) | 김천시 감문면 |
| 김산현(金山縣) | 김산현(金山縣) | 김산현(金山縣) | 김천시 부곡동 | |||||
| 지례현(知禮縣) | 지품천현(知品川縣) | 지례현(知禮縣) | 김천시 지례면 | |||||
| 무풍현(茂豐縣) | 무산현(茂山縣) | 무풍현(茂豐縣) | 무주군 무풍면 | |||||
| 7 | 영동군(永同郡) | 길동군(吉同郡) | 영동군(永同郡) | 영동군 영동읍 | 양산현(陽山縣) | 조비천현(助比川縣) | 양산현(陽山縣) | 영동군 양산면 |
| 황간현(黃澗縣) | 소라현(召羅縣) | 황간현(黃澗縣) | 영동군 황간면 | |||||
| 8 | 관성군(管城郡) | 고시산군(古尸山郡) | 관성군(管城郡) | 옥천군 옥천읍 | 이산현(利山縣) | 소리산현(所利山縣) | 이산현(利山縣) | 옥천군 이원면 |
| 안정현(安貞縣) | 아동혜현(阿冬号縣) | 안읍현(安邑縣) | 옥천군 안내면 | |||||
| 9 | 삼년군(三年郡) | 삼년산군(三年山郡) | 보령군(保齡郡) | 보은군 보은읍 | 청천현(淸川縣) | 살매현(薩買縣) | 청천현(淸川縣) | 괴산군 청천면 |
| 기산현(耆山縣) | 굴현(屈縣) | 청산현(靑山縣) | 옥천군 청산면 | |||||
| 10 | 고령군(古寧郡) | 고령가야국 → 고동람군(古冬攬郡) |
함녕군(咸寧郡) | 상주시 함창읍 | 가선현(嘉善縣) | 가해현(加害縣) | 가은현(加恩縣) | 문경시 가은읍 |
| 관산현(冠山縣) | 관현(冠縣) | 문경현(聞慶縣) | 문경시 문경읍 | |||||
| 호계현(虎溪縣) | 호측현(虎側縣) | 호계현(虎溪縣) | 문경시 호계면 | |||||
| 11 | 화령군(化寧郡) | 답달비군(答達匕郡) | 화령군(化寧郡) | 상주시 화서면 | 도안현(道安縣) | 도량현(刀良縣) | 중모현(中牟縣) | 상주시 모동면 |
표 3 상주시 중심부의 기 조사현황(※유적번호는 그림 2·3 참조)
| 연번 | 유적 | 지번 | 조사현황(수량) | 참고문헌 | 유적번호 |
|---|---|---|---|---|---|
| 1 | 복룡동유적 | 256 | 통신~조선 : 건물지(32), 연못(1), 우물(81), 수혈(409), 구(24), 기타(135) | 영남문화재연구원, 2008, 『상주 복룡2지구 주택건설부지내 상주 복룡동 256번지유적 Ⅰ-Ⅳ』. | ① |
| 230-3 | 통신~조선 : 건물지(16), 우물(31), 수혈(291), 구(10) | 영남문화재연구원, 2009a, 『상주 복룡동 아파트 건설부지내 상주 복룡동 230-3번지유적 Ⅰ-Ⅱ』. | |||
| 10-4 | 통신~조선 : 건물지(14), 우물(36), 수혈(147), 구(16), 연못(1), 기타(2) | 영남문화재연구원, 2009b, 『상주 중앙로(제2철길)확장구간내 상주 복룡동 10-4번지유적 Ⅰ-Ⅱ』. | |||
| 397-5 | 통신~조선 : 적심(5), 우물(4), 수혈(11), 구(1), 기타(1) | 영남문화재연구원, 2006, 『상주 제2건널목 입체화 시설공사부지내 상주 복룡동 397-5번지유적』. | |||
| 342-3 | 통신~조선 : 수혈(48), 우물(2), 구(6) 등 91기 확인 | 영남문화재연구원, 2004, 「상주 복룡3지구 주택건설부지내 유적 문화재 시굴조사 약보고서」. | |||
| 2 | 복룡동 | 299 | 초기철기 유물(지표수습) 통신~조선 문화층 | 대경문화재연구원, 2007. 5, 「상주 복룡동 299번지 단독주택 건립부지 내 문화유적 시굴조사 보고서」. | ⑤ |
| 283-78 | 조선 : 적심, 석렬, 추정건물지 등 확인 |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2011. 6, 「상주시 복룡동 283-78번지 1종근린생활시설 부지내 문화재 발(시)굴조사 약보고서」. | ⑲ | ||
| 283-93 | 조선 : 건물지(1), 수혈(10), 구(1) | 세종문화재연구원, 2014. 3, 「상주 복룡동 283-93번지 근린생활시설 신축공사부지내 유적 국비지원 문화재 정밀발굴조사 약식보고서」. | |||
| 283-20 | 조선 : 건물지, 수혈, 우물, 주혈, 구 등 75기 확인 |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2014. 3, 「상주 복룡동 283-93번지 근린생활시설 신축공사부지내 유적 국비지원 문화재 정밀발굴조사 약식보고서」. | |||
| 293-13 | 통신 : 적심(9), 수혈(3), 구(2) | 세종문화재연구원, 2014. 4, 「상주 복룡동 293-13번지 단독주택 신축공사부지내 유적 국비지원 문화재 정밀발굴조사 약식보고서」. | |||
| 283-79 | 통신 : 수혈(2) 고려 : 주거지(3), 수혈(4), 구(2) 조선 : 구(1) | 세종문화재연구원, 2014. 4, 「상주 복룡동 283-79, 283-81번지 근린생활시설 신축부지내 유적 국비지원 문화재 정밀발굴조사 약식보고서」. | ⑥ | ||
| 282 | 조선 : 건물지(1), 노지(3), 수혈(5), 주혈(24) | 한국문화재연구원, 2015. 2, 「상주 복룡동 282번지 건축물 신축부지 내 유적 국비지원 발굴조사 약보고서」. | |||
| 259-1 | 통신~조선 생활유적 확인 *복룡동유적과 접한 동쪽부분(유적有) | 금오문화재연구원, 2017. 6, 「상주 복룡동유적지 주변 도시계획소로(1-24) 개설공사 구간내 시굴조사 약식보고서」. | ㉒ | ||
| 326 | 통신 : 건물지(2), 우물(2), 소성유구(1), 수혈(5) | 한빛문화재연구원, 2017. 12, 「상주 복룡동 326번지 근린생활시설 신축부지 내 문화재 발굴조사 약보고서」. | ② | ||
| 342-37 | 통신 : 수혈(8), 주혈(6) | 한국문화재재단, 2018. 6, 「소규모 국비지원 발굴조사 약식보고서 -상주 복룡동 342-37번지 단독주택 신축부지내 유적-」. | ③ | ||
| 335-1 | 통신 : 건물지(4), 주거지(13), 적심(7), 주혈(4) ; 조선시대 : 우물(2) | 한빛문화재연구원, 2019. 5, 「상주 복룡동(335-1번지) 농어업시설 신축부지 내 유적 문화재 발굴조사 약보고서」. | ② | ||
| 331 | 초기철기 : 구(1); 통일신라 : 수혈(1) 조선 : 수혈(10), 건물지(1), 부석(2) | 금오문화재연구원, 2019. 6, 「상주 복룡동유적지 주변 도시계획소로(3-178) 개설공사구간내 유적 매장문화재 발굴조사 약식보고서」. | ④ | ||
| 268 | 청동기 : 수혈(8), 주혈(5) 조선 : 집석유구(1) | 한국문화재재단, 2020. 11, 「상주 복룡동 268번지 근린생활시설 신축부지 내 유적 국비지원 발굴조사 약보고서」. | ㉒ | ||
| 277-4 | 조선 : 주거지(1), 굴립주(2), 집석(1), 수혈(10), 소성(2), 구(1), 매납(1), 주혈 | 대경문화재연구원, 2021. 12, 「상주 복룡동 277-4번지 자동차세차장부지 내 유적 국비지원 발굴조사 약보고서」. | ⑲ | ||
| 230-10 | 통신 : 주거지(3), 우물(1), 구(3), 생산(6), 적석(8) 외 고려~조선(397) | 미래문화재연구원, 2022, 「상주 두드림 시립도서관(생활문화센터) 건립 문화재 발굴조사 용역 약식보고서」. | ㉔ | ||
| 248 | 통신~조선 : 도로(1) 조선 : 건물지(1), 적심(1) | 금오문화재연구원, 2022. 8, 「상주 복룡동유적지 주변 도시계획도로 소로(1-32) 개설부지내 매장문화재 정밀발굴조사 약식보고서」. | ㉓ | ||
| 280 | 고려~조선 : 도로(1), 삼가마(2), 수혈(16), 적심(5), 굴립주건물지(1), 우물(1), 배수로(1), 노지(1) 외 주혈군 | 금오문화재연구원, 2022. 8, 「상주 복룡동 280번지 일원 다가구주택 신축공사부지 내 유적 매장문화재 정밀발굴조사 약식보고서」. | ⑲ | ||
| 293-39 | 통신 : 도로(1), 건물지(6), 주거지(1), 수혈(14), 구(4), 우물(1), 기타(33) 조선 : 적심(1), 수혈(10), 기타(21) | 금오문화재연구원, 2023. 6, 「상주 제일하이츠 빌라-대전고물상 소로(3-64) 개설공사부지내 매장문화재 정밀발굴조사 약식보고서」. | ⑥ | ||
| 3 | 인봉동 | 21-5 | 통신~조선 : 건물지(1), 주거지(1), 수혈(4), 적심(1) | 한국문화재재단, 2012. 3, 『상주 인봉동 21-5, 14번지 단독주택 신축부지 내 문화유적 국비지원 발굴조사 약보고서』. | ⑫ |
| 76-2 | 조선 : 우물(1), 석렬(1), 수혈(1), 집석(2), 구(2) | 계림문화재연구원, 2012, 『상주 인봉동 76-2번지 유적-건물신축 건립 부지-』. | ⑬ | ||
| 73-7 | 조선 : 건물지(6), 해자(1) 근현대 : 건물지(6), 수로(1), 배수로(1) | 상주박물관, 2020. 12, 『상주읍성지(인봉동 73-7번지) 학술발굴조사 약보고서』. | ⑭ | ||
| 35-5 | 여말선초 : 수혈(3) 조선 : 읍성 성벽 기저부 등 | 한국문화재재단, 2021. 5, 『상주 인봉동 35-5번지 근린생활시설 신축부지 내 유적 국비지원 발굴조사 약보고서』. | |||
| 41-1 | 조선 : 수혈(1) 조선~근대 : 석렬(1), 소성(1) | 한국문화재재단, 2022. 1, 『상주 인봉동 41-1번지 근린생활시설 신축부지 내 유적 국비지원 발굴조사 약보고서』. | ㉕ | ||
| 4 | 성동동 | 61-6 | 조선 : 수혈(3) | 세종문화재연구원, 2011, 「상주 성동동 61-6번지 일원 공동주택 신축부지내 유적 문화재 발굴(시굴)조사 약보고서」. | ⑧ |
| 61 | 통신~조선 : 적심(7), 석축(1), 우물(1), 주혈(15) | 세종문화재연구원, 2012, 『상주 성동동 61번지 유적』. | |||
| 61-8 | 초기철기 : 수혈(2) 통신 : 수혈(15), 주혈(11) | 세종문화재연구원, 2012, 『상주 성동동 61-8번지 유적』. | |||
| 81 | 통신~고려 : 건물지(2), 적심(12), 담장(1), 수혈(1), 구(3) | 한국문화재재단, 2015, 『2013년도 소규모 발굴조사 보고서Ⅹ-상주 성동동 81번지 유적-』. | ⑦ | ||
| 81-1 | 통신~고려 : 건물지(1), 적심(4), 우물(1), 담장(1), 수혈(18), 구(4), 주혈(14) | 한국문화재재단, 2015, 『2013년도 소규모 발굴조사 보고서Ⅹ-상주 성동동 81-1번지 유적-』. | |||
| 157-9 | 조선 : 집석(1), 주혈(1), 고상건물지(1) | 한국문화재재단, 2015, 『2013년도 소규모 발굴조사 보고서Ⅹ-상주 성동동 157-9번지 유적-』. | ⑩ | ||
| 64-7 | 조선 : 수혈(2), 소성유구(1), 유물포함층 | 동국문화재연구원, 2017. 6, 「상주 복룡동 도시계획도로(소로1-18, 3-149) 문화재 발굴(시굴)조사 결과보고서」. | ⑪ | ||
| 120-1 | 청동기 : 주거지(1), 조선 : 적심(2) 등 통신 : 수혈(1); 시대미상 : 수혈(1) | 금오문화재연구원, 2017. 7, 「상주 동성동 주민센터 본관증축공사부지내 유적 매장문화재 정밀발굴조사 약보고서」. | ⑦ | ||
| 76-4 | 고려~조선 : 수혈(6) | 한국문화재재단, 2018. 5, 「소규모 국비지원 발굴조사 약식보고서 -상주 성동동 76-4번지 근린생활시설 신축부지내 유적-」. | |||
| 149-7 | 조선 : 수혈(10), 구(2), 집석(1) | 한국문화재재단, 2018. 5, 「상주 성동동 149-7번지 농업용 창고 신축부지 내 문화유적 국비지원 발굴조사 약보고서」. | ⑨ | ||
| 157-13 | 통신 : 주거지(1), 수혈(1) 조선 : 수혈(1), 주혈(8) | 한빛문화재연구원, 2021. 7, 「상주 성동동 157-13번지 도시재생 뉴딜사업 신축공사 문화재 발굴조사 결과보고서」. | |||
| 5 | 서성동 | 163-48 | 통신~고려 : 문화층 확인(도로확인) 조선 관아시설 관련 유구 | 영남문화재연구원, 2013, 『상주 왕산역사공원 조성공사 사업부지내 상주 관아유적』. | ⑮ |
| 163-82 | 통신~고려 : 문화층 확인(유물출토) 조선 관아시설 관련 유구 | 세종문화재연구원, 2017, 『상주 왕산공원 조성사업부지내 상주목 관아유적』. | |||
| 6 | 무양동 | 152 | 고려~조선 : 건물지(2), 주거지(62), 수혈(118), 구(1), 우물(15) 등 | 대동문화재연구원, 2011, 『상주 무양동 152유적Ⅰ·Ⅱ-』. | ⑯ |
| 179-2 | 고려~조선 : 수혈(23), 구(11), 주혈(10) | 한국문화재보호재단, 2013, 「상주 무양동 179-2번지 근린생활시설 신축부지 내 발굴조사 약보고서」. | ⑰ | ||
| 1-5 | 조선 석축 제방시설 확인 | 영남문화재연구원, 2014. 4, 『상주시 무양동 1-5번지 일원 주택건설사업장 내 유적 문화재 발굴조사 약보고서』. | ⑱ | ||
| 156-5 | 조선 : 건물지(1), 주거지(1), 수혈(10), 구(2), 주혈(17) | 세종문화재연구원, 2015. 1, 「상주 무양동 156-5번지 근린생활시설부지 내 유적(국비) 문화재 발굴조사 약식보고서」. | |||
| 156-4 | 고려~조선 : 수혈(19), 우물(1), 소성유구(1), 구(7), 주혈(10) | 한국문화재재단, 2015. 2, 「상주 무양동 156-4번지 근린생활시설 신축부지 내 문화유적 국비지원 발굴조사 약보고서」. | ⑰ | ||
| 202-1 | 고려~조선 : 수혈(8) | 다온문화재연구원, 2017. 12, 「상주 무양동(202-1번지 근린생활시설 신축부지내 유적 국비지원 발굴조사 약보고서」. | |||
| 138 | 조선 : 수혈(208), 삼가마(5), 우물(18), 주혈(36) | 화랑문화재연구원, 2019. 5, 「상주 무양동 138번지 일원 아파트 신축부지 내 유적 문화재 발굴조사 약보고서」. | |||
| 7 | 성하동 | 2-1 | 조선 : 연지(1), 건물지(1) 조선~근대 : 배수로(1), 담장(1) 등 | 해동문화재연구원, 2022. 10,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상주사무소 청사 신축부지 내 문화재 발굴조사 약보고서」. | ㉕ |
| 8 | 냉림동 | 43-1 | 유적 없음 | 대동문화재연구원, 2009. 11, 「상주 냉림동 43-1번지 일원 공동주택 신축공사부지내 문화재 시굴조사 보고서」. | ⑳ |
| 2-1 | 유적 없음 | 대동문화재연구원, 2010, 「상주 냉림동 2-1번지 일원 주유소 신축부지 내 문화재 발굴(시굴)조사 약보고서」. | ㉑ |
[표 6] 복룡동 256번지유적 주거시설과 『삼국사기』 옥사조 비교
| 신분 \ 내용 | 문 헌 | 당척대입 | 제한면적 | 일반 주거건물지 (제2군) | 일반 주거건물지 (제3군) | 일반 주거건물지 (제4군) | 일반 주거건물지 (제5군) | 일반 주거건물지 (제6군) | 수혈 주거지 |
|---|---|---|---|---|---|---|---|---|---|
| 진 골 | 24척(尺) | ≒ 708cm | ≒ 50.13m² | · | ○ | ○ | ○ | · | · |
| 6두품 | 21척(尺) | ≒ 620cm | ≒ 38.44m² | ○ | · | · | · | · | · |
| 5두품 | 18척(尺) | ≒ 531cm | ≒ 28.20m² | · | · | · | · | · | · |
| 4두품 | 15척(尺) | ≒ 443cm | ≒ 19.62m² | ·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