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말~17세기 초 조선의 화기혁명과 『神器秘訣』의 화기론
The Firearms Revolution of Joseon in the Late 16th and Early 17th Centuries and the Theory of Firearms in Singibigyeol
1 국방대학교
1 Korea National Defense University
DOI: https://doi.org/10.71244/jojm.2025.35.345
초록
이 논문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조선에서 일어난 화기 중심의 군사적 변화와 한효순의 병서 『신기비결(神器秘訣)』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분석하고 있다. 임진왜란은 동아시아의 군사 과학 기술이 교류되고 화약 무기가 전면적으로 사용된 대규모 전쟁이었다. 전쟁 중 화력의 우위가 승패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로 부각되었으며, 이는 전술, 군수, 제도 등 군사 체제 전반의 '군사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먼저 개인 화기의 발전으로 16세기 중반 여진족 대응 과정에서 철환을 발사하는 '승자총통'이 개발되었으며, 이후 사거리와 명중률을 높인 여러 형태의 승자총통으로 개량되었다. 임진왜란 중에는 일본의 조총이 도입되어 전쟁의 판도를 바꾸었으며, 조선은 이를 모방 제작하고 포수를 양성하는 데 주력하였다. 또한 새로운 대형 화기도 개발, 도입되었는데 명나라 군을 통해 '불랑기', '호준포' 등 신형 화포가 소개되었다. 불랑기는 빠른 연사가 가능한 후장식 화포였고, 호준포는 가벼워 야전에서 운용하기 편리하였다. 아울러 기존 화기의 변화도 나타났는데, 천자총통 등 전통적인 대형 총통도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 총신이 길어지고 구경이 작아지는 형태로 개량되었다. 다양한 화기가 도입되면서 성능이 제각각이었고, 이로 인해 통일된 전술 체계를 마련하는 데 어려움이 발생했다. 17세기 초 한효순이 편찬한 『신기비결』은 이러한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화기의 제작법, 장약량, 발사법 등을 정리하여 무기 체계의 표준을 제시했다. 『신기비결』은 단순히 화기 사용법을 정리한 책을 넘어, 임진왜란 이후 급변한 군사 환경 속에서 화기의 표준화를 통해 국방력을 강화하고 통일된 전술 체계를 확립하려 했던 조선의 노력을 상징한다.
Abstract
This study analyzes the military changes centered on firearms in Joseon from the late 16th to the early 17th century and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Han Hyo-sun's military manual, Singibigyeol. The Imjin War was a large-scale conflict where East Asian military science and technology were exchanged, and gunpowder weapons were used extensively. The superiority of firepower emerged as a key factor in determining victory, leading to "military revolutionary" changes across the military system, including tactics, logistics, and institutions. Specifically, individual firearms evolved from the 'Seungja-chongtong' developed in the mid-16th century to various improved versions with enhanced range and accuracy. During the Imjin War, the introduction of Japanese muskets (Jochong) changed the course of the war, and Joseon focused on replicating them and training musketeers. New heavy firearms like 'Bullanggi' and 'Hojunpo' were also introduced via the Ming army. To address the lack of uniformity in firearm performance, Han Hyo-sun compiled Singibigyeol in the early 17th century, providing standards for manufacturing, gunpowder dosage, and firing methods. Singibigyeol symbolizes Joseon's efforts to strengthen national defense and establish a unified tactical system through the standardization of firearms amidst the rapidly changing military environment after the Imjin War.
Ⅰ. 머리말
16세기 말 일본의 조선 침공인 임진왜란은 세계전쟁사적으로 큰 전환기적인 사건이었다. 임진왜란은 동아시아의 주요 국가 모두가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규모도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대규모 전쟁이었다1. 아울러 이 전쟁을 계기로 명 중심의 동아시아 패권 질서가 붕괴되고 새로운 질서로의 출발점이기도 하였다. 군사적인 측면 자체에 집중하여 보아도 이전과는 매우 다른 혁명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먼저 동아시아 주요 3개국이 한반도에서 전투를 함에 따라 이들 국가의 군사적 능력이 여실히 드러났다. 주요 전투에서 소개된 각국의 우수한 군사과학기술은 전쟁 기간 중 각국에 전해져 많은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중국의 각종 화기는 조선과 일본에 전해졌고 일본의 조총 기술은 조선과 중국에, 그리고 조선의 대형 화포는 일본에 전해졌다. 다음으로, 화약무기가 참전 국가 모두 전쟁에서 전면적으로 사용된 최초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의 주요 전투에서 많은 화약무기가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화력(火力, firepower)의 우위에 따라 전투의 승패가 갈리게 된다2. 1593년 초에 있었던 대표적인 전투인 평양성 전투나 벽제관 전투, 행주산성 전투 등 임진왜란의 운명을 결정지었던 전투에서 화력이 강한 측이 승리를 거두었던 것은 이를 반영한다. 한편 전쟁 중 새로 도입된 여러 화약무기는 위력과 발사속도 등이 우수하였으므로 이후의 여러 전투에서 곧바로 채택되었다. 아울러 기존 화기도 새로운 화기의 영향으로 개량이 이루어지는 등 화약 무기와 관련하여 이전에 볼 수 없는 혁명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화약 무기의 개량과 대량 도입은 단순한 무기의 변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술, 군수, 제도, 성곽 등 군사체제 전반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고 이를 경제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국가의 체제 변화가 불가피하게 된다. 화약 무기의 전면적인 도입과 사회 변화에 대해 서양 역사학과 정치학에서 1950년대 이후 군사혁명(軍事革命, Military Revolution)이라는 개념을 처음 도입한 이후 여러 논쟁을 거쳐 오늘날에는 당연한 설명의 하나로 수용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서는 동아시아 군사사 연구에서도 임진왜란 전후 나타난 군사적 변화를 동아시아의 군사혁명으로 평가하는 연구가 다수 나타나 동아시아사에서도 군사혁명론은 점차 시민권을 얻고 있는 중이다3. 최근 조총을 중심으로 이해되던 근세 일본의 군사사 연구에서도 대구경 화포를 중요하게 인식하기 시작하고 있음은 주목되는 양상이다4.
임진왜란을 통해 다양한 신형 화기가 도입 또는 개량되고 새로운 군사체제인 삼수병 체제와 전술인 절강병법 등도 조선에 도입되었다. 새로운 화기와 체제의 도입은 기존의 군사체제와 충돌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이를 통일적으로 조정하지 못할 경우 기존의 체제와 새로운 체제가 공존하며 많은 비용을 발생시키게 된다. 17세기 조선에는 신구 군제가 병립하는 문제로 인해 군적상으로는 있어5 향촌 사회에서는 극심한 양정 부족 현상으로 인해 심각한 반발이 나타나기도 하였다.6 또한 군사적으로 심각한 문제는 단기간 내에 각종 화기가 도입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일한 화기의 경우에도 여러 경로를 통해 그 기술이 도입되어 성능이 제각각이었다. 화기의 성능 차이는 제작의 어려움뿐만 아니라 사거리 등 세부 제원도 달라 통일적인 전술 체계를 마련하기에도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이에 더하여 남쪽의 일본 위협과 함께 임진왜란 전후부터는 기병 중심의 북방 여진 위협도 본격적으로 나타났으므로 성격이 다른 군사적 위협에 대해 모두 대응할 수 있는 전술의 마련과 무기의 개발도 요구되었다.
군사상의 다양한 변화와 상반된 도전적 요소의 대두에 따라 이를 정리하여 통일적 무기 체계 및 전술체계 마련이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17세기 초 간행된 한효순이 저술한 화기관련 병서로 알려진 신기비결 은 임진왜란 직후 조선이 직면한 군사적 상황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반영하는 한 자료로 매우 주목된다. 그동안 이 책에 대해서는 단순히 17세기 초 조선의 화약무기 장방법(裝放法), 즉 장전과 발사 관련 내용이 수록된 병서로서만 주목받았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 책의 분량 중 병법과 관련된 내용이 화기 관련 내용보다 2배에 달할 뿐만 아니라 그의 또다른 저술로 다양한 진법에 대해 검토한 진설(陣說) 을 고려한다면 화기에 대한 내용 정리가 단순히 16세기 이전까지 조선에 도입된 다양한 화기의 내용을 단순히 정리한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화기 관련 내용의 정리는 단순히 당시 알려진 여러 화기 관련 내용을 정리한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화기의 표준화를 통해 통일된 전술 체계를 확립하기 위한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그동안 신기비결 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조선 화기발달사의 한 흐름의 일환으로 다루고 있거나 한효순의 생애와 관련하여 검토하고 있을 따름이다.7 최근에는 조선중기 화기사 연구의 일환으로 신기비결 의 여러 화약무기에 대해 구체적인 의미를 살핀 연구가 나타나 주목된다.8
본 연구는 한효순의 신기비결 이 단순한 화기 관련 병서가 아니라 17세기 초 화기의 표준화와 통일된 전술 체계 확립을 추구하던 조선의 상황을 반영하는 병서로서 의미가 있음을 밝히고 이는 조선의 군사혁명적인 변화의 양상을 반영하는 것임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통해 17세기 초 한효순의 병학자로서 재인식과 함께 신기비결 의 자료적 가치를 제고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Ⅱ. 16세기말~17세기 초 조선의 화기 개량
16세기 중반 이후 동아시아 지역의 정세 변동은 매우 유동적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농업 생산력 증가와 농촌시장의 발달을 바탕으로 16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안정적이었던 동아시아의 기존 국제질서를 근본적으로 무너뜨린 두 요소가 출현하게 된다. 하나는 은(銀) 사용의 확대이며 다른 하나는 동아시아 해상 교역의 급격한 활성화를 들 수 있다. 1540년대가 되자 명나라 북방 몽골족의 위협이 고조되었다. 몽골의 새로운 지도자로 등장한 알탄 칸(Altan Khan)이 원조(元朝)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명나라의 변경을 공격하였다. 그는 1542년 명나라 군에 큰 타격을 주고 옛 몽골의 수도인 카라코룸을 탈환하였다. 1550년에는 북경을 위협하여 이른바 경술지변(庚戌之變)을 초래하였다9. 이러한 북방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많은 군대를 주둔시킴에 따라 많은 은이 북방으로 흘러갔고 명나라 국내에서는 은 품귀현상마저 나타났다. 1540년대부터 명나라의 생사(生絲)와 교환되어 중국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일본의 은은 중국 내의 은 소요 급증에 따라 급속히 확대되었다. 은의 수요가 상승하면 위험을 무릅쓰고 명 조정의 해금정책을 피해 사적인 밀무역에 나서는 자들의 이익도 증가하게 된다. 이른바 왜구의 존재가 그것으로, 1550년을 전후하여 나타난 명나라의 북로남왜(北虜南倭)의 위기는 이러한 상황의 한 반영이었다.
유동적인 동아시아 국제정세는 조선에는 주변의 세력의 적극적인 움직임과 침입의 형태로 나타났다. 16세기 초 삼포 거주 왜인들의 반란인 삼포왜란(중종 5년, 1510년) 이후 추자도 왜구 침입(중종 17년, 1522), 황해도 풍산 일대의 왜구 침입(중종 18년, 1523) 등 왜구의 침입이 여러 차례 나타났다. 16세기 중반 왜구들이 전라도 해안지역을 습격한 을묘왜변(명종 10년, 1555) 당시 전라도 병마절도사가 전사하는 사건은 조정에 큰 충격을 주었다.
국제교역의 활성화와 서양 세력의 동아시아 지역 출현으로 대표되는 국제정세의 변화가 군사적 갈등으로 전환된 것은 이 지역의 군사적 상황의 변화에 기인하고 있다. 즉 16세기 중반 이전까지 동아시아 중심 지역인 명과 조선 두 나라만이 독점하고 있던 당시의 전략 무기인 화약무기 제조 능력이 주변 지역으로 이전되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일본에 신형 화승총인 조총(鳥銃, 일본어로는 鐵砲) 제작 기술이 전해진 것이었다. 조총의 일본 도입은 당시 동아시아 세계에서 군사적 균형을 깨는 출발점이었다.
을묘왜변 당시 왜구는 이전과 달리 중국의 선박을 모방하여 선박을 제조하여 상당히 견고하여 조선은 기존의 총통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였다. 아울러 이에 대응하기 충분한 화약무기를 보유하지 못한 조선군의 상황도 이를 어렵게 하였다. 을묘왜변이 마무리되는 과정에서 총통 문제는 심각하게 거론되었다. 선전관 박세현(朴世賢)은 1555년 6월 15일 전라도에서 서울로 복귀하고 “이준경의 말이 ‘왜적들이 녹도에서 패했을 때에 천자(天字)·지자(地字) 총통이 없어서 적선을 부수어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도망가게 만들었으니 매우 통분스럽다.’고 했습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처럼 왜변 발생 초기나 왜변 수습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위력있는 화약무기가 방어책의 핵심 사안으로 거론되고 있다. 선전관 박세현의 보고를 보면 대형 총통인 천자·지자총통이 충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보다 상대적으로 크기가 더 작은 예전의 총통으로 대처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이전에 비해 크기가 대형화된 신형 총통의 부족이 매우 심각한 상황임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북방에서는 여진족의 동향도 심상치 않았다. 조선은 세종대에 두만강 유역에 회령, 온성, 종성, 경원, 경흥 등에 진을 설치하여 여진족을 이들 진성 주변에 거주하도록 허용하였다. 조선에서는 이들을 성저야인(城底野人)이라고 불렀는데,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에 걸쳐 야인사회에서 농경의 비중이 증가하고, 중국 및 조선과의 모피 교역이 증가하면서 그 세력이 크게 성장하였다. 이들은 경제력 강화를 기반으로 세력을 강화하고 조선에 점차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였으나 조선은 소극적인 대외정책으로 인해 이들의 성장을 제대로 조정하지 못하였다. 1583년 두만강 하류의 야인인 니탕개 등이 함경도 국경지역에서 일으킨 반란인 이른바 니탕개의 난은 그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전란이었다. 이들의 대규모 침입에 대해 조선은 대규모 기병의 동원과 함께 신형 개인 화기인 승자총통의 활용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승자총통은 이전의 소형 화기와는 큰 차이가 있는 화기였다. 이전의 화기가 주로 화살 형태의 발사체를 사격하는 방식이었던 것과 달리 원형의 발사체인 철환 몇발을 장전하여 발사할 수 있는 개인 화기였다. 아울러 화기의 구조도 이전보다 총열이 길어져 사거리가 늘어나고 명중률도 개선되었다. 대형 총통은 상대의 선박이나 성곽 등 대형 표적이나 진을 펴고서 전투하는 정규군 위주의 전투방식에서는 쓸모가 있었겠지만, 기병 위주의 전력으로 분산과 집결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방식으로 전투하는 야인들을 상대할 때는 그 효과가 제한적이었을 개연성이 높다. 그러한 상황에서 철환을 사용하는 총통은 매우 효과적인 무기였다. 승자총통은 이러한 조선의 새로운 화기의 대표적인 존재였다.
승자총통은 이전에 화살을 발사하는 총통에 대비하여 작고 가벼운 철제 탄환을 쓰게 되면서 굵은 구경이 필요없게 되었고, 장전하는 탄환의 수 또한 점차 줄어들면서 구경은 줄어들게 된다. 발사체가 탄환으로 변하고 아울러 장전하는 탄환의 수가 줄어들면서 정확성이 요구되었다. 이에 따라 조준을 위한 가늠자와 가늠쇠, 그리고 총 자루[木架] 고정 장치가 등장하게 된다. 기존에 모병에 나무 자루를 끼워 사격하던 형태에서 총신 아래 총 자루를 고정하여 사격하는 형태로 전환되었다10.
승자총통과 같은 철환 발사 화기에 대해 조선은 16세기 중반 왜인들이 여러 침입 당시 철환을 사용하여 조선을 공격한 사실을 통해 그 우수한 성능을 인지하고 있었다. 명종 7년(1552) 제주목사의 보고에 따르면 왜구들은 전투 당시 방패를 배 주위에 둘러 세우고 철환을 마구 쏘는 방식으로 싸웠다. 이러한 전투 양상은 계속되었는데 7년이 지난 명종 14년(1559)에 왜선이 전라·경상·청홍·황해도에 나타났을 때, 조선인 중에 왜선에서 발사된 철환에 맞아 즉사한 사례가 있었다. 특히 전라도 구조도(仇助島)에 출현한 왜선에서 발사된 철환에 조선 수군이 응전하다가 조선의 군관과 뱃사공(蒿工)들이 전사할 정도였다. 당시 여러 전투에서 왜인들이 쏜 철환은 조선군의 참나무나 상수리나무 방패도 뚫고 조선의 군사들을 살상할 정도로 관통력이 뛰어났다. 왜구들이 화약무기에서 철환을 사용하고 그 철환의 위력이 대단한 것을 경험한 조선군도 철환 화기의 제작과 보급 확대에 집중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 직후인 1575~6년경 승자총통이 개발되었다.
최초 개발된 승자총통은 장전시 화약량은 1량(兩)으로 당시 조선시대 휴대용 화약무기 중 상당히 많이 사용되었다. 17세기 전반 편찬된 『화포식언해』에 의하면 승자총통의 사격에 필요한 화약량 1량은 우자총통을 비롯한 대부분 총통의 약 3배에 해당하는 양이었고, 월자총통의 20배, 영자총통의 10배에 해당하는 양이다. 또한 승자총통은 무려 15발의 철환을 발사할 수 있었는데, 이는 승자총통 계열이 아닌 총통의 철환 발사개수가 1~3개 수준인 것과 비교하면 최대 5~15배 많은 양이었다. 화약을 많이 사용한 승자총통은 반동이 매우 강하여 운용하기가 쉽지 않은 약점도 있었다. 많은 화약과 철환을 장전함에 따라 승자총통은 발사시 압력을 견디고 냉각을 보다 원활하게 하기 위해 총열에 대나무 마디처럼 생긴 돌출된 띠인 죽절(竹節)을 두었다11.
니탕개의 난에서 신형 화기인 승자총통의 집중 사격으로 여진의 일제 공격을 저지하는데 효과를 거두었으나 여러 전투 경험을 통해 승자총통의 개량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승자총통의 개량 총통으로 차승자총통과 소승자총통 등의 다양한 개인 화기가 제작되었는데, 그 노력은 대체로 구경이 작아지고 장전하는 화약의 양이 줄어들어 사격시의 반동을 적정 수준으로 제어할 수 있었다. 대신 철환의 개수도 줄어들었으므로 사격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조준 장치인 전조성(前照星)과 후조성(後照星)이 총열의 앞 뒤에 부착되고 어깨로 견착하여 사격시 반동을 조절하기 위해 총열 하부에 목제의 장가(杖架)를 결합하는 방식으로 개량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이전까지 승자총통은 총열의 뒷부분에 자루를 끼울 수 있는 모병(冒柄)이 있어서 겨드랑이 사이에 끼고 사격하는 형태였으므로 반동 제어가 어렵고 장약으로 사용하는 화약의 양이 많았으므로 손으로 들고 쏘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동이 강한 개인 화기였다. 이러한 모습은 중세 유럽의 초기 개인 화기인 이른바 수총(手銃, Hand Cannon)의 사격 방식과 유사하였을 것이다. [그림 1]
임진왜란은 새로운 체제의 개인 화기인 조총이 전투의 양상을 크게 변화시켰다. 조총은 화승식(火繩式)의 점화구조(Firelock)를 가진 신형 화승총(火繩銃, Matchlock Rifle)으로 방아쇠를 당겨 용두(龍頭)에 물린 화승이 화약을 담은 접시에 닿아 점화 발사할 수 있었으므로 일제 사격이 가능하였다. 또한 가늠자와 가늠쇠를 통해 정확한 조준사격도 가능하였다.13 이전과 완전히 다른 체제의 개인 화기인 조총의 등장은 전쟁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게 된다. 조총이 동아시아 지역에 처음 도입된 것은 16세기 중반인 1543년 일본의 규슈 남단 다네가시마(種子島)에 표류한 포르투갈 상인에 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래 직후 곧바로 다네가시마, 네고로(根來), 구니토모(國友), 사카이(堺) 등지에서 화약과 조총의 제조가 이루어지고 급속히 일본 전역으로 보급되었다.14 조총은 일본에 전해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에도 전해졌다.
조총이 전투에 사용되던 초기에는 그 수량을 충분히 갖출 수 없어 아직 전투의 승패를 가름하던 무기는 아니었다. 조총이 전체 무기체계에서 차지하는 수량적 비중은 비록 높지 않았으나 전술적 중요성은 도입 초기부터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존 원거리 무기였던 궁시에 비해 조총은 보다 원거리에서 사격하여 정확히 명중시켜 적군을 살상할 수 있었다.15 이는 조총이 가진 구조적 특성에 따른 것이었다. 조총은 구경에 비해 총열이 길어 추진력이 강하여 총탄이 곧바로 날아가고 관통력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조준기로 인해 명중률도 높았다. 다만 한 번 쏠 때마다 화약과 탄환을 장전하는 시간이 활에 비해 많이 소요되지만 관통력이 높아 적의 돌격을 한 번의 사격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임진왜란 초기 여러 전투에서 일본군의 조총의 위력과 3단 연속 사격 전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던 조선군은 어려움을 겪었다.
조선은 조총에 대항하기 위해 조총의 제조와 조총병인 이른바 포수(砲手)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포수 양성을 위해 조총의 확보와 그 제작, 보급에도 역점을 두었다. 전쟁 초기에는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조총을 활용하였지만 조총의 수요가 커짐에 따라 조총의 제작기술을 알고 있는 투항한 왜인인 항왜(降倭)를 통해 그 제작기술을 습득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중반 무렵부터 조선의 자체적인 조총 제작도 가능해졌다. 포수의 중요성이 확인됨에 따라 포수의 양성 문제가 시급히 부각되고 아울러 새로이 명나라에서 도입된 보병 위주의 전술로서 조총병과 창검으로 무장한 근접전 전문의 군사(殺手)를 함께 운용하는 이른바 ‘절강병법(浙江兵法)’의 전술체계 보급을 위한 새로운 군사제도 창설의 필요성이 나타났다. 1593년(선조 26) 10월 선조가 한성으로 환도한 직후 새로운 군영인 훈련도감(訓鍊都監)이 창설된 것은 새로운 군사제도의 필요성에 따른 것이었다. 훈련도감에는 포수와 살수 이외에 궁시를 다루는 사수(射手)를 함께 편성하였다. 포수, 사수, 살수 등 세 병종을 바탕으로 군사제도를 재편한 것은 조선의 지방군도 마찬가지였다. 전쟁 기간 중 기존의 궁시 위주로 편성되었던 조선의 군사제도에 이제 포수, 살수라는 새로운 병종이 도입되었다. 훈련도감의 경우 최초 포수를 중심으로 500명 규모로 창설되었으나 1여 년이 지난 1594년 11월에는 포수 7초, 살수 4초, 사수 2초 등 13개 초에 달하여 50% 이상이 포수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방군의 평안도 북부지역의 경우에도 30% 이상이 포수였다16.
이상에서처럼 조선의 조총 보급은 경이적일 정도로 빠른 것이었다. 이러한 흐름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계속되어 광해군대에는 조총 제작을 담당하는 관서인 조총청(鳥銃廳)이 있어 조총의 제작과 개량 등을 담당하였고 부족한 경우에는 일본으로부터 조총을 대량으로 구입하거나 구입하려는 시도도 나타났다. 실제 광해군 10년(1618)에는 각도에 500~1000여명의 포수가 확보될 정도로 조총 보급은 대단한 것이었다17.
새로운 개인 화기의 도입, 개량과 함께 대형 화기의 개량과 새로운 화포의 도입도 나타났다. 중국의 각종 화포가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임진왜란 이듬해 초 조·명 연합군의 평양성 탈환 전투를 통해서였다. 이 전투를 참관하였던 이덕형은 명나라군이 불랑기, 호준포, 멸로포 등의 각종 화포를 평양성에서 5리(약 2㎞) 정도 떨어진 곳에서 일제히 사격하여 일본군의 사기를 꺾고 각종 단병기를 든 명군이 돌진하여 일본군을 공격하고 있음을 보고하였다18. 평양성 전투에서 명나라 군이 여러 대형 화기를 다량으로 운용하여 일본군을 공격하는 전술을 목격한 조선은 이후 전쟁에서의 화기의 중요성을 보다 적극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일본군의 경우에도 전쟁 초기에는 대포를 그다지 사용하지 않았으나 조선 및 명군과의 여러 전투를 통해 대구경 화포가 공성과 수성에 매우 유리하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정유재란 초기부터 각종 대구경 화기 사용이 활발해졌다19. 예를 들어 1597년 8월의 남원성 전투에서 일본군은 석화시(石火矢, 이시히야)와 대통(大筒)을 사용하여 성을 공격하였다19. 석화시는 남만, 즉 포르투갈 등으로부터 도입된 후장식 화포인 불랑기(佛狼機)의 일종이었다. 그해 7월의 칠천량 해전에서도 시마즈 군은 육상에서 대철포(大鐵砲)를 사격하여 조선 수군을 공격하고 각 왜성에 대통과 석화시를 나누어 배치하였다20.
임진왜란의 여러 전투에서 명군이 사용한 화포의 위력과 일본군의 화포 사용 등을 경험한 조선도 불랑기, 호준포 등을 적극적으로 도입되었다. 서양식 신형 화포인 불랑기가 임진왜란 직전 도입되었다. 불랑기(佛朗機)는 명대인들이 유럽의 포르투갈을 지칭하는 국명이기도 했고, 동시에 불랑기인들이 가져온 후장식의 화포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유럽에서 불랑기포 혹은 불랑기에 해당하는 후장식 대포는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초반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불랑기는 포구의 앞에서 장전하는 방식이 아니라 포신 뒷부분에 포환과 화약을 장전한 자포를 결합하여 장전하는 후장식 화포였다. 특히 포탄을 장전하는 부분인 자포(子砲)가 포신 본체에 해당하는 모포(母砲)와 분리되는 독특한 장전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모포 1문에 자포 여러 개를 준비하여 미리 장전해 놓고서 사격 후 다른 자포로 교체하며 사격하는 방식이었으므로 사격 준비 시간을 대폭 단축하여 빠른 사격이 가능한 장점이 있었다.
호준포는 마치 호랑이가 걸터앉아 있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철제 경량 화포이다. 호준포는 임진왜란 중 평양성 전투에서 명나라군이 사용한 것을 목격한 이후 곧바로 조선에서 모방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호준포의 길이는 2자이며 무게는 36근(21.6kg)으로 큰 못 2개와 쇠 올가미[鐵絆] 하나가 있어 포신을 땅에 고정하여 발사할 수 있었다. 발사할 때에는 연환(鉛丸) 70개 혹은 철환(鐵丸) 30개를 장전하여 한 번에 사격할 수 있었다. 호준포는 조준기가 없어 명중률이 낮은 문제점이 있었지만, 사정거리가 길고 포의 크기가 작고 중량이 가벼울 뿐만 아니라 조작이 간편하여 운용하기 매우 편리하였다. 16세기 중반 명나라 장수 척계광이 논과 늪이 많은 중국의 남방지역에서 왜구를 토벌할 때 가벼운 호준포를 개발하여 왜구를 공격하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하였다.
이외에도 천자총통 등 조선의 전통적인 화기도 전투에서 중요성이 계속되고 전투의 과정에서의 경험을 통해 개량의 양상이 나타났다. 대형 총통의 제작은 1555년에 일어난 을묘왜변에서 왜구들의 선박을 격파하기 위한 조선의 대책에서 출발했다. 총통에 필요한 동철에 대한 수급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상당히 많은 대형 총통이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제작된 대형 총통 등의 무기 체계가 임진왜란 때에 사용되어, 조선군의 주력 화약무기로 활약하게 된다. 이 시기 제작된 대형 총통은 왜선을 바다에서 격파하는 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중 여러 전투를 통해 천자총통, 지자총통과 같은 대형 화포는 지나치게 크고 장약의 양이 많이 들어가 화력은 좋지만 탄도가 곧지 않아 명중률이 떨어져 해전이나 수성전에 적절치 않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21 이에 이항복은 수전이나 수성전에는 현자총통과 불랑기를 사용하자고 주장하였다.22 실제 현존하는 조선의 대형 화기는 조선 전기보다 후기에 총신이 약간 더 길어지고 구경이 작아지는 변화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특히 황자총통의 개량형인 별황자총통의 경우에는 불랑기의 영향을 받아 포이와 모병을 가지는 형태를 띨 뿐만 아니라 길이 대비 구경 비율을 보면 이전의 화포보다 길어지고 구경이 작아지는 양상이 현저하게 나타기도 하였다.23
Ⅲ. 조선의 화기혁명과 『신기비결』의 화기 표준론
16세기 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조선의 화약 무기의 혁신과 개량, 그리고 임진왜란을 전후한 신형 화기 도입 등의 양상은 15세기 이전의 화기 기술의 도입과 제작에서 보이는 것 못지 않게 대단한 것이었다. 기존 및 신형 화기 등 다양한 종류의 화기의 공존과 채용으로 인해 기존의 화약 무기 제작 및 활용법에 대한 정리와 함께 새로이 도입된 신형 화기의 제조 및 운용 등에 대한 내용을 종합적으로 정리할 필요성을 높였다. 아울러 임진왜란 전후 중국이나 일본에서 도입된 화약무기에서 보이는 선진적인 기술을 도입하여 기존 화기의 개량과 작동법 등도 정리하여야 했다. 17세기 초 한효순에 의해 편찬된 『신기비결』은 이 시기 조선의 화기에 나타난 이러한 양상을 반영하는 화약 무기 관련 병서자료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이 책의 후반부에는 척계광의 병법을 다룬 『기효신서』와 역대 병서의 주요 내용을 발췌하여 제가병법부(諸家兵法附)로 정리하고 있다. 이는 다양하고 새로운 화약무기가 전면적으로 사용되는 전쟁 양상의 급변에 따라 관련된 병법과 전술에 대한 내용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다음의 『신기비결』 발문을 보면 이 책의 편찬 배경과 과정 등에 대해 함축적으로 잘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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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군(三江郡)24에 가정(嘉靖) 44년(1565, 명종 20)에 인쇄된 『총통식(銃筒式)』 한 편이 있었는지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고, 그 말이 매우 간략하고 그 방법도 많이 누락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용하는) 화약의 많고 적음, 장전 및 발사 방법, 군졸들을 연습시키는 방법 등이 모두 상세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항오의 군사들이 무엇을 따라서 그 원칙을 배우고 오묘함을 터득하겠는가? 내가 그 가운데 이를 취하여 약간의 첨삭 가필을 한 다음에 『신서(新書=기효신서)』에 실린 화기에 대한 설명에 이를 덧붙여 『신기비결』이라 이름지었다. 그러나 장령들이 병법을 모르고 군사들이 싸울 줄을 모르면 비록 그 병기가 있다 하더라도 승패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태공병법(太公兵法)』 21장과 『손자병법(孫子兵法)』 13장, 『위료병법(尉繚兵법)』 17장과 『척계광병법(戚繼光兵法)』 52장을 취하여 그 아래에 붙여서 북로(北路) 여러 진보의 장수들에게 보이고, 사람마다 이것을 알도록 하여 이와 같이 전쟁에 대비하고 이와 같이 부대를 엄숙히 하도록 하고, 이와 같이 연좌와 형벌을 준엄하게 시행하고 이와 같이 기정(奇正)의 깊은 지모를 운용하도록 하고자 하였다.
이 인용에서 잘 알 수 있듯이 한효순은 1565년 삼강군에서 인쇄하였던 화기 관련 병서인 『총통식』의 내용을 바탕으로 임진왜란 중 도입된 새로운 전술과 병기에 대한 내용을 담은 병서인 명나라 척계광의 『기효신서』의 화기 관련 내용을 덧붙이고 뒷 부분에는 척계광 병법의 내용과 태공병법, 손자병법, 위료병법의 내용 중 주요 내용을 편목에 따라 인용 정리하여 『신기비결』을 완성하였다. 즉 기존의 화기 관련 내용에 더하여 임진왜란 중 도입된 신형 화기에 대한 제원과 장전 및 사격법을 붙이고 관련 병법 내용을 더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화기와 관련된 내용 이외에 다양한 병법 중 일부를 발췌하여 수록한 체제의 병서인 『신기비결』이 임진왜란 직후 급히 간행된 것은 임진왜란 전후 조선의 전투 방식이 급변하였으나 아직 통일된 전술 체계가 충분히 마련되지 못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총과 불랑기, 호준포 등 새로운 화기의 도입과 승자총통, 천자총통 등 기존 화기의 개량, 화기 관련 군사 비중의 급격한 확대 등으로 인해 16세기 말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조선은 이전의 전투 양상과는 완전히 다르게 되었다. 이전과 달리 화기의 위력이 높아지고 화기의 보급이 확대되자 화기가 전투의 중심적인 요소가 되고 더나아가 전투의 승패에서 화력(火力)의 우열이 결정적인 요소가 된 것이다.25 즉 조선, 더나아가 동아시아 화기혁명이라고 할 정도의 변화가 나타났다.25 26 단위 면적 당 화력의 우열이 전투의 핵심적인 요소가 되자 전투 방식도 근본적인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화기의 대량 도입과 위력의 확대에 따라 따른 새로운 전투 방식의 대두로 인해 기존의 전술 체계로는 조응하기 어려워졌다. 『신기비결』의 후반부에 병법 관련 내용이 수록된 것은 이러한 변화의 반영이었다. 다만 새로운 전술이 완전히 정립되지 못한 상황에서 관련 내용을 여러 병서에서 발췌하여 우선 잠정적으로 필요한 내용을 수록한 것이다.
『신기비결』은 1책 71장의 활자본 병서이다. 신기(神器)란 글자 그대로는 그 성능이 가장 신묘스러운 무기라는 뜻이지만, 조선시대 주요 사료에서 신기는 대체로 조총과 같은 우수한 화기를 가리키고 있다.27 『신기비결』의 체제는 크게 본문, 부록, 발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의 앞에는 목차가 따로 없지만 내용을 통해 대체로 본문, 부록 발문으로 크게 구분되며 각각의 내용과 체재는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본문은 책머리에 대포 1위와 조총 1문에 대하여 대표적인 예를 들어 각기 그 발사에 필요한 기본적인 도구를 품목별로 소개하였다. 이어 조선의 전통 화기와 임진왜란 전후 조선에 전해진 신형화기 등 18종의 화기, 즉 천자총(天字銃), 지자(地字)·현자(玄字)·황자(黃字)·불랑기(佛狼機)·조총(鳥銃)·쌍안(雙眼)·백자(百字)·대승(大勝)·차승(次勝)·소승(小勝)·우자(宇字)·주자(宙字)·홍자(洪字)·황자(荒字)·일자(日字)·영자(盈字)·측자총(昃字銃)에 대해 소요되는 화약, 화약선(火藥線)의 구분과 치수, 발사물의 종류와 용량 및 장방법을 수록하였다. 또한 총가(銃歌)라는 제하에, 먼저 총을 깨끗이 손질하는 세총(洗銃)을 비롯하여 화약선의 삽입, 화약·복지(覆紙)·송자(送子)·목마(木馬:檄木)·송자·연자(鉛子) 등 여러 단계에 이르는 장전 과정을 소상하게 설명하였다. 다음에는 대포·불랑기·조총에 대한 연습 방법인 습법(習法)을 설명하였다. 이어 신기해(神器解)·조총해(鳥銃解)·단기장용해(短器長用解)의 설명으로 각 화기의 유래와 특징 등을 해설하고, 교화기(校火器), 수화기(收火器), 찰유실(察遺失), 계손폐(稽損廢), 사군기(査軍器), 청화기(請火器), 계총수(戒銃手), 징허총(徵虛銃) 등 화기의 취급과 관련된 주요 내용을 『기효신서』의 관련 부분에서 인용하여 해설하였다. 그러나 화기 관련 내용은 이 책 전체 71장 중 19장 정도로 분량은 30%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화기 관련 부분에 이어 ‘제가병법부’에서는 『황태공병법』, 『손자병법』, 『위료자병법』, 『척계광병법』 등에서 관련 내용을 뽑아 부기하였다. 부록이지만 『신기비결』의 전체 분량 중에서 70%를 차지하고 있다. 『신기비결』이 화기 관련 내용이 중심임에도 불구하고 분량으로는 제가병법(諸家병법)에 대한 내용이 더 많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는 한효순이 언급하듯이 ‘장령으로서 병(兵)을 알지 못하고 군졸로서 전(戰)을 알지 못하면 비록 화기를 익히더라도 승패에 보탬이 없으므로 고금의 병가에서 중요한 말을 뽑아 덧붙인다’고 하여 화기 관련 병서에 네 병서의 주요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즉 전투 양상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지켜야하는 전쟁 원칙의 확인과 함께 새로이 주목되어야 하는 전술의 내용을 부기하고 있는 것이다. 즉 화기가 가져다 준 전투 양상의 변화에 따른 전술의 변화를 위한 병학 및 전술의 원칙을 정리하고 있다. 마지막 부분인 발문은 앞에서 인용하였듯이 1603년 여름에 이 책의 편자인 함경도 도순찰사 한효순이 쓴 글로 이 책의 간행 동기와 배경을 적고 있다.
그동안 『신기비결』은 조선의 화기 관련 병서상 매우 특징적인 측면으로 17세기 초 조선에서 운용되던 각종 화약무기의 장방법(裝放法)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28 장방에서 장(裝)은 화약과 탄환을 화기의 약실에 장전한다는 것이고, 방(放)은 불을 붙여 탄환을 발사하는 것으로, 『신기비결』 전후의 화기 관련 병서인 『총통식』, 『화포식언해』가 주로 화약무기의 제원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신기비결』은 화약무기의 제원과 함께 장방하는 절차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것은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장방하는 화약무기가 16세기 후반에 많이 도입된 것과 관련이 있다. 또한 표준화된 장전 및 발사 절차도 필요하였다.
『신기비결』에서 장방법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전술과 군사 편제의 체계화를 위해 화기의 표준화를 시도하였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기존의 화기 이외에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다양한 종류의 화기가 명군 또는 일본군 등 여러 경로를 통해 도입되었고, 동일한 화기의 경우에도 도입 경로에 따라 사정거리 등 화기의 제원과 위력 등이 모두 다른 문제가 나타났다. 화기가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질 경우에는 통일된 전술이나 편제를 개발하기 어려우므로 여러 화기를 정리하여 표준화하고 아울러 발사물의 무게와 재질, 장전하는 화약의 양 등도 균질하게 정리할 필요성이 있었다. 특히 당시 화기는 느린 발사 속도와 기후에 영향을 많이 받는 한계 등으로 인해 단독으로 운용되는 것이 아니라 집단으로 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각종 단병기와 궁시 등을 통합하여 전술을 구사하였다.
예를 들어 조선의 조총 도입의 경우를 살펴보면 조총 제작 기술 도입은 우선 명을 통해서 시도되었다. 1593년 1월 말 벽제관 전투 이후 전쟁이 다소 소강 상태에 들어가자 조선은 조총과 화약 제조법을 알려준다는 중국인의 제의를 받아 장인을 보내어 이를 배우도록 하였다.29 아울러 일본군에게서 노획한 조총을 활용하다가 조총 제작 기술을 알고 있는 투항한 일본군인 이른바 항왜(降倭)를 통해 그 제작 기술을 습득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1593년 중반이 되면 조총 개발과 관련된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은 자체적으로 조총을 모방하여 이른바 정철총통(正鐵銃筒)을 개발하였는데, 총열을 단조로 만든 철인 정철로 제작한 이 총통은 그 위력이 조총에 버금갔다고 한다. 아울러 교서정자(校書正字) 이자해(李自海)도 개성부에 있을 때 감독하여 조총을 만들었는데 그 정교함이 일본의 조총인 왜총(倭銃)과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 선조도 그해 11월 일본의 조총을 개량하여 새로운 조총을 만들어 시험하기도 하였다.30 즉 임진왜란 이듬해 중앙과 지방의 다양한 곳에서 조총 제작이 시도되고 어느 정도 성과가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에서 표준화된 조총 제작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으므로 표준화된 조총 규격을 정하고 이에 따른 장방법을 확정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조총 이외의 다른 화기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조총과 같이 우수한 무기의 개발 과정에서 획득되거나 개발된 여러 기술은 기존의 무기 체계의 개량에도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특히 명군이 소지하였던 주조식 조총과 삼안총(三眼銃), 쾌창(快槍) 등의 기술 습득 과정과 함께 일본식 조총 제작은 조선의 기존 개인화기인 승자총통의 개량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승자총통은 16세기 후반 김지(金墀)가 전라좌수사 재임 시 창안한 개인 화기로서 그 이전의 소형 총통을 개량하여 철환을 장전하여 사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총열을 이전의 소형 총통에 비해 2배 이상 길게 하여 사정거리를 늘리고 명중률을 높인 것이었다. 또한 이전의 격목(隔木) 대신 토격(土隔)을 사용하여 탄환을 발사함에 따라 장전 시간이 빨라졌다. 화살에 비해 소형인 탄환을 많이 가지고 다닐 수 있게 되어 운용 효율도 높아졌다. 다만 승자총통은 손으로 심지에 불을 붙이는 지화식(指火式) 총통이었으므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사용한 화승식(火繩式) 소총인 조총과 같이 일제 사격이나 날아가는 새를 쫓아가며 맞힐 수 있는 능력을 갖지는 못하였지만 이전의 조선 화기에 비해 성능상 많은 발전이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빠른 시일 내에 조선이 일본의 조총을 모방하여 제작할 수 있었던 것도 승자총통의 제작 기술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현존하는 승자총통류를 보면 조선에서 승자총통을 발전시키기 위해 계속적인 노력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승자총통 계열 소형화기로는 승자총통, 차승자총통, 소승자총통 등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 이외에 별승자총통(別勝字銃筒), 별양자총통(別樣字銃筒), 소양자총통(小樣字銃筒), 소소승자총통(小小勝字銃筒), 별조자총통(別造字銃筒) 등 더 많은 종류가 확인된다. 최초 승자총통 개발 이후 20여 년이 지난 마지막 단계의 소승자총통은 가늠자와 가늠쇠, 그리고 총자루와 연결하는 고정 고리 장치가 모두 장착되어 조총의 바로 전 단계까지 발전하고 있다.31 즉 조총의 기술 습득 과정에서 익힌 여러 기술을 승자총통 제작과 개량에 반영한 것이다. 이처럼 승자총통도 다양한 계통으로 개량되면서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17세기 초 신기비결 에 승자총통을 대·중·소의 3종류로 구별하고, 병자호란(1636) 직전 편찬된 화포식언해(火砲式諺解) 에서 승자총통, 차승자총통, 소승자총통 등으로 분류한 것을 통해 17세기 초반 이전까지 매우 다양한 승자총통이 제작되었으며 신기비결 편찬을 통해 3종류 전후로 표준화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화약 무기의 표준화는 소형 화기보다 대형 화기인 대포에 더 중요한 것이었다. 대포는 대형 철환을 먼거리까지 정확하게 날리기 위해서는 고각인 앙각(仰角)과 탄도, 화약 양, 탄환의 크기와 무게 등을 고려한 복잡한 계산이 필요하였다.32 따라서 장전과 사격을 위한 각종 도구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장전을 위한 화약과 포환의 무게나 부피, 재질 등도 엄격하게 표준화되어야 한다. 이는 일본에서도 동일하여 16세기말 ~17세기 초반에 다양한 크기의 조총 제원과 소요되는 탄환[玉目]과 화약량, 대형 화포인 자모포(子母砲) 등의 다양한 탄환[玉]에 따른 화약[玉藥]의 양 등이 자세히 규정된 서적인 이른바 砲術傳書가 편찬되기도 하였다.33 이러한 양상은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에는 16세기 후반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기존의 천자총통 등 대형 화포 이외에 불랑기, 호준포 등 새로운 체재의 화포가 명을 통해 도입되었고 불랑기와 호준포도 크기별로 다양한 규격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여 신기비결 에는 각 화기별 1회 장전에 필요한 화약의 양과 화약 심지의 길이, 탄환의 발수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천자총의 경우에는 매 1위(位)마다 화약 30냥, 화약심지 5치, 중간 납탄환 100발으로 규정되어 있다. 아울러 천자총, 지자총, 호준포, 불랑기와 같은 대포의 경우에는 사격시에 소요되는 각종 장전 보조 도구와 화승, 화약 등이 수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대포를 사격하는데 요구되는 철곽(鐵钁, 구덩이 파는 철 괭이), 철추(鐵錘, 격목 다지는 쇠몽둥이) 1자루, 약승(藥繩), 대연자(大鉛子), 중연자(中鉛子) 등이 자세히 규정되어 있다. 이는 조총과 쌍안총, 백자총, 대소 승자총통의 경우에도 삭장(槊杖, 화약을 다지는 조총 구경에 맞는 나무) 1켤레, 작은 납탄환[小鉛子] 등이 수록되어 있다.34
표준화된 화기의 제원과 함께 장전하여 사격하는 장방 절차는 해당 화기의 설명 아래에 ‘총가(銃歌)’라는 항목을 정하여 수록하고 있다. ‘총가’는 병사들이 화기의 장전 및 사격 순서를 외워서 쉽게 익히도록 노래처럼 만들어 붙인 이름이다. 총가는 임진왜란 초 도입된 병서인 기효신서 의 화기 관련 조항에 처음으로 수록된 것으로 이를 바탕으로 조선의 여러 화기 장방법에 적용한 것이었다. 신기비결 의 여러 화기 중 대표적으로 조선의 전통적 대형 화기인 천자총, 즉 천자포와 새로 도입된 개인 화기인 조총의 장방법을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천자총은 모두 11단계로서 그 순서와 의미는 다음과 같다.
洗銃 (총통 안을 쓸고 닦는다)
入藥線 (약선혈(도화선을 넣는 구멍)에 도화선을 밀어넣는다)
下火藥 (총구로 화약을 넣는다)
下覆紙 (총구에 종이를 넣어 화약을 덮는다)
下送子經 (나무 자루로 화약과 종이를 살짝 두드려 다진다)
下목마 (총구에 격목을 넣는다)
下送子 用力打至藥田 (나무 자루로 힘껏쳐 격목을 화약 바로 앞까지 밀어넣는다)
下鉛子一層 下土子送子 (총구에 납탄환 30여발을 넣고 흙을 넣는다)
下鉛子一層 下土子送子 (반복)
下鉛子一層 下土子送子 (반복)
下合口大鉛子 一杖下送子 用力打入口平銃
(총구에 맞는 큰 납탄환을 넣는다. 힘으로 쳐서 총구에 평평하게 넣는다)35
여기서 천자총통에 사용하는 탄환으로 납 탄환, 즉 연자(鉛子)를 규정하고 있는 것도 매우 의미가 있다. 납은 3가지 측면에서 다른 재질의 탄환에 비해 우수한 측면이 있었다. 먼저 납은 흔한 금속으로 가격도 싸고 구리나 철보다 밀도가 높아 공기 저항을 받아도 위력이 적게 줄었다. 또한 납은 부드러워 표적에 명중할 경우에는 형태가 변하며 피해 부위를 크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금속이 녹는 점인 융점(融點)이 낮아 병사들이 자체적으로 조총의 구경에 맞추어 간단히 대량 제작이 가능하고 전장에는 잉곳(ingot, 일명 鑄塊) 그대로 휴대하였다가 필요에 따라 주형(鑄型)을 사용하여 쉽게 만들 수 있었다.36
이상에서 보듯이 17세기 초 신기비결 단계에 들어서면 조선의 화기는 그 직전까지 경로를 달리하고 다양하게 개량된 각종 화기가 18종류로 통일되고 아울러 제원과 장전 및 사격 방법도 통일되는 단계가 되었다. 또한 화약무기가 전장의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함에 따라 이전보다 화기의 운용이 매우 중요하였다. 이를 위해 신속한 화기의 장전과 사격을 요구됨에 따라 이전보다 장전 속도를 높이는데 유리한 토격으로 장전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도록 하였다. 승자총통에서 보듯이 토격형 총통은 철환과 같은 발사체를 사격하는데 필요할 뿐만 아니라 이전의 격목형 총통에 비해 장전 속도를 단축시켜 좀더 빠르게 사격할 수 있었다.37 이전까지 발사 속도의 한계로 인해 궁시가 더 중시되기도 한 상황에서 전투에서 화기의 역할 증대가 가능하게 되었다. 서양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장전 절차를 훈련함으로써 단계를 건너뛰거나 순서를 놓치지 않으면서 장전 과정을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특히 장전 훈련을 통해 병사들은 신속하면서도 서로 호흡을 맞추며 장전할 수 있었으므로 지휘관은 최적의 일제 사격(Volley) 시기를 파악할 수 있었으므로 전투시에 매우 필요하였다.38
다만 위험한 화약을 사용함에 따라 이의 취급이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총가를 통한 반복 훈련으로 군사들이 화기의 장전 및 발사에 익숙하도록 훈련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또한 총가를 통한 반복 훈련으로 조총 등의 빠른 재장전과 재장전 동안 실수를 줄이고 통일된 동작으로 일제 사격이 가능하도록 하였다.39 한편 조총 등의 화기는 궁시에 비해 사격하는데 용이한 측면이 있지만 화약은 조금만 취급에 소홀히 하여도 폭발 등의 위헙이 있었고 이는 임진왜란 중 여러 전투에서도 나타난 것이었다. 아울러 조선은 16세기 후반까지 기병 중심의 전술 체계에서 임진왜란을 계기로 각종 화기와 단병기를 중심으로 무장한 보병을 중심에 두고 여러 병종의 치밀한 협력을 통해 일본군을 공격하는데 유리한 명나라 척계광의 전술체계인 이른바 절강병법이 도입되었다.40
절강병법에서는 정예 기병이 아닌 다수의 보병을 중심으로 전술을 구성하였는데, 이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전투의 규모가 급속히 커지고 다양한 화약 무기의 도입으로 궁시로 무장된 기병을 상당수 대체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이전에 병사가 되지 못하였던 일반 농민층에서도 군사로 수용하여 반복적 훈련으로 전투력을 높이도록 하였다.41 이들 농민 출신 군사들은 이전보다 학식 등이 상대적으로 떨어졌으므로 다소 복잡하고 위험한 화약무기를 다루기 위해 엄격하고 반복적인 훈련이 반드시 요구되었다. 신기비결 각 화기에 나타난 총가와 대포, 불랑기, 조총의 연습법 등에 대한 내용의 수록은 이를 반영한다.
특히 신기비결 에서 화기의 장방법 관련 내용 뒤에 별도로 교화기(校火器), 수화기(收火器), 찰유실(察遺失), 계손폐(稽損廢), 사군기(査軍器), 청화기(請火器), 계총수(戒銃手), 징허총(徵虛銃) 등 화기의 취급과 관련되어 주의할 내용을 담은 조항을 수록한 것이 화기의 관리와 조작의 중요성 등을 반영한다. 이 부분은 기효신서 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기록한 것으로, 「교화기」 조에서는 화약과 화승 등 사격할 때 필요한 물품 관리를 강조하였다. 「수화기」는 화기의 수납 관리에 관한 내용으로 사격이 끝나면 총을 씻어서 말리도록 하며 총가(銃架)에 수납하여 습기로 인해 손상되지 않도록 하였다. 「찰유실」 조는 화기와 부속물을 잊어버려 가져오지 않는 등에 대한 처벌 조항이다. 「계손폐」 조는 손실품과 폐품의 조사에 대한 내용이고, 「사군기」 조는 병기의 검사에 대한 내용, 「청화기」 조는 부족한 화기 부품 등의 지급 요청 등에 대한 내용이다. 「계총수」 조는 적군이 달려들 때 사격을 제대로 하지 않을 경우에 대해 처벌하는 내용이다. 마지막의 「징허총」 조는 화기의 유효 사정거리에 미치지 못하였음에 불구하고 헛되이 발사할 경우 엄하게 처벌하는 내용을 규정하여 조준 사격을 강조하고 있다. 실제 전투에서 긴장한 조총수들이 명령 없이 먼거리에서 사격하는 경우가 적지 않음을 반영한 것이다. 다만 각종 총통의 도입과 기존 화기의 개량에 따라 발사속도가 빨라지고 위력도 높아짐에도 불구하고 화기만으로는 기술적 한계로 인해 기병의 돌격을 완전히 저지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언제나 근접 방어를 위한 근접전 전문 병사인 이른바 살수(殺手)의 필요성과 함께 위력은 다소 약하지만 빠른 발사가 가능한 궁시를 사격하는 병사인 이른바 사수(射手)도 필요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기 제작 기술의 계속되는 발달과 기병 저지에 조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던 전쟁 경험에 따라 화기를 다루는 포수 등의 비중은 높아지게 된다. 결국 17세기 중엽 훈련도감 등 중앙 군영에서 사수의 존재가 사라지고 살수의 비중도 급격히 낮아지고 대부분 포수로 개편되는 양상이 나타났다.42
Ⅳ. 맺음말
이상에서 16세기 후반 이후 조선의 신형 화기의 도입과 개량, 화기 보급의 확대와 전쟁 양상의 혁명적 변화를 살펴보고 한효순의 『신기비결』은 화기의 표준화와 이에 부합하는 전술 모색을 통해 조선의 군사혁명적 양상을 반영하고 있는 병서임을 확인하였다. 이를 통해 이전까지 조선의 화기 관련 자료의 하나로서 검토되던 이 책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즉 이 책의 내용에 집중하던 기존의 연구에서 나아가 조선의 화기 발달 흐름 속에서 이 책의 화기 관련 내용을 살피고 이 책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임진왜란 이후 본격화된 조선의 군사적 혁신의 내용을 반영하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본 연구에서는 『신기비결』의 병학 관련 내용에 대한 검토가 충분하지 못하고 『진설』의 내용과 연계를 통해 검토하지 못한 한계가 있음은 사실이다. 향후 『신기비결』과 『진설』의 종합적 검토 및 17세기 초반 조선의 다른 병서와의 관련을 새로이 검토할 필요성이 있다. 아울러 임진왜란 이후 나타난 조선의 군사적 변화 양상을 군사혁명의 개념을 통해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이 책의 서지학적, 사료적 의미 이외에 역사적 의미를 드러내는 본격적인 노력이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