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의 역사성 연계를 위한 표석의 활용: 인천 주안염전 표석을 사례로
Utilization of Markers for Linking the Historicity of Places: A Case Study of the Juan Salt Farm Marker in Incheon
1 충북대학교
1 Chungbuk National University
DOI: https://doi.org/10.71244/jojm.2025.35.389
초록
1907년 천일제염을 위한 염전으로 조성된 인천의 주안염전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조성된 염전이라는 역사성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폐염을 거쳐 경인공업지역의 일부인 주안국가산업단지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특별한 흔적을 남기지 못하였다. 다만 1989년에 염전이었던 위치인 인천광역시 부평구 십정동 일대에 우리나라 최초의 천일제염이 시행된 곳이라는 표석이 만들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동안 주안염전에 관한 연구와 조사는 지속적으로 진행되었으나 주안염전이었던 지역이 행정구역의 분화로 인해 주안염전표석은 관리되지 못하고 방치된 상태이다. 주안염전표석은 주안염전 8구의 염전 중에서도 가장 최초로 소금이 생산된 시험염전의 위치와는 다소 벗어나 있고 염전표석의 내용도 다소의 수정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주안염전은 일제강점기와 산업화시기 인천의 변화를 관통하는 주요한 지점이다. 주안염전표석은 현재와 장소의 역사를 연계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라고 보고 이를 활용할 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Abstract
The Juan Salt Farm in Incheon, established in 1907 for solar salt production, holds historical significance as the first solar salt farm in Korea. However, after its closure in the 1960s and its transformation into the Juan National Industrial Complex, part of the Gyeongin Industrial Area, it left few traces. In 1989, a marker was erected in Sipjeong-dong, Bupyeong-gu, Incheon, identifying the site as the birthplace of Korea's first solar salt production. While research on the Juan Salt Farm has continued, the marker has been neglected due to administrative divisions. The marker's location deviates slightly from the original experimental salt farm where salt was first produced among the eight districts of Juan Salt Farm, and its content requires revision. The Juan Salt Farm is a pivotal site reflecting Incheon's change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the era of industrialization. This study suggests ways to utilize the Juan Salt Farm marker as an important means of linking the present with the history of the place.
Ⅰ. 서론
1. 문제제기 및 연구목적
도시에서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어떤 존재들은 뚜렷하게 흔적을 남겨 유적이 되거나 적어도 도시에서 공동체의 매개가 되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반면에 상당수의 존재들은 기록상으로는 존재하나 현재의 시점에서 실제 도시에서는 그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경우들도 적지 않다. 특히나 우리나라의 도시들 중에서도 인천과 같이 산업화와 도시화가 활발한 도시들은 이런 경향성이 더 강한 편이다. 그간 인천은 우리나라에서 근대 도시를 상징하는 시설들이 가장 먼저 설치된 도시임을 도시브랜드 차원에서 오랜 기간 홍보해 왔는데 천일제염도 그중에 하나이다. 본격적인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기 전인 1907년에 인천에서는 우리나라 최초로 천일제염이 시작되었다. 훗날 이 염전은 확대되었다가 우리나라 최초의 공업단지로 변모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염전의 이름은 주안염전으로 염전이 처음으로 시작된 위치가 당시 인천부 주안면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후 경인선의 주안역이 생기면서 오늘날 주안이라는 지명은 처음 위치와는 다소 다르게 사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안염전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일제염이라서 중요한게 아니라 인천의 도시화를 논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과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2010년 이후에 주안염전에 대한 연구와 조사가 학술논문 이외에도 각종 기관과 박물관에서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일제강점기 염전조성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맥락, 일제의 의도 후에 염전 주변에 거주했던 사람들의 기억 등이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주안염전은 주안역 부근에 염전이나 소금에 관련된 일부 도로명을 남긴 것을 제외하고는 그 뚜렷한 흔적을 남기지 못하였다. 더군다나 당시 염전 자리였던 지점에 인천시에서 표석을 제작하였으나 이 역시 기록이나 기억보다는 방치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천일제염이라는 표석이 이 논문의 출발점이고 이를 활용하고자 함이 본 논문의 큰 문제제기이다.
필자는 이미 2022년 8월에 발행된 한국도시지리학회지에서 주안염전 표석에 대해서 일정 부분 논의하였고 그때도 주안의 지명이나 주안염전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일정부분 논지를 전개하였다(윤현위·정원욱, 2022). 2022년의 논문은 주안염전을 대상으로 장소기억과 역사성이라는 이론적 배경을 바탕으로 과거 주안국가산업단지와 관련된 도시재생과 산업단지구조고도화사업을 시행함에 있어 과거 장소의 흔적을 최소한 염두해야 함을 강조했다. 이 논문에서도 이미 표석을 활용한 주안염전일대의 역사성을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본 연구에서는 이어 더해 추가적으로 지난 3년간 추가된 내용을 바탕으로 염전표석 자체의 활용에 방점을 두고자하였다. 더욱이 2022년 당시에는 염전표석이 1989년에 제작되었다는 사실 을 알지 못하였다. 표석을 중심으로 장소의 역사성을 위한 세부적인 사안에 좀 더 중점을 두고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2. 연구방법 및 자료
본 연구에도 2022년의 연구와 마찬가지로 주안과 주안염전에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았으며 여기에 추가적으로 주안역에 관련된 내용을 첨부하였다. 주안이라는 지명이 처음 위치에서 이동되는데 주안역의 역할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연구지역은 현재 주안역 북부의 미추홀구 주안5동, 남동구의 간석동, 부평구의 십정동 일대로 한정하였다. 주안이라는 지명의 이동을 실제로 확인하기 위해서 주안산과 주안이라는 지명이 나오는 고지도와 일제강점기 때 제작된 지형도를 사용하였으며 관련 지지들을 참조하였다. 고지도는 고문헌 DB 와 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제공하는 자료를 활용하였으며 일제강점기의 자료는 국립중앙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제공하는 지형도를 사용하였다. 일제강점기 주안이라는 지명이 주안역 개통에 따라 이전되는 과정을 1930년대에 발간된 지도를 통해서 좀 더 명확하게 제시하였다.
2010년 이후에는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남동구, 부평구에서는 역사적 차원의 도시변화를 다루기 위해서 각기 주안염전에 대한 내용을 다른 조사보고서 및 발간물을 출간하였는데 이들을 모두 검토하여 세부적인 자료의 활용은 물론 각 특성을 파악하고자 했다.
염전표석이 위치한 지역의 특성과 소유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 국유재산포털과 토지이음의 자료를 활용하였으며 좀 더 세부적인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 현지 조사와 최근까지 이 부지를 사용했던 부평구청에 문의하여 토지이용의 이력에 관한 내용을 조사하였다. 현지조사는 2025년 6월 24일, 7월 18일, 7월 28일, 8월 8일에 걸쳐 진행하였다. 현장조사 과정에서 주안염전이 위치한 토지는 국유지인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 기획재정부와 한국자산공사가 운영하고 있는 국유자산포털에서 이 내용을 확인하였으며 세부적인 토지이력을 확인하기 위해 추가적으로 토지이음과 토지대장(정부24)을 활용하였다.
주안염전표석이 위치한 토지는 현재 비어있는 상태인데 향후 이용계획을 확인하기 위하여 인천광역시 부평구청 자원순환과와 한국자산관리공사 인천지사에 문의하여 세부적인 내용을 확인하였다. 부평역사박물관에서는 2017년 주안시험염전의 위치를 현재의 위성영상에 비정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는데 본 연구에서는 이 작업을 토대로 QGIS 에서 제공하는 지도(Open Streetmap)와 주안염전 설계도를 중첩하는 작업을 시행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부평역사박물관의 작업과 그 원리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해상도의 문제로 인해 인용하기 어려운 현실적인 점과 2017년에 비해서 염전표석 주변지역의 토지이용이 변했다는 점을 감안하여 추가적인 작업을 수행하였다. 이를 통해 염전표석의 위치와 주안시험염전의 위치 관계를 확인하였다.
Ⅱ. 지명의 이동: 주안역과 주안염전
주안(朱安)이라는 지명은 그 유래와 역사가 길다. 조선시대의 지지와 지도에서도 주안이라는 지명을 접할 수 있다. 인천은 1392년 조선이 개국할 때까지 인천이 아니라 인주였는데 1459년에 도호부로 승격하였다. 도호부로 승격한 인천에는 10개의 면이 있었는데 그중 주안도 포함된다. 지명의 한자표기는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를 거쳐 다소 변경되었다. 주안이라는 지명은 주안산에서 유래했는데 조선전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제9권에 따르면 주안산은 인천도호부 북쪽 11리에 위치한다고 나와 있다. 당시의 주안산은 현재의 만월산인데 대동여지도상에서도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대동여지도에서 인천이라고 표시된 부분이 도호부인데 주안산은 문학산의 북쪽에 위치한다[그림 1]

1789년에 발간된 호구총수에도 주안면(朱安面)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인천광역시 남구, 2018). 일제강점기 초기에도 원래의 주안면을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 이후에는 주안이라는 지명이 이전되는 상황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림 3]
그로부터 2년 후에 발간된 1913년의 지형도를 보면 경인선이 주안에서 꺾어지는 지점에서 주안면이라는 지명을 확인할 수 있다[그림 4]


1913년 지도를 보면 탁지국제염소라는 표시를 확인할 수 있다. 탁지국은 1910년에 폐지되었는데 이는 1911년에 발간된 지형도와 마찬가지로 1910년 이전의 지형도를 기본으로 지도를 제작했기 때문이다. 이 지도의 오른쪽편에 주기를 보면 1907년의 지형도를 참조했다고 쓰여있다. 조선염업보고서에도 자염생산지를 보여주는 지도가 등장하는데 보고서에 첨부된 지도보다 1913년의 지도가 더 세밀한 위치를 보여준다. 염전의 이름이 주안염전이 된 것은 처음 염전이 조성된 지역이 주안면 상십정리와 하십정리(현재의 부평구 십정동 일대)였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의 지적원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그림 6]
행정구역의 변경은 면단위뿐만 아니라 리단위에서도 이루어졌는데 1913년 지도에서는 주안역 부근에 훈충리라는 지명을 확인할 수 있다. 지도상의 주안역에서 남단으로 사미리가 보인다. 1918년 지도에는 다소의 변화가 관찰되는데 사미리가 사충리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훈충리와 사미리가 합쳐진 행정구역명이다. 1918년 지도의 주안역 왼편에 주안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일반적으로 일본의 지도는 철도역명을 한자가 아닌 히라가나로 표기한다. 이 지도의 상인천역(현재의 동인천역)이나 부평역도 마찬가지이다. 2017년에 발간된 미추홀구의 도시마을생활사 주안동편에 따르면 훗날 주안동의 원형이 되는 주안정은 관교리와 간석리의 일부가 합쳐진 결과이기 때문에 지도상의 주안이 행정구역명이라고 보기는 다시 어려운 측면이 있다.
참고로 철도역의 부설에 따른 지명의 변화는 인천의 부평에서도 관찰되는데 원래 부평은 현재의 부평역보다 북단에 있는 계양구에 가까운 위치였으나 부평역이 설치되면서 그 인근 부평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과 같은 형국이다.
한국의 근대염업을 연구한 류창호(2020)에 따르면 주안염전은 소금에 부과되는 염세를 통해서 중앙집중식 과세체제의 도입하기 위한 결과물이었다. 천일제염은 근대적 생산시설과 기술을 도입하여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도입되었다. 당초 조선 최초의 천일제염지는 전남 목포였으나 1906년 통감부 재정고문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의 지시에 의해서 인천으로 변경되었다(류창호, 2017). 주안염전은 1907년 시험염전의 성공을 통해서 총 8구까지 확대되었으며 후에 남동염전, 소래염전, 군자염전까지 확대되는 첫 출발점이기도 했다. 처음 소금이 생산된 시험염전이 이후 [표 1]
[표 1] 주안염전 시기별 확장과 면적
| 염전구분 | 면적(町步) | 공사준공 연월 | |
|---|---|---|---|
| 주안염전1기 | 제1구 | 1.1 | 1907. 8. |
| 제2구 | 6.6 | 1909. 5. | |
| 제3구 | 9.0 | 1909. 6. | |
| 제4구 | 14.5 | 1910. 5. | |
| 제5구 | 57.3 | 1911. 7. | |
| 소계 | 88.5 | - | |
| 주안염전2기 | 제6구 | 32.4 | 1919. 3. |
| 제7구 | 26.9 | 1919. 3. | |
| 제8구 | 44.6 | 1919. 3. | |
| 소계 | 123.9 | - | |
| 합계 | 212.4 | - | |
주) 1정보(町步)는 9917.36㎡이다.
출처) 류창호(2020, p180)의 내용에서 인천부분만 발췌함.
주안염전이 완공되고 주안역이 영업을 시작한지 20년 정도가 지난 시기인 1930년대 후반의 지도를 보면 주안이라는 지명이 주안역 남부로 확대되는 상황을 엿볼 수 있다. [그림 8]
이러한 추론이 가능한 이유는 [그림 8]의 지도는 2006년에 이찬선생이 발간한 우리 옛 지도라는 책에 첨부된 지도인데, 지도의 원본에는 제작연도를 명시하고 있지 않다. 이 지도에는 현재 주안역에서 (구)시민회관 사거리까지의 도로가 개설되기 전의 상황을 보여주는데 이 사거리에 있었던 주안초등학교의 전신인 주안공립보통학교를 확인할 수 있다. 주안공립보통학교의 개교 연도는 1934년이며 1938년에 인천주안공립심상소학교로 교명을 변경한다. 따라서 이 지도는 1936~1938년 시기의 인천을 보여준다고 추축할 수 있다.
지도를 보면 주안역에서 남쪽 방향으로 주안우편소, 주안금융조합 등이 위치한다. 주안정은 2차 행정구역 개편 당시 관교리의 일부와 간석리의 일부가 합쳐서 된 행정구역명인데 광복 후에는 주안동이 된다(인천광역시 미추홀구, 2017). 해방 후에 주안동은 계속적으로 분동되어 남쪽으로 확장되었다. 주안의 행정동은 1~8동까지 분동되어 현재에 이른다.
Ⅲ. 행정구역 분화와 주안염전에 대한 영역화
1. 주안염전에 대한 분활된 기록
1992년 문민정부의 수립 이후에 지방자치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지방자치단체 단위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하는 작업이 이전보다 세부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자치단체별로 연구원, 문화원, 문화재단, 박물관 등이 설립되면서 로컬 스케일에서의 역사과 유산이 발굴되기 시작하였다. 근대문화유산을 상당수 보유하고 있는 인천에서는 2000년 이후부터 이러한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주안염전에 관한 내용도 포함되었다. 주안염전에 관한 내용은 인천시 자체의 발간물 이외에도 미추홀구, 남동구, 부평구에서 각각 독립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주안염전의 공간적 범위가 해당 구들의 관내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지지 차원에서 주안염전을 가장 먼저 다룬 지역은 남동구였는데 남동구는 2010년 남동구 20년사를 발간하면서 주안염전에 관한 내용을 상당수 다루었다. 이는 주안염전의 일부가 현재의 남동구 간석동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동구사에서는 간석동에 해당하는 4구 염전에 대한 내용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2017년 부평에서는 십정동의 십정동의 옛 이름은 열우물마을을 다루면서 십정동에 포함된 주안염전에 관한 내용을 상세히 다루었다. 이 보고서에는 주안의 지명 유래와 이전, 시험염전자리의 비정에 따른 염전표석 위치에 대한 문제제기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지역사 차원에서 주안염전의 역사성과 가치부여에 큰 기여를 했다. 이후 미추홀구에서 진행된 도시마을생활사 시리즈의 일환으로 2017년에 주안동이 발간되었는데 실제로 미추홀구 주안동이 주안염전에서 차지하는 면적은 좁지만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주안의 지명이동과 주안염전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2019년에는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주안공단에 관한 조사보고서가 발간되었는데 1960년대 후반에 조성된 주안국가산업단지는 해방 이후에도 운영되었던 주안염전이 대한염업공사를 거쳐 폐염된 이후 매립되어 조성되었기 때문에 공단의 조성과정 차원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국가기록원에서 보유하고 있는 주안염전 관련 자료들이 활용되면서 주안염전에 관련된 다양한 자료들이 소개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기존과 달리 새로운 경향도 감지된다. 2024년 부평역사박물관에서는 한국 최초 천일염전 부평 천일제염시험장이라는 제목의 조사보고서를 내놓았다. 어떤 측면에서는 부평에서 주안염전에 현재의 부평이라는 지명을 병기하면서 주안이라는 지명을 영역화하는 듯한 모습으로 보여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부평의 입장에서 과거의 지명일지라도 주안이라는 지명을 전면에 내세워 사용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주안염전 주변의 도로명 주소를 살펴보면 미추홀구의 경우에는 주염로, 염전로 등의 도로명이 사용되며 염전로의 경우에는 남동구 간석동에도 이어지나 부평구에는 소금과 관련된 도로명이 사용되고 있지 않다. 과거 주안염전이었던 십정동 일대에는 열우물로, 가재울로, 백범로 등의 도로명이 사용되고 있다. 이와 유사하게 인천 미추홀구에서는 마을박물관 일환으로 2023년부터 주안5동 행정센터에 염전골마을박물관을 설립하여 주안염전에 관련된 상설전시관을 운영하고 있다.
2. 주안염전의 영역화 이후 염전표석의 현재 상황
앞 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주안염전에 관련된 내용들은 상당부분 많은 저작물로 소개되었고 류창호(2020)의 연구에서 세밀한 부분까지 연구되어 염전의 형성과 관련된 주요 내용들은 정리가 상당부분 진전을 이룬 상태이다. 그러나 주안염전은 실체가 없을 뿐만 아니라 표석 자체가 문화재가 아니다 보니 딱히 안내문 등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 개인적인 관심이 없는 경우에는 표석과 이를 통한 주안염전을 접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표석 위에 주안염전은 558-7이라고 되어 있지만 표석 자체는 십정동 558-2에 위치해 있다. 표석의 뒤편을 살펴보면 1989년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주안염전이 공식적으로 폐염된 시기를 1968년이라고 본다면 폐염된 지 21년 이후에 이러한 표석이 만들어진 것이다.
1989년에는 주안염전 표석 이외에도 중구 답동성당에 있는 표석도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어떠한 맥락에서 만들어졌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최유식(2025)에 따르면 서울은 1985년부터 본격적으로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주요 문화재에 대한 표석이 제작되었는데 1989년은 그와 같은 맥락에서도 벗어난다. 2025년 6월부터 인천시청의 관련 부에서 염전표석에 관한 사안을 문의하였으나 현재까지는 관련된 자료나 문서를 찾지 못한 상태이다.
그렇다면 왜 주안염전표석은 십정동 558-2에 위치하고 있는가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주안염전 표석의 위치는 전반적으로 주안염전이었던 위치는 맞지만 주안염전 중에서 처음으로 조성된 시험염전의 위치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이미 부평역사박물관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역사성과 상징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시험염전 내부로 이동해야 할 필요성을 제시하였다. 먼저 왜 주안염전 표석은 원래 시험염전 위치가 아닌 현재의 위치에 있었을까? 주안염전 표석이 있던 부지는 2021~2024년 사이 부평자원순환가게로 사용되었고 계약 해지 이후에는 건물들은 철거되고 지금은 비어있다. 이 토지의 지번은 부평구 십정동 558-2번지인데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확인하기 위해 기획재정부에서 운영하는 국유재산포털에서 확인한 결과 이 토지는 기획재정부 소유의 국유지였다.
십정동 558-2에 대한 토지대장을 살펴보면 이 토지는 1974년 환지에 의해서 국가소유가 되었다. 1974년에는 건설교통부 소속이었으나 이후에 재정기획부로 전환되었다. 토지대장을 통해서는 이 토지가 어떤 토지구획정리사업의 결과물인지 알 수는 없다. 다만 이 시기 토지구획정리사업 현황을 보면 1974년 이전에 완료된 사업구역은 숭의지구, 주안1지구, 부평1지구, 부평2지구, 고속1~5지구가 있다(인천광역시, 2002). 위치상으로는 십정1·십정2구역이 있으나 이들은 모두 1980년대 중반 이후에 사업이 완공되어 시기상으로 다소 차이가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염전표석은 1989년에 만들어졌는데 염전의 일부가 문화재로 지정되거나 흔적이 남아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표석이 현재까지도 존재하는 건 국가소유의 토지에 위치하기 때문으로 풀이할 수 있다.
2025년에 접어들어 염전표석이 위치한 이 토지에 다소 새로운 양상이 전개되고 있다. 이 토지의 소유주는 기획재정부이나 실제 관리는 한국자산관리공사 인천지사에서 하고 있다. 지사에 문의한 바에 따르면 해당 토지는 2025년 6월부터 민간에 매각하기 위해서 기획재정부에 매각신청을 해놓은 상태여서 안에는 기존의 건물들과 시설물들이 철거된 상태였다. 만약 민간부분에 매각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면 개발하는 방식에 따라서 염전표석은 새로운 장소로 이전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Ⅳ. 장소의 역사성을 위한 표석의 활용 방안
1. 표석의 이전 검토
부평박물관에서 발간한 보고서와 같이 표석을 원래 자리로 이전하는 방안은 역사적 사실을 해당 위치에서 알린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맞는 제안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현실적으로는 어려움이 있어 보이는데 시험염전으로 추정되는 위치의 토지이용은 주로 공장, 창고 그리고 근린시설의 사용이 주를 이룬다. 따라서 표석을 이전시킨다면 시험염전의 내부보다는 도로에 접해 있는 지역을 검토해 볼 수 있다. [그림 16]


해당 지역은 공장이 다수 입지해 있고 화물차가 수시로 드나드는 지역이기 때문에 이 지역에 표석을 이전시키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더군다나 시험염전 내부로 이전시킬 경우에 현재보다 더 좁은 도로상에 위치하기 때문에 오히려 접근성이 더 떨어진다고 보여 진다. 2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0년 걸쳐 총 8구의 염전으로 조성된 주안염전이 일부 전문 연구자를 제외하고는 8구의 염전을 따로 분리해서 인식하지는 않을 것이다.
주안염전은 매우 광범위한 공간적 영역을 보유하고 있다. 만약 점으로 표시할 수 있는 문화재의 경우에는 표석의 위치가 상대적으로 매우 중요하지만 넓은 면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경우인 주안염전의 경우에는 그 표석의 위치가 반드시 첫 번째 지점에 있어야 하는가를 강조하면 역설적으로 시험염전 자리만 강조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림 17]
2. 기존 표석에 대한 보완과 활용 방안 제안
3장 2절에 제시된 염전표석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표석의 상단에는 ‘한국 최초의 천일제염’이라고 되어 있고 표석의 본문은 ‘구한말 융희 원년(1907년) 나라에서 천일제염을 계획하고 주안에 1정보의 천일제염염전을 만든 것이 시초가 되어 1911년에는 99정보의 전일염전을 완성함으로써 이곳이 한국 최초의 천일염전지가 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주안염전은 1911년이 아니라 1919년까지 확장되었고 제시된 99정보도 정확하지 않다. 류창호(2017)의 연구뿐만 아니라 이미 주안염전 확장에 관한 면적이나 시기는 어느 정도 종합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염전 표석의 본문 내용을 수정해야한다. 첫째 ‘나라에서 천일제염을 계획’했다는 부분도 구한말이라는 상황을 감안 했을 때 표석자체만을 봤을 때 조선이 일본에 병합되기 이전의 시기라고는 하나 조선 조정이 염전을 조성했다고 하기는 어렵다. 새로운 염전표석 문구제정을 위한 별도의 협의와 토론 과정이 필요하다.
둘째, 염전표석에 관련된 안내문 설치와 표석 주변에 주안염전에 관한 정보의 추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주안염전은 등록문화재나 국가유산이 아니기 때문에 염전표석 자체에 대한 안내 표지판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주안염전의 역사적 중요성을 고려한다면 십정동 일대에 안내문을 설치하는 방안도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주안염전에 관한 연구와 조사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염전에 관련된 과거 자료가 많이 발굴되어 있고 이중 일부는 인터넷에서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주안염전표석 옆에 추가적으로 QR-Code 를 활용하여 주안염전의 설계도, 염전관련 사진들을 볼 수 있는 서비스의 제공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셋째, 천일제염 이전의 소금생산에 관한 내용도 추가되어야 한다. 천일제염 이외에도 주안은 소금을 생산하던 지역이었다. 앞서 지도에서 확인된 탁지국제염소에서 볼 수 있듯이 주안만에서는 염전이 조성되기 이전에도 소금이 생산되었기 때문에 천일제염에 관한 내용이 우리나라에서 시행되었던 자염 등에 관련된 내용을 추가할 필요가 크다.
넷째, 주안을 공유하고 있는 부평구-남동구-미추홀구의 협업과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과거 부평구와 남동구는 과거의 주안을 미추홀구는 현재의 주안이라는 지명을 사용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주안이라고 하면 미추홀구의 주안을 뜻하지만 과거의 지명과 현재의 지명이 갖는 의미를 연계하기 위해서는 각기 다른 구와 기관들의 협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각 구청은 물론 문화원과 박물관, 인천 소재 대학들이 참여해 과거 지명과 현재 지명의 공존을 모색하는 새로운 행태의 거버넌스 구축이 가능하다.
일례로 한국연구재단에서 지원하는 사업 중에서 인문도시지원사업이라는 연구지원사업이 있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매개로 지역소재 대학이 사업을 수행하되 지역 유관 기관의 참여가 의무화된 이 사업은 주안염전을 소재로 한다면 자연스럽게 부평구, 남동구, 미추홀구의 참여가 가능해진다.
좀 더 세부적으로 세 개의 구를 모두 경유하면서 주안염전과 주안국가산업공단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답사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다. 주안염전표석과 주안시험염전은 부평구 십정동에 위치하고 남동구 간석동 홈플러스는 원래 4구 염전 저수지에 해당되는 자리이다. 과거 주안신사가 위치했던 용화선원은 미추홀구 주안5동에 위치한다[그림 20]

Ⅴ. 결론
이 논문은 2022년에 게재한 주안염전에 관한 논문을 바탕으로 염전표석 자체를 활용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보완한 결과물이다. 주안염전은 인천이 본격적인 산업화시기에 접어드는 과정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지점인데 급격한 산업화의 물결에서 그 어떠한 흔적을 남기지 못하였다. 주안염전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천일제염이 시행된 지역으로 그간 관련된 연구와 조사가 시행되어 염전의 조성과 확장에 관한 자료가 상당수 축적되어 있다. 그러나 행정구역의 분화에 따라 주안염전이 각기 다른 행정구역에 소속되면서 주안염전을 두고 각기 다른 기관에서 발간물이 지속적으로 발간되었지만 정작 염전표석 자체는 방치되어 있다. 1989년에 만들어진 염전표석은 그 자체는 큰 가치가 없으나 도로명 주소나 표지판을 제외하면 이 지역이 주안염전이었음을 보여주는 유일한 조형물이라는 점에서 장소의 역사를 현재와 연계해 줄 수 있는 수단으로 그 활용성이 높다고 하겠다.
그러나 3장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주안염전에 관련된 조사와 연구는 지역학 차원에서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고 관련된 저작물들이 발행되고 있는 상황과는 다소 무색하게 실제 행정구역의 분화 이후에는 부평구와 남동구에서는 역사자원의 활용차원에서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지 못한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은 방치되어 있는 주안염전표석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여진다. 이는 과거 주안이라는 지명의 유래와는 무관하게 현재 미추홀에서 주안이라는 지명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과는 100여 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행정구역이 분화된 측면도 있지만 주안이라는 지명이 경인선 개통과 이에 따른 주안역의 영역 개시로 인해서 주안역 일대가 주안이 된 지명의 이동과도 큰 영향이 있다. 주안염전의 사례처럼 과거의 지명과 현재 의 지명이 각기 다른 행정구역에 속하게 될 경우에는 이 둘의 연계는 더욱 더 어려워진다.
본 연구에서는 염전표석 이동에 관련된 두 가지 방안을 검토하였다. 주안염전 중에서 가장 먼저 소금을 생산했던 시험염전은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으나 현재 이 위치는 대부분 공장용지로 사용되고 있어서 염전표석을 이전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워보인다. 현재 국유지 내에 위치한 염전표석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보완점이 필요한데, 첫째, 염전표석의 본문 내용을 그동안 연구된 자료를 바탕으로 수정해야 한다. 둘째, 주안염전 표석에 대한 안내문을 설치하고 이 지역이 천일제염 이외에 우리나라 전통의 소금생산지역이었음을 알릴 수 있는 내용 보완할 필요성이 크다.
셋째, 이러한 표석의 수정과 보완을 바탕으로 역사적 지명과 현재의 지명이 공간적으로 분리된 경우 이 둘의 연계를 위해서 부평구, 남동구, 미추홀구의 각 기관들이 협력해 주안염전을 주제로 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러한 활동들이 축적되어야 향후에 주안염전을 비롯한 각지에 흩어져 있는 인천의 소금을 주제로 한 기관의 운영이 가능해진다.
본 연구는 1989년에 제작된 염전표석을 장소의 역사성을 연계할 수 있는 자산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되었다. 주안염전표석이 방치되고 활용되지 못하는 궁극적인 원인은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를 거쳐 지명의 위치가 이전되었기 때문인데 본 연구에서는 이에 대한 명확한 해결방안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인천의 오래된 지명인 부평과 제물포도 이와 유사한 문제점을 장기간 보유하고 있다. 향후 연구에서도 이 문제 접근하기 위해 노력하고자 다짐하며 부족한 글을 마친다.
謝辭
논문이 완성되는데 있어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 특히 일본쪽 자료의 검색과 해석에 큰 도움을 주신 경희대학교 지리학과 박사과정의 박수민군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외부로 대출이 안되는 인천대학교 도서관의 자료 정리에 큰 도움을 준 인천대학교 일본지역문화학과의 곽재형군께도 감사 드린다. 마지막으로 1930년대 후반 주안역 일대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도록 고해상도 고지도를 제공해 주신 서울역사박물관 최인호선생님의 노고에 큰 감사를 표한다.







